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31回. “체어맨의 外交術”
1. 외교는 싸움이다.
2017년 12월 13-17일 방중(訪中)한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 열 끼니 중에서 여덟 끼니를 중국 측 고관들과 마주 앉지 못한 채 이른바 “혼밥”을 먹어야만 했다. 한국 매체에선 거센 홀대논란이 일었다. 문대통령은 이른 아침 서민 식당을 깜짝 방문해 밀가루 튀김 유조(油條, youtiao)를 먹는 외교쇼를 연출했건만 홀대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기대했던 중공 서열 2위 이극강(李克强, Li Keqiang, 1955- )과의 오찬 식사도 무산됐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혼밥은 그러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방중 둘째 날엔 청와대 순방기자단 소속의 기자 두 명이 중국의 경호원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취재를 위해 분명히 출입비표를 제시했음에도 중국 경비원들은 막무가내였다. 행사장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공식 행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 홀 밖에선 기자들이 집단폭행을 당한 사건이었다. 일부 열혈지지자들이야 “맞을 짓을 했다”며 되레 기자들을 욕했지만······. 세계인의 상식에 비쳐볼 때, 기자폭행이란 용납될 수 없는 반문명적 폭거일 뿐이다. 중국 측에선 사과도, 해명도, 책임자 처벌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이 우발적이었을까? 의도된 만행이었을까?
중국의 오랜 청객(請客, qingke) 문화에선 요리, 술, 차 하나하나에도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중국 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외교가 그러하다. 대통령이 되기 전 트럼프는 만약 중국이 외환조작 등 불공정 무역을 이어가면 미국을 방문한 중국방문단에 국빈자격의 정식 만찬을 베푸는 대신 맥도날드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세계 최강대국의 외교 프로토콜(protocol)도 건달들의 몸싸움만큼 치사하고 사특할 수 있음이다. 면박주기, 모욕주기, 기자패기 등도 잘 계산된 외교작전일 수 있다.
2. 흐루쇼프와 모택동
1954년 스탈린의 후계자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1894-1971)가 처음 북경을 방문했을 때, 중국 측에선 최고의 대접을 한다며 광동요리 용호투(龍虎鬪)를 대접했다. 뱀과 고양이가 들어가는 요리였다. 흐루쇼프는 아예 입도 대지도 않았고, 동석한 러시아 영부인은 눈물까지 흘렸다 한다. 중국 측이 흐루쇼프에 용호투를 대접한 사건은 문화차이에 기인한 단순한 외교적 실수로 보인다. 당시 중국은 소련에서 경제 및 기술 원조를 받고 있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중국 측은 내내 흐루쇼프를 어르고 달래서 더 많은 이권을 받아내려 안달이었다.
1958년 8월 흐루쇼프가 두 번째 북경을 방문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모택동은 작심하고 흐루쇼프에 의도된 외교적 결례를 행했다. 흐루쇼프가 비행기에서 내릴 때 북경의 공항엔 레드카펫도, 의장대도, 따뜻한 포옹 의식도 준비되지 않았다. 흐루쇼프를 위해 마련된 낡은 호텔 룸엔 세상에도 에어컨이 없었다. 무더운 8월 혹서 속에서 100킬로가 족히 넘는 고도비만의 흐루쇼프는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다. 다음 날 회담이 시작됐을 때, 모는 담배연기에 질색하는 흐루쇼프 앞에서 작삼한 듯 줄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흐루쇼프가 공들여 준비해 온 중소 방위조약 초안을 설명할 때, 모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흐루쇼프의 면상에 손가락질을 해대기도 했다.
이튿날 모는 중남해 관저의 개인 수영장으로 흐루쇼프를 불렀다. 키 작고 뚱뚱한 흐루쇼프 앞에 중국 측 수행원이 펑퍼짐한 수영복을 내밀었다. 모는 흐루쇼프가 수영을 전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강물에서 헤엄치며 몸을 닦아왔던 모는 물개처럼 유유히 수영장을 아래위로 오갔다. 흐루쇼프는 커다란 복부를 드러낸 채 수영장 얕은 곳에 발만 담그고 서 있었다. 물속에서 회담을 이어가기 위해 모는 흐루쇼프에 커다란 플로터(floater)를 주고는 깊은 곳으로 오라 지시했다. 흐루쇼프는 플로터를 잡고서 어색하게 발질을 하며 물을 가로지르는 모를 따라다녀야만 했다.
물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빠른 호남성 사투리로 툭툭 내뱉는 모의 발언을 통역사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러시아어로 옮겨야만 했다. 물속에서 발을 구르며 겨우 떠있는 흐루쇼프는 한 마디도 제대로 응수할 수 없었다. 흐루쇼프에겐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제 아무리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공산당 총서기라 해도 도리 없었다. 어떤 잔치에서건 게스트는 호스트에 따를 수밖에 없다. 호스트가 모욕을 주면 게스트는 꼼짝없이 모욕을 당해야만 한다. 대체 왜 중국공산당 총서기 모택동은 소련 공산당 총서기 흐루쇼프에 그토록 황당무계한 외교적 결례를 행해야만 했나?
3. 스탈린과 모택동
전기 작가들은 흔히 모택동이 스탈린에 당했던 외교적 모욕을 흐루쇼프에게 앙갚음했다고 설명한다. 1949년 12월 모는 난생처음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찾았다. 12월 20일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축하연에 참석하고, 또 중소동맹을 체결하기 위함이었다. 불과 석 달 전 거대한 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선포한 중국공산당 지도자로서 그는 당연하게도 최소한의 특별대우를 기대했으나······.
스탈린 인격숭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철의 장막”에 휩싸인 공산권 국가들에선 일제히 스탈린의 탄생일을 경축하는 송사(頌辭)를 언론에 게재하고, 스탈린의 위인전을 인쇄해 배포하고, 전국을 그의 초상화로 도배를 했다. 날마다 공산권에선 수백 만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초과 근무를 하고, 경축서신을 보내고, 축하전보를 발송한다는 선전이 이어졌다. 서구의 친소인사들도 스탈린에 아낌없는 찬사를 올려 바쳤다. 영국공산당원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가 대표적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노동당 출신 영국수상 클레먼트 애트리(Clement Richard Attlee, 1883-1967, 재위 1945-1951)까지도 경축서신을 발송했다. 공산권에선 오로지 유고슬로바키아의 언론만이 침묵했다.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길 거부한 유고슬로바키아의 티토가 1948년 이후 스탈린에 완강히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국에서도 대규모의 스탈린 탄신일 기념식이 열렸다.
모택동은 공산권의 “위대한 영도자”의 생신에 초대받아 온 수많은 하객 중 한 명일뿐이었다. 스탈린은 일부러 모택동을 공산권의 다른 국가 대표들과 똑같이 대우했다. 모스크바 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모는 싸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스탈린은 사흘 간 모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12월 18일 오후 10시 첫 만남에선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두 시간 동안 두 사람은 국제정세를 논하고 양국 간의 군사동맹을 논의했는데······.
모택동과 스탈린의 제1차 회담 기록을 보면, 스탈린의 고압적인 태도가 행간에 묻어난다. 모는 중소평화 조약의 체결과 함께 대규모 경제원조(300만 달러)를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기민하게 기선을 제압한다. 그는 모에게 중소관계가 기본적으로 얄타회담(1945년 2월)에 따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소련은 장개석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만주철도의 이권을 갖고 요동의 여순(旅順)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는 상태였다. 모는 짐짓 물러서며 여순의 소련군을 계속 주둔시키라 요청했다. 모는 대만의 "해방"을 위해 군사지원을 해달라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 빌미를 주지 말라 경고했다. 중국에 공산국가를 건립한 모로선 굴욕적인 회담이었다.
만나기 전부터 스탈린과 모택동 사이에는 이미 높은 불신의 벽이 높았다. 1920-30년대부터 스탈린은 모의 혁명노선을 신뢰하지 않았다. 중국의 혁명과정에서 제창된 모택동사상 역시도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리에서 벗어난 변종이라 생각했다. 도시 노동자들 대신 산간의 농민들을 규합해 소비에트를 실험하는 모택동은 고작 게릴라 투사 정도로 생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에는 세계 각국 유학생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공부하는 코민테른 산하 공산주의 대학들이 있었다. 1928년의 통계를 보면, 모스크바에서 혁명이론을 공부하는 1천 명의 해외유학생 중에서 4백명이 중국유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은 코민테른 산하의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에서 수학했다. 소위 "28명의 볼세비키들"은 모두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의 과정을 이수한 유학파였다. 토착공산주의자인 모는 1930-40년대 내내 왕명(王明, Wang Ming, 1904-1974)을 비롯한 모스크바 유학파들과의 힘겨운 당내 권력투쟁을 일삼아야만 했다. 모스크바 유학파들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해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르려 했지만, 모택동은 과감하게 볼세비키즘의 정도에서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를 스탈린이 좋아할 리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모는 스탈린이 자신을 노골적으로 홀시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5억 4천만에 달했다. 모는 인류사 최대 규모의 사회주의 국가를 이제 막 건설한 공산권의 영웅이었다. 그런 모가 스탈린을 “알현(謁見)”하기 위해 모스크바 외곽의 다차(dacha, 러시아식 오두막)에서 두 달의 치욕을 꼽씹어야 했다. 공산주의자 이전에 한 명의 중국인으로서 모는 격분했다. 스탈린의 홀시와 경멸은 모에겐 분명 안 잊히는 쓰라린 기억임에 틀림없었지만·····.
그 정도 이유만으로 모가 흐루쇼프를 홀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천하의 모택동이 필요하다면 그 정도 구원(舊怨) 쯤이야 왜 못 숨기겠는가? 그가 후환을 몰랐을 리 없다. 모욕을 당하고 귀국한 흐루쇼프는 당장 신경질적인 외교보복으로 응수했다. 흐루쇼프는 우선 중국에 체류하던 소련 고문단의 즉각적인 철수를 명령했다. 공동으로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마감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고문단의 요청도 묵살했다. 흐루쇼프에 대한 모의 외교적 결례는 양국사이의 우호관계를 갈등관계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바로 모가 흐루쇼프를 모욕한 사건은 결국 모가 쏘아올린 중소분쟁의 신호탄이었다. 1970년대 미중 사이의 핑퐁외교로까지 이어지는 1950년대 중소분쟁의 서막이 비로소 올랐다.
4. 모택동의 외교전략
흐루쇼프가 북경을 방문해 모택동의 수영장에서 벌거벗긴 채로 노골적인 외교적 홀대를 당하기 1년 전이었다.
1957년 8월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발사에 성공했다. 같은 해 10월과 11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스푸트니크(sputnik, 인공위성)가 보기 좋게 대기권 진입했다. 우주산업에서 소련이 미국을 앞서가는 극적인 장면이 전파를 타고 지구 전역에 중계되었다. 곧바로 이어진 볼셰비키 혁명 40주년 기념행사를 빛내기 위한 사회주의 종주국의 “우주쇼”라 할만 했다. 11월 초 공산권의 64개 국가의 공산당 및 노동당 지도자들이 모스크바로 모여들었다. 11월 2일 모택동 역시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볼셰비키 혁명 40주년을 기리면서 공산권 지도자들은 서구자본주의 세력에 저항하는 반제동맹을 결의한다. 소련공산당 서기 흐루쇼프로선 공산권 내의 리더십을 확인하는 중요한 행사였는데······. ([문혁춘추] “30회,” 마지막 문단)
모스크바에 도착한 모택동은 놀랍게도 흐루쇼프를 치켜세우고 다녔다. 11월 6일 연설에서 그는 “스탈린 인격숭배 비판은 소련공산당의 현명한 조치”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모택동의 주치의 이지수(李志綏, Li Zhisui, 1919-1995)의 회고에 따르면, 모택동은 스탈린을 비판한 흐루쇼프를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다. 흉중에 비수를 감추고 모택동은 공산권의 지도자들 앞에서는 흐루쇼프의 체면을 충분히 세워주었다. 흐루쇼프로선 외교적 선방(善防)이 아닐 수 없었다. 들뜬 흐루쇼프는 모택동과 함께 온 국방장관 팽덕회에게 “모주석이 우리의 스탈린 비판을 지지하고 있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과연 왜 모택동은 흐루쇼프에 외교적 호의를 베풀었을까?
불과 3주 전 1957년 10월 15일 중소 양국 사이에서 “국방신기술에 관한 밀약”이 체결되었다. 표면상으로는 관련분야의 과학적 노하우를 전수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로는 중국에 핵무기와 ICBM의 기술을 이전하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소련은 1955년부터 중국에 핵물리학을 전수했다. 1957년 10월 18일 대규모의 최고위 과학 대표단이 3개월 계획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3개월간 소비에트 과학기술의 발전상을 목격한 중국대표단은 소련과 1958년 1월 18일에 합의문을 채택한다. 표면상으로 중국 과학 발전 12년 발전계획이었지만, 실제로는 핵무기 개발의 기술을 전수하는 협약이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을 보면, 소련은 이 당시 중국에 핵기술을 전수하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기술력을 격찬하면서 모택동은 그의 정신상태를 의심케 하는 과격한 발언을 한다. “제국주의 전사들이 제3차 세계대전을 감행한다면, 그 결과는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일 것이다. 상상해 보라. 세계대전이 재발하면 몇 명이나 죽겠는가? 27억 인구 중에서 3분의 1, 혹은 2분의 1이 죽겠지. 최악의 경우 인류의 절반이 죽고, 나머지 절반은 생존하겠지. 그렇게 되면, 제국주의 국가는 모두 파멸되고 전 세계는 사회주의 체제로 될 것이다. 그리고 수년 안에 다시 세계의 인구는 27억이 되겠지.”
1969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대회에서 소련의 지도자 브르지네프(Leonid Brezhnev, 1906-1982)는 당시 상황을 회고한다. “많은 동지들이 모택동이 1957년 이 홀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모택동은 놀라운 허세와 냉소를 머금고서 핵전쟁이 나면 인류의 절반이 죽을 것이라 말했지요.” 소련 사람들은 소련의 기술력이 서구의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모의 발언에 공포감을 느꼈다 한다. 흐루쇼프와 소련의 신기술에 대한 모택동의 발언 물론 외교적 찬사일 뿐이었다. 한 달 앞서 1957년 10월15일에 체결된 국방신기술에 대한 중소 양국의 비밀조약에 대한 모택동의 답례였다.
1955년 이래 소련은 줄곧 중국의 핵물리학을 지원하고 있었다. 1958년 소련은 연구 원자로 건설 약속을 이행했다. 1957년의 비밀조약은 이제 군사방면으로 핵기술의 이전을 확장한 셈이었다. 모택동은 오매불망 핵개발을 꿈꿔왔다. 그는 핵무기의 개발만이 자강(自强)의 진정한 실현이라 굳게 믿었다. 아편전쟁 이후 100년의 국치를 극복하는 필수불가결의 군사적 조치였다. 1957년 가을 모택동은 공격적으로 흐루쇼프에 스푸트니크 기술의 공유를 요구했다. 흐루쇼프 역시 폴란드와 유고의 저항을 눌러야 하는 흐루쇼프로선 모택동의 지지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모의 핵 야심을 잘 알고 있었던 흐루쇼프는 그의 지지를 이끌기 위해 군사지원을 약속했다. 한편으론 중국의 무분별한 핵개발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계산이었다. 1957년 말 모택동과 함께 모스크바에 온 대규모의 중국과학 사절단은 3개월 간 체류하며 소비에트의 신기술을 이전받았다. 급기야 1958년 1월 18일 양국 사이에는 정식 조약이 체결되었다. 표면적으로 이 조약은 소련의 중국에 대한 향후 12년간의 과학지원 계획이었으나 핵기술의 이전이 핵심이었다.
1957년 11월 11월 2일 모택동을 따라 왔던 국방장관 팽덕회와 3인의 중국 장성들은 모택동이 귀국한 후에도 11월 27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며 각료회의를 이어갔다. 팽덕회와 3인의 중국 장성들은 공식 연설문에서 소련의 ICBM과 스푸트니크의 성공적 발사를 칭송했지만, 정작 핵무기에 관해선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을 보면, 이때는 이미 소련은 중국에 핵기술을 전수하기로 결정한 후였다. 흐루쇼프의 그런 결정이 모택동과 중국 군부 사이에 내재하던 갈등을 고조시켰음직하다. 모택동과는 달리 팽덕회는 소련의 핵우산을 쓰고 대신 재래식 무기의 현대화 및 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군사전략상 중국의 군부는 모택동의 핵개발노선에 어깃장을 놓고 있던 셈이었다. 그 점에서 모택동과 팽덕회, 다시 말해 중공중앙과 군부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앞서 소개했던 바와 같이 1958년 대약진운동을 개시한 모택동은 이듬해 여산회의(1959)에서 국방장관 팽덕회에 정치적 사형선고를 내린다. 한 해 앞서 모택동은 흐루쇼프아의 중소분쟁을 본격화했다. 모는 아마도 그때 쯤이면 핵무기 관련 소련의 핵심기술을 다 빼냈다 판단했던 듯하다. 실제로 중국은 1959년 여름부터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한다. 59년 6월에 시작됐어 하여 중국 최초 핵무기의 코드명은 "596"이었다. 중국의 핵무기 개발은 간단없이 지속되었고, 1964년 10월 16일에는 최초로 핵실험에 성공한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이어 다섯 번 째로 중국은 당당히 세계 핵클럽에 가입했다. 3년 후에는 수소폭탄을 보유하게 되었다.
모택동은 모스크바에 가서 흐루쇼프에 격찬의 레토릭을 선사했지만, 소련의 군사기술이 더은 아쉽지 않았을 땐 스탈린에 당했던 모욕을 흐루쇼프에 되갚을만큼 짓궂은 면모도 보였다. 흐루쇼프를 향한 모택동의 일거수일투족엔 군사작전만큼이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물론 스탈린에 대한 뼈에 사무친 복수심이 아니었다면 그의 후계자 흐루쇼프를 수영장으로 끌고 가진 않았을지 모른다. <계속>
P.S. 여담이지만, 지금도 내 주변엔 2017년 12월 방중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 측으로부터 외교적 홀대를 당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친구들이 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국가간 외교 정상화를 위해선 우선 홀대를 홀대로, 모욕을 모욕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 다음 홀대와 모욕을 자행한 국가의 외교적 도발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규탄해야 한다. 덩치 큰 강대국의 지도자일수록 국제적 위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치졸한 방법으로 타국의 지도자를 망신주는 자가 대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아이들의 싸움과 다르지 않다. 욕설을 듣고 매를 맞아도 가만 있으면 영혼은 병들고 육신은 노예가 되고 말지만, 맞서 싸우면 못된 깡패는 도망가고 만다. 바로 장개석의 대군을 피해 산간벽지로 도망하던 모택동의 게릴가 부대가 터득한 싸움의 기술이다. 중국 앞에서 겁먹지 말라. 대한민국은 인구 5천 만 소득 3만 불로 세계에서 8대의 선진대국이다. 그 여덟 나라들에 들어가기엔 현재 중국은 까마득히 뒤쳐져 있을 뿐이다.
송재윤 객원 칼럼리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