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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는 그러나 하나님은 이라는 제목으로 강수정 전도사님께서 하시겠습니다. 설교 가운데 많은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게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옷가게에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객이 옷을 구매하면 종이 쇼핑백을 무료로 드렸는데 회사 내부 정책이 바뀌면서 쇼핑백은 종이가 아닌 천으로 바뀌었고 가게는 더 이상 무료로 쇼핑백을 주지 않았습니다. 독일어로는 슈더 바이틀이라고 하는 천으로 된 쇼핑백은 하나당 2유로로 올랐습니다. 그렇게 기존의 가게를 방문했던 손님들은 화를 내기도 하고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영업을 해야 하는 판매자이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 정책을 반영한 그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바로 2유로를 지불하면 그중 1유로는 환경 보호 프로젝트에 기부가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언급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고객의 표정이 달라진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2유로의 그 새로운 쇼핑백을 결국 사겠다고 말하면서 오늘 좋은 일을 해서 너무 기분이 좋다는 말을 하며 나갔습니다. 그것은 그 고객 한 분이 아니라 여러 번 같은 반응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 인간에게는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본성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을 봐도 그렇습니다. 타인을 잘 챙기거나 사회에 좋은 일을 기여하는 일을 할 때 저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또 뿌듯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타인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함으로써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느낄 때 자기 만족을 느낍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도 각각 좋은 사람의 기준, 또 스스로 좋은 사람임을 느꼈을 순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어진 말씀을 통해 복음을 믿는 우리가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그러나 하나님은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그러나를 인용한 것인데요. 그러나라는 표현은 앞의 내용과 뒤에 내용이 상반될 때 쓰는 접속 부사입니다.
그러면 3절까지 앞의 내용과 4절부터 뒤의 내용이 어떻게 상반이 될까요?
1절부터 3절까지의 내용은 그리스도 없이 사는 이방인의 상태를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1절은 말합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올바른 길에서 떨어진다는 의미로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죄는 단순히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윤리적이지 않은 행동만을 뜻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과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다음 2절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종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집,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여기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2절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입지 못하면 사악함의 근원이 되는 사단의 힘에 복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불순종의 아들은 히브리어적 표현으로 하나님께 대적하여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능력의 역사로 하나님의 영을 받기 전에는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에 의해 노예가 되었을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심지어 대적하면서 불순종하는 것에 타고나는 습관적인 삶을 가진 자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3절에서는 심지어 더 강한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바울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과거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오직 육체의 욕심에 따라 지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체는 생리적인 신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부패한 인간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탈락한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본성에 의해 결코 그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노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표현이고, 또 태어날 때부터 가진 그 뿌리 자체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살아갈 때 이런 허물과 죄를 어떻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죄된 본성을 부인하고 그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한계, 인간의 약함,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고 허물을 스스로 가리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 결과 사회적인 상황에서 가면을 쓰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사소한 예시로 우리는 잠깐 스쳐 지나가거나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 만난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친절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손을 잡으며 안부를 묻고 서로 잘 지낼 수 있도록 챙겨주기도 하는 훈훈한 모습들은 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된 본성이 가끔 보는 사람들에게는 잘 숨겨질지 몰라도 매일 함께 얼굴을 마주하는 가족들에게는 더 쉽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가족과 함께 지내실 때 어떠신가요?
우리는 가족에게는 매일 항상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애써 외면했던 나의 가장 괴물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나의 내면에 가장 추한 모습을 보이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사소한 예시지만 이러한 순간들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죄된 우리의 본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는 겉으로는 좋은 사람이 어느 정도는 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내면의 죄를 결코 숨길 수 없습니다. 이 허물과 죄는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납니다.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 이야기로 한번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황자의 비유입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유산을 미리 달라 하면서 집을 떠났고, 그곳에서 방탕하게 살다가 전 재산을 탕진하게 됩니다. 첫째 아들은 집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 곁에서 성실히 일을 했고,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해내고 또 지켜내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것도 없이 다시 돌아오며 큰 꿈으로 삼아 달라는 첫째 아들은 아버지는 품고 큰 잔치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분노를 하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아주 유명한 성경 이야기입니다. 보통 우리는 이야기를 죄라는 주제로 바라볼 때 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포커스를 둡니다.
그런데 팀 켈러라는 신학자는 탕구 하나님이라는 신앙 서적을 통해 사실은 둘째뿐만 아니라 첫째를 포함해 이 두 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 두 형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두 가지의 길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방탕한 삶을 살며 아버지로부터 멀어집니다.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상징하는 첫째 아들은 집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모두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왜 둘째 아들과 같다고 할까요?
종종 저는 나눔 가운데 이런 내용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딱히 크게 하나님께 잘못한 것도 없고, 성경대로 잘 살아서 막 죄를 지으면서 살거나 그러지는 않은 것 같아요. 바로 이 문장을 대변하는 인물이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크게 길을 벗어나거나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않았지만 도덕적인 수능이라는 조건 하에 아버지의 재산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힘이 없어 보이지만 관계적으로는 두 아들 다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 없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인격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 여긴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두고 팀 켈러는 이 누가 복음 본문의 제목을 황자의 비유가 아닌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를 비유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만 방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자신이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뒤틀린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인간의 죄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내가 쌓아온 좋은 행실로 인한 자기 외로움에 스스로 만족하지만 그 안에서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인정해야 할 첫 번째 궁극적인 진리는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육체와 영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며 율법을 어기거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그 시도 자체입니다.
앞서 언급한 항구 하나님에서는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순종해 착한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분이 당신에게 복과 도움을 베푸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당신에게 돕는 자 혹은 강화를 주는 모본이 될지언정 당신의 구조는 아니다. 당신 스스로 구주 역할을 맡고 있다. 매일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임을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삶의 모습을 볼 때 구원자 역할을 스스로 맡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심리학에 구원자 콤플렉스 혹은 메시아 콤플렉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구원자 심리는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정도를 넘어서 그의 어려움에 대한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구원 환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의 문제를 나의 문제처럼 여기며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줍니다. 이러한 심리를 제외하고 겉모습과 행실만 볼 때는 사랑을 주는 예수님을 닮은 모습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내면 깊은 속에서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리는 인간의 죄성을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리스도 없이 사는 인간은 잃어버린 상태이고, 타인과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오늘 설교 제목에 반영된 4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4절부터는 이전에 살펴본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상태와는 다릅니다. 여전히 우리가 영적으로 잃어버린 상태일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허물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성실하게 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허물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그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그 은혜 하나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선물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누가복음 본문에서 비유해서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 말씀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은 더 이상 아버지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으니 품꾼의 하나로 삼아달라는 회개가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달려나가서 그 회계보다 아들이 돌아왔다는 자체를 기뻐하고 그를 안았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그 동기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긍휼과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값없는 용서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선물받은 은혜입니다.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인간인 우리에게 베푸신 그 호의와 선물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어서 오늘 절에 오늘 본문 8절에서 9절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행하는 인간의 모든 윤리적인 노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노력해서 혹은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이 구원을 성취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우리는 그 어떤 좋은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가야 할까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10절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게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설교의 시작으로 저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본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믿는 우리는 단순히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좋은 사람은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종교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된 속성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완전히 죽고 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인해 세 사람이 되었고, 그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선한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좋은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은 스스로 쌓아올린 자아상입니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혹은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해 만들어 나가는 겉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친절했다가 가족에게는 한없이 예민해지는 우리의 모습처럼요.
하지만 선한 사람은 다릅니다. 선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때문에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 어떠한 자아상을 넘어선 정체성입니다. 그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령께서 선한 일들을 해나가시고 그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사람입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거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흘러나오는 삶의 모습들입니다.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돌을 닦아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 안에 성취되었으며 그 목적은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을 반영하게 되는 새로운 삶에 따른 당연한 결과입니다. 선한 일은 더 이상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구원에서 비롯된 열매로서 하게 됩니다. 선한 일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고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선한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며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10절을 통해 그리스도 없이 사는 이전의 삶과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는 새로운 삶을 대조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이 대조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전환이 됩니다. 우리는 전에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전에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전에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떤 삶의 이야기를 들고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이 모든 이야기 속에 가족과의 어려움, 인간관계의 어려움, 교회 생활의 어려움, 회사 생활의 어려움, 자녀 교육의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불안정한 미래와 후회되는 과거로 인한 어려움, 진로의 어려움, 건강의 어려움, 믿음 생활의 어려움, 또 제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어려움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들은 우리가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생존해야 하는 신호가 아닙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그 순간들은 바로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에 시작된다는 신호입니다. 인간인 우리는 이러한 상황으로 인한 내면에 그 어려움들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 불손종하여 하나님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해 나가려는 모습에 죄인이 되었을 그때에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비로소 우리 안에 성화의 과정이 시작될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됩니다. 주일 예배는 비록 끝나지만 우리의 예배는 삶의 자리에서 계속됩니다. 매일이 영적 전쟁인 가운데 우리 스스로 우리의 어려움, 우리의 문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애써 가리고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은혜를 매일 경험하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한 주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