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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1일 목요일 [(자) 대림 제3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학자 기념 허용 아가의 연인은, 나의 연인이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온다고 노래한다(제1독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인사하자 엘리사벳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시다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으니 행복하시다고 한다(복음).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아가의 말씀입니다. 2,8-14<또는 스바 3,14-18ㄱ> 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10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4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남편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에 자주 비유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아가의 구절들은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의 심정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이러한 구절들은 사랑으로 일치되는 한 영혼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이 구절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러 찾아오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감성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이 구절은 구세주의 탄생을 앞둔 교회의 기쁨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벳 성녀는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성녀의 태 안에 있는 아기, 세례자 요한이 성령으로 가득 차(루카 1,15),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구세주를 알아보고 뛰놀았기 때문입니다. 둘의 만남은 구세주를 알아보고 맞이하는 영혼들의 기쁨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성탄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마음은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주는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주님을 연인으로 맞이하는 설렘이 우리 안에 커진다면, 아기 예수님께 하느님 사랑의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시고 낮은 곳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담는다면, 우리 마음은 이웃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특별한 만남 두 여인의 만남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보통 사람의 시선, 통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인 시선, 즉 인간적이고 표면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기구한 운명을 지닌 두 여인의 가슴 아픈 만남이었습니다. 한 여인은 노산(老産) 중의 노산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엘리사벳은 당시 가임 연령을 훨씬 넘긴, 세상 뜰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셨습니다. 당시 엘리사벳의 세례자 요한 잉태 사건은 장안의 화제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태안에서 아기가 뛰놀았습니다. 아마도 이 분야 기네스북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상황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 여인을 보십시오. 마리아 역시 엘리사벳 못지 않게 기구한 여인입니다. 아직 10대소녀입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한 마디로 미혼모였던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라고 똑부러지게 이야기 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간 역사와 국민 앞에 저지른 과오를 조금이라도 뉘우친다면, 그간 나라에 끼친 천문학적 손실을 생각한다면, 쥐죽은 듯 조용히, 기도하고 반성하면서 연말을 지내야 마땅할 텐데... 개념이 없는 건지, 정말 머리가 나쁜 건지,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송년회다, 뭐다 해서 국민들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고 있는 분의 모습을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사저 앞을 지키는 우리 젊은이들입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엄동설한에 그 곳에서 벌벌 떨면서, 그렇게 벌을 서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수행하고 있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고 보람을 느낍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입대했는데, 본의하니게 나라를 들어먹은 법범자들의 안전을 지키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이 너무나 딱해보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조속히 청산되어야 할 적폐입니다. 그 대단한 분들 한명 경호하기 위해 연간 4~5억원의 혈세가 지출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정말이지 무의미, 무가치한 일에 희생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이해하지 못할 현실 역시, 인간적 시선으로만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 성령 안에서 바라봐야겠지요. 이 땅의 모든 비정상적인 것들이 조속히 정상화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급해 단돈 300만원 대출받은 것 제 때 갚지 못해,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 감당하느라 죽을 고생하고 계시는 이 땅의 서민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천문학적 금액의 불법 비자금을 축척하고도 저리 떵떵거리며, 저리 실실 웃으며 돌아다니는 대단한 사람들을 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행복하십니다, 믿으신 분!”
저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한 번은 신학교에서 기도를 마치고 함께 밥을 먹기 위해 내려가고 있는데 저의 목 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휴 촌스러워!”
아마 제 이름까지 말했었는지 저는 그것이 저를 향해 하는 말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제 이름 자체가 촌스러운데다 워낙 촌스럽게 컸기에 그 촌티란 것이 도시에서만 살아온 이들에겐 어렵지 않게 보이나봅니다. 젊은 사제가 뭐 얼마나 시골스럽게 컸을까 생각도 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면 환경이 어땠는지 대충 짐작을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는 유치원이 있는 줄도 몰랐고 우유 먹을 돈도 없었고 신발 살 돈도 없었고 촛불 켜 놓고 공부하였고 겨울엔 따듯한 물이 모자라 형이 씻은 물에 또 씻어야 했고 자동차 배터리를 충전시켜 와서 9인치 흑백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사제가 된 지금 이런 모든 것들이 저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만 어렸을 때의 가난했던 경험들은 밤하늘의 보석처럼 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아직도 좋은 묵상거리와 강론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고 세상을 비관하여 사는 사람이었으면 그 과거를 어떻게 보게 되었을까요?
‘난 태어날 때부터 지지리 복도 없었지. 우유도 못 먹어서 키도 못 컸지, 과외도 한 번 못하고 하숙도 한 번 못해서 몇 시간씩 통학하며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 그렇다고 세상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어? 이놈의 세상!’
어쩌면 그 가난이 지금의 비관적인 삶의 핑계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것은 저에게 커다란 선물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그런 것들을 겪으며 산 것을 하느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저와 같은 연령대에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도 거의 없고 또 강론에서 보시면 아시지만 저의 많은 묵상 자료들이 어렸을 때의 어려운 경험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가난이 너무 자랑스럽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가난이란 것을 조금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족의 가장 따듯한 이미지 중에 하나는 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전기밥솥 주위에 둘러 앉아 자동으로 밥이 되는 것을 보고 온 가족이 놀라고 신기해하던 모습입니다. 잘 살게 되면서 경험하지 못하게 되었던 수많은 것들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셨던 주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믿음이 있다면 모든 것이 은총으로 변합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고통일지라도 믿음의 눈으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입니다. 고통이 믿음을 통해서 그렇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의 싹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의 복되심이 그 분의 믿음 덕이라고 칭송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리아에 비해서 성모님은 믿어서 행복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삶은 일곱 개의 칼로 심장을 찔리는 고통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양심의 위안으로 평안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단 한 시간도 누려보지 못합니다.
성모님이 믿음으로 행복하신 분이시라면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겸손하여 믿을 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버린 겸손한 사람에게만 성령의 은총이 내려와 믿을 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항상 하나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하고 깨끗해집시다. 그러면 믿음과 행복을 저절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깨끗한 마음의 구유에 새로 태어나게 되고 우리와 한 몸이 되실 ‘성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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