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주역,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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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주역,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
중세 유럽의 가장 유명한 귀족 가문 중 하나는 메디치 가문이었다.
1434년부터 1737년까지 피렌체와 토스카나를 통치한 후,
메디치 왕조는 상업과 은행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 몇몇 가족 구성원들은 일련의 후원과 자금을 통해 예술, 교육,
그리고 건축에 광범위하게 기여했다.
실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다른 르네상스 거장들은 모두
그들의 아낌없는 지원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메디치 가문은 때때로 스캔들과 폭정에 휘말려
유럽의 귀족 가문 중에서 가장 두려운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18세기 중반에 왕조가 무너지기 전까지
3세기 이상의 권력, 위신, 그리고 영향력을 누렸다.
사진을 통해 메디치 가문이 누구이며,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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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피렌체는 매력적인 문화, 르네상스 예술과 건축,
그리고 중세 기념물로 유명하다.
하지만 오늘날 볼 수 있는 화려함의 상당 부분이 13세기에
번성하기 시작한 가문의 후원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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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피렌체
메디치 가문은 토스카나의 무겔로 지역 출신이다.
비교적 보잘것없는 기원에서, 이 왕조는
아마도 중세의 가장 유명한 가문으로 진화했다.
가문이 성장함에 따라, 이 도시도 번영했고, 결국 그들은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고 메디치 은행의 소유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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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1360–1429)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1397년에 가족 은행을 설립하면서
피렌체에서 가문의 권력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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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 데 메디치 (1389-1464)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는 1434년에 권력을 잡았고 메디치 가문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많은 기간 동안 피렌체의 효과적인 통치자로 세웠다.
역사적으로 대 코시모로 알려진 은행가로서의 그의 부는
상당한 권력과 명성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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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후원자
중세 재정에서 변혁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메디치 가문은 일련의 후원과 자금을 통해
예술, 교육, 그리고 건축에 광범위하게 기여했다.
예를 들어, 코시모는 도나텔로의 '다비드'가 포함된 예술 작품을 의뢰하고
피렌체의 웅장한 메디치 궁전(사진)을 포함한 몇몇 주목할 만한 건물의
건설에 자금을 조달하는 데 많은 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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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데 메디치 (1449–1492)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와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명의 자녀 중 한 명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코시모 데 메디치였다.
로렌초 대제라고도 알려진 그는 후손들 중
가장 유망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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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의 경배'
그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로렌초는 예술과 인문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그는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지원했다.
보티첼리가 1475년에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는 메디치 가문의 여러 세대와
그들의 가신들의 묘사를 포함하고 있다.
밀라노로 외교 사절단을 떠나기 전 16세의 로렌초가 말과 함께 왼쪽에 있으며,
예술가 보티첼리 자신은 맨 오른쪽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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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노 데 메디치 (1453–1478)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그의 형 로렌초와 함께 피렌체를 공동 통치했다.
그러나 파치가의 음모로 알려진 음모로 그의 삶은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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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치가의 음모
1478년 파치가의 음모는 동생 줄리아노와 함께
로렌초를 살해함으로써
메디치 가문을 폐위시키려는 시도였다.
피렌체의 귀족 가문인 파치 가문의 구성원들은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 중에
형제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한 무리의 공모자들이 공격을 감행했다.
줄리아노는 사망했고, 로렌초는 부상을 입었지만 탈출했다.
대부분의 공모자들은 곧 붙잡혀 즉결 처형되었다.
파치 가문은 그 후 피렌체에서 추방되었고,
그들의 땅과 재산은 몰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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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디 로렌조 드 메디치 (1472–1503)
로렌초가 불과 43세의 나이로 요절한 후, 그의 장남 피에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사실상
피렌체 국가의 통치자가 되었다.
피에로는 교황 레오 10세가 되는 그의 동생 조반니와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그의 사촌 줄리아오와 함께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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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피에로
약하고, 오만하며, 규율이 없었던 피에로는
프랑스와 불리한 평화 조약을 받아들이기 전에
겨우 2년 동안 권력을 잡았는데, 이 조약은 대중을 격분시켰다.
그는 샤를 8세가 피렌체에 입성하면서 1494년에 강제로 쫓겨났다.
메디치 가문은 권력 기반을 잃었고, 피에로는 망명 중 사망했고,
그 후 불행한 피에로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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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에서 돌아오다.
나중에 교황이 된 피에로의 남동생은 메디치 가문이
1512년에 유배지에서 피렌체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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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영향력
사실, 메디치 가문의 부와 영향력은 메디치 가문이 네 명의 가톨릭 교회의 교황
– 교황 레오 10세 (1513–1521), 교황 클레멘스 7세 (1523–1534),
교황 비오 4세 (1559–1565), 그리고 교황 레오 11세 (1605)를 배출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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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성당
게다가, 메디치 교황들은 예술을 후원하는 전통을 계속이어갔다.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에게 작품을 의뢰했고
클레멘스 7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벽을 그려달라고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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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2세 데 메디치 (1492–1519)
불행한 피에로는 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인 로렌초 2세는 피렌체에서 권력을 되찾았다.
그 다음 몇 년은 유럽에서 메디치의 영향력의 정점을 기록했다.
피렌체 외에도, 로렌초는 또한 우르비노 공작이 되었다.
나중에 그의 친딸인 캐서린은 앙리 2세와 결혼한 후
프랑스의 여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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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여왕
사실, 메디치 가문의 두 여인이 프랑스의 여왕이 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1547–1559)와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두 번째 부인으로
프랑스의 여왕이었던 마리아 데 메디치(1600–161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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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 데 메디치 (1510–1537)
로렌초 2세의 사생아인 알레산드로가 1523년에
피렌체의 지도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짧고 잔인했으며,
그의 사촌인 이폴리토에 대한 증오가 더해졌다.
하지만 1537년 알레산드로를 암살한 것은
먼 사촌 로렌지노 데 메디치였다.
그는 그의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1548년에 살해되었다.
그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가 왕권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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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 1세 데 메디치 (1519–1574)
1537년에 피렌체의 공작이 된 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1569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보유한 칭호인 토스카나 대공으로 승격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코시모 1세는 그 지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세웠고,
그의 후손들은 1700년대까지 대공으로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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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피렌체의 행정 사무실을 우피치라고 알려진 건물로 옮겼다.
동시에, 그는 작은 박물관을 설립했다.
오늘날, 이것은 피렌체에서 유명한 우피치 미술관이며,
메디치 가문이 대 코시모 시대부터 수집한 많은
위대한 르네상스 시대의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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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1541–1587)
브론지노가 그린 젊은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의 이 그림은
우피치 미술관에 걸려 있다.
프란체스코는 그의 아버지 코시모 1세의 뒤를 이었지만,
덜 효과적인 통치자임을 증명했다.
그의 딸 마리아는 나중에 프랑스의 여왕이 되었다. 그 후,
그녀의 아들은 1610년부터 1643년까지 루이 13세로 프랑스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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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1세 데 메디치 (1549–1609)
페르난도 1세 데 메디치는 1587년에 대공이 되었고
토스카나를 안정과 번영으로 회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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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메디치
로마의 화려한 빌라 메디치는
1544년 페르난도 1세 데 메디치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또한 피렌체에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술 작품들의 컬렉션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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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 2세 데 메디치 (1590–1621)
페르난도 1세의 장남인 코시모 2세 데 메디치는 주로 그의 어린 시절
스승인 위대한 천문학자, 물리학자, 공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후원자로 기억된다.
갈릴레오의 업적은 목성의 위성 네 개를 발견한 것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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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 3세 데 메디치 (1642–1723)
메디치 가문 출신의 토스카나의 여섯 번째 대공인 코시모 3세는
토스카나 역사상 가장 긴 53년의 통치를 즐겼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효과가 없었고, 한때 강력했던 메디치 왕조는
말기의 쇠퇴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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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 (1671–1737)
마지막 토스카나 대공인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가 남자 후계자 없이
1737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가문은 그와 함께 죽었다.
1735년 코시모 리카디 후작이 잔 가스토네를 방문하고
그의 수행원들을 묘사한 이 그림은 메디치 가문이 살아있을 때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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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1세, 신성 로마제국 황제
잔 가스토네가 죽은 후, 토스카나의 통치권은
합스부르크의 상속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에게 넘어갔다.
메디치 가문은 18세기 중반에 왕조가 무너지기 전까지
3세기 이상의 권력, 위신, 그리고 영향력을 누렸다.
그러나 그 후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오랜 유럽 통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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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예배당
메디치 예배당은 메디치 가문의 몇몇 구성원들의 마지막 안식처
역할을 하며 피렌체의 산 로렌초 대성당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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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성구실
주목할 만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하고
일련의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들을 특징으로 하는
수수한 사그레스티아 누오바("새로운 성구실")이다.
그 무덤들은 로렌초 디 피에로와
줄리아노 디 로렌초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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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예배당
더 정교한 팔각형 카펠라 데이 프린키피("왕자의 예배당")는
멀리서 보았을 때 산 로렌초의 독특한 특징인 높은 돔으로 덮여 있다.
흥미롭게도, 6개의 거대한 석관은 비어 있고,
메디치 가족의 유해는 지하의 지하실에 매장되어 있다.
출처: (Britannica) (Medici Bank) (Luxaraz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