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집에서 걸려있던 이민위천(以民爲天) 이라는 액자 때문에 이석기를 종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물론 이석기는 주사파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말이 김일성이가 즐겨사용했다는 단순한 논리 하나만으로는 억지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사파들이 주장하는데로 이민위천을 말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전부 종북주의자인가?
이민위천은 이석기가 종북주의자임을 증명하는 아주 작은 단서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으로 이석기가 종북주의자임을 주장하는 것은 말하기 좋아하는 언론의 횡포이자 무식한 우파들의 소행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석기의 이민위천이라는 말에서부터 주체사상의 근간이 되는 국가주의(민족주의)의 근원을 말하고자 한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같은 의미(nation)인데, 통치자 입장에서는 국가주의가 될 것이고 인민의 입장에서는 민족주의가 될 것이다.
이민위천이라는 말은,
“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라는 사마천이 쓴 ‘사기’ 의 ‘역이기전 酈食其傳’에 나온다.
사마천의 스승 동중서는 유교를 국교화 하여 한나라 무제의 중앙집권적 왕권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
기원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규모나 기간에 있어 한나라를 능가할 수 없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중국의 통일은 한나라부터다.
동중서는 유교를 국교화 하면서 왜곡을 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五倫을 三綱으로 왜곡한 것이다. 공자의 말씀인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문학 지침서 같은 것이었다.
그 중 하나가 君臣有義인데, 왕과 신하는 의로 맺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동중서는 삼강에서 君爲臣綱으로 왜곡하였다. 군위신강에서 綱 의 뜻은 그물의 세로줄을 말하는데 그물을 잡아당기면 한 군데로 모여지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세로줄로서 즉 종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군위신강의 뜻은, 신하는 왕에게 종속되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는 뜻이다.
공자와 맹자는 단 한번도 三綱을 말한적이 없다. 三綱은 동중서가 한나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교를 국교화 하여 왜곡한 것에 불과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다. 三綱의 또 다른 夫爲婦綱 과 父爲子綱의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의 지위를 남성들에 종속시키고 가부장적 사회를 만드는데 일등공신이며, 이것이 한나라 이후 2000년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엉터리 유교의 덕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五倫의 義,親,序,別,信은 어지러운 세상 춘추전국시대를 살아가는 법과 제도를 뛰어넘는 인민들의 생활지침서인데 반하여 三綱 의 綱 은 국가주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인민들을 억압하는 법과 제도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동중서의 제자인 사마천은 중화사상의 대부격인 사기를 저술하였는데, 사기는 자신들 한나라의 역사는 확대하고 자세히 기록하고 변방의 역사는 오랑케의 역사로 기술하여 중국 역사의 기본 바탕이 된 동이족의 역사는 그 본질을 찾을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자신들의 뿌리마저 갉아 먹게 되었다.
한나라 성립 배경이 된 유교의 국교화와 역사의 왜곡은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존재하던 수많은 소수민족들의 역사를 말살하였고 그들의 언어를 사라지게 만들었을뿐만아니라 그들을 중국의 한족이나 한반도의 한족으로 편입시키는 결과를 낳아 민족을 사라지게 하였다.
또한, 현재 중국정부가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기술과 자본을 바탕으로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여 소수민족들의 자치정부를 탄압하는 것으로도 한나라의 건국이념이 중화사상으로 변질되어 인민들의 인권을 탄압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현재의 중국은 2000년전 한나라의 천하통일과 번영을 되새기고 대물림 하려 할 것이다.
그럼,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
에서 이민위천의 본질과 그 뒤에 기록된 이식위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먼저 이민위천이라는 말은 후에 동아시아 왕들의 위대한 지침어인 爲民政治로 승격이 된다. 모든 왕들은 백성을 하늘같이 떠받들고 위해야 하는 것이 제왕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한나라 이후, 동아시아 2000년 동안 백성을 하늘 같이 여긴 왕은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성군이라 여기는 우리의 위대한 세종대왕 조차도 동북지역의 소수민족들을 침략하여 그들의 근거지를 빼앗고 영토확장을 하였고, 그가 발명한 수많은 과학적 도구들은 실제로 왕권확장과 백성들의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효과적인 도구로 전락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단 한번도 爲民을 이야기 한 적이 없다. 오히려 與民政治를 말했다.
여민은 위민과 다르게 평등한 개념으로 백성을 떠받들지도 않고 억압하지도 않고 함께 평등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백성을 하늘같이 떠받든다는 위선적 행위로 인해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져 반대급부로 백성들 위해 군림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여민정치인 것이다.
따라서 위민정치는 동중서의 군위신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왕권강화의 국가주의 탄생의 빌미를 준 셈이다.
이민위천 뒤의 문구 以食爲天의 뜻은,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수긍할 것도 같기도 하지만, 뭔가 불현듯 스쳐가는 것이 있지 않을까?
맑스의 유물론은 한국에 수입되어 들어와 저 유명한 1980년대의 사회구성체 이론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그것의 논쟁을 시점으로 운동권이 NL 과 PD로 갈리는 계기가 되었다.
운동권의 이론적 대부로서 박현채 선생은 운동의 이론화와 과학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소년 빨치산의 이력으로나 서울대 경제학자로서 그의 경력은 좌파학자로서 우뚝 서있음에는 누구도 부인못할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저서 [민족경제론]의 제목은 그가 갖다 붙힌 것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제목을 고민하여 우연하게 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민족경제론의 요지는, 보호무역을 통해서 자국의 자급자족만이 인민들이 살 길이라는 주장이다.
아마, 그의 그런 주장에 민족이라는 말을 우연히 갖다붙힘으로서 NL들의 필독서가 된 것에 대해서도 혹시 지하에 계신 박현채 선생이 웃고 있지나 않을런지 모르겠다.
그의 저서 ‘민족경제론’은 신자유주의 무역자유화의 폐해가 나타나는 현재를 예언한 대단한 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민족경제론의 민족이라는 글자 하나만으로 주사파들의 민족주의를 언급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주사파들은 그의 경제학적 이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이 강하다.
그리고, 그의 제자였던 안병직 교수가 뉴라이트의 대부가 되고 그의 책이 주사파들의 필독서가 된 것은 어쩌면 동중서가 유교를 왜곡하고 사마천이 역사를 왜곡한 것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사회구성체 이론의 모태가 되었던 맑스의 유물론은, 물적토대가 사회를 구성하는 2차적 가치 종교 철학 예술 학문 정치 이념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쉽게 이야기 하면 인간사회는 먹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즉 사마천이 이야기 했던 以食爲天 의 뜻과 통하지 않는가. 사마천은, 왕이 백성들의 배를 배부르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백성들은 오로지 먹는 것으로만 행복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유물론은 상당한 부분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 세상은 동물과 다르게 그 보다 복잡한 것이다.
실제로, 역사 이전의 원시 공동체 시대에서도 인간들은 먹는 것과 함께 그들의 소박한 종교(에니미즘,토테미즘)의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생활을 설계했던 것이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도 물적토대는 틀림없이 중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정신적 가치 또한 중요한 사회적 가치였던 셈이다.
그 증거를 하나 살펴보자면, 유럽 복지의 원조였다고 자부하는 영국의 스피넘랜드법은, 종획운동으로 장원에서 쫒겨난 농노들이 산업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기술혁명으로 점점 노동자가 필요없어지자 영국의 도시들은 실직한 프롤레타리아가 거지떼가 되어 사회문제가 되자, 실직한 노동자에게 무조건 생활비를 보장하자 구호대상자는 끊임없이 늘어나고 생산성은 떨어지게 되어 노동자는 거지떼로 전락하고 자본가들 조차도 손해를 보게 되었다.
시골영주와 자본가들의 싸움에서 자본가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영국 왕 또한 난감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맑스는, 산업혁명을 통해 나타난 프롤레타리아라는 생소한 인간형을 기반으로 유물론을 생각했으며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 또한 봉건사회와 같은 계급사회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맑스의 유물론은 자유시장에서 물질 만능의 현대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어울리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자본주의가 있기 전의 과거의 사회에서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산업혁명 시대의 프롤레타리아가 물적 토대를 이루고 현재의 소비자가 됨으로서 물적숭배(fetishism)의 천박한 인간형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어쩌면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노름빛에 허덕이던 그 당시의 맑스의 입장에서는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19세기는 인류 역사에서 커다란 전쟁이 없었던 가장 조용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 시기가 유럽의 제국주의가 제 3 세계를 침략하던 자본주의의 완성의 시기였다. 그것이 위기로 나타났던 것이 1,2 차 세계대전이었다.
그 후, 세계는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두 세력을 나뉘어졌으나, 시실은 그 뿌리는 같았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수준의 차이였던 것이다. 한쪽은 자본주의를 국가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햇고, 한쪽은 자본주의를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햇던 것이다.
한쪽은 개인과 시장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그것을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햇고
한쪽은 계급적 관점에서 개인을 집단으로 관리하여 기계적 평등을 이루었으나 결과적으로 국가의 노예로 만들었고 자유시장을 통채로 말살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외부의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같은 길을 걷게 되고 말았다.
이석기와 국정원 사태는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중국 한나라의 절대왕권 강화와 중세 절대주의 왕권체제 그리고 근대 유럽 왕들의 스포츠 였던 전쟁비용을 위해 아메리카 대륙의 금의 약탈이 현재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맑스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유럽의 민족주의는 약탈해온 금을 기반으로 금본위제 화폐제도가 생겨나고 각국의 왕이 발행하는 화폐의 종류에 따라 같은 돈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기반으로 하여 탄생된 것이다.
유럽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엉터리 이데올로기인가는, 불과 150년전 영국의 왕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독일인이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형성 과정에서 국가주의로 무장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사생아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석기라는 주사파 인간형은 국가주의와 물신숭배 계급주의가 만들어낸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역사인식과 사회에 대한 시선은 극도로 협소하다. 역사와 사회를 합리적으로 진보하는 과학의 시선으로 바라본 맑스의 오류가 그 시절 생물학의 다윈의 진화론과 합리성을 같이 한다는 것에서 실소를 금할 수 밖에 없다.
복잡한 인간사회를 기계적인 합리적 이성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역사를 강자의 시선인 국가주의로 해석함으로써 계급주의의 늪에 빠져버린 가장 위험하고 볼품 없는 것이 바로 이석기류의 주사파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