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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된 잠실에는 두 동리가 있었습니다. 섬의 북안은 신천리, 남안은 잠실리로 불렸는데 이 지명은 지금에 이어져 신천동과 잠실동이 되었습니다. 잠실섬은 누에를 치는 양잠소답게 섬 곳곳에 뽕나무가 가득했습니다. 김정호가 제작한 한양 지도인 <경조오부도>를 보면 잠실섬 옆에 뽕나무숲을 의미하는 ‘桑林’이라는 표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잠실은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침수지였기에, 조선 후기로 올수록 이곳의 잠업은 쇠퇴하였고 신잠실이 양잠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조선 후기 동잠실에는 ‘잠실’이라는 이름만이 남았고, 오랜 양잠의 맥이 끊기게 됩니다.
강의 흐름을 바꿔놓은 대홍수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한강에는 한 해에 네 차례의 홍수가 있었습니다. 세 개의 태풍은 한반도 전 지역을 강타했고, 연일 계속된 집중호우로 한강과 낙동강 일대 피해는 유독 컸습니다. 논밭 10만여 단보, 가옥 6000호가 유실되었고 붕괴된 가옥은 1만 7000여 호, 침수된 가옥은 4만 6000호여 호에 달했으며 64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기록적인 수해로 이때의 홍수는 ‘을축년 대홍수’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옵니다.
을축년 대홍수는 잠실 옆을 흐르는 한강의 유로를 바꿔놓았습니다. 홍수 이후 신천으로의 유량 유입이 급격하게 늘어나 본류가 되었고, 반대로 기존의 본류였던 송파강은 지류가 되었습니다. 유량이 풍부한 송파강을 끼고 전국의 물산이 집결하며 번성했던 송파나루터와 송파시장은 대홍수 이후 쇠퇴해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1934년 일제강점기 경성부 행정구역 확장조사서에 따르면 잠실섬 내 신천리, 잠실리에는 각각 62가구 384명, 35가구 201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뽕나무가 사라진 지 오래인 척박한 섬에서 주민들은 밀이나 수수, 메밀 따위를 경작했습니다. 1960년대까지 서울의 동쪽 끝은 뚝섬과 광나루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강 동쪽의 거대한 모래섬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1965년의 언론에서 잠실섬을 ‘서울의 외딴 낙도’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잠실 미개발의 역사는 이때까지도 이어져 온 모양입니다. 1963년 잠실 일대는 서울로 편입되었지만, 잠실섬은 문명에서 외면당한 섬이었습니다. 주민들은 뱃사공 일을 하거나 도시에 내다 팔 채소를 재배하며 살았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섬에는 TV, 전화는 물론 전깃불도 없었고, 동사무소와 파출소 같은 행정시설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민들이 잠실을 인지하는 사건이 매년 한 번씩 있었는데, 여름철 홍수 때였습니다. 매해 여름철 집중호우가 내리면 잠실은 물에 잠겨 신문에 이름을 올리기 일쑤였습니다. 1966년 7월 한강이 불어나 섬이 고립되었을 때, 미군이 선박과 헬기를 동원해 섬 주민 1,400여명을 구조한 사건이 전해집니다. 섬에 물이 들어차는 위급상황에서도 잠실섬에서는 외부에 구조 요청을 할 만한 통신수단도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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