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 하야 잠못드러 하노라
(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밤은 깊어 삼경인 때에
나뭇가지에 깃들여 있는 봄의 정서를 소쩍새야 알리가 있으랴마는
다정한 것이 병처럼 되어서 잠을 못 들고 있노라.)
이 유명한 시조는 고려 충신 문열공 이조년(梅雲堂 李兆年,1269~1343)의
다정가(多情歌)인데, 오늘 그 주인공의 유적지를 찾아 산청으로 떠난다.
안곡서원(安谷書院) 입구 표지석
안곡서원(安谷書院)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에 있는 서원으로
이장경, 이조년, 이포, 이인립, 이제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하면서
강학(講學)도 하는 사당 겸 서당의 기능을 갖는 건물이다.
1913년에 강당이 지어지고 3년 후인 1916년에 영당이 지어졌다.
안곡서원 정문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에 전퇴를 둔 전퇴집이고
영당은 상량문에 숭정기원후오 병진 사월일(崇禎紀元後五 丙辰四月日)로
즉 숭정기원후 5번째 병진(丙辰)년으로 1916년 봄에 지어진 건물이다.
서원 정문인 경모문(景慕門)
이조년은 성주 용산리에서 이장경(李長庚)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이들 다섯 형제의 이름은 큰형부터 아래로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 조년(兆年)이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고 형제간의 우애는 매우 깊었다.
안곡서원(安谷書院) 강당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공민왕 때 형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황금을 강물에 던진 "의좋은 형제 이야기(兄弟投金)"가 실려 있는데, 성주 이씨의
가승(家乘)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이억년과 이조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강당 대청
이 일화는 개성 유수를 지냈던 이억년이 벼슬을 버리고 함양으로 낙향할 때,
동생인 이조년이 한강 나루 건너까지 배웅해 주다가 생긴 일이라고 한다.
즉 두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한 덩이를 주었다. 나루터에 도착해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강당 왼쪽
형이 놀라서 까닭을 묻자 아우는 “제가 평소에 형님을 매우 사랑하였는데,
금을 나누어 가진 다음에는 갑자기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이 물건이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기 때문이므로 강물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말이 참으로 옳구나.”라며 자신의 금덩이도 강물에 던져 버렸다.
강당 오른쪽
이조년은 안향(安珦)의 제자로 벼슬이 예문관대제학 이르렀던 그는
충혜왕(忠惠王,고려 28대왕)의 황음(음탕한 짓)을 여러번 충간하였으나
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341년 진현관 대제학의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성주로 돌아온 강직한 선비였다.
강당에 걸린 편액들
시문에 뛰어난 그는 이때 "다정가"로 시작되는 시조 1수를 남겼는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의 심정을 읊은 이 시조는 고려 시대 시조 중에서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고시조 가운데 자주 애송되는 작품이다.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제 / 이화월백삼경천(梨花月白三更天)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아랴마는 / 제혈성성원두견(啼血聲聲怨杜鵑)
다정(多情)도 병인양 하여 / 진각다정원시병(儘覺多情原始病)
잠 못 들어 하노라. / 불관인사불성면(不關人事不成眠)
사당 출입문인 유정문(由正門)
이조년(李兆年,1269~1343)은 시문에 뛰어난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성주,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이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과,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경덕사(景德祠)와 안곡영당(安谷影堂) 건물
경덕사(景德祠)
안곡영당(安谷影堂)
영당 내부(영정 봉안)
경덕사 내부(위패 봉안)
단청이 화려한 사당 건물
사당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온다
첫댓글 먼길 수고 덕분에
안곡서원과 봉안 인물에 얽힌 이야기 잘 읽었읍니다
잘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지금부터 110여 년 전 경남 산청 안곡서원원에서 다섯분 문인의
영정을 봉안하고 모셨다고 하니 가히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도 뜻이 있는 많은 분들은 지금도 제례를 지낼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 말기 이조년을 비롯한 다섯분 형제 모두가 급제한
이 사실 이외에는 없다고 하니 정말 뛰어난 분들입니다.
이조년을 고령군에서도 뜻을 기리고 있다고 하는데 성주에서는 너무 등한시 하는것 같아
씁쓸합니다.
안천님이 먼곳까지 가셔서 생생한 흔적을 소개하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본인의 카페에도 모셔놓겠습니다.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