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리아를 위한 파반느
박영화
비는 처서를 적시고
처서는 바람을 물고 오고
급히 떠나느라 흘리고 간
저기 연못 속
꽃잎은 안녕처럼 피어나고
꽃의 혓바닥은 달콤해
이별은 짧고
흔들리는 오후 네 시
진홍빛 감잎 한 장
지키지 못할 약속에 화르르 마음 내려놓는다
꽃에 누워, 홀로 누워
어느 인연의 길 붉게 물들인다
배롱꽃 유서인 양 몸을 날린다
남녀가 눈을 맞출 때 이 세계의 꽃이 피고,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 시민- 인간, 이것은 종족의 걸작품이고, 그 어떤 예술가도 이 종족의 걸작품을 능가할 수는 없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가정에는 아이를, 사회에는 시민을, 인류에게는 인간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태어났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종족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창조행위이며, 이 세상에서 이 창조행위보다 더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없다.
남녀가 눈을 맞추고 사랑을 나눌 때, 그것은 너와 내가 한몸이 되고, 너와 함께 생사의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모든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등은 이 ‘사랑의 드라마’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영원한 사랑의 드라마의 주연배우이자 그 관객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순수한 사랑, 이 티없이 맑고 아름다운 사랑이 그러나 운명의 여신의 장난처럼 이루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오필리아는 덴마크 귀족인 플로니어스의 딸이자 햄릿 왕자의 약혼녀였지만, 그러나 햄릿의 아버지가 그의 동생인 클로디어스에게 독살을 당한 이후, 감히 이 세상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비극적인 생애를 마친 귀족여성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어머니와 삼촌의 결혼식이 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남편이자 숙부인 현왕(클로디어스)을 죽여야만 했던 햄릿의 과제 앞에서, 그의 약혼녀인 오필리아 따위가 두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뛰어난 재색미모를 지녔으면서도 사랑하는 햄릿 왕자로터 버림을 받은 오필리아, 아버지인 플로니어스를 그의 숙부인 클로디어스 왕으로 착각을 한 햄릿에게 살해를 당한 이후, 정신을 잃은 미치광이가 되어 강물에 빠져 죽은 오필리아----.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뛰어난 오필리아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러나, 오히려, 거꾸로 수많은 예술가들의 예술의 주제가 되고, 아직도 이처럼 박영화 시인의 [오필리아를 위한 파반느]로 탄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는 처서를 적시고 처서는 바람을 몰고 온다. 오필리아가 손에 꽃을 꺾고 들어간 연못 속에는 꽃잎이 안녕처럼 피어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즉, 버림받은 사랑은 “꽃의 혓바닥”처럼 “달콤하다.” 처서는 로망스의 계절인 여름이 끝나고 비극의 계절인 가을이 왔다는 것을 뜻하고, “저기 연못 속/ 꽃잎은 안녕처럼 피어나고”는 오필리아가 그녀의 몸을 던졌다는 것을 뜻한다. 낚시꾼에게는 언제, 어느 때나 다 잡았다가 놓친 물고기가 가장 크고, 바둑의 명인에게는 언제, 어느 때나 단 한 번의 착각으로 다 이긴 승리를 놓친 것이 아쉽듯이, 이처럼 오필리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청순 가련형’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강가의 버드나무는 버림받은 사랑이 되고, 쐐기풀은 고통을 의미하게 된다. 데이지는 순수를, 팬지는 허무한 사랑이 되고, 제비꽃은 충절을 암시한다. 양귀비의 붉은 색은 죽음을 의미하고, 이 청순 가련한 여인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의 그림, 즉, [오필리아]의 초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별은 짧고/ 흔들리는 오후 네 시”, “진홍빛 감잎 한 장/ 지키지 못할 약속에 화르르 마음 내려놓는다.” “꽃에 누워, 홀로 누워/ 어느 인연의 길 붉게 물들인다.”
“배롱꽃 유서인 양 몸을 날린다.” 박영화 시인의 [오필리아를 위한 파반느]는 참으로 아름답고 뛰어난 동양적 변주의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꽃 속에서 태어나 꽃 속에 누워, 붉디 붉은 배롱꽃 유서를 남기고 죽어간 오필리아의 최후의 전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명제보다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회한이 더 컸을 것이고, 그 결과, 사랑하는 햄릿과 함께 그들의 후손을 남기지 못한 회한이 더 컸을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태어나 꽃을 피우고 후손을 남기지 못한 죄보다 더 큰 죄는 없을 것이다.
박영화 시인은 상징과 은유가 뛰어나고, 그 ‘인식의 힘’이 천년 바위를 꿰뚫는 힘을 지녔다. 언어는 온 천하를 다 담는 만화경이 되어야 하고, 그 힘은 어떤 조각가의 칼보다도 더 날카롭고 예리해야 한다.
모든 명시는 ‘시서화의 진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