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 김신용
거기, 칸나가 있었다. 발아래,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발아래 여름 화단이 있었고 거기, 칸나가 피어 있었다. 칸나, 여름의 꽃 칸나—, 눈을 찌르는 붉은빛의 칸나—. 현기증이 일었고, 투명한 유리의 벽이 물컹한 액체처럼 느껴졌었다. 순간, 폭발하던 칸나, 칸나의 붉은 꽃, 꽃의 뇌수—, —까마득한 공중에서 추락해 붉게 터져 나오는 뇌수 호르무즈 해협의, 보이지 않는 강철 물고기에 의해 폭발하는 섬광 같았다. 여름의 화단에 붉게 피어 있던 칸나, 칸나의 붉은 꽃, 그 꽃의 뇌수는—. 그런 여름이었고, 콜타르처럼 끈적하게 땀이 달라붙는 여름이었고 호르무즈 해협을 건너온 강철 물고기가 건물 벽에 부딪힌 듯 유리는 햇살을 튕겨 냈고, 조금씩 하강할수록 더욱 크고 붉게 투신해 오던 칸나의 붉은 꽃—, 꽃의 뇌수—. 이것이 칸나를 본 그 여름의 기억이라면, 그래, 꽃의 뇌수—, 내가 한 가닥 밧줄에 의지해 고층 건물의 외벽에 매달려 유리를 닦고 있을 때,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 꽃도 대지의 한 가닥 밧줄에 매달려 있는 삶의 얼굴인 것처럼 생의, 마지막 뇌관에 불을 붙인 자폭의, 아름다움인 것처럼
목괴의 시/ 김신용
무릎 다 닳은, 목괴가 다 된 늙은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렸다 오랜 풍상에 가지 삭아 내려앉고 뭉툭하게 변한 등걸에는 검버섯 같은 지의류들이 집을 지었는데, 그 등걸에 겨우 한 가닥 남은 가지에 사과가 열렸다 발갛게 익은 사과. 뭉툭한 목괴처럼 변한 등걸로도 바람과 햇빛을 호흡했는지 탐스럽게 익은 사과, 얼른 따서 한 입 베어 먹고 싶지만 다가가는 손을 주춤거리게 하는 머뭇대게 하는, 그냥 오래오래 공중의 가지에 매달아 두고 싶은―. 이제 무릎 다 닳아 늙어 고목이 된 나무의 한 가닥 남은 가지가 어떻게 저 빛깔 고운 사과를 익게 했을까? 눈길 거두지 못하게 하는―. 그러나 고목이 된 나무가 마지막 안간힘으로 매달아 놓은 것 같기도 해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게도 하지만, 그래, 가만히 눈 감으면 보인다. 아직도 “걷고 있는 사람”처럼 목괴가 다 된 나무의 뭉툭하게 변한 등걸이 끈질기게 뻗고 있는 뿌리가―. 아직 살아 뜨겁게 땀 흘리며 야윈 두 다리 힘줄 버팅기고 있는 뿌리가―. 이제는 가지들도 삭아내려 전신에 검버섯 같은 지의류에 덮였어도 일생의, 그 혼신의 힘으로 밀어 올린 사과 하나―.
아직도 “걷고 있는 사람”의 눈빛 같은, 발갛게 익은 사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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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 달에 출판 된 김신용시인의 <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 을 읽으면서
같은 언어의 반복이 많고
어럽지 않은데도 시를 이해하는데 좀 난해한 느낌이 들더라두요,
시 작법이 전에 나온 시집과는 좀 다른 듯 ,
그러게요..
김시인도 요즘 젊은이들을 의식한 걸까요?
김신용, 하면 명징한 짧은 시의 대가로 여겨지는데....
난해하지는 않고..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