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양의 이중성
어린 양은 예수님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상징성이 텍스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므로 독자는 종종 어린 양의 명확한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양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많은 사람들은 성화(聖畵)의 어린 양을 연상하며 목자이신 예수를 따르는 평화로운 동물을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제물로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양을 직접 키워본 사람들은 그런 낭만적이거나 영적인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저분하고 미련한 동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단순한 언어적 분석을 통하여, ‘어린’의 작고 예쁜 이미지와,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떠오르는 ‘양’의 순종하는 이미지를 결합하여 ‘순종하는 어린 양’으로 의미를 결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징을 분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기준과 원칙이 있습니다. 독자의 잣대가 아니라 상징을 선택한 화자의 잣대여야 합니다. 메시지를 구성한 화자, 이를테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면 성경이 왜곡되고 맙니다.
성경 해석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저자의 의도에서 의미를 확인해야 합니다. 문맥을 통하여 상징의 배경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상징이 지니는 다양한 의미를 문맥에 따라 점진적으로 파악하여 어린 양의 성경적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죄를 대속하는 짐승의 제물로서 어린 양은 의지를 지닌 존재가 아닙니다. 율법의 제사에 바쳐지는 양처럼 다만 수동적으로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의 이미지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상징성은 율법의 제물입니다. 죄를 대속하려는 자기의 의지나 생각에 따라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의 수동적인 도구로 쓰인 어린 양입니다.
생명의 상징인 피를 흘려서 속죄의식을 통하여 죄사함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9:22). 율법의 전통에 따라 속죄의식을 통하여 사람의 죄를 어린 양에게 전가하고, 피를 흘려 사람의 죄를 대신 씻는 종교의식입니다.
그러나 죽은 짐승의 피는 상징이고 의식일 뿐, 결코 완전한 제사가 되지 못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피는 율법의 제물로서 드리는 단순한 ‘어린 양’의 피가 아닙니다.
죽은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율법의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씻어 주신 ‘완전한 제물’입니다. 그는 율법의 죽은 제물이 아니라 복음의 ‘산 제물’로 자기 몸을 드려 ‘피 흘리고 살 찢겨’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물이 되신 것은 단순히 피흘림을 통한 수동적 제사의 의미가 아니라, ‘친히’ 자기 몸을 드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의 거룩한 사랑의 표현이며 의지적인 희생의 실천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일서 2:2).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베드로전서2:24-25)
당연히, 죽은 짐승의 피는 완전한 제사가 되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종교의식으로서 가치와 의미를 지니지만 짐승의 제물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변화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피로 죄를 의식(儀式)적으로 고백 할 수는 있으나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의 피입니다. 그는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 없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보배로운 피로 ‘영원한 속죄’<히브리서 9 : 12)를 이루시고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브리서 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