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 (외 2편)
오세영
광에 보관해 두었던 감자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없다.
서너 개는 쏠린 채로 나뒹군다. 몇 개의 양파도……
천장에 구멍이 나 있다.
쥐들의 해킹,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필시 저 구멍은
방과 뜰과 골목으로 거미줄처럼
엮여 있으리.
담낭선근종(膽囊腺筋腫)이라는 병명을 몰라
마우스로
인터넷을 서핑해 본다.
한 마리 쥐가 이리저리
잽싸게 뛰어다닌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소풍날
신 났던 보물찾기 놀이를 떠올려 본다.
아하, 이리저리
아무것이나 이득을 좇아 살아온
내 한생은 기실
그때 배운, 숨은 보물찾기에 다름이
아니었구나.
한 마리 쥐였구나.
새 20
푸드덕푸드덕,
타오르는 장작불 속에서 깃을 치는
새들의 비상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무엇이나 불꽃의 정점에 서면
새가 된다.
흩날리는 꽃잎, 솟구치는 불티,
까마득히 허공의 한 점으로
사라지는 재.
바람은 영혼의 길
육신을 소진한 한 마리 새가
그 길을 안다.
흙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그
보이지 않는 길.
우렛소리
불이 꺼지자 홀은 일시에 암흑,
무대에서 바라보는 객석은 온통 관객들의
눈빛으로 반짝거린다.
오늘 밤에
내가 맡은 역은 의사 지바고.
텅 빈 시베리아 빙원(氷原)의 오두막은
바람에 찬데
눈밭에서 슬피 우는 창밖 늑대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밤새
시를 쓴다.
오늘의 내 연기는 충실했을까.
어둠 속에서
달빛 조명의 지구를 숨죽여 바라보는
별들의 초롱초롱한 시선들.
멀리 마른하늘에서
우주의 잔잔한 박수 소리가 들린다.
—시집 『마른하늘에서 치는 박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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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 1965년~1968년 박목월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봄은 전쟁처럼』『적멸의 불빛』『벼랑의 꿈』『무명연시』『사랑의 저쪽』『시간의 쪽배』등과 학술서적 다수가 있음.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출처: 푸른 시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강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