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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사라진 세계의 아름다운 책들과 세계의 섬 / 김학중
사라진 세계의 아름다운 책들과 세계의 섬
김학중
1
이곳은 사라진 책들의 마을
세계에서 잊혀지고 버려진 책들이
압축기에 들어가 사라지기 전에 남겨진
그 책의 마지막 판본들이 흘러와 이룬 마을
사라진 세계의 아름다운 책들과 망각된 자들의 섬
세계의 섬
이곳 사람들은 그 책들 모아 담장을 만들고
책들로 세운 벽에 지붕을 올려 집을 만들었다네
집들과 벽들이 모두 이웃한 책장인 세계
그 섬에서는 누구도 책으로 세울 수 있는 높이를 넘어선 집을 짓지 않았네
2
이 마을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사라진 책의 존재를 잊어가던 무렵
함께 망각된 존재들
그들은 그 책을 이루고 있는 페이지와
그 페이지의 언어들에 자신을 씻은 자들은
그들은 그 책들이 자기를 빛은 자기만의 존재의 집임을 알았다고
그렇게 전하지
여러 다른 세계에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든 마을
너무도 천천히 형성되는 바람에
기억의 폐허에 세워진 마을
이곳에선 다른 세계에서 빠져나간 아름다운 마음들이
서로의 이름을 끝까지 기억하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책들의 목록을 노래로 만들어
이어 불러오던 곳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지은 언어로 노래하고
그 노래로 매일의 몸을 씻었지
사라진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물로 몸을 씻지 않았다네
그들을 이룬 마을의 책들이 물로
언어를 씻지 않듯이
서로 다른 언어들로 씻긴
서로가 유일한 언어의 부족인
마을의 후손들
그 후손과 후손들의 마을
그들은 인간이 말들로 서로 다툼을 벌이기 이전으로 돌아가
서로를 포옹하는 부족이 되었지
책의 부족이 이룬 유일한 회복의 세계
책들이 서로 기대고 포개어져
서로의 무게를 받아주듯이
서로를 지탱해주는 거대한 사물의 책장
사라지고 사라지다
연기된
사라진 세계의 섬
세계의 바깥이 여전히 도착 중인 바깥의 섬
4
섬을 지나는 세계의 바람만이
그 섬의 노래를 바깥으로 흘려보냈네
바람 속에 남은 사라진 세계의 언어에
지금 여기의 세상이 씻기는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네
—계간 《상상인》 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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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중 / 1977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창세』 『바다의 소리로 여기까지』, 청소년 시집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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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세계의 아름다운 책들과 세계의 섬 / 김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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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6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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