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6일(성 요아킴과 안나 기념일) 영원을 향한 목마름 신앙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세속적인 성공과 안녕을 바라고 믿는다면 매우 실망할 수밖에 없다. 고민할 거 없이 주님이신 예수님의 지상 삶이 어떻게 끝났는지 잘 알고 있다. 매일 수시로 바라보고 그분을 향해 청하고 기도하는데, 그렇게 사신 분에게 세속적인 성공과 안녕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이다.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니 믿음이 필요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소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품으로 들어감이고, 하느님과 하나가 됨이다.
간절함은 하느님의 것인가 보다. 한나는 성전에서 간절히 기도해서 얻은 자식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쳤고, 삼손도 그랬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그렇게 얻은 아들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의 일에 봉헌됐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의 어머니 안나 성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그의 남편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는데 아기를 갖게 된 건 하느님이 선물을 주신 게 아니라 당신께는 불가능이 없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마침내 남자의 도움 없이 태어나셨다. 성경이 전하는 이 이야기들은 모두 하느님, 인간이 온전히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분을 가리킨다. 인간의 간절한 바람은 영원하신 하느님을 향해 있는 거다. 하느님 안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목마름과 복닥거림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수님 시대 농부가 그곳이 돌밭이든 가시덤불 속이든 사방에 씨앗을 뿌리듯이,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들이 듣든 안 듣든,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상관없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들을 귀가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 하느님을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끌리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인생에서 하느님의 뜻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게 당신의 일용한 양식이었다(요한 4,34). 당신이 세상에 사는 이유였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는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마침내 그분과 하나가 되고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서다. 그런 거룩한 욕망을 지닌 이에게 세속적 성공과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얼마나 하찮게 보이겠나. 그런 건 그냥 지푸라기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은총을 받아서인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서인지 그의 마음이 처음부터 좋은 땅인 사람도 있는 거 같다. 그 외는 다 길바닥이고 돌밭이고 먹고 사느라고 가시덤불이다. 좋은 땅이 되게 일구는 거다. 세속적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지 깨닫고, 금욕적인 생활로 하느님을 향하지 않는 모든 불순한 바람들을 없애고, 인내로 믿음을 더 굳건하게 만들어 간다. 그래서 신앙이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점점 전부가 되게 한다. 사실 마지막 순간에 남는 건 믿음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도박 같은 순간적인 판단이 아니다. 일생을 두고 키워야 하는 큰 나무 같은 거다. 뿌리를 깊게 내려 폭풍에도 뽑혀 나가지 않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 이웃에게 그냥 막 내어주는 그런 크고 멋진 나무 말이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예레 3,14).”
예수님, 주님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뼛속 깊숙이 박혀 있고, 온 신경계에 새겨져 있는 죄스러움을 빼내고 지울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 대신 십자고상이 제게 말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믿습니다. 제 믿음이 제 유일한 희망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개입으로 카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고, 그 일로 거기 있던 제자들이 아드님을 믿게 됐습니다(요한 2,11). 무엇이든지 아드님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게 가르쳐주시고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