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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화 <타이타닉>
이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에 비견될 만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이다. 역사상 최고의 제작비 2억 8,000만 달러에, 최대 세트 제작, 자료 준비 기간 5년과 제작 기간 2년 등 ‘20세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작’으로 평가받았다.
무려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수상함으로써 대작 〈벤허〉와 동일한 기록을 남겼다. 감독 제임스 카메론의 열정과 치밀성은 영화 곳곳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심장을 뜨겁게 달구면서, 장대한 스케일의 3시간 이상의 전설을 창조했다. 그는 단순한 멜로드라마도 이처럼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이 작품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창조된 낭만적인 서사극이다. 그동안 이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나 TV물은 여럿 있었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러브스토리를 엮어서 관객의 심금을 울린 영화는 없었다. 영화의 스토리는 젊은 로즈(케이트 윈슬렛 분)의 시점에서 진행되는데 그녀가 평생 가슴속에 간직한 잭 도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과의 러브스토리는 어떤 것이었을지, 그녀는 어떻게 생존했으며 ‘침몰할 수 없다는 배’는 과연 어떻게 침몰했을지 등등을 보여준다.
처음에 잭 역을 매튜 매커너히로 점찍었는데 카메론 감독이 디카프리오를 강력히 추천했다는 후문이다. 케이트 윈슬렛은 로즈 역을 따내려고 끈질기게 카메론 감독에게 졸라댔다. 런던의 자택에서 카메론 감독에게 매일같이 이메일을 보냈고 LA로 와서는 매일 전화를 해댔다. 마침내 로즈 역을 거머쥔 케이트는 카메론 감독에게 장미(로즈) 한 다발을 보내며 진정한 로즈를 보여주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스미스 선장 역에는 로버트 드 니로가 결정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위장에 탈이 나는 바람에 포기했다. 이 영화 촬영이 끝난 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는 친남매처럼 가깝게 지내오고 있다. 2015년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남우주연상을 따낸 디카프리오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가장 환호했던 배우가 케이트였다.
이미 타이타닉호를 주제로 한 영화들이 여럿 있어서 처음 영화가 기획될 때에는 많은 이들이 흥행을 시큰둥하게 보고 이 영화의 제작에 별로 내키지 않아 했다. 이런 여러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카메론은 영화를 밀어붙이다시피 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제작비가 무지막지하게 늘어나면서 제작사인 폭스와 파라마운트의 관계자들의 애간장은 점점 더 타들어갔다. 애당초 1억 2,000만~1억 5,000만 달러 정도를 예상했으나 2억 달러를 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처럼 예상보다 마구 늘어나는 제작비 때문에 제작을 중도 포기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자, 카메론 감독은 자신의 개런티 800만 불을 포기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타이타닉〉이 아무리 성공해도 카메론은 각본료를 제외하고는 한 푼도 못 받을 것이 예상되었다. 여하튼 제작사였던 폭스나 파라마운트 또한 파산은 아니지만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조금이라도 덜 망하기 위해 개봉 시기까지 세심하게 조율하며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전대미문의 초대박이었다. 미국 내 흥행 성적 6억 달러(약 6,000억 원), 미국을 제외한 해외 흥행 성적 12억 4,500만 달러(약 1조 2,450억 원)를 합쳐, 총합 약 18억 4,500만 달러(약 1조 8,450억 원)로 10년 넘게 세계 1위의 타이틀을 고수했다. 이후 많은 블록버스터들이 <타이타닉〉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전 〈E.T.〉와 〈쥬라기 공원〉 이후 미국 영화가 전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영역을 넓혀간 이후 올린 최고의 성적 중 하나였다.
실제로 엄청난 불안감 끝에 개봉한 〈타이타닉〉의 첫 번째 주(週) 성적은 겨우 2,800만 달러였다. 오프닝 성적이 바닥의 성적을 기록하여 암운을 드리우기도 했다. 이래저래 폭스와 파라마운트의 간부들의 심장은 타이타닉호처럼 또 한 번 덜컥 가라앉았다. 그러나 입소문을 타고 점차 성적이 오르더니 박스오피스 15주 연속 1위라는 역대급 기록을 달성하면서 기염을 토했다.
II. 흥행의 귀재, 제임스 카메론 감독
오늘날까지 세계 영화사상 20억 달러의 이상의 수익을 돌파한 영화 6편(<아바타> <어벤져스:엔드게임> <타이타닉> <스타워즈:깨어난 포스> <어벤져스:인피니티 워> <아바타:물의 길>) 중 절반인 3편을 만든 감독이 바로 제임스 카메론이다. 경이적인 흥행몰이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는 매번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짜릿한 재미를 안겨주면서 단순히 볼거리와 스케일에 치중된 단순한 *블록버스터가 아닌,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풍성한 볼거리와 함께 풀어낸다. 또한 스토리 텔러로서의 재능과 영상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표현해 왔다.
* 블록버스터
일반적으로 블록버스터(blockbuster)란 제작비용이 많이 들어간 영화를 말한다. 블록버스터의 뜻은 초대형 폭탄으로 세계 2차 대전에 영국 공군이 쓰던 4.5 톤의 거대한 폭탄을 말한다. 간혹 대히트작들을 일컬을 때도 쓰인다.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카메론의 아버지는 전기기술자, 어머니는 화가였다. 어렸을 적 <고질라> 시리즈에 푹 빠지기도 했던 카메론은 그때부터 잡동사니로 로켓·비행기·탱크 등을 만들면서 미니어처 제작의 습작을 거쳤다. 한편 독서광이었던 카메론은 특히 공상과학소설을 좋아해 그 시각적 상상력을 화면에 표현하는 데 관심을 가져 왔다. 캘리포니아 주립대를 중퇴한 카메론은 결혼을 하고 트럭운전사로 일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그는 LA로 가서 로저 코먼의 뉴월드 영화사에 들어간다. 81년에 <식인 피라니어>로 감독 데뷔했다. 그 후 카메론은 <터미네이터>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자 게일 앤 허드를 찾아가고 <터미네이터> 속편을 비롯한 모든 권리를 1달러에 넘길 테니 자신을 감독으로 기용하라고 제안한다.
1988년, 65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저예산으로 만든, 미래사회의 암울한 묵시록이 담긴 SF액션물인 <터미네이터1>은 ‘테크 누아르’란 평과 함께 대성공을 거뒀고, 이어서 <에이리언2>의 감독으로 발탁된다(<에어리언1>은 리들리 스콧이 감독). 카메론은 <터미네이터>와 <에이리언2>의 대성공으로 영화사의 돈을 맘대로 쓸 수 있게 되자 새로운 특수효과를 개발해가면서 시각세계의 표현영역을 넓히는 데 주력한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아눌드 슈와즈네거
이후 그의 블록버스터 작품인 <타이타닉> <아바타> <아바타:물의 길> 등에서 보여 주었듯이 대부분 그의 작품은 엄청난 규모의 제작비를 쏟아 붓는 블록버스터 급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카메론은 할리우드영화의 제작비 상승을 주도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카메론은 명장 윌리엄 와일러, 스탠리 큐브릭 감독처럼 완벽주의자로 유명하다. 거기다 괴팍하기까지 해서 악명이 높다. 촬영장에서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달달 볶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는 소문이 나있었다. 제 아무리 몸값이 높고 유명한 배우라 할지라도 인정사정없었다. 그러나 훗날 <아바타> 촬영 준비 차 여러 과학자들과 함께 심해 탐사를 다녀오면서 성격이 일변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유대감"을 탐사 과정에서 배웠다고 소회를 밝혔고 이후 촬영장의 분위기가 전과 다르게 부드러워졌다는 후문이다. 금년 12월 아바타 시리즈 3편인 <아바타:불과 재>를 공개할 예정으로 있다.
III. 타이타닉호 침몰의 진실
1912년 4월 10일, 세계 최신이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초호화 여객선인 타이타닉호가 영국의 사우스햄프턴 항을 떠나 뉴욕을 향해 출발했다. 배의 규모나 시설로 보나 이 여객선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으로 보였다. 이 배는 당시의 어떤 군함보다 두 배나 컸다. 그야말로 불침선이었다. 검은 빛으로 도색된 반짝이는 선체엔 엷은 황색의 굴뚝 4개, 총톤수 4만 6,328톤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진, 실제 타이타닉호
길이는 약 2.7 킬로미터로 두꺼운 강철판을 사용한 2중 바닥이었고, 갑판 밑은 만약을 대비하여 16개의 방수 구획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브리지(선교)에서 단추를 누르면 자동적으로 각 구획실의 문이 닫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 배에는 당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4월 14일 일요일. 별이 빛나는 추운 밤, 타이타닉호는 캐나다 뉴펀들랜드섬 남동해역을 20노트를 약간 웃도는 속도로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달빛도 없는 칠흑 같은 고요한 밤이었다. 2,224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은 이 호화 여객선의 첫 번째 항해라는 축제 기분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승객 명부에는 당시 내로라하는 부호들과 기라성 같은 명사들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 가운데는 대부호인 존 제이콥 애스터, 미국 메이시 백화점 소유자인 이시도어 스트라우스I, 여러 명의 영국 귀족, 또한 이 배의 설계자인 토마스 앤드류스 등이 있었다. 앤드류스는 이 배야말로 20세기 기술을 몽땅 응축한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승무원들 역시 이 배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하느님이라도 이 배를 가라앉힐 수는 없을 것이야.”
타이타닉호가 첫 항해를 떠난 그해, 그린란드와 북부 지역은 30년 만에 가장 따뜻한 겨울이 찾아왔다. 그래서 빙산과 얼음들은 래브라도 해류의 영향을 받아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연의 기후도 사고를 유발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그래서 동북쪽으로 따뜻한 걸프 해류에 떠밀려 빙산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대서양 횡단 해상 통로로 여기저기 밀려 들어와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타이타닉호는 근처에 빙산이 떠 있다는 첫 번째 전문을 받았다. 이 최초의 빙산 경고는 카로니아호에서 온 것이었다.
“타이타닉호 선장께 알림, 서쪽으로 향하는 여러 선박들이 북위 42도, 서경 49~51도 사이에 빙산과 얼음덩이들이 떠 있다고 경고하고 있음.”통신실에서는 잭 필립스와 해롤드 브라이드 두 무선사가 그 지역에 있는 다른 배들로부터도 빙산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거듭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무선사들은 그 전문을 무시해 버렸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 배는 절대로 침몰할 수 없다.”라는 주위에서 하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에 다시 한 번 같은 내용의 전문이 들어왔다.
이제는 그 전문을 아예 받아 적지도 않았다. 세 번째 전문이 들어오자 할 수 없이 이번에는 그 통신내용을 적어서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에게 전했다. 스미스 선장은 그 전문을 읽어 보고는 아무 말 없이 타이타닉호의 소유 회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 사장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그 전문을 보고 쓰레기통에 휙 던져 버렸다. 한 시간쯤 후에, 다시 네 번째 경고가 들어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선장이 말했다. “승객들에게 떠다니는 빙산을 조심하도록 일러줘라.” 그것이 전부였다. 승객들이 빙산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그것은 참으로 웃기는 말이었다.
사진, 타이타닉호 침몰 장소
그날 밤 9시 30분에 다섯 번째 전문이 들어왔다. 다섯 시간 동안 계속 들어오는 빙산 경고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배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제 타이타닉호는 뉴펀들랜드섬 최남단 지점인 케이프 레이스에 가까워 졌다. 이때에는 친구들과 친척들 그리고 사업상 계약 등 승객들의 일상 무전들로 통신실은 온통 북새통을 이루었다. 열 단어에 3달러를 받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무선 요금에도 불구하고 1등석의 승객들은 경쟁적으로 타이타닉호에서 무선 연락을 보냈다.
외부로 나가는 무선 송신기는 고장이 나서 불통이 되기까지 했다. 아마 세계 최고의 여객선을 타고 있다고 지인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호기를 부리며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긴 항해 동안 즐길 수 있는 기분전환 방법 중의 하나였다. 증기선인 메사바호가 급전을 보내 타이타닉호가 진행하고 있는 방향에 거대한 빙산이 떠 있다고 또 한 번 전해 주었지만, 이 전보도 끝내 묵살되고 말았다.
밤 11시, 캘리포니안호의 스탠리 로드 선장은 전속력으로 항해하는 타이타닉호를 보고 기겁을 했다. 그는 곧 무선사 시릴 에반스에게 타이타닉호에 신속히 경고 메시지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에반스는 곧바로 “우리 캘리포니안호가 빙산에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귀 선박도 주의하시오.”라는 무전을 보냈다. 그러나 이를 수신한 타이타닉호의 필립스는 “끼어들지 마시오. 당신은 지금 우리 무선 교신을 방해하고 있단 말이오.”하고 핀잔을 줬다.
폼 잡고 싶어 하는 1등석 승객들의 전보보내기에 바쁜 필립스가 땍땍거린 것이다. 애써 조심하라고 보낸 무전에 거꾸로 면박을 당하자 화딱지가 난 에반스는 씩씩거리며 11시 30분경 잠을 청했다. 승객들의 폭주하는 무선 처리를 위하여 이렇게 중요한 무선 내용을 깔아뭉갠 처사는 곧바로 커다란 비극을 불러왔다.
밤 11시 40분, 마스트 꼭대기의 망대에서는 승무원 프레데릭 플리트가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배 항로 바로 앞에 검은 물체가 떠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빙산이었다! 빙산도 보통 큰 빙산이 아니었다. 빙산은 유령처럼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급히 망대의 종을 세 번 크게 울렸다. 종을 세 번 친다는 것은 바로 앞쪽에 물체가 있다는 신호였다. 선교에 전화를 걸었다.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난리가 났다. “전방에 빙산이다!” 이 빙산은 높이 25미터, 길이 약 20미터로, 추정 배수량은 20만 톤급으로 타이타닉호의 4배나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
사진, 영화에서
선교에 있던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은 ‘전속력으로 후진’할 것과 ‘좌측으로 급히 선회’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배는 왼쪽으로 천천히 돌기 시작했고, 빙산을 피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항해사의 행동은 민첩했지만,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끽끽거리는 귀에 거슬리는 긁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머독은 배가 빙산에 부딪쳤음을 깨달았다. 감시원으로부터 보고를 접수한 지 30초가 조금 지났을까 말까한 시간에 당직 항해사는 트드드득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다.
거대한 빙산이 배의 우현을 긁고 지나갔다. 야구공만한 얼음 조각에서 농구공 크기의 얼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얼음이 우현의 갑판 위에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배와 빙산은 길어야 10초 동안 접촉했다. 동시에 약 90미터 닫는 레버를 가동시켰다. 16개의 방수 구획실이 즉각 닫혀졌으며, 승무원들은 안심했다. 갑판 위의 승객들은 얼음 조각들을 주워서 깨뜨리면서 장난까지 치고 있었다.
카드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람들은 테이블에서 눈을 돌려 밖을 보았으나, 창문 밖으로 빙산이 휙 지나가는 것을 본 뒤 무심하게 다시 놀이에 몰두했다. 그때 34년간의 항해 경력을 지닌 베테랑인 스미스 선장은 배 설계자인 앤드류스와 함께 배를 막 순시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선장의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빙산은 이미 선체의 리벳(철판을 이어 고정시키는 큰 대가리 못)을 쥐어뜯고, 강철판에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이다.
후에 수거한 강철을 실험해 본 결과 타이타닉호에 사용된 강철 종류는 영하의 수온에서 부서지기 쉽다는 점이 발견되었다. 10분 사이에 16개 방수 구획실 가운데 3개 구획실이 물로 꽉 찼고, 뱃머리(이물)가 아래로 기울기 시작했다. 앤드류스는 스미스 선장에게 타이타닉호가 이미 파국을 맞이했음을 침통하게 알려 주었다. 방수 구획실이 3개나 파손된 이상 배의 침몰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사진, 영화에서
4월 15일 자정이 약간 지난 시각, 스미스 선장은 조난 신호를 발신하도록 지시했다. 불과 2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화물선 캘리포니안호가 있었지만 무선사 에반스는 이미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당시는 교대 근무제도가 없어 한 사람이 24시간씩 꼬박 근무하곤 했다.
한심한 것은 캘리포니안호의 한 수습 승무원이 하늘에서 터지는 구조 신호탄을 보고 선장을 깨우러 갔다가 막상 선장님을 깨우기 직전 겁이 나서 그만두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늘같은 선장을 깨운다는 게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스미스 선장은 타이타닉에서 구명보트를 내리고 하선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승객들은 구명보트를 타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상당수는 그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승객들은 타이타닉호가 결코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승객 대부분은 구명보트에 탈 생각조차 안 했다. 시커먼 북대서양 한복판에서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보트보다는 길이 270미터의 강철로 만들어진 최신형 여객선이 훨씬 안전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배에서 가장 부호였던 존 제이컵 애스터도 아내에게 “여기가 저 조그만 보트보다 안전해.”라고까지 말했다. 스미스 선장은 탈출 명령을 내리되, 혼란 방지를 위해 대놓고 승객들에게 침몰이 임박하다고 알리지도 않았다. 이 배에는 구명보트 14척, 비상용 소형 돛배 2척, 공기 구명정 4척으로 총 20척이 탑재되어 있었고, 공식 수용인원은 1,178명으로 승선 인원의 약 3분의 2에 해당되었다. 나중에야 밝혀진 일이지만, 최초 배 설계 시에는 구명보트가 64척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새 40척으로 줄어들었고, 그 다음엔 다시 23척으로 점점 더 줄다가 선박 제작팀과 소유주 사이의 절충 끝에 결국 20척으로 팍 줄어들어 버렸다.
선박 소유주는 구명보트가 차지하는 공간을 산책로로 사용하길 바랐던 것이다. 점차 배가 서서히 기울어짐에 따라 대다수의 승객들 은 상황이 훨씬 심각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너도 나도 구명보트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진, 영화에서
혼란 속에서 구명보트에 옮겨 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불과 711명의 승객에 불과했다. 12시 45분쯤 우현에서 정원 65명의 구명보트 7호가 겨우 28명을 태우고 처음으로 내려졌다. 곧이어 55분에 좌현에서 구명보트 6호가 7호와 마찬가지로 28명을 태우고 내려졌다. 이와 같이 정원수를 채우지 않고 구명보트를 내린 것은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가 스미스 선장이 지시한 “여자와 어린이 먼저”란 말을 “여자와 어린이만”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정원이 덜 찼음에도 성인 남자라는 이유로 탑승이 거부된 것이다. 구명보트는 좌현과 우현 양쪽에서 하나둘씩 내려지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정원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내려졌다. 구명보트 5호는 41명이 탔고 3호는 32명이, 8호는 39명이 탔고 1호는 겨우 12명(정원 40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모든 구명보트에는 최소한 500명이 더 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중에야 확인되었다. 1시 30분쯤에는 배의 앞머리가 잠기기 시작하고 혼란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구명보트도 이제 어느 정도 정원을 채우면서 태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배는 심하게 기울어져 차디찬 바다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오전 2시 15분, 빙산과 충돌한 지 대략 2시간 반 후 드디어 선미(고물)를 공중에 높이 들어 올리면서 배가 순간적으로 수직으로 섰다. 그러자 엔진과 승강기, 비품류와 식료품, 유리 식기와 석탄 등 고정되어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이 튀어 나와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굴러 떨어졌다.
사진, 영화에서
그리고는 잠시 후 음산한 정적만이 남았다. 이렇게 호화 여객선은 1,513명을 태운 채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오전 2시 20분, 배가 완전 침몰하자 배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 버려졌다. 당시 바닷물의 온도는 영하 2도였다. 바닷물에 빠졌다가 나온 2등 항해사 라이톨러의 회상에 따르면 “천 자루의 칼로 몸을 찌르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침몰로부터 20분이 지나면서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대부분이 30분 안에 사망했으며 4명만이 그곳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90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여객선 카르파티아호가 구조신호를 받고 황급히 달려왔지만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4시였다. 타이타닉호가 완전 침몰된 지 1시간 40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카르파티아호는 타이타닉호의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4월 14일 자정 무렵, 로스트론 선장은 자고 있던 중 통신사로부터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고 있음을 보고받았다.
그는 즉시 사고 현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갈 것을 지시했다. 바다의 파도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달려오는 카르파티아호의 불빛은 오전 3시 30분에 볼 수 있어서 생존자들이 환호했지만, 모든 생존자를 구조하는 데는 몇 시간이 더 걸렸다. 오전 4시쯤 구명보트 4호를 최초로 발견하여 구조했고 약 4시간 30분 동안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인양했다.
사진, 영화에서 두 주인공
이 무렵 카르파티아호의 선원들과 승객들은 바다에 20개가 넘는 거대한 빙산들과 타이타닉호의 잔해들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오전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하고 나서 45분 후 다른 배들도 구조를 위해 달려왔지만 추가 생존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뒤늦게 달려온 화물선 캘리포니안호에게 잔해를 더 뒤져보라고 지시하고 오전 8시 50분에 미합중국 해군의 정찰 순양함 체스터호의 호위를 받으며 뉴욕으로 향했다.
카르파티아호의 뉴욕행 항해도 빙산·안개·폭풍·거친 파도 등 악천후의 연속이었지만, 4일 후인 4월 18일 뉴욕항에 도착했다. 항구는 사고 소식을 들으려는 수만 명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로스트론 선장은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1912년 미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활약했다.
비하인드 스토리
스미스 선장은 끝까지 배에 남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배의 설계자인 앤드류스는 승객들의 구명보트를 내리는 것을 돕다가 1등실 흡연실에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흡연실에서 고귀하게 남기로 한 사람은 앤드류스뿐 만이 아니라 다른 1등실 승객들도 있었다. 어떤 승객들은 카드 게임을 계속했으며 당대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스티드는 차분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기관장인 조지프 벨을 포함한 많은 기관사들과 화부들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까지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배의 전기를 작동시키는 작업을 하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항해사들과는 달리 기관사들은 전원 순직했다. 이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고군분투했는데 이는 전속 항해 중이던 타이타닉호의 기관이 바짝 달아올라 있어서 차가운 바닷물이 닿으면 폭발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한 8명의 악단은 배가 침몰하기 불과 10분 전까지 찬송가를 연주하고 서로에게 행운을 빈 후 헤어졌다. 2등실 승객이었던 가톨릭 사제 토머스 바일스 신부는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고 사람들의 구명보트 승선을 도왔고, 구명보트를 타지 못하고 죽을 운명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갑판 위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선종했다.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저민 구겐하임은 부인과 하녀를 보트에 태우고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의복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라고 말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마시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딸 페기 구겐하임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예술 작품들로 나중에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웠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스트라우스 노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남편인 이시도어 스트라우스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아내인 아이다 스트라우스도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 다음 하녀 엘렌 버드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자기 대신 구명보트에 태운 뒤 남편과 함께 운명을 맞이했다. 이시도어 스트라우스 부부가 승선을 거부한 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게 이런 거라는 걸 보여주는 보기 드문 사례로 칭송을 받았다.
옆에 있던 지인이 노부부가 승선하는 것에 대해서 누구라도 시비를 걸지 않을 거라면서 승선을 권유했지만, 이시도어는 “나는 다른 이가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네.”라고 말하며 승선을 거부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이 부부가 함께 껴안고 누워 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현재 뉴욕 브롱크스에 스트라우스 부부를 기리는 기념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바닷물로도 침몰시킬 수 없었던 사랑.”
남편이 금광을 발견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1등실 승객 여장부 몰리 브라운은 구명보트에서 가장 앞장서서 노를 저었으며 생존자를 구조하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가 자꾸 뭐라고 지껄이자 계속 그렇게 구시렁대면 바닷물 속에 처넣어 버리겠다고 강압적으로 말했다. 명배우 케시 베이츠가 영화에서 몰리 브라운으로 나오는데 구명보트에 타기 전 배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길을 잃어 헤매는 3등실 승객들을 보트로 안내했다.
5등 항해사 헤럴드 로우는 침몰 직후 물 위에 떠 있는 승객들을 구조하러 간 항해사였다. 서열은 생존 항해사들 중 막내였으나, 괄괄한 성격답게 자신이 지휘하는 보트 3척을 모아 2척에 승객들을 전부 옮기고, 선원 3명과 구조작업을 지원한 남성 승객 1명과 함께 침몰 현장으로 나머지 보트를 몰고 갔다. 당시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사람이었던 존 제이콥 애스터는 임신 5개월 된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워 보내며 갑판 위에 앉아, 한 손에는 강아지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시가를 피우면서 멀리 가는 보트를 향해 “사랑해요. 여보!”라고 외쳤다.
승객들을 대피시키던 선원 한 명이 애스터에게 보트에 타라고 하자, 애스터 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런 다음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며칠 후, 배의 파편들에 의해 찢겨진 애스터의 시신을 생존자 수색 중이던 승무원이 발견했다.
그는 타이타닉호 10척도 만들 수 있는 재산을 가진 부호였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사양했다. 목숨으로 양심을 지킨 위대한 사나이의 선택이었다. 희생자 중에는 억만장자 애스터를 비롯하여 저명한 언론인·사업가·군인·엔지니어 등 사회적 저명인사가 많았지만, 이들 모두는 곁에 있던 가난한 부녀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일본 철도원 차장인 호소노 마사부미는 여성과 어린이들로 채워진 10번 구명보트에 여장을 하고 살그머니 올라탔다. 구조 후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행운의 일본인’으로 알려졌다. 얼마 후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에 그의 이야기가 실리면서 그는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잡지에는 영국의 윤리학 교수 로렌스 비슬리가 “사람들을 밀쳐내고 보트에 탄 비열한 일본인이 있었다.”라는 증언이 실려 있었다. ‘창피한 일본인’이라는 비난과 함께 그는 직장을 잃었고 언론에 의해 오랫동안 겁쟁이로 비난받았다. 그는 후회와 수치 속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찰스 조긴은 타이타닉호의 요리사였다. 배가 빙산에 충돌했을 때 취침 중이던 조긴은 급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구명정을 내리는 작업에 임했고 공포에 빠진 승객들을 진정시켰다. 또한 수십 개의 의자를 바다로 집어던져 사람들이 잡고 떠 있을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런 헌신적인 행동 덕에 구명정에 탑승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을 구한다면서 그 기회를 사양했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마지막으로 술이나 실컷 마시고 죽자.”라고 굳게 마음을 먹고는 술을 꺼내 들이키기 시작했다. 마지막 구명정이 떠나고 결국 타이타닉호는 침몰했다. 조긴은 거의 두 시간 동안 차가운 바닷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술 덕분에 거의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물 위에 떠 있는 생존한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온 구명보트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는 끝까지 “술이 나를 구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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