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自由}와 순리{順理}에 대한
문학적이해[文學的理解]
영원한 자유인
동암(東巖) 김광수 시인 편
글 김광한
문학 평론가
중앙대 국문학과 69년 졸업
한국문인현회 회원
문예춘추 문학상 소설부문 수상(2021년)
서울 용산 출생
자연인이 쓰는 자유스런 생각으로 쓰는 시,그 시속에 김광수 시인의 솔직함과 정직과 겸손,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문장과 어휘들,그것들이 시인의 옷이 되고 글이 되고 한편의 시가 된다.삶이 각박할 수록 어려운 것보다 쉽게 접근하게 만드는 친절이 필요할때 시인은 반갑게 손을 내민다.김광수 시인이 상재한 시 가운데 대표적인 몇편의 시를 골라 생각을 정리해본다
김광수 시인
글 김광한(평론가)
대화에 대하여
김광수
어린 시절에는 형이나 누나에게
학교 다닐 때에는 선배와 선생님
군대 가서는 고참과 장교들에게
직장에서는 상사들로 부터
여럿이 모여 있거나 회의 시간에
말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말을
무작정 듣기만 했는데
퇴직하고 나서도 습관이 됐는지
선배 상사 윗사람들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
주로 묵묵히 듣고만 있지요
어느 때 인가 부부동반으로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하는 말
“당신은 입이 없수 왜 말 한마디 못하고
남의 말만 듣고 있어요“
가만히 내 나름 속으로 혼잣말을 했지
말 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아
나는 들어 주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야.
<본문 시의 귀절>
어지간한 나이가 되면 말과 행동이 줄어들고 행동반경이 좁아진다.젊어서 많은 시인의 경우 젊어서 수없이 많은 시를 써왔고 그때마다 스스로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그러나 세월이 지나 다시 그 시를 읽어보면 웬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 거리고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당황한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다.애써 여기저기 남의 시와 책속에서 발견한 현학적 수식어가 웬일인지 낯설어지고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문구같아서 자신의 정직함을 훼손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다.그래서 작가는 과거의 시를 현재와 맞추기 위해 많은 퇴고와 수정을 하게 되 고 오히려 다시 쓰는 것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월이 그의 문학적 오류를 바로 잡아주는 선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문학적 배경에는 불평(不評) 대신에 감사(感謝)를 부정(否定) 대신에 긍정(肯定을)
절망(絶望) 대신에 희망(希望)이라는 명제 아래 다시 출범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어느 때 인가 부부동반으로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하는 말
“당신은 입이 없수 왜 말 한마디 못하고
남의 말만 듣고 있어요“
가만히 내 나름 속으로 혼잣말을 했지
말 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아
나는 들어 주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야.
젊어서는 쉬운 말을 어렵게, 현학적 수사를 애써 동원하면서 자신을 한껏 상대로 하여금 높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자랑으로 여겼지만 어언 칠순의 나이가 지나면서부터 좀더 인생과 문학에 대해 소탈한 자세가 되어간다는 것은 동심이야말로 진리이고 인간이 갖는 티없는 맑은 마음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리라.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나서는 것보다 비켜서는 것에 대해, 그리고 말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것에 대해 어려운 선택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기를 찾는 일이라고 생각한 김광수 시인은 가끔 아내에게 약간의 핀잔섞인 질타를 받게 된다.그가 쓴 시 <대화에 대하여>에 여실히 나타난다.남의 말을 가로채지 않고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그것은 안격의 성숙에 비례한다.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남편에 대해 아내는 불만을 표하지만 그는 세상만사를 자신의 편이 아닌 남의 편에서 나를 관조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터득하는 것, 그것을 그는 자신의 시에 ㄷ입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그래서 그가 쓰는 모든 글, 특히 시에서 알기 쉽게 쉬운 어휘를 동원해서 남들에게 불편하지 않게 알리고 있다.세계적으로 이름난 시인들이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원로 유명 인사들이 굳이 어려운 단어를 골라 쓰지 않고 쉬운 말로 푠현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움을 쉽게 전달하려는 인간적 평등에 기인하기 때문일 것이다.이렇듯 그의 모든 시는 알기 쉽고 그리하여 전달하는데 어려움이 없다.그것은 난해한 것에서 부터 해방이 되는 자유인으로서의 기쁨과 함께 시를 늘 곁에 있는 친구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 유감
자녀나 손주가 옆에서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면 될 텐데
누가 보지 않는다고
아무렇게나 쓰면 안 되지요
말도 되지 않은 댓글 때문에
곳곳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요
언어 사용은 인격을 나타내므로
신중하게 판단하고 써야 하는데
우리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기는 것만 가르치고
남을 칭찬하고 배려하는 교육을
소홀히 하여 생기는 현상이라지요
남이 보지 않는다고 개똥을 치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 밟듯이
나쁜 말을 함부로 쏟아내면
누군가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되는 거 아시나요.
그의 시에 나타난 이미지는 솔직함과 착함이다.평생을 평범하게 질서를 지키면서 살아온 그의 용모속에 비치는 것은 선량함이고 악을 외면하고 선을 찬양하는 평범하지만 실천함을 주저하는 속물들에 대한 말없는 질타이다.<댓글유감>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의 즐거움을위해 남을 아프게 하는 댓글을 달지 않는다.이름을 숨기고 악필을 달고 그것을 읽는 본인의 아픔에 즐거워하는 사람들,그것은 인간의 선함을 버리고 악마와 손을 잡는 범죄행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지난 30여년간의 공직 생활을 통해서 많는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깨달은 것은 남에게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도덕적 관념이 뿌리박혀있어 그의 시 도처에 얼굴을 내민다.남이 힘들여 쓴 글은 그 남이 자신을 인정해주기 위한 덕담섞인 말을 기대하는 것임을 잘 아는 그는 모든 글에 그의 사랑과 평화가 깃든 마음을 담은 댓글을 달아줘 화자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주어왔다.
말도 되지 않는 댓글 때문에
곳곳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요
언어사용은 인격을 나타내므로
신중하게 판단하고 써야하는데
<본문중의 일절>
댓글 독한 것을 악필이라고 한다. 맘에 들지 않으면 댓글 쓰지 않으면 될 것을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독한 마음을 갖고 댓글을 쓰는 것은 상대에게 억지로 독을 먹이는 것과 같다.비록 눈에 보이는 유형력은 없어도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는 댓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살같은 끔찍한 일로 일생을 망치기도 했다.그의 악필 질타는 <수필 같은 시>속안에 들어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시로 쓰는 수필 같은 것이리라.거침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그의 알아듣기 쉬운 시어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감동을 주는데 인색치 않다.오랜 인생을 살면서 터득한 진리는 함께하는 모든 세상의 생명가진 것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그래서 그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결코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겸손한 자세로 시속에 감춰 이를 쉬운 언어로 전달해준다.오래전에 작고한 구상 시인은 깊은 철학적 사유를 쉬운 시로 표현하길 좋아했다.구상 시인의 시 임종이 그렇다.그의 시는 구상시인과 많이 닮아 있다. 구상시인의 인간적이고도 절실한 사랑의 표현인 너털웃음과 착하고 쉬운 어휘속에 감도는 인간적 체취가 김광수 시인과 일맥상통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임종 고백
구상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흉물 같은 내 마음을
나는 마치 고소 공포증
폐쇄 공포증 환자처럼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구상 시인의 임종고백 일절>
죽음 임종 같은 무거운 주제를 현학적 수사하아없이 쉬운 우리말로 표현한 유명한 시의 하나이다. 가벼운 주제를 어렵게 표현하는 것보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알기 쉽게 표현하는 것은 독자들에 대한 배려이자 서비스같은 것이 아닐까?일찌기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 프란체스카 성인은 부자임을 포기 하고 나눠주면서 자신을 낮춤으로 많은 사람들의 맺힌 마음을 풀어주고 그들을 무겁고 어두운 영혼의 가리막에서 해방 시켜 주었다. 김광수 시인 역시 지극히 낮은 자세로 가장 쉬운 어휘를 골라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던진 메시지. 그것은 지혜롭고 올바르게 살아가게 하는 진리의 바탕이 아닐까.?
부자로 살아가기
돈이 얼마나 많이 있어야
부자 소리를 들을 수 있나
돈이 많아야 부자가 되나
마음이 부자면 부자지
,<본문 작가 시의 한귀절>
부자가 되고 싶지만 능력과 기회가 없어서 부자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자조 와 질투섞인 시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고 능력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비유적으로 읊은 시의 하나이다.부자가 싫지는 않지만 공직자 생활을 평생해온 시인으로서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 여러 위험하고 바람직 스럽지 않은 일을 해야만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는 자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다.불교용어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이 있듯 만지고 보이는 것 모두가 허상일진데 재물의 많고 적음도 결국 삶의 한계안에 가뒀다가 버리는 것,누구나 다 아는 진리라 하지만 실천하기 힘든 일, 그래서 재물이란 누더기(?)를 벗어던지고 홀가분하게 살아오니 그에게 생긴 것이 바로 시심(詩心)이 아닐까 생각한다.부자는 결코 시를 쓰지 못한다.부자가 갖는 욕심의 또 다른 손가락이 시를 쓰는 손가락을 그냥내버려두지 않는다.마음속에 부자란 생각을 하면 부자이고 부자를 부러워하면 오히려 가난뱅이가 되듯이 물질보다 정신을, 그 정신속에 시란 맑은 영혼을 불어넣어준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을 한다.그래서 그는 동암이란 호외에 자연인이란 또다른 칭호를 스스로에게 붙였다.예로부터 부자는 천국가기가 바늘 구멍으로 낙타가 들어가듯 힘들다고 한만큼 부자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벙법을 택한 것같다.
노목 농장
김광수
파아란 하늘 아래
끝없이 흘러가는 구름
구학산 아래 노목마을은
공기가 맑고 시원한데
이따금씩 서쪽 계곡에서
불어오는 수줍은 바람
서산에 해가 질 때면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황홀한 풍광이 온 누리에
아름답게 펼쳐지는데
소나무 주목나무 향나무 모과나무
단풍나무 회양목 비비추 금잔화 톱풀 한 가족
아주 자그마한 농장
내가 무척이나 정성들였지.
정지용의 <향수>를 방불케 하는 추억속에 접혀있는 마을의 풍경.그것은 작가뿐만아니라 읽는이들을 모두 우리를 과거 속으로 인도하게 하는 시이다.<노목 농장>은 물론 작가 자신과 그와함께했던 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지명적인 마을이지만 독자들은 상상을 통해 무한 공간을 넘어서 노목농장으로 발길을 돌린다.평범하고 흔히 대하는 환경, 이를 쉬운 언어로 노래하는 작가의 시는 어느 훌륭한 가곡의 작사가 못지 않은 흥취를 만들어주고 있다.소나무 주목나무 회양목 단풍나무 비비추 금잔화 등 어느곳에나 대할 수 있는 나무들을 동원해서 꿈과 같은 시를 만드는 재주는 그가 얼마나 자연과 가까히 하고 있고 자연을 사랑하는가를 엿볼수가 있다. 허술한 재료로 귀한 물건을 만드는 힘, 그것은 그가 얼마나 세상과 이웃 동물과 식물 모두를 사랑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서산에 해가 질 때면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황홀한 풍광이 온 누리에
아름답게 펼쳐지는데
<본문 시의 한 귀절>
개발이 되기전 대한민국 어느곳에서나 볼 수 있는 저녁나절의 모습이 새삼 그리운 것은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생각나기 때문일 것이다..문명은 자연의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마저 앗아간 느낌이드는 것은 오래전에 가졌던 순수한 동심을 맇게 되고 세월의 흐름속에 함께 잊혀진 그리운 얼굴들이 아닐까.김광수 시인은 노목농장에서 지는 해를 쳐다보는 감회를 시적 감각으로 승화시켰다. 매우 소박한 귀절들이지만 아직도 때묻지 않은 영혼의 시인을 만날 수가 있는 시이다.
나의 칠순잔치
칠십을 맞아 잔치를 해야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해야 좋을지
궁리에 궁리를 더하여 얻은 것이
따로따로 나누어서 잔치를 하기로 했지요
그동안 지인들의 잔치에 초대받아 가보면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불러
잔치를 벌이는데 끼리끼리만 놀고 있어
서로가 서먹서먹하고 잔치 분위기가 어설퍼
시골친구 학교동창 군대친구 직장 지인
문화원 동료 집안 친척 처가까지
친한 사람들만 따로 불러 잔치를 해야 하니
열네 번의 잔치를 벌려야 하지요
지금까지 이만큼 살아온 건
여러분들 사랑과 배려 덕분 이지요
축의금은 정중히 사양 하오니 오셔서
맛있게 드시고 축하만 해 주세요.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란 말이 있다.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가 곡강(曲江}에 앉아 쓴 시로서 예로부터 사람으로 태어나 칠십년을 보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희란 다른말로 표현되기도 한다.김광수 시인이 70, 즉 칠순을 맞이해 쓴 알아듣기 쉽게 쓴 시에서 이제까지 살게 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함과 고마움을 전하면서 잔치를 하는 모습이 담겨있다.칠십년을 살면서 마주쳤던, 환경에 따라 부침하듯 많은 사람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지인들을 초대해 잔치를 벌이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을 보듯 읽는이들을 잔치 상으로 안내해 즐겁게 해준다.오늘을 사는 칠십 이상된 사람들은 자신보다 훨씬 짧게 살다간 대부분의 부모들보다 생명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고 그 가운데 김광수 시인도 포함이 되어있다.굳이 설명할 필요없이 시인의 칠순 잔치에 모인 사람들은 과거 장소와 때만 다를뿐 정을 나눴고 어려울때 손을 잡아준 사람들일 것이다.소박하고 선량한 마음이 고스라니 담긴 아름다운 자리, 그 자리의 모습을 시로 표현한 시인의 마음이 얼굴에 새겨진 주름살의 숫자만큼 정겹고 순박하기만 하다.
내 고향 양수리
어릴 때는 시골에 살고 있으니
고향을 물어야 할 일이 없었지
서울에 올라 와 살다 보니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는데
양수리라 대답하면
가까워서 좋겠네 하지만
어린 시절 우리 동네는
살기가 정말 어려운 곳이었지
벼농사는 거의 짓지 못하고
보리 옥수수 감자 귀리 밀 조 고구마
밭농사만 하고 있으니
여름에는 깡 보리밥에 옥수수 감자와 국수
겨울에는 노란 조밥에 고구마로 살았지
참으로 살기 어려운 마을 이었어
지금은 다들 오고 싶어 하는 곳이지만.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 두물머리란 두갈래의 물줄기가 한곳으로 모이는 곳, 그래서 양수리라고도 한다.남한강과 북한강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곳에서 한데 합쳐 한강으로 흐르는 넓은 호수 같은 곳, 지금이야 많이 알려져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북적대지만 시인이 태어나 살고있던 이곳은 여늬 시골처럼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궁상맞은 곳, 주위의 경관도 세련되지 못하지만 번듯한 논밭이 드물어 고작 보리 옥수수 귀리 밀같은 잡곡들, 어린 시절 시인은 이 어렵고 힘든 가난한 마을에서 미래가 확실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그러나 제법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양수리 고향은 문명의 옷을 입어 없는 것이 드문 온갖 가게들과 유흥 시설이 생겨낫지만 시인은 아직도 어려운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그리고 그때 꿈꿨던 희망과 희망을 갖지 못한 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가난한 정을 나누면서 살때가 그립다.시로 엮은 한편의 수필, 혹은 단편소설같은 시속에 추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글이 아닐 수 없다.생각이 흐르는대로 가감없이 써내려간 시,거기에 인간 본연의 시인의 모습이 들어있어 누구나 한번쯤 그곳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마음이 들게하는 시가 아닐 수 없다.
삶의 난해함을 풀어주는 시.
가면속에 가려진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자연인이 되어 어루만지는 생활의 시
동암 김광수의 시인의 시는 매우 쉽게 읽힌다.그러나 쉽게 읽힌다고 해서 시의 내용이 가볍거나 허술한 것은 아니다.시안에 박혀있는 명사나 형용사 등이 우리 주위에서 흔히 쓰이는 것들로 이뤄졌기 때문에 무겁고 난해한 시를 즐겨읽거나 쓰는 시인들에게는 가볍게 느껴질 수가 있다.시의 내용도 그 나이또래가 되면 느낄 수 있는 삶의 환희와 지난날들의 고통을 얼굴 찌푸리지 않고 털어놓는 이웃 할아버지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그의 시를 읽는이들도 부담없이 알기 쉽게 쓴 시를 읽고 즐거워한다.그것은 읽는이들과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시속의 내용에 끼어들어 뭔가 한마디 더 해주고 싶은 주제를 시인은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문장에 삽입되는 어려운 한자용어, 즉 난해하고 사전을 찾아봐야할 용어를 구사한다고 잘된 시가 아니다.일찌기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가 희극론을 썼다.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비극과 희극가운데 희극을 선위로 삼아 쓴 희극론은 근엄한 학자들이나 종교인들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이 희극론을 작품에 끌어들인 작가가 유명한 기호학자이자 철학가이기도한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였다.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한 수도원의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호르헤라는 근엄하고 경직된 성격의, 오직 그리스도밖에 모르던 호르헤란 수도사가 등장한다.그는 수도원 도서관 관장이었는데 도서가운데 아리스토 텔레스의 희극론을 읽는 수사를 살해하기 위해 책속에 독극물을 발라놓았다.희극론이야말로 그리스도, 즉 주님을 모욕하는 책으로 생각하고 이를 읽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기에 일찌감치 죽여버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신념을 가진 자가 그 신념을 실현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론에서 웃음을 주제로한 내용을 삽입시켜 경직된 것만이 최고선인줄 착각한 종교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했지만 돌아온 것은 독자들의 죽음이었다.세상에는 탈을 쓰고 살면서 탈에 맞춰행동을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김광수 시인은 이런 면에서 이와 반대인 삶, 솔직하고 착하고 악을 외면하고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일관한 기록이 시로 남게 되지 않았을까?그래서 그의 시는 누구나봐도 긍정작인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앞으로 많은 시간이 남아있기에 더 아름다운 시를 쓰기위해 정진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