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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잣집9대 진사 12대 만석꾼 배출한 재력가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잣집에 내려오는 200년 전통의 가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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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 | ||
부불삼대(富不三代,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란 말이 있다. 최근 들어 우르르 무너지는 재벌들을 보면서 이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100년은 유지될 줄 알았던 한국의 재벌들이 허망하게 넘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부자가 3대를 넘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세간사(世間事)의 이치를 절절히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의 부는 이루는 것도 빠르지만 망하는 것도 신속하다. ‘졸부(猝富)는 졸망(猝亡)’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싶다. 과연 3000리를 내려가는 백두대간의 유장한 산줄기처럼 3대를 훌쩍 뛰어넘어 오래가는 부자가 한국에는 없단 말인가! 수십, 수백억원을 삽시간에 벌어 당당한 사업가 행세를 하던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경주 최(崔)부잣집을 생각하게 된다. 최부잣집은 유장한 부자, 즉 졸부가 아닌 명부(名富)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집안이다.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연이어 만석을 한 집으로 조선팔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집이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좀처럼 깨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기록일 성싶다. 3대 부자도 어려운데 어떻게 12대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그렇게 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면 반드시 집안 나름의 경륜과 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문을 품고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늦은 오후, 경주 교동(校洞) 69번지에 주소를 둔 최부잣집에 도착했다.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도 교동 69번지는 특별한 장소다. 원래 이 터는 신라의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 오른쪽 옆으로는 신라 신문왕 2년부터 자리잡은 계림향교(鷄林鄕校)가 있고, 뒤편으로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어려 있는 계림(鷄林)이 자리잡고 있다. 또 왼쪽 뒤편으로는 내물왕 무덤을 비롯한 5개의 커다란 봉분이 작은 동산처럼 누워 있고, 거기서 좀더 왼쪽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살던 재매정(財買井)이 있다. 이렇게 최부잣집은 주위가 온통 신라 신화와 역사의 자취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집터 자체가 박물관 분위기를 풍기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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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잣집의 가훈 | ||
최부잣집에서는 대대로 가훈처럼 지켜내려온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다섯째,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를 차근차근 곱씹어보면 최부잣집의 향기가 배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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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
쌀을 많이 가지고 있던 부자들로서는 이때야말로 논을 헐값으로 사들여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상극(相剋)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이것을 금했다. 이는 양반이 할 처신이 아니요,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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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리 안에 굶는 이 없게 하라 | ||
밤을 지내고 떠나는 나그네는 빈 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과매기 한 손(2마리)과 하루분 양식, 그리고 노자를 몇 푼 쥐어 보냈다. 어떤 과객에게는 옷까지 새로 입혀서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최부잣집이 과객대접에 후하다는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입 소문을 타고 조선팔도로 퍼졌다. 강원도 전라도는 물론 이북 지역에까지 최부잣집의 명성이 퍼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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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제 | ||
최부잣집의 가훈을 음미하면서 나는 로마 천년의 철학이 생각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가 천년을 지탱하도록 받쳐준 철학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는 것이다. 이를 번역하면 ‘혜택받은 자들의 책임’ 또는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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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자 설총을 낳은 터 | ||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최부잣집의 집터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집터는 요석공주가 살던 곳이었다. 최부잣집이 이곳에 자리잡은 시기는 대략 200년 전. 그러니까 현재 장손인 최염씨의 7대조가 되는 최언경(崔彦璥, 1743~ 1804)대의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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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水는 있으되 背山이 없다 | ||
집터의 입지 조건을 보통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그런데 최부잣집을 보면 임수(臨水)는 되어 있는데, 배산(背山)이 잘돼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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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 쌓이는 도당산 | ||
형산강 상류의 게무덤 자리에서 경주 교동으로 이사온 최언경부터 현재의 자손인 최염까지 계산하면 7대다. 12대 만석 중에 앞의 5대는 게무덤에서 하였고, 나머지 7대를 요석궁터였던 현재의 교동집에서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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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칸의 민간 궁궐 | ||
원래 이 집은 아흔아홉 칸이나 되었고, 부지 2000여 평에 1만여 평의 후원도 있었다. 그 집에 살던 노비만도 1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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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최부자 최준 | ||
문파(汶坡) 최준은 현재의 장손 최염의 조부이며, 마지막 최부자로서 나라가 망한 일제시대를 넘긴 인물이다. 마치 중국의 식민지가 된 티베트의 망명지도자 달라이 라마처럼, 문파는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최부잣집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동시에 재산도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살았던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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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큰 뒤주 | ||
문파 최준은 말년에 손자인 최염에게 나중에라도 일본에 가거들랑 아리가의 무덤을 꼭 한 번 찾아가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아리가의 셋째 아들(有賀敏彦·80)은 현재 한일문화교류협회 일본측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선대의 인연을 아는 그가 최염에게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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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잣집의 현 장손은 어떻게 사나? | ||
현재 최부잣집은 관리인이 살고 있을 뿐 집주인은 이곳에 없다. 사랑채의 팻말에는 이 집이 최식(崔植)의 집으로 새겨져 있지만 이미 1974년에 사망했고, 현재 주인은 최식의 장남인 최염으로 서울 방배동에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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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 양반’이란 별명 | ||
“최부잣집의 종부인 셈인데 친정은 어딥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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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을 ‘어긴’(?) 장손 | ||
나는 강희숙 여사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녀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부부는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인 최성길씨(崔成吉·40)는 사법고시에 합격해 현재 예비판사라고 한다. 2001년 2월에 서울지방법원에 정식으로 발령을 받을 예정이다. 따지고 보면 최성길씨가 최부잣집의 장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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