탁골산 산행과 회계재 탐방을 하고나니 또다시 인근에 있는 보고싶은 곳들이 눈에 밟힌다.
그래서 호암산을 가볍게 산행한 뒤 오서리 동대마을로 이동, 경행재를 답사하기로 한 것.
동대마을은 카프시인 권환과 권양숙 여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란 1925년에 결성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문학가들의 실천단체.
한국전쟁 때 진동까지 북한군이 내려왔으니 이 마을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래서 마누라를 버려야 합니까?”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절규가 이곳에서 기인한 것.
늦게 출발한 일정이라 동선을 최대한 짧게 그렸다.
원점회귀로 삼아 차를 댈 곳은 창원시와 고성군의 경계인 ‘울빛재(고도 약 130m)’로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 산55-1’.
‘울빛재’는 와우산(臥牛山 210.5)과 호암산(虎岩山) 사이의 낮은 고개로 ‘우비치(牛飛峙)’가 변화된 이름이란다.
엎드린 소가 벌떡 일어나 날아간(飛) 고개라니?
우산(牛山) 남쪽에 바다를 끼고 있어 ‘마산합포구 삼진 일대(옛 진해)’의 옛 이름이 우해(牛海)가 되었다고 하니 소와 밀접한 관계가 있나보다.
<우해의 우리말은 ‘쇠바다’이고 우산은 ‘쇠뫼’>
호암산을 오르는 등로는 창원시와 고성군의 경계(市界)로서 대체로 양호한 편.
꼭대기(약 290m)에 올라서면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북쪽으로 훤히 조망이 트인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이유다.호암산을 갔다 오는 데는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호암산(虎岩山 309.9)’은 ‘범바위산’을 말하며, 그러한 바위가 있을 줄 알았으나 평범한 육산이었다.
와우산(臥牛山 약 115)은 소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지어진 이름.
지난 번 답사한 와우산(210.5)과 같은 이름으로 네이버지도에만 그 이름이 보인다.
나지막하고 펑퍼짐한 봉우리 일대에 과수원이 자리하였고, 임도인 듯 그어진 길도 과수원이었다.
산행 후 찾은 ‘경행재’는 다음카카오에 검색을 하면 권환 시인의 생가지인 ‘오서리 565’에 나오고, 네이버지도엔 엉뚱한 곳에서 ‘경행제’로 나타난다.
올바른 검색의 키워드는 ‘창원 안동권씨재실(마산합포구 대실로 134-1,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635번지).
나는 네이버지도만 믿고 동대마을 골목골목을 샅샅이 헤매고 다녔는데, 시내버스 오서시장 정류소 ‘안동권씨세거지’ 맞은 편 ‘다목적복지회관’ 뒷편에 있다.
경행재(景行齋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32호)는 창원지구 안동권씨문중인 회계서원의 지원(支院)이다.
1867년 만들어진 경행재는 4.3 삼진의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10년 일제 강점이 시작되자 권환(權煥 1903~1954)시인의 부친인 성재 권오봉 선생이 경행학교를 연 뒤 지역 민족교육의 요람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순국한 죽헌 이교재 선생과 기미년 삼진의거 주역의 한 분인 백당 권영조 의사가 여기서 공부를 했다.
그런 이유로 경행학교는 일제에 의해 1927년 강제로 문을 닫게 된다.
오서리는 ‘옛 진해현 서쪽에 있는 다섯마을’이라는 뜻으로 동대, 서대, 월안, 탑동, 회동마을을 일컫는다.
이 중 면소재지인 동대·서대마을이 오서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대(竹) 군락지로 죽실(竹室)로 불리었으나 진전천 개울(물통골)을 경계로 ‘동대’와 ‘서대’가 분리되었다.
동대마을은 안동 권씨, 서대마을은 밀양 박씨가 많이 산다.
◇ 파란 트랙은 ☞ 탁골산-금봉산-와우산
산행궤적.
4.3km에 천천히 2시간 40분쯤 걸렸다.
고도표.
<산길샘>
경행재를 찾노라고 동대마을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녔다.
미리 준비한 표지기. 네이버지도에만 나오는 와우산의 높이는 대강이다.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 산55-1’을 입력 ‘울빛재’에 도착한 뒤 길 옆에 차를 댔다.
지금 내가 선 위치는 고성군 회화면이고, 창원시 안내판을 넘으면 창원시 진전면 영역인 것.풀섶에 숨어버린 길을 찾아...
풀섶을 벗어나면 반듯한 등로.
의외의 반듯한 등로는 얼마전까지 산불아저씨가 오르내렸기 때문일까?
호젓하기 이를 데 없는 오솔길을 쉬엄쉬엄 올랐더니...
능선 꼭대기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파노라마>. 북쪽으로 헌걸찬 산줄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낙남정맥?
<동영상>도 찍었다.
산불감시초소에서...
울퉁불퉁 근육질의 산맥들.
일일이 그 봉우리들을 다 짚어낼 수 있을까?
여항산, 서북산에서 내려앉은 산줄기가 우측 광려산에서 다시 치솟는 걸까?
다 헤아릴 수 없는 山山山.
인상착의로 볼 때 이쪽이 인성산과 멀리 여항산인 갑다.ㅋ
그런 뒤 호암산을 다니러 간다. 호암산에선 신경수 님의 시그널이 반긴다.
살펴본 대로 낙남정맥에서 동으로 분기하여 적석산~탁골산~와우산~호암산~동진교까지의 산줄기를 답사하는 듯.
산불감시초소와 호암산의 등로는 고도차 거의 없는 평이한 산길로 왕복 15분이면 충분하다.
다시 돌아온 산불초소. 나는 이쯤에서 배낭을 벗고 먹을 것을 끄집어 낸다. 나대로의 정상 세러머니(?)를 하기 위함이다.
남쪽으로 열리는 조망은 바다. 좌측 산자락 건너로 동진교가 숨었을 테고, 바다 건너엔 지난 번 다녀간 노인산(?)
당겨본 노인산.
이제 천천히 갈 길을 간다.
오래전 정비가 된 등로.
가파른 곳에선 지그재그 산길이다가...
뜬금없는 전봇대를 만난다. 어디서 어디를 이어주는 전선인가?
전봇대 좌측으로 내려다보니 등로가 나 있고, '창원방문의 해'라는 푯말이 나무에 걸려있다.
그러거나말거나 나는 직능을 고수하여....
임도에 내려선다.
돌아본 내려온 길.
우측으로 휘어지는 임도를 따르다...
곡각지점에서 내가 타고온 능선을 올려다 본 뒤...
얼마안가 좌측으로 임도를 벗어난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으나 '산길샘'에 임도로 표시되었기에 그대로 따른 것인데, 아주 오래되어 묵은 임도인 듯했다.
임도를 벗어나는 지점에 보이는 무덤은...
전주 최씨 묘. 무덤 우측으로 살짝 비켜서 내려가면...
임도에 닿을 즈음 묘 한 기.
세멘트 포장임도에 내려서서...
임도 우측을 올려다 보니 차를 댄 울빛재가 잘록하게 보인다.
내려온 곳에서 와우산 방향을 바라보고 동선을 짚어본다.
반대편 울빛재 가는 길에 보이는 건물은 농장. 아까 임도를 계속 따랐다가 저 농장으로 꺾어 내려올 수 있었을 것.
Y로에서 우측 비포장 임도에서 흰색 화살표 방향으로 와우산을 오른다.
좌측 화살표는 과수원(가족묘원) 진입길이고, 과수원 진입직전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지 말고 우측 임도급 산길을 따르면 되겠다.
나는 과수원 안으로 들어와 능선으로 붙었으나 나중에 보니 우측 탱자나무 바깥으로 묵은 임도가 있었다.
과수원 옆의 가족묘원.
그 우측 과수원 창고 뒤로 능선에 붙는다.
그 길은 희미한 족적이 있을 뿐.
꼭대기에 오르자 그물망이 쳐진 과수원.
그물망 휀스 좌측 옆으로 진행.
과수원엔 참다래(키위)인 듯. 네이버지도에서 정확한 좌표를 찍기 위해 두루뭉실한 봉우리를 서너 번 왔다리갔다리.
그렇게해서 찍은 와우산 표지기. 정확한 위치나 정밀도는 논하지 말라.
그 옆의 석주가 있는 무덤.
임도로 표시된 곳은 과수원이라 내려갈 수 없었고, 다만 모내기가 한창인 평화로운 시골마을이 보인다.
산북저수지 우측으로 두 마을 산북중땀과 산북아랫땀.
왼쪽 제법 높은 봉우리는 314.7m봉이고, 중앙에 잘록한 안부 너머는 천수사가 있다.
산북저수지 뒤로 나주막한 봉우리가 소가 엎드린 형국의 또다른 와우산(210.5).
그러니까 와우산(약 115m)에서 와우산(210.5)을 바라보는 격이다. 멀리 고개를 든 산은 적석산(?)인가?
당겨 보았으나 긴가민가다.
하산은 올라간 능선길 옆으로 비켜나오니 임도급 산길이 위로 붙고 있다.
내려가는 길에서...
과수원 입구의 탱자나무 울타리 좌측으로 나간다. (흰색 화살표로 올랐다가 검은 화살표로 나가는 것.)
이제 농장건물 앞으로 나 있는 포장임도를 따르다...
다시 아까의 산북마을을 내려다 본다.
농장을 지나며 좌측 호암산 임도에서 내려오는 길을 확인한다.
울빛재로 돌아가다 바위에 걸터앉아 시원한 캔맥 하나로 갈증을 풀었다.
그렇게 울빛재에 회귀한 뒤 오서리 동대마을을 향한다.네이버지도를 검색한 뒤 찾아가는 나의 답사 발걸음은 헤매는 발길.
버스 정류장 이름은 '오서시장', 그 앞에 '안동권씨세거지' 표석이 있다.
400여년 전 정착하였다는 안내석.
그 맞은 편에 그럴 듯한 한옥건물이 있다.
다목적복지회관이다. 복지회관치곤 이색적이고 그 규모가 놀랍다.
나는 동대마을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니다 급기야는 동네 주민에게 "경행재가 어딥니까?"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찾아온 경행재는 '다목적복지회관' 뒤에 있었다.
자물쇠가 걸린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니 제법 규모가 큰 한옥과 비석 두 기.
‘애국지사백당권영조선생기념비(愛國志士白堂權寧祚先生紀念碑)’
백당(白堂) 권영조의사(權寧祚義士)는 3.1독립운동시 삼진(三鎭)지구의 주역이었다.
그 옆에 있는 또다른 비석은 ‘성재권오봉선생공적비(誠齋權五鳳先生功績碑)'.
경행학교를 세운 이가 권환시인의 부친인 성재 권오봉 선생인 것.
경행재는 시경에 나오는 말로 경을 향한다는 뜻.
경이 경치와 햇빛을 뜻하기 때문에 옳고 바른것을 당당히 행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란다.
경행재는 1988년 보수공사로 마루를 늘려 규모가 커졌으나 외관상 큰 변화는 없다한다.
처마 밑의 편액을 살펴보니 글쓴이는 '신익희' 선생. 이거 진본이 맞능감?
신익희(申翼熙, 1892~1956)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자 정치인으로 자는 여구(如耉)이며, 호는 해공(海公)·해후(海候)이다.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유세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마루에는 '근차회계재운(謹次檜溪齋韵 삼가 회계재의 시에 차운(次韵)하다.)'으로 시작되는 칠언율시가 걸려있다.
끝에 '세신미족말도석근고(歲辛未族末道錫謹稿)'이니 1871년 족말(族末) 도석이 삼가 원고를 쓰다.
돌아보는 경행재.
- 두 할머니 -
오늘도 두 할머니
홰나무 밑에 나와 앉았다
청파 다섯 단 물크러진 홍시 일곱 개
아직도 남았다 흙먼지 부-옇게
경학원(經學院) 긴 골목은 벌써 저물어
바쁘게 오고가는 사내들 색시들
뉘 하나 돌보지도 않았다
오! 두 할머니에게 복이 있으옵소서
<권 환>
오랫동안 월북작가라는 꼬리표 때문에 문학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권환(權煥.1903∼1954)은 1988년 해금 조치 뒤에 비로소 월북하지 않고
고향 마산에 칩거해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문학가 동맹의 핵심인물인 홍명희가 월북(1946)하였고, 임화(林和), 이태준 등이 월북(1947)하였으나 그는 두세 차례 월북의 기로에 있었으나
월북하지 않았다.
폐결핵 때문이었는지, 전향의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었는지는 알길이 없지만.
- 우리 진영 안에 있는 소小부르주아지에게 주는 노래 -
소부르주아지들아
못나고 비겁한 소부르주아지들아
어서 가거라 너들 나라로
환멸의 나라로 몰락의 나라로
소부르주아지들아
부르주아의 서자식(庶子息) 프롤레타리아의 적인 소부르주아지들아
어서 가거라 너 갈 데로 가거라
홍등(紅燈)이 달린 카페로
따뜻한 너의 집 안방구석에로
부드러운 보금자리 여편네 무릎 위로!
그래서 환멸의 나라 속에서
달고 단 낮잠이나 자거라
가거라 가 가 어서!
작은 생쥐 같은 소부르주아지들아
늙은 여우 같은 소부르주아지들아
너의 가면(假面)너의 야욕 너의 모든 지식의 껍질을 짊어지고
<권 환>
* 브루주아란 지배계급 전반의 돈많은 지주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프롤레타리아란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