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소마을.,백화사 경내.
백화사 뒤.,내시묘역.
백화사계곡,
'북한산 둘레길 10구간' 내시묘역길.,여기소마을.
은평구에서 지정한 친환경적 생태마을이기도 하다.
북한산자락 내시묘역 인근.,은평구 진관동 여기소마을.
조선시대 은평구는 '한양~의주로' 교통의 길목.
중국 사신이 오고, 조선 사신이 가는 사행길로서
정치· 외교· 군사 및 문화적으로 중요한 길목이었다.
서삼릉 서오릉 능행길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피난로.
인조반정, 이괄의 난 때는 반정군 반란군 집결 접근 통로
의주로 상에 영서역· 금암발참 등의 존재에 따라
인조별서유기비와 금암기적비가 세워지게 되었고,
구파발· 연서로 등 지명이 생기고 서오릉이 들어섰다.
'서오릉 원찰' 수국사 건립, 도성 가까운 교외지역으로
왕실의 화의군파·영산군파·무산군파 묘역이 자리 잡으면서
내시 묘역 일군이 진관동 '여기소 ~이말산' 일대에 들어섰다.
내시부 별장 내.,내시묘역
조선 세종의 제9왕자로 단종 때 충신 화의군 이영 묘역
(和義君李瓔墓域,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4호)., 진관외동.
그 인근 재촌에 성종의 제13왕자인 영산군의 묘소가 있으며,
진관내동에는 성종의 12남 무산군파(무산군 손자 화릉군) 묘역.
진관내동 산27-2호 일대에는 내시묘역이 집단으로 형성
이곳은 가장 크고 오래되고 보존상태 양호했던 내시묘역.
이사문공파(李似文公派) 내시 분묘 45기가 있던 문중 묘지
그외 진관외동 이말산에 영조의 외조부이자
숙빈최씨의 아버지인 최효원의 묘역이 있으며,
진관내동 못자리골에는 영천이씨 묘역이 있는데
선조 때 호조판서 이린과 이선 형제와 후손들 묘역.
.
여기소마을 뒷산에는 여기저기 고분 흔적들이 유난히 많다.
정돈된 묘역보다 오래전부터 후손의 발길이 끊긴 고분 흔적들.
고분마다 봉분 위로 솟은 잡목 숲 아래 제멋대로 나뒹구는 석물들.
은평구는 사행로와 관련하여 사신성황당, 금성당이 있고,
박석고개 성황당 터, 천부지모제단비, 아기바위 등이 있다.
또한 선소리산타령·가사(제41호)· 가곡(제30호)·영산재(제50호)
국가무형문화재, 궁시장· 배접장· 중장 등의 무형문화재도 있었다.
북망산천.
은평구 지역에는 상여꾼들이 부르던 상여소리와
시신을 땅에 묻고 달구지꾼들이 흙과 회를 다질 때,
선창자가 북을 치면서 선창하면 달구질하는 사람들은
달굿대로 묘를 다지며 후렴을 부르는 달구질소리가 전한다.
상여소리(향두가:香頭歌) - 저승으로 가는 노래.
"태어날 때는 혼자 울고, 죽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울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북망산천 머다더니 내 집앞이 북망일세”.
"오실 날이나 일러주오."
"어야디야~. 어야디야~"
은평구 진관동은 몇해 전까지.,진관내동 진관외동
백화사 뒤 내시묘역은 진관외동에 속한.,여기소마을.
조선시대 진관동은 "제2의 왕도" 라는.,왕실 묘역 지대.
519년 조선왕조와 운명을 같이 한.,중인가문 묘역.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더 행세했다.'는.,진관동.
'귀신 神, 길 道' 마을 邑' 신도읍 옛지명이 이를 대변.
진관내동 여기소마을에는 여기소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북한산성 축성 감독 관원을 사랑하던 기생이 남장을 하고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해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있다.
공사가 끝난 후 기생이 찾던 관원이 이 사실을 알고,
그 연못에 찾아가 통곡하였다는 연못.,‘여기소’(汝其沼).
북한산자락 여기소마을 주변은 묘역 흔적들이 즐비.
후손의 왕래가 끊겨 관리가 전혀 안된 묘역들이 많다.
멋대로 나뒹구는 비문과 석물, 봉분 위로 치솟은 고목들.
내시묘역 일대는 온통 멧돼지들이 땅을 파헤친 흔적들.
여기소마을 주민들 외에는 다니지 않는 인적이 드문 곳.
한낮에도 귀신이 나올듯 등골이 섬뜩한.,전설의 고향 같다.
하여, 이곳 주민들은 북한산보다 노고산 산책을 더 선호한다.
노고산을 성역으로 여기는.,여기소마을 주민들.
진관동 주민들이 새해 일출 명소로 찾는.,노고산.
할미봉 정상에서 산신 할머니에게 새해 소원을 기원.
노고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노고산 정상.,비박.
'노고산 정상' 할미봉은.,북한산 전망대.
동쪽으로 북한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한북정맥 가지능선들로 첩첩산중.
영조의 효심이 깃든.,노고산 흥국사.
영조가 생모 묘역인 광탄 소령원에 행차할 때마다
휴식을 취하였는데, 이절의 이름을 흥국사로 바꾸고
약사전 편액을 써서 하사하며 법당을 중창하게 한 사찰.
이후 흥국사는 왕실의 각별한 관심 속에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기도도량이 되었다.
북한산 둘레길(내시묘역길)이 인근에 있고
장흥 상상리 일대는 은퇴 상궁과 내시들의 마을.
노고산 일대에는 은퇴상궁과 내시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이 자주 찾았다는 사찰이 흥국사였다고 전해온다.
천년 고찰 흥국사, 지봉 이수광, 월남 이상재 선생 묘역,
고인돌 유적, 추사 김정희 암각문 등 볼거리 많은 노고산.
노고산.,추사 김정희 암각문
경기도 의정부시를 가운데 두고 양주 일부를 관통해 휘도는
한북정맥은 의정부 서북쪽 한강봉에서 능선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한북정맥......................
한강봉 서쪽 능선은 앵무봉~월롱산~오두산
여맥은 한강과 임진강 합수지점에 가라앉힌다.
이 서쪽 능선을 ‘신산경표 한북정맥’이라 부른다.
한강봉에서 한북정맥 주능선은 방향을 남동으로 튼다.
남동 한북정맥은 챌봉~사패산 지나 도봉산에 이르기에
일명 ‘한북정맥 도봉지맥’이라고 명명(明命)되어 있다.
한북정맥 도봉지맥은 우이령을 지난 상장봉에서 노고산.
즉,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상장봉능선.
효자동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 방향을 트는.,한북정맥.
이후 한북정맥 도봉지맥은 325m봉에 이르러 북서로 틀어
현달산~고봉산~장명산에 이르러 여맥이 한강으로 스며든다.
................................................................................
솔고개~359.6m봉~노고산~325m봉으로 이어지는
노고산 주능선은 북서쪽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삼상리
삼하리, 남동쪽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지축동 경계를 이룬다.
.....................노고산(老古山 : 495.7m)...............
산신 노고성 할머니가 치마로 돌을 옮겨 성을 쌓다가
도락산과 노고산에 걸치고 앉아 오줌을 누고 있었는데
그밑에 있던 게가 뜨거운 오줌에 놀라 할머니 그곳을 물자
화난 할머니가 게를 파주 너머로 던져버린 산이라 하여.,노고산.
옛부터 '노고할머니에게 치성을 드린 산'.,노고산.
노고산은 할머니 산신에게 산신제를 지내던.,성지.
노고산 이름은 19세기 중반의 지리 기록에 처음 등장
동국여도(1801~1822) 대동여지도(1861 :석적산 :石積山)
광적면의 옛날 지명이 석적면이었으므로
석적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
양주시 남면에서 광적면과 백석읍 서편에 이르는
지역에는 400~500m 이상의 높은 산이 거의 없다.
양주시 백석읍의 팔일봉, 은봉산, 앵무봉이 보일뿐.
양주시 장흥면 지역으로 들어서야
400~500m 산들이 나타나며 이들은
북한산 국립공원 줄기로 맥이 이어진다.
광적면 서편으로 산줄기가 이어져 북서풍을 막아 주며
이들 산줄기는 양주시 장흥면 앵무봉과 일영봉을 거쳐
북한산 국립공원 상장봉과 오봉산과 도봉산으로 이어진다.
..............................................................................
북한산보다 맷돼지 피혜가 적은.,노고산.
노고산은 진관동 주민들에게는.,성역(聖域)
노고산과 북한산 사이에 위치한.,여기소마을.
여기소마을 앞산은 북한산, 뒷산은 노고산이며
그 사이에는 재두루미 날고 물안개 피는.,창릉천.
은평구에서 가장 생태환경 친화적인.,'여기소마을.'
'장흥, 일영, 송추' 갈림길 길목.,여기소마을.
나루 진, 너그러울 관.,진관동(津寬洞)
진관동 백화사(은평구 의상봉길 70-7)
여기소마을(북한산 백화사입구 분기점).
북한산으로부터 남쪽 한강을 향해 낮아지는 지역.,은평구.
백운대(836m)의 지봉 남장대(715m)를 비롯 비봉, 백련산 등.
옛부터 수도 서울의 외곽 방위 요충지이며 천혜의 생활환경 터전.
계곡으로부터 발원된 깨끗한 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은평의 중심부인 불광천을 흘러 한강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불광천.
시가지 지역이 분지형인 관계로 비교적 온난한 지역으로
녹번동 삼거리 중심으로 인왕산, 북악산에 접한 비봉, 문주봉,
석가봉 그리고 멀리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등으로 연결되는 산악군.
한냉한 대륙성기후을 순화시켜주기에 겨울에도 따듯해 살기 좋은.,은평구.
은평구 지도
조선시대 은퇴한 궁인들이 여생을 보냈던.,지역.
'왕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지역'.,은평(恩平).
"왕과 신하(臣下)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이다." - 정조.
물고기 형태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진관동.
진관동은 은평구 내에서 인적이 드물고 풍광 좋은 지역.
삼천리골, 여기소 등은 옛 주민들 만이 사용하는 지명이지만
'못자리골(못절터), 마고정, 재각말, 잿말' 등은 은평뉴타운 지명.
현재, '은평뉴타운 1단지' 마을 이름.,못자리골.
모내기 하기 위한 '못자리 터'였던., 연못가 마을.
'못절터'는 못자리골에 있었던 옛 절터로 추정된다.
'은평뉴타운 3단지' 마고정
현재, '은평뉴타운 3단지' 마을 이름.,마고정.
구파발역 인근에 파발마를 묶어두는.,정거장.
은평구에서는 2015년 10월 9일(금) 오전 9시에
개관 1주년을 맞은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파발제.
은평 역사 한옥박물관
주 행사 내용은 식전공연과 파발재현행사, 걷기대회,
도착지 행사등으로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걷기구간은 은평역사한옥박물관~하나고등학교 앞을 지나
메디텍고 옆길에서 말을 메어두었다는 마고정~ 이말산 등산로.
재각말은 '재각(齋閣)이 있는 마을'이란 의미이다.
시조(始祖)에게 '제사 지내는 재각이 있는 마을'.,잿말.
은평뉴타운 우물골., 금성당 古宅
.......................금성당(錦城堂)........................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통적 당집.
2008년 7월 22일 대한민국 중요민속문화재 제58호 지정
1891년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후기 전통적 당집 형태.
19세기 서울ㆍ경기 무속신앙을 볼 수 있는 민속문화재.
금성대군(1426~1457)의 영혼을 위무하려고 세운.,굿당.
무신도와 각종 무구류(巫具類)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등.
희귀성과 건축사적인 중요성도 높아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
현재, '은평뉴타운 2단지' 마을 이름은.,우물골.
우물골에서 북한산 기자촌능선 방향에.,폭포동.
진관동 66 -24 김기정 집 마당에 상나무배기 우물.
이 우물 곁에는 '수백년 수령' 향나무 한그루가 있다.
우물에 향내가 배어 있고 도술을 부리는 금계 수탉이
알을 낳는다고 하여 옛부터 만병통치 약수라고 전한다.
옛날에는 인근 주민들이 매일 이곳에 물을 마시고
바가지로 떠서 통에 담아 가지고 집에 갖고 갔단다,
현재, '은평뉴타운 4단지' 마을 이름은.,폭포동.
폭포동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면.,북한산 선녀폭포.
구파발역 광장에 설치된 인공폭포는 폭포동을 상징.
폭포동.,선녀폭포.
선녀폭포 & 옥녀탕.
폭포동계곡
은평뉴타운.,폭포동.
진관내동은 조선시대 경기도 고양군 신혈면 탑골・
삼천리골・못자리골(못절터)・여기소・마고정・제각말・
잿말・폭포동 등으로 불리었고 구파발동과 진관동은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덕수원(덕수천 남안)터.
창릉천
조선시대 덕수원(덕수천 남안)
오늘날에는 창릉천변 구파발역.
......조선시대 우리나라 3대 대로.........
양주에서 함경도 아오지까지 가는.,북발
한양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가는.,서발
광주에서 의주까지 가는., 남발.
.........................................
즉, 조선시대 서발이.,오늘날 구파발역.
파발은 많은 파발꾼들이 쉬고, 말도 갈아 타고,
볕 잘들고, 풀과 나무가 잘 자라는 산세가 좋은 곳.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구파발역.
구파발역 1번 출구.
이 지역은 경의가도 '덕수원(德水院)'이란
국립여관 외에 주막과 대장간이 많던 곳이다.
조선중기부터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한.,파발역.
........................파발(擺撥)...........................
임진왜란 중 조선에 파견된 명 군대가 파발제를 이용.
이의 필요성을 느낀 조정에서는 1597년 5월 파발을 설치.
인조 때 서발·북발·남발 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제.,완성.
..............................................................................
은평 파발제
군사 기밀문서를 신속히 전달하기 위해 설치한 수단
파발에는 말을 타고 연락하는 기발(騎撥)과 보발(步撥).
파발은 일의 완급을 나타내는 방울을 달아 전송했는데,
방울 셋을 단 3현령(三懸鈴)은 긴급사태를 의미하는 파발
보통 파발은 하나를 달고, 이보다 급한 일은 2개를 달았다.
.........................
.........................
진관동(津寬洞) 동명은 이 지역에 진관사가 있는데서 유래.
1973년 7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서.,서대문구로 편입.
진관동이 설치되어 진관내동・진관외동・구파발동 일원을 관할.
구파발동(舊把撥洞)은 파발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
과거, 구파발동이 법정동이었으나 현재는 진관동으로 통합.
진관동 동사무소 주소(住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2로 31.
백화사입구.,여기소마을.
조선시대 남성을 거세한 환관에 대한 호칭.,내시(內侍).
하지만, 원래 내시는 비서나 경호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내시(內侍)의 한자말을 풀이하면., '모실 시(侍)'를 쓴다.
일본 사무라이들을 의미하는 한자말도.,'모실 시(侍)다.
춘추전국시대 다이묘 근접에서 경호하는 믿을 만한 무사.
삼국지에서 조조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내시 '허저, 양수' .
고려 말부터는 환관이 왕의 지근거리를 지키며 비서 역할.
조선시대 내시는 남성을 거세한 환관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조선시대 환관은 '목소리가 가늘고, 간사한 이미지'가 아니라
최고 권력자 왕의 곁에서 왕명을 전하거나, 의전을 챙기는 사람.
조선시대 내시부는 오늘날 청와대 부속실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 부속실은 총리실 사찰 등을 기획한 곳.
현재, 청와대 부속실은 대통령 최측근 막후 권력자들이 포진.
청와대 부속실은 1부속실과 2부속실로 나뉘는데,
1부속실은 대통령을 2부속실은 영부인 의전을 담당.
조선시대 내시부 힘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청와대 부속실.
................................
................................
조선시대 도성 인근 경기도에는 내시마을이 많았다.
현직 내시들은 광화문 서편 효자동 인근에 많이 살았고,
경기도 내시마을들은 나이든 환관이 은퇴 후 자리 잡은 곳.
조선시대 내시들은 결혼도 하고,
3살 이전 남자아이를 양자로 들여
가족을 이루고 집단으로 모여 살았다.
왕의 지근거리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내시.
그들이 집단으로 모여사는 지역이.,내시마을.
내시마을은 인근 주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조선시대 퇴임 내시들 집단 거주지.,송추, 장흥, 일영.
내시(內寺)란 어릴 때 성기 거세후, 입궁한 남자(男子).
내시부 종9품 상원(尙苑)에서 종2품 상선(尙膳) 지위(地位).
각자 실력에 따라 임용(任用)이 되면, 은퇴하기 전(前)까지
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세자궁(世子宮)·빈궁(嬪宮) 등에서
감선(監膳)·사명(使命)·잡역(雜役) 등을 수행하면서 축재는 물론,
처첩(妻妾)도 거느렸고, 3세 이하 양자(養子)를 받아들여 가계를 계승.
조선시대 내관(內官)·내시(內侍)들은 궁궐 밖 거처에서 출퇴근.
내시들이 살았던 '화자동(火者洞)'이)이 경복궁 옆 효자동(孝子洞)
그들은 한양(漢陽) 사대문(四大門) 안팎 일대에 거주(居住)했다 한다.
거세된 남자로 궁정 업무 전반을 담당하는 환관과 내시.
환관과 내시가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조선 시대부터.
고려시대 내시는 유학을 공부하여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거나
왕을 대신해 궁궐 밖 민심을 살피고, 각종 사건을 처리하는 임무.
공민왕 5년(1356) 새로 설치된 환관의 관청이.,'내시부'
내시부 소속인 환관과 본래의 내시가 혼동되기 시작했다.
내시는 환관의 별칭이 되며 내시 고유의 역할을 상실한 것.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 내시(內侍)로 통칭된.,환관.
고려 환관은 '부곡(部曲)·관노(官奴)·가노(家奴)' 출신.
천예(賤隷)계 무녀(巫女)·관비(官婢)의 소생인 천민 출신.
고려시대 환관은 관직을 가질 수 없고
녹봉도 없었으며, 의식주 편의 만 제공.
.
궁중 환관의 직무는 궁문수위, 어전 내의 보안,
관비의 감독, 궁중의 전명(傳命), 궁정 내 청소 및
대내(大內) 감선(監膳 : 궐내 음식물 감독), 각종 잡역.
환관은 왕의 출행시 수행, 제의식의 각종 잡역을 담당.
거세로 인해 남성적 특징이 퇴화해 중성화하고, 여성화.
음성이 변하고 수염이 빠지며, 성격도 감정 기복이 심하고
육체적인 결함을 의식, 항상 열등감을 지녔던 것으로 전한다.
그들은 또한 정직하고 자비심도 많다고 하지만
반대로 물욕이 강해 축재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군주 측근에서 여러 기밀을 접하는 기회가 많아
권력을 장악해 정치를 혼란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조선 세조 12년(1466) 내시원 폐지로
'고려~조선 초' 내시 제도는 사라졌고
그 이후 내시는 환관의 동의어가 된 것.
중국처럼 궁형이 없었던 조선 내시 중에는,
어릴 적 사고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었지만
남성을 상실한 이들은 수염이 없고 중성 비음.
구부정한 어깨, 왜소한 체구, 우스꽝스러운 모습.
경복궁 서쪽 '서촌' 한옥마을은.,'중인 및 내시'마을.
고래등 같은 북촌 기와집들과는 대조를 이루는.,서촌.
북촌에는 사대부가, 서촌에는 중인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궐 밖에서 출퇴근하는 관리들의 거주지.,서촌.
왕을 가까이 모시는 내시들이 서촌에 살면서 궁궐을 출입.
서촌 아래 효자동, 체부동, 누하동은 10평 남짓 한옥마을들.
내시들도 가정을 이룬 사람이 많았으나,
자식 없는 설움을 양자를 들여 달래었으니
집의 크기에 굳이 연연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궁에서 유숙하며 근무하는 장번(長番)내시.
궐 밖에서 출퇴근하는 출입번내시가 있었다.
김종직 作 내반원기(內班院記) 서문에 의하면
"내시부를 영추문 밖에 두었다"고 적고 있는데
효자동 일대가 내시 거주지역이었음을 뜻한다.
서촌(西村)
정조 때 편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같은 지역.
경복궁 경회루 남문의 서쪽에 내시부가 있었다고 기록.
오늘날 종로구 통인동과 효자동 근처가 이에 해당한다.
가난한 집에서 팔린 딸들을 처로 두기도 한 내시.
그 여인들은 성욕을 못견뎌 도망치는 일도 잦았기에
효자동 내시동네는 소슬대문과 담장이 높기로도 유명세.
높은 소슬대문에 고대광실 같은 호화주택 동네.
왕실 재산을 관장한 환관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환관에 빌붙어 권세를 잡으려는 자들의 딸과 혼맥.
환관은 직책과 권세에 비례하여
사대부 만큼이나 축첩을 거느렸고
왕의 신임과 비례하여 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연로하여 은퇴하면, 내시촌에 거주.
자기네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내시마을.,인덕원(仁德院).
이들은 신체적으로는 비록 거세된 몸이지만,
왕과 가까이 대할 수 있었던 환관(宦官) 신분.
과거에 높은 관직을 역임했던 신분에 어울리게
남에게 어진 덕을 베불었기에 마을 이름이 인덕.
그런데 나중에는 이 마을에,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을 위한 숙소인 원(院)을 두게 되어 인덕원.
인덕원은 임진왜란이 전에 폐지하여 없어진 원(院).
인덕원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교통의 요지여서,
과천· 안양· 의왕· 군포· 성남 등 사통팔달했던 곳이다.
내시마을은 왕명을 전달하는 파발 등 교통 요지에 위치.
왕의 측근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이들이 살았기에
내시마을은 주위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남의 잘못이나 비밀을
왕에게 몰래 일러바치거나
헐뜯는 짓을 가리켜.,"고자질."
'고자가 하는 짓.'.,고자질.
궁궐에서 행해지는 이런일 저런 일들을
왕에게 비밀리 보고하는 것이 환관의 의무.
'고자질'의 어원은 '고자가 하는 짓.'에서 유래.
파주시청이 위치한 금촌읍에는 "고자새말"이란 지명.
금촌리 394번지에 아직도 내시들이 살았던 집터가 있다.
"내시들이 권세를 믿고 온갖 횡포를 부렸다."던 고자 마을.
"이웃 마을 주민들이 이곳을 지날때 넘던 고개.,'답답고개'
마을 지나 냇가 건너면 마음 놓고 소리친다."는.,'소리치다리.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곳 환관들의 횡포에 관한 지명 흔적.
파주 금촌은 예전부터 개경으로 가는 길목으로
광해군 때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서울을 버리고
조선시대 천도를 논할 정도로 살기 좋은 지역이었다.
인덕원 역시 서울에서 삼남으로 이어진 길에 자리 잡고
과천벌을 배후에 두어, 물산도 풍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도 인덕원은 안양, 과천, 의왕을 나누는 교통의 요지이다.
조선시대 최고 권력자 왕의 최측근에 있던 내시들
은퇴 후, 살기 좋은 최고 명당에 자리를 잡았던 흔적.
그후 수백년이 지났어도 그 후손들이 혜택을 누릴 정도.
조선시대 내시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던 마을은
경기도 장흥 송추 일영 일대로, 아직도 인근에는
그들에 관한 단편적인 추억담이 아련히 전해온다.
양주군 장흥에 가면 낮은 산 개울가에.,'벌마을'.
속칭 "내시(고자)마을" 뒷산에는 200여기.,큰무덤.
왕을 가까이 모시던 환관들의 세도를 짐작케 한다.
조선 중기 무렵부터 벼슬에서 물러난 환관들이
경치 좋은 이곳에 집단부락을 이루며 살던 마을.
왕년(往年)에 임금의 최고 측근(側近)이었고
은퇴 당시에 벼슬이 높아 웬만한 고을 수령들은
내시들의 위세에 눌려 양반도 헛기침을 못낼 정도.
하물며, 일반 백성들은
그 위세에 눌려 그 앞에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
조선시대 퇴임 상선 내시들의
'집단 거주지' 여기소마을 일대.
1970년대까지도 진관동 일대에서는
지역 웃어른 역활을 했던 상선 후손들.
진관동 일대 토지주는 대대로 상선 후손들이고
소작인들은 대대로 그 음덕에 기대어 살았던 탓.
진관동은 조선왕실과 밀접한 묘역이 많았던 지역.
"조선왕실 제2의 왕도(王都)"라고도
불릴만큼.,권력층 사자(死者)의 마을.
사자(死者)가 산 사람보다 행세했던 곳.
북한산 둘레길.,내시묘역길
북한산 둘레길 10구간이.,내시묘역길.
내시부.,별장 및 상선 공동묘역이 위치.
'내시묘역길' 초입에 위치한.,'여기소마을'.
이곳 내시묘역은 내시파중 이사문(李似文)을 파조로 하는
“이사문공파(李似文公派)”의 내시 분묘가 모여 있는 가족 묘지.
현재 그의 후손 5가구가 19대까지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김충영(金忠英) 묘.
자헌대부(資憲大夫) 승전관(承傳官)을 지냈고
비를 세운 날자가 ‘천계(天啓) 원년(元年) 8월 12일’.
광해군 13년인 1621년에 세운 비석 임을 알 수 있다.
승전관이란 왕과 왕비의 명령을 출납한 승전색(承傳色).
내시부의 직제 상으로는 정4품 상전(尙傳)이 이를 맡았다.
후손이 소장한 이사문공파(李似文公派) 가계도(家系圖)를
기록한 가승(家乘)을 보면 묘가 ‘중흥동(中興洞) 면암(緜岩)
일명 솜바위로 백화사에 있고 동쪽 사패지(賜牌之地)’에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처음부터 중흥사(中興寺) 동쪽
현재 위치에 국가로부터 하사받은 땅에 묘역을 조성.
현재 있는 묘 가운데 비석에 관직이 기록된 이는 14명.
그중 최고관직 종2품 상선(尙膳)에 오른 이는.,
임성익(林成翼), 박민채(朴敏采), 김성휘(金成輝),
박황(朴滉), 오준겸(吳浚謙) 등 모두 5인이며, 기타
영내시부사(정1품)가 1인, 판내시부사(종1품) 1인,
구한 말에 봉시(奉侍)를 지낸 이가 2인이며,
기타는 상세(尙洗: 정6품) 등 다양하다.
이들 묘 중 박민채(朴敏采) 묘비문에는
현재의 은평구 진관동(津寬洞)과는 다른
‘양주(楊州) 진관(榛官)’이, 김성휘(金成輝)와
박황(朴滉) 비문에 ‘양주 진관(榛關)’이라는 한자.
진관내․외동 변천사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묘역에 남아 있는 석물(石物)은 문인석(文人石)이 5쌍,
비석이 5기, 상석(床石)이 20기, 망주석(望柱石)이 9기.
특히, 오늘날 일반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내시도 부인과 자녀를 두고 생활했다는 사실.
즉, 비문에 기록된 ‘박공(朴公) 양위(兩位)지묘’와
‘배정경부인(配貞敬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부좌(祔左)’
내시 부인도 사대부 부인과 같이 정1품 정경부인에 봉작(封爵).
또 ‘유삼자(有三子) 왈김여일(曰金汝鎰)
왈임성익(曰林成翼) 왈김성휘(曰金成輝)’
라는 기록은 내시도 자녀를 입양(入養)해
대를 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이곳에는 부인과 함께 묻힌 합장묘 7기,
나란히 묻힌 쌍분(雙墳)이 3기정도 남아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내시묘로는
양주(楊州) 효촌리(孝村里)에 있는 선조(宣祖)조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른 김계한(金繼韓) 시조(始祖)
연양군파(延陽君派)의 직계 후손 8위의 묘가 있고,
노원구 월계 2동 인덕대학 뒷산인 매봉산에
통훈대부(通訓大夫) 내시부(內侍府) 상세(정6품)
김계한의 손자 승극철(承克哲)의 묘 정도이다.
우리나라 최대 내시묘역으로 언론에 부각되면서
201?년 3월 사적 440호 ‘초안산 조선시대분묘군’ 지정
초안산(楚安山) 묘역은 사대부 서민 다양한 계층의 무덤.
따라서 북한산 내시묘는 중국에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크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서울에서 유일한 내시 집단묘역임이 입증되던 곳.
이곳 내시묘역은 하루 빨리
국가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곳.
2012년 북한산 의상봉지락
45기 내시 묘역이 파헤쳐졌다.
그곳 후손들이 한 조경업자에게
4억8천만 원을 받고 땅을 넘긴 탓.
이 일대는 궁녀 묘역 10기 정도가 확인된 곳.
현재, 북한산초등학교 터가 잊혀진 궁녀 묘역.
조선시대 궁녀들은 나이가 많거나 중병에 걸려
업무 수행을 하기 어려운 경우 궁녀 직을 파했다.
이들은 출궁 후 비구니가 되어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화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진관동에는 퇴임 궁녀들의 삶터로 추정되는
비구니 사찰들의 흔적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산42번지(1637년 : 인조 15년)
이곳은 조선시대 내시부 상약인 신공의 묘역이다.
궁중 약에 관한 일을 맡은 내시부 종3품.,상약(尙藥).
묘비 뒷면에는 1637년(인조 15년) 2월에 조성한 기록.
묘표의 앞에는 상석과 문인석 1기가 남아 있다.
묘표는 사각 비좌(碑座)에 비머리가 원수형 비신.
비신(碑身) 전면 "통정대부행내시부상약신공지묘.
비신 전면에는 "通政大夫行內侍府尙藥申公之墓)",
후면에는 "숭정십년이월 일장(崇禎十年二月 日葬)"
여기 내시부 상약 신공 묘역은 북한산 둘레길 8구간
구름정원길 옆에 있는데 분묘 흔적은 보이지 않으나
묘표, 상석 문인석 위치로 보아 분묘 일부는 둘레길 내.
아마도 신공의 후손들이 없어 관리를 안한듯
그나마 은평구에서 관리하고 있음이 다행이다.
북한산 서북쪽으로는 내시 묘역이 많이 있는데,
'효자동~ 내시묘역길' 주변에 내시 묘역이 많다
.................................
.................................
현재 내시의 묘가 남아있는 곳은
도봉구 초안산과 쌍문동, 은평구 신사동,
경기도 고양과 남양주, 양주, 용인, 경북 청도 등.
이마저도 언제까지 남아 있을지 모른다.
내시의 양자로 이어진 직계 후손들은 선조가
내시라는 점을 부끄럽게 여겨 묘역을 없애기 때문.
북한산 의상봉.
여기소.
백화사입구.,여기소마을.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 의상봉 자락에., 여기소마을.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원효봉 백운대 노적봉도 보인다.
이 마을 개울은 30~40년전까지 주민 식수일 만큼 깨끗했다.
북한산 백화사 계곡물이
이 마을을 관통하기 때문.
그리고나서, 창릉천과 합류.
'노고산과 북한산'자락 사이.,창릉천.
민물고기, 곤충들 등의 서식처여서일까?
물안개 피는 아침마다 두루미떼가 모여든다.
이곳 창릉천변 좌우에는
관상수 재배농원들이 많다.
서울 도심보다 평균 3~4도 기온이 낮아
조선시대부터 피서지로 소문난 명소가 많다.
송추, 장흥, 일영, 노고산 매미골, 북한산성 계곡.
1904년 사진.,행궁
조선 숙종때 축성한 북한산성 내.,행궁(行宮).
나라가 위급할때 도성을 지키기 위한.,피난도성.
그후, 이곳 행궁을 찾은 조선 왕은.,숙종과 영조 뿐.
행궁이 비좁고 어느 왕도 찾지 않아
건물이 퇴락했던 영향 때문이 아닐까?'
평상시 북한산 행궁 서고는 고문헌.,비밀 보관처.
외전이 있었던 곳은 수해로 지반이 유실되었으나
내전이 있었던 곳은 기단석, 계단, 주춧돌 등이 남아
그당시 내전과 행각의 배치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북한산 상원봉 아래 행궁은 실제 사용된 적은 없다.
중성문 지나 남쪽 계곡에서 동장대가 바라보이는 곳.
경복궁에서 정북 7km 지점에 위치한.,북한산성.
1711년 숙종 때 고려때 중흥산성을 바탕으로.,축성.
북한산성 행궁은 내전 28칸 외전 28칸 부속건물 68칸.
수원화성 576칸 행궁에 비해
북한산성 행궁은., 작은 규모
북한산성 계곡.
............창릉천(昌陵川)............
문수봉 대남문 북쪽에서 발원하여
북한산성을 관통해 대서문 수구를 나와,
고양시와 양주군 경계를 이르는 상장봉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와 만나 서쪽으로 흘러 내려와
은평구와 고양시 경계를 이루고 행주산성 아래에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한강 제1지류 하천'이자., "덕수천".
..........................................................................
북한산 효자(북한동)계곡에서 발원한.,창릉천.
서울 경계를 지나 방화대교 북단에서 한강 유입.
창릉 조성 이전에는 덕수천(德壽川)이라고 하였다.
북한천.
북한동계곡에서 발원한 북한천과 합류.
고양시 덕양구를 흘러 한강으로 유입된다
북한천에서.,'최고의 절경' 향옥탄(響玉灘).
산영루(山映樓).,향옥탄(響玉灘).
'물소리 옥구슬 굴리는듯 하여.,향옥탄.
비가 내리고 꽃이 피니.,이곳이 바로 선경.'
조선후기 문인들이 남긴 詩가 많은.,신영루.
'산그림자 물위에 비춰 보이는 누각.,산영루.'
..........................
..........................
조선시대 북한산자락의 창릉천은 아름다웠으리라.
그무렵, 축대 없는 창릉천 가에 우마차길만 있었을듯.
화순 적벽 창랑천도 절경이지만 여기보다 못했을듯 싶다.
화순 적벽.,창랑천
서울 은평구는 창릉천을 경계선으로
'고양시'와는 행정 구역이 갈라진다.
...........................창릉(昌陵)..................................
예종(1450~1469)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1445?~1498).,능.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차남, 의경세자가 요절한 바람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 기간은 14개월에 불과.
예종은 즉위 초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대신을 원상으로 삼아 이들이 서무를 의결.
원상 제도는 신하들에 의한 일종의 섭정이었다.
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3 신하는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측근 세력.
이들은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의결했고, 예종은 형식적으로 결재만 했다.
창릉은 서오릉에 조성된 최초의 왕릉으로
언덕 위에 두 개의 능이 있는 동원이강 형식.
...........................................................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위치한., 서오능 내 창릉.
일제강점기 경성부 은평면 일부가 신도면으로 통합.
예전 신도면 용두리 행정지명이 현재, 덕양구 용두동.
.........용두동..........
1912년 고양군 하도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혈면, 하도면, 경성부 은평면 일부가
신도면으로 통합되어 신도면 용두리가 되었다.
1973년 신도면이 신도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92년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며., 용두동 개칭
1996년 구제(區制) 실시로 덕양구 관할이 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창릉동에서 관할한다.
용두동은 마을 형세가 용머리처럼 생겨 유래된 지명.
서오릉이 명당인 용의 혈을 가지고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
.............................................................................
대자리는 풍수상 용의 몸통 지세에서 유래된 지명.
용미리는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당시.,구룡동(九龍里)
"龍"과 호미리(虎尾里)의 "尾"를 합하여.,용미리(龍尾里).
혜음령 고개를 넘어 광탄면으로 와서
용의 꼬리가 9 갈래로 나눠어져.,구룡리.
창릉천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공동묘지 터.
창릉천변 여기소마을은 은평구 지정 친환경 마을.
10여년 전까지 농사짓던 논도 있었던 50여호 가구.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사슴농장까지 있었던 마을.
불과, 몇년 전까지 만 해도,
두메산골 오지같던.,산골마을.
마을 한가운데로 아스팔트 도로가 뚫리며 개발 붐.
아직도 친환경적 생태환경은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주민들이 부업 겸 취미 삼아 관상수 재배 및 꽃가꾸기.
사슴농장 옛터에 새로 지은 주택들이 들어서고
원주민들이 떠난 그 빈자리에 새로이 이주한 주민들.
뜰에 나무를 심고 꽃밭을 가꾼 전원주택들이 늘고있다.
옛 주민들 중 고령자는 마을 입구 여기소경로당에 모여
한낮에는 젊은층이 도심 일터로 빠져나간 빈자리를 메운다.
연초에는 원주민들이 마을 행사도 갖고 김장을 함께 했던 마을.
여기소마을.,경로당.
요즘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 이 마을 어린이들.
마을 인근에 위치한 북한산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중학생이 되면, 자녀교육을 위해 원주민들이 이사.
한낮에도 여기소경로당이 한가로울 만큼이나
하루가 다르게.,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북한산초등학교는 옛모습 그대로 간직.
의상봉 자락에 위치한.,북한산초등학교.
조선시대 상궁과 궁녀들의 묘지였다던 곳.
'그래서, 학교운동장에 잔디밭을 깐 것일까?'
북한산초등학교 내 야영장.
북한산초등학교에서는 북한산 계곡물처럼
어린아이들의 맑고 고운 심성을 기르기 위한
숲속 마을 들꽃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형 혁신학교로 운영되는 북한산초등학교
산과 숲이 숨 쉬는 건강한 배움터인 교육 환경.
방갈로 8개동을 보유한 야영협력학교로도 지정.
이 프로그램에서는 양봉과 텃밭 가꾸기 체험,
야영수련, 생태환경, 야외교육 등이 이루어지며
교내 독서토론 교육과 전통무예인 택견 수련, 그리고
국악 교육 등으로 학생들의 정서교육에도 소홀함이 없다
학생들의 체력 향상과 운동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1인 1스포츠클럽 생존수영과 등반은 전교생을 대상.
1-3학년은 아이스스케이트, 4-6학년은 스키를 배우며
이 모든 교육과정은 학부모 부담없이 학교예산으로 운영.
1967년 3월 25일 서울 북한산국민학교로 개교
1996년 3월 2일 서울북한산초등학교로 개칭.
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이다
한 학년에
한반 뿐인
초등학교.
북한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한.,북한산초등학교.
학교 주변에 민가가 드물어 학생 숫자가 적은 편.
교육환경은 서울에서 최고 수준이 아닐까? 여겨진다.
북한산초등학교는 상쾌한 바람과 맑은 계곡물,
소나무숲 등 천혜의 교육 환경을 자랑하고 있어
자연을 닮아가며 웃음과 칭찬이 샘솟는.,교육시설.
북한산초등학교는 북한산성 입구에 위치.
서울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여건을 갖춘 학교.
여기소마을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위치에 있다.
은평구 대서문길 진관동.,북한산초등학교.
은평(恩平)이란 왕(王)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그 왕을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곳이란 의미를 품고있는.,지명.
......................진관동....................
진관동 동명은 진관사에서 유래하였다.
법정동 진관외동과 진관내동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2007년에 진관동으로 합쳐졌다.
구파발동(舊把撥洞)은 파발이 있던 곳.
과거에는 구파발동이 법정동이었으나
현재는 진관동으로 통합되어 있다.
.............................................
은평구 지도.
은평구 지도는.,물고기 형태이며
진관동은 물고기 머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내시들이 토지주였던.,여기소마을 일대.
왕이 내시부 상선에게 하사했다고 하는.,내시부 별장.
여기소마을 안쪽 내시부 별장 내에 내시묘군이 다수 자리.
용출봉(龍出峰) 주능선 자락 끝에 위치한.,내시군묘.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 위치한 계곡이., 백화사계곡
백화사계곡 오른쪽 용출봉 자락 끝에 있는.,내시부 별장.
수만평 별장지대 내에는
계곡물을 막아 만든.,수영장.
내시묘군으로 이어지는.,산책로.
별장지기 가옥들도 몇채 있을 정도.
몇년 전까지 주민들은 그곳을 "내시 별장"이라 불렀다.
이 마을 토지 대부분 내시부 후손 몇사람이 소유했었기에
여기소마을 옛주민은 마을 이름보다 ‘278번지’로 마을을 통칭.
여기소마을은 '국립공원, 그린벨트, 군사지역'
개발제한구역이라 마을 개발이 크게 제한되어
허가없이 집을 증개축 수리할 수가 없었던 마을.
'조선시대 내시부 관할 묘지기들의 삶터였던듯.,'
몇년 전까지만 해도.,'여기소마을' 일대는
집앞 나무 한그루도 자르거나 없애지 못했고
사전 신고 없이 행하였다면 벌금을 내게 되며
구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 순시가 자주 있던 곳.
최근 몇년 사이에 이 마을은 그린벨트 해제로
외지 주민들 주택 및 별장지로 각광 받고 있다.
북한산 등산객들의 출입이 많은.,여기소마을.
북한산성 입구와 근접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북한산성입구와 버스로 두 정거장 사이에 위치.
여기소마을은 등산로가 번잡하지 않고
북한산 초입까지의 거리가 짧기 때문에
등산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요즘 등산객들로 인한 불편을 겪는다.
등산객의 쓰레기 투기로 마을 환경이 오염되고
등산객이 몰고 오는 승용차 매연과 주차가 문제점.
등산객들은 마을 입구에 설치된 자판기 커피나
음료수를 마신 후에 아무 곳에나 투기 하기도 하고
등산 후 생기는 쓰레기를 비닐봉지 째 투기하기도 한다.
또한 등산객들이 마을 공터에 무질서하게 주차.
주민들의 차량이 움직이지 못하고 묶이기도 하며
편도 1차선 도로를 높은 속도로 질주해 사고의 위험.
현재, 주민들은 이러한 문제를 어디에 호소하거나
마땅히 해결하지 못한 채 그대로 생활하고 있는 실정.
등산객이 이 마을을 찾을때 각별히 유념했으면 하는 바램.
백화사.,불상
백화사는 백화사계곡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
백화사에서 10분 남짓 올라가면.,백화사계곡.
'한폭의 동양화'같은 비경지대가 연속 나타난다.
'백화사 ~백화사계곡 ~가사당암문'.,등산로.
백화사계곡.,초입.
옛날에 북한산에서 굴러온 커다란 바위에
불상을 새겼다는 백화사가 있어.,백화사계곡.
조선시대 선왕의 궁녀들이 몸담았던.,비구니 사찰.
백화사 담장 넘어.,내시부 상선 별장터.
그 안에 조선시대 내시부 상선들의 묘역.
내시부 묘역은 백화사계곡 초입 우측에 위치.
내시부 별장 안에 여기저기 묘역들이 산재.
.
이 일대는 조선시대 내시들이 토지를 소유했던 곳.
현재도 마을의 안쪽에는 내시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산 둘레길 10구간 이름은 내시묘역길 구간.
내시부 별장터 정문 곁 벽돌 담장을 끼고 돌며
'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길 10 구간이 시작된다.
벽돌담장 끝부터 철조망 울타리로 이어진.,내시묘역.
여기소마을은 토지를 몇 사람이 소유했었기에
사람들은 지번 ‘278번지’로 여기소마을을 칭한다.
내시부 별장 담장이 뚫린 곳이.,의상봉 등산로 초입.
그곳에서 의상봉을 오르는 능선길이 있고
계곡 등산로는 가사당암문으로 올라가는 길.
능선길은 암릉 바윗길이고 계곡길은 평탄한 편.
조선시대에는 암릉 바윗길이 험해서
'계곡길~가사당암문'으로 다녔으리라.
조선 숙종(1711년) 북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전국에서 많은 백성이 노역에 동원되었던 곳.
그무렵에는 노역에 동원된 인파가 붐볐으리라.
이 공사에 동원된 한 관리를 만나기 위해
남장까지 한 기생이 불원천리 마다하지 않고
이마을까지 찾아와서 공사 감독에게 면회를 간청.
그당시 관습으로는 나라에서 하는 큰 공사에
남녀가 만나는 것은 부정 탄다 하여 면회를 통제.
하여, 그 기생은 이 마을에서 늘 남자를 기다렸단다.
기생은 몇 달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자
어느날 아침에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 속에
그리움을 참지 못해 그 관리의 이름을 부르며
이 마을 인근 연못 속에 몸을 던졌다고 전한다.
그후, 마을 사람들이 그 기생의 시체를 건져서
연못 근처에 묻어준 마을이라하여.,여기소마을.
현재 연못은 없어지고 경로당이 들어선.,여기소 터.
'인근에 있는 낚시터가 옛 여기소 흔적일까?'
일설에는 ‘계집녀(女) 기생기(妓) 못소(沼).,여기소
예전에는 흐린날 비가 내리는 가을밤이면 이곳에서
"여보~" "여기소~" 애절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성현들의 산행기 속에 함께 동행한 기생들.
바늘 가는데 실 가듯.,기생들을 대동한 8도 명산 등정기.
옛부터 풍류 묵객과 기생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었던 관계.
여기소 지명은 음성에도 있다.
생극면 소재지 신양리에서 5㎞.
음성 기점 19㎞ 지점에.. 여기소
약 20 평 너럭바위는 옛 선비들의 선유처(仙遊處).
어느해 여름, 경기도 광주에서 명성을 날린 기생.,선옥.
'이곳 폭포수를 바라보며, 줄을 타다가 몸을 날렸다.'는 곳.
선옥은 천하에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기생.
그녀는 노래도 잘했지만, 시작(時作)도 일품이었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얼굴 어디인가에 어두운 그림자.
그 때 이 곳에 지나가다 잠시 쉬어 가게된.,노승.
은밀히 그녀를 불러, 그녀의 죽음을 예고해 준다.
"얼굴을 보니 곧, 죽음을 면치 못할 관상이니,
만약, 살고 싶다면, 내일 '칠장사'를 찾아오라."
"죽을 운명을 알고 있으며, 피하고 싶지 않으니
마음의 편안함이 고요한 대해(大海)와 같습니다.
그러하니, 뜻은 고맙지만, 스님은 염려 마십시오."
노승이 깨달은 바 있어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선옥은 뭇 선비들 앞에서 줄을 타려고
폭포를 중심으로 하여 못(沼) 양쪽 나무에 줄을 맨다.
선옥은 하얀 치마 저고리에 흰 버선을 신고
줄 위에 오른 모습이 한 마리의 백학과 같았다.
선비들은 넋을 잃고 그녀의 춤사위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침은 고사하고, 숨 소리마저 죽인 선비들.
한번 지나가고 돌아가는 순간, 몸을 날린 그녀.
그녀가 물속으로 곤두박질치자 경악한 선비들.
하얗게 솟구치며 끓어 오르는 폭포수 속 물거품.
그녀의 시체가 떠오른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상처 한 곳 없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마치, 생전에 그 얼굴처럼 온화스러운.,혈기.
기생이 빠져죽은 웅덩이라 하여.,여기소(麗妓沼).
그후부터 여기소에 선비들이 모이는 일이 없어졌다.
사람들은 선옥이 실족하여 못에 빠져 숨졌다고 하나
현장을 본 선비들은 선옥이 자살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절세가인 선옥이 왜 스스로 몸을 던졌는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로부터 이곳은
기생이 죽은 늪이라 하여 ‘여기소'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름다울 려(麗)
기생 기(妓)
늪 소(沼).
북한산 의상봉 자락에 위치한.,'여기소마을'.
이곳 마을의 지명은 조선시대 여기소에서 유래.
음성 선유처 여기소(麗妓沼)와는 지명 유래가 유사.
너汝
터基
늪沼
여기소(汝基沼).
북한산 의상봉 7부 능선에 위치한.,戀人바위.
마치, 남자는 武官 같고 여자는 기생 같아 보인다.
현재, 백화사 입구에 여기소마을은 의상봉 등산로 길목.
의상봉은 대서문 곁 산성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고
북한산초등학교 잔디운동장 뒤로 올라가는 길도 있지만
'북한산 둘레길 10구간' 백화사 뒤 내시묘역구간을 통해서
의상봉으로 올라가는 길을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고 있다.
의상봉 7부능선 암릉에 위치한.,연인바위.
이곳을 찾는 등산객이 즐겨 애용하는 쉼터.
의상봉 암릉 중턱에 있어 오르기 까탈스럽다.
의상봉.,연인바위.
옛부터 전하는 전설이
있을 법도 하지만.,없다.
이곳 바위의 이름도.,없다.
1980년대 말부터 클라이머들 만이
간혹 드물게 찾던 인적 드문 바윗길.
1993년 암릉 위에 등산로 시설물 설치.
그후로 대중적인 등산로로 각광을 받게 된.,의상봉능선.
아직까지도 경사가 급한 암릉 구간이 많아 인적 드문 곳.
등산객들이 "연인바위"라고들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아니다.
의상봉 정상부는 암릉 바위길의 연속.
조선시대에 의상봉을 오르는 등정로는
'백화사입구 뿐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백화사입구 ~ 가사당암문 ~ 의상봉 정상.
요즘은 북한산 둘레길에서.,내시묘역길 구간.
그곳에서부터 의상봉능선으로 오르는.,등산로.
암릉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다보면.,연인바위 쉼터.
연인바위 쉼터
남녀가 한 몸이 되어
돌이 된듯한.,연인바위.
그곳 지나면 또 다시.,암릉.
의상봉 암릉에 등산로 시설물이
설치된 시기는 1993년 가을 쯤 같다.
그전까지는 등산객 발길이 끊겼던 곳.
의상봉 정상 인근.
의상봉 정상부는 북한산 전망대 같다.
의상봉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곳이.,원효봉.
그위로 염초봉능선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병풍암.
그리고, 12성문 내 북한산성 안.
그 주변을 병풍처럼 애워싼 암릉.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듯 하다.
.
의상봉에서 바라본.,북한산 암봉들.
오늘날, 의상봉 암릉에는 시설물이 설치되어
누구나 오를 수 있는.,일반 등산로가 되었지만
1993년 이전까지 등산객이 오를 수 없던.,바윗길.
그전까지는 클라이머들이나 간혹 찾는.,바윗길.
필자가 처음 이곳을 오른 시기는 1991년 인듯 하다.
조선시대 의상봉 암릉지대는 '선계의 영역'이었으리라.
신라 고승 의상대사(625~702년)
의상대사의 수도처였다는.,의상봉.
그가 당나라 유학 후 귀국할때 그를 흠모했던
선묘낭자의 넋이 불법을 지키는 수호용이 되어
의상 곁에서 그림자처럼 보호했다는 전설이 있다.
당나라에서 귀국 후 의상대사는
절친 원효대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의상봉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한다.
그당시 의상대사와 동시대 인물.,원효대사.
원효대사는 의상봉 건너편 원효봉에서 수도.
두 고승이 수도승 때 구름을 타고 오갔다는 전설.
그리하여, 명명된 지명.,의상봉과 원효봉.
용출봉에서 바라본.,의상봉 & 원효봉.
그후, 신라 말, 음양풍수설의 대가.,도선국사.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는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예언 하였다.
도선국사(827~898)는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된.,신라 고승.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고려를 창건한 태조가 태어나
고려시대 역대 왕들은 도선국사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조선시대 풍수설 대가 무학대사의 사상적 스승 도선국사.
하여, 조선시대 풍수설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도선국사.
북한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보면
의상봉과 용출봉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멀리서 봐도 오를 엄두가 나지 않는.,암봉.
조선시대 풍수설에 의하면
청룡 머리에 해당하는.,의상봉.
'한양의 서벽(西壁)' 의상봉능선.
북한산초등학교 잔디 운동장은
조선시대 궁녀들의 공동묘지 옛터.
상당히 신분 높은 궁녀들이 묻혔던듯.
'청룡 머리' 산세인 의상봉 산자락의 묘터라면
왕의 자녀를 양육한 보모상궁들이 묻힌 곳 아닐까?
그러나, 확인할 비문 또는 흔적들이 멸실되어 안타깝다.
1967년 3월 25일 개교한 북한산초등학교.
건축 당시 터파기 과정에서 멸실되었던듯..궁녀 무덤터에 들어선 학교와 잔디밭 운동장.
잔디밭 운동장~ 학교 야영장 ~ 의상봉 가는 길.
의상봉은 그리 높지 않지만 온통 암릉인 등산로.
의상봉~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문수봉.
암릉 능선으로 이어진 주능선 상의 경관이 아름답다.
조선시대의 군기(軍旗) 중 청룡기는 진영의 왼쪽에 세워서
좌군(左軍)·좌영(左營)·좌위(左衛) 등의 표치(標幟)로 하였다.
조선 숙종이 한양 북쪽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했던.,북한산성.
당시 북한산성 축성 책임자는 '화엄사 승려' 성능.
인조 때 남한산성 축성 책임자였던 '각성'의 제자.
성능이 작성한 북한산성 축성 기록.,북한지(北漢誌).
조선시대 북한산성 12성문 중에서 정문.,대서문.
대서문 우측에 위치한 원효봉능선은.,우백호 산세.
대서문 좌측에 위치한 의상봉능선 일대는.,좌청룡 산세.
특히,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암릉 주능선.
클라이머들이 즐겨찾는 호젓한 바위길의 연속.
특히, 용혈봉 암벽연습장은 거의 인적이 없는 곳.
리지등반 수준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탓.
조선시대 용혈봉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던 영역.
'용혈봉'이란 지명이 그 사실을 대변하는 것 같다.
용혈봉 암장.
문수봉~승가봉~비봉~관봉~삼지봉~향로봉(수리봉)
'북한산의 용아장성'이라 불릴만큼 암릉 경관이 환상적.
요즘 '초보자~중급자' 리지등반 코스로서 각광받는 암릉.
'의상봉~ 비봉' 능선 아래
사찰 대부분 비구니사찰이다.
백화사, 삼천사, 진관사, 승가사.
'의상봉 능선' 등산코스 들머리는
'북한산성 입구' 또는 '백화사 입구'.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출구로 나와
북한산성 행 버스를 타고 '백화사입구' 하차.
그곳에서 북한산을 향해 걷다보면.,여기소마을.
여기소마을 경로당 벽에는.,'여기소 터' 표지석.
그 표지석에 새겨진 '여기소 전설'이 눈길을 끈다.
이곳 여기소마을 지명은 '여기소'에서 유래.
의상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여기소마을.
서울 은평구에서 지정한 친환경마을이기도 하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302-3
여기소 경로당 앞.,여기소 터.
너汝, 터基, 늪沼.,여기소(汝基沼)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시골에서부터 올라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 못에 몸을 던졌다 하여.,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
현재, 그 연못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 경로당이 있지만
조선 중기 이미 집터로 변하여
그 전설 만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
조선 숙종때 북한산성 축성 담당 종사관을 사랑한.,기생.
왕명으로 축성에 전념하느라 6개월 간 나오지 못한 종사관.
국법이 지엄하여 면회도 할 수 없고, 편지도 전하지 못한.,기생.
(그당시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불과, 6개월 만에 완공된.,북한산성.)
그 종사관의 소식을 몰라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종사관이 변심한 것으로 오해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기생.
여기소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전한다.
(그당시 지방관청에 소속된 관기들은)
(변방 관리 군사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집 떠난 고달픔을 달래주는 것이 임무였다.)
.
(이들은 관리가 부임할 때마다 소집 점고(點考)를 받고 )
(빨래, 바느질, 수청까지 들면서 천민 신분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관리 임기가 끝나면, 이별이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
.
(관기는 관물 또는 공물로 취급되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하여, 기생과 관리는 사랑에 한계가 있었다.)
종사관이 산성 축성을 완성하고나서야
산성을 나와 가장 먼저 기생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 기생이 여기소에서 숨을 거둔 후였다.
'그대 여기서 죽었는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왜 참지 못하고 여기서 죽었는가?"
너 여(汝), 여기 기(其), 못 소(沼)
그리하여, 이곳에 그 애달픈 뜻을 담아
‘여기소(汝其沼)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여기소에서 좀 더 올라가면.,백화사.
비구니 사찰.,백화사.
조선시대 퇴임 궁녀들이
여생을 보낸 곳이 아닐까?
살아서도
죽어서도
오직 왕만
섬겨야하는
궁녀의 일생.
왕의 생전에는 궁궐에서
왕의 사후에는 사찰에서.,
백화사 담장 뒷편은 조선왕실 내시부.,공동묘지.
백화사는 궐에서 나온 궁녀들.,노후 은둔지였을까?.
백화사는 조선시대 '정업원'의 역활을 한듯.,여겨진다.
후손이 없는 궁녀들이 궐을 나온 이후
노후에 몸을 의탁한.,'비구니 사찰' 백화사.
내시부에서 백화사 비구니를 돌본듯 추정된다.
궁녀가 병들면
궁궐을 나와야 하는
조선시대.,왕실의 법도.
사가(私家)에 몸을 의탁할 수 없는 궁녀는
내시부에서 보살피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궁녀는 한번 궁궐에 들어가 입궐하고나면
죽는 순간까지 궁녀 신분으로 평생 살아야 하며
비록, 왕의 성은을 받지 못했어도 정절을 지켜야 했다.
의녀가 앵무새 피를 팔뚝에 떨어트려 흘러내리면
궁녀가 될 수 없었고 살에 묻으면 처녀로 인정 받는
처녀감별법을 통해 입궐하고나면, 평생 외로움의 연속.
궁녀는 신분 상으로는.,'왕의 여자.'이지만.
궁녀가 왕의 성은을 받기란.,하늘의 별 따기.
그 맺힌 한이 하늘에 닿아
가뭄의 원인이 된다고 하여
대기근 때에는 궁녀들을 방출.
사실 상, 궁녀를 감원 차원에서
퇴출할 경우에도 지켜야 할.,정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궁녀 간
엉덩이에 벗 '朋' 문신도 성행하였고
남근 노리개로 밤의 외로움을 달랬다.
그러나, 궐내 궁녀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동성애를 하거나 별감 또는 내시와 관계 할 경우
궁형, 곤장100대, 교형, 참수형 극형 등을 받았다.
죽음이 두려우나
사랑에 굶주린 궁녀들은
동성애에 빠지기도 하였다.
문종이 세자였던 시절에, 세자빈을 멀리 하자
세종은 미모의 순빈봉씨를 새 세자빈으로 책봉.
그러나, 순빈봉씨는 궁녀와의 동성애로 쫓겨난다.
현종8년(1667년) 꿏다운 이팔청춘 나이의 궁녀.,귀열.
깊고도 깊은 궁궐의 기나긴 겨울밤이 견디기 힘들었다.
하여, 궁궐 서리인 형부를 유혹하여 통정한 사실이 발각.
극도로 흥분한 현종은
대비전 나인 귀열에게
즉시 참수형을 집행했다.
그리하여, 일단 궁녀가 되면
궁궐에서 퇴출된 궁녀라 해도
혼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 국회의사당.
조선시대 궁녀들의 공동묘지 양말산(190m) 터.
조선시대 양, 말 '국유 방목장'이 있었기에.,양말산.
양말산 샛강 영등포 쪽 연못가에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 폐지 전까지
용추(龍湫)라는 내시 시술소가 있었다.
고종 34년(1897)
대한제국 성립 전까지
음경은 남겨놓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그 비명소리가 멀리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천둥 번개 치는 비오는 날에만 내시 시술.
시술 도중에 죽는 경우도 잦았고
시술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경우도 잦았다 한다.
이곳에서 시술 받은 내시들에게는
용추가 새 생명을 부여받은 곳이기에
"시술한 의녀를 어머니라 불렀다." 한다.
이 일대에는 내시의 한이 서려있어
오늘날 국회가 늘 시끄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지관들의 이야기도 있다.
여의도 양말산 궁녀공동묘지는
조선시대 궁녀들의 묘터 중에서도
한맺힌 혼이 많이 묻힌 곳인듯 하다.
18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국사의사당 뒤편에
거대한 남근석을 세워 여인들의 한을 달랬던 곳.
원래, 명당은 기맥이 흐르고 모여서 진혈터를 형성.
그러나, 양말산 터는 기맥이 거의 없어
생기 없는 죽은 땅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
화장터나 공동묘지는 음기 넘치는 곳을 골라
일부러 맥이 꽉 뭉친 곳에 터를 쓰기 때문이다.
"망자가 사는 음기 가득한 곳에서는
산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을 리 만무."
“나쁜 기운이 가득한 곳에 사람이 계속 머물면
몸 안에 균형이 무너져서 분란이 일어나기 마련.”
그래서, 오늘날 국회의사당은 분란이 잦은 것일까?
백화사 인근에 위치한., 북한산 초등학교.
원래, 조선시대 궁녀들의 묘터 였다는 곳이다.
이곳 의상봉 자락 역시 조선왕실 묘역과 관련 깊다.
진관동 백화사계곡 주변에는
조선왕실 종친들의 묘역이 많고,
궁녀들의 묘역, 내시부 묘역이 있다.
원래, 내시는 왕의 침소를 지키는 자.
이들이 고자가 되어 내시부에 들어가면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쳐야만 내시가 된다.
국가에 고변이 발생하였거나
왕을 해치려는 정변이 일어날 경우
왕의 은신처를 함구하는 것은 기본 소양.
입조심을 위해 나무에 꺼꾸로 매달리거나
코에다 모래를 넣는 고문 등 입조심 수련과정.
과거급제자 버금가는 학문을 쌓아야 내시부 입성.
하여, "조선왕실 제2 의 성도(聖都)" 또는
"신들이 사는 곳.(옛주소 신도읍 : 神道邑)"
조선시대 사자(死者)의 마을이었다는.,신도읍.
'귀신 神,
길 道,
고을 邑'
'조선시대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이 더 행세했다.'는
의상봉 아래.,'백화사계곡 일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속하지만
그 후손들의 발길이 이미 끊긴 묘가 많아
멧돼지 출몰 다발구역일 만큼 인적이 드문 곳.
요즘도 인근 주민들이
새벽 산책을 꺼리는 곳.
한낮에도
이곳을 지나치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
서울특별시 임에도불구하고
멧돼지 가족이 땅을 판 흔적들이
여기저기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자의 마을인 이 일대는
간간이 등산로에서 벗어난 등산객들이
길을 찾아 묘지 사이를 방황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도성에서 십리까지는 묘를 쓸 수 없었는데,
이말산 일대는 성저십리 외곽지대라 분묘가 많은 지역.
조선시대에는 내시부에서 이곳 분묘들까지 관리했던걸까?
1960~1970년대까지만해도
내시부 후손들이 많이 살았고
묘지기 주민들이 많이 살던 마을.
조선시대 역대 내시부 상선들의 묘소가
유일하게 보존되어 몰려있는.,내시부 별장.
약 5만평 남짓 규모로 수영장 및 별장도 있다.
내시부 상선은.,조선시대 내시부 최고위직 벼슬.
특히, 명종 재위 때 내시부상선이었던 환관 노윤천.
그의 묘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이 묻힌.,내시부 묘역.
왕이 내시부 상선에게 하사한 후,
그 수양아들의 후손이 대물림으로
소유하였거나 지켜온 별장인듯 하다.
그러나, 북한산초등학교에서부터
이말산 인근까지 내시부 별장 주변에
산재한 묘역은 아직까지는 방치되어 있다.
'내시부 별장' 철조망이 끝나는 지점부터
백화사계곡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열린다.
'등산로 따라 올라갈까? 개울따라 올라갈까?'
등산객 대부분 등산로 따라서 오르지만
개울 따라 오르면 더 아름다운 비경지대.
북한산 '의상봉 가는 길' 백화사계곡 입구.,등산로.
'비구니 사찰' 백화사를 지나면 계곡 풍경이 아름답다.
조선 말, 사대부들이 기생과 풍류를 나눴다는.,여름 피서지.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인근 여기소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다는.,계곡물.
여기서부터는
계곡을 즐기기
딱 좋은.,개울길.
'백화사계곡' 개울길로.,들어서면
규모는 작아도 비경지대의 연속이다.
연인 사이라면 단둘이 찾기에 적당한 곳.
폭포 지대도 있고
개울가 암반지대도 있고
마당바위 쉼터도 간혹 나타난다.
조선시대 무관과 기생 같은 연인이
한밤중에 이곳에서 만나 함께 목욕하며
남몰래 회포를 풀었음직한 개울가 너럭바위.
사랑하는 사이라면
함께 목욕하고도 싶고
서로 정분을 나누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리라.
고요한 밤의
정막을 깨는
개울가 물소리.
달빛 또한 부끄러워
구름 뒤에 숨었으리라.
혹시, 누가 엿보지 않을까?
조선시대에는
백화사 비구니도
역시 이곳으로 와서
몸과 마음을 씻었으리라.
마음을 씻고 또 씻어도
쉽게 씻어지지 않는.,세속(世俗).
세심대(洗心臺)라 명명되었음직한 곳.
그러나, 이곳에 전하는
지명은 '백화사계곡' 뿐이다.
그외 지명은 맥이 끊긴 것 같다.
백화사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기자기한 비경지대.
선비와 기생들이 풍류를 즐겼음직한 개울가 너럭 바위들.
백화사계곡을 끝까지 거슬러 오르면., 마지막 폭포가 넓은 소.
이곳 위로 올라가 보면
집채보다 큰 바위가 있고
그 큰바위 밑에 동굴이 있다.
무당들의 굿 흔적을
자주 볼 수 있는 동굴.
그 동굴 안에서
은밀하게 솟는 샘물은
마치, '여인의 상징' 인듯.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여근곡에 위치한 동굴은
사자(死者)의 환생을 의미.
.
'용출봉의 정기'를 의미하는 샘물일까?
'아니면, 불교의 윤회설'을 뜻하는 곳일까?
아직도 무속신앙 기도처로서 각광 받는.,동굴.
간혹, 동굴 안에는 촛불이 켜져있고
무당이 굿을 한듯 제수음식이 널려있고
그곳 주위는 경사급한 암반지대가 감쌌다.
그 앞 암반 위에 목욕하기 적당한 소가 있다.
옛부터 이곳을 찾는 무녀들이 목욕재개하던 곳.
그 뒤로 돌아 올라가면, 또 하나의 계곡이 숨겨져 있다.
마치, 처녀의 그곳을
연상하게 하는.,처녀골 산세.
그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큰바위.
'큰바위 아래 동굴은
굿판 무녀(巫女)들에게는
사자(死者)의 환생(還生)을
염원(念願)하는 기도처인 곳일까?'
집채보다 더 큰바위가
개울의 입구를 가로막았고
그 뒤에는 개울이 숨겨져 있다.
처녀 자궁(子宮)을 보호할
처녀막을 상징하는듯한.,풍경.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비경.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비좁고 경사가 급해 오르기가 까탈스럽다.
특히, 암반의 물이끼가 진로의 오름짓을 거부.
마치, 생사(生死)의 경계선을 오락가락하는듯.
살떨리는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처녀골 산세.
그 처녀골 산세의 개울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큰바위.
큰바위에 가리워진.,개울.
위치가 비밀스럽고 은밀해
인적이 끊긴 계곡 속.,처녀골.
계곡이라 부르기에는 작은 규모이고
개울이라 부르기에도 규모가 큰 편이다.
마치, 하늘나라 선녀들의 목욕처 같은 곳.
백화사계곡 속에 숨겨진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계곡.
마치, 별천지 인양 아름다운 곳.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을 연상케하는 곳.
북한산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기도 하다.
하여, 하산길에 목욕하고픈 女心을 자극하는 곳.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을듯
도도한 매력을 발산하면서도
보일 것은 드러내고 싶은.,女心.
북한산12성문 올리지 등반을 하고나면
온몸은 물론 속옷까지 땀에 흠뻑 젖는다.
하산 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민망할 만큼.
"선생님!~ 망 좀 봐주세요.
우리 여기서 땀 좀 씻을께요."
'12선녀산악회'에서는 유일한 홍일점.
할아버지 선배님이자 클라이밍 선생님.
그래서, 하산길에 몇번 망을 본적이 있다.
12처녀가 "12선녀탕"이라 부르던 곳.
피부 미용에 효험 있다는.,북천(北川).
북천이 아니더라도 땀을 씻고 싶은 쉼터.
.
등산로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계곡.
그곳을 지나면, '가사당암문'이 나온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 있는.,가사당암문.
조선 숙종때 축성한 북한산성의 일부분이자
북한산성 외곽 12성문 중 하나인.,'가사당암문'.
조선시대 여기소 전설 속 종사관이 축성한 곳일까?
그곳 지나 능선 상에 도달하면
등산로 길가에 있는.,수도승바위.
가사를 입은듯한 수도승을 닮은 바위.
그래서, '가사당암문'이라 부르는걸까?
그 아래 의상봉에 위치한 사찰이.,국녕사.
의상대사 수도처.,궁녕사.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수도에 정진한 기도처.'
훗날, 조선시대 기도처에 세운 사찰이.,국녕사.
국녕사를 품고 있는 의상봉을 지나면.,용출봉.
용출봉.
용출봉.
남근처럼 우뚝 솟은 용출봉 산세.
용이 하늘로 솟을듯한.,용출봉(龍出峰)
독립된 암봉이라 낙뢰사고가 잦은.,곳이다.
백화사계곡 여근곡과 어울리는 산세.
백화사계곡에서 흘러내려 고인.,여기소.
여기소마을 입구.
..................찾아가는 길.............
여기소에서 유래된 지명.,여기소마을.
구파발역 1번출구 앞에서 704번 버스 탑승
백화사입구에서 하차하면.,여기소마을 입구.
............................................................
떡시루를 닮은 산세라.,증취봉.
증취봉 아래 부왕동암문 인근.,동굴바위 쉼터.
의상봉능선이 끝나는 지점이자 등산객들의 쉼터.
'의상봉~용출봉~ 용혈봉~ 증취봉'.,'의상봉능선'
의상봉능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경지대., 증취봉.
증취봉 ~부왕동암문~환희대~삼천사계곡~삼천사.
조선시대 연산군 재위때 비구니사찰이었던.,삼천사.
삼천사계곡은 예나 지금이나 풍광 좋은 곳.
조선 중기 선왕의 궁녀들이 몸을 담았던 곳.
삼천사 곁에 능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진관사.
진관사 입구.,한옥마을.
진관사 입구
2015년 3월 진관사 탬플스테이
서울시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문체위·위원장 이상묵)는
3월 10~11일 1박2일에 걸쳐 진관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체험.
첫날 일정은 진관사 역사와 템플스테이 소개, 타종, 예불체험.
둘째날 새벽 3시 30분부터 새벽예불과 108배, 참선, 포행, 다도.
2014년 10월 25~26 탬플스테이.
진관사.,16나한도.
'16나한도'는 왕실과 상궁들이 후원하여 조성.
'왕실 발원 불화'로 조선말 시대상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활약하던 진철 비구가 그린 1884년 작품.
이말산.,진관공원.
'진관사~구파발' 사이에 있는.,이말산.
귀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이(耳)말산.
이말산에 위치한 진관공원은 은평뉴타운 산책로.
진관공원은 은평뉴타운 및 북한산 경관이
한눈에 들어와 요즈음 찾는 이들이 많은 곳.
.....................진관공원...........................
해발고도 132.7m의 이말산이 곧 진관공원이다.
면적 98만3,791㎡로 북한산국립공원까지 이어진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이 성묘를 다녔던 곳이 진관공원길.
지역주민의 일상 산책로로 주로 이용되고 있고
구파발역에 바로 인접하여 숲길로 북한산과 연결.
지하철 3호선과 704번 버스 등 대중교통을 통해서
북한산으로 진입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시민공원
.....................................................................
은평구 진관동 산74.,이말산.
이말산.,진관공원.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 앞.,폭포광장.
그곳 폭포 위로 올라가는 등산로가.,이말산 입구.
이말산에 들어서면 호젓한 숲속 오솔길이 펼쳐진다.
진관내동 533번지.,지하철 3호선 구파발(舊把撥)역
조선 중기부터 문서를 전달하는 파발역참이 있던 곳
구파발역 폭포광장 곁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이말산.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나즈막한 야산.,이말산.
女心을 자극할만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구파발역 폭포광장 위에 위치한.,연못.
그곳 연못에서 피고지는.,연꽃.
그 연못 인근에 위치한.,갈대밭.
미풍(微風)에도 흔들리는.,갈대 숲.
여심(女心)도 바람에 흔들리는 것일까?
그곳부터는 마냥 걷고만 싶은 숲속 오솔길.
이말산 숲속 오솔길은 진관사로 이어진다.
이말산 진관공원은 조선시대 묘터가 많다.
이곳 묘터은 진관사 수륙제와 관련 깊은듯..
은평구 지도는 물고기 형태이고
진관동은 그 머리에 해당하는 지역.
"물과 물고기는 왕과 신하의 관계."- 정조.
은평구 지도.
연못에 물이 없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고
연못은 조선왕실이고 물은 곧 왕이라는 뜻.
조선시대 은평구는 퇴임 내시와 궁녀들의 삶터.
은평(恩平)이란 왕(王)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그 왕을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곳이란 의미를 품고있는.,지명.
조선시대 진관사의 연례행사였던.,수륙제(水陸齊).
육지의 땅위나 땅 밑 그리고 바다 혹은 강에 살고 있는
미물중생이나 축생들을 위해 지은 죄업을 씻는 불교의식.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세종과 세조 재위 때에는
유교를 숭상하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실에서는 전통적인 중요한 행사로 강행한.,수륙제.
진관사 수륙제
진관사 수륙제(津寬寺 水陸齋)는 조선초기부터
온 수륙(水陸)의 고혼 천도를 위하여 행해졌던 불교의례.
2013년 12월 31일 대한민국 중요민속문화재 제126호로 지정.
조선초기부터 불교의례로 조선왕조실록에
설행기록이 나타나는 역사성과 예술성이 높다.
개인 천도의 성격을 띤 영산재에 비해
대중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고 낮재․밤재
합설이라는 의례 상 특수성을 지니므로
중요무형문화재 신규종목으로 지정하였다.
오늘날, 은평구 지도를 살펴보면
수륙제의 흔적 또는 영향인듯 하다.
진관사 & 진관사계곡.
진관동은 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속한 동이다.
북쪽에 북한산 응봉이 있고, 동쪽에 경기도 고양시,
동의 많은 면적이 북한산국립공원 내에 포함되어 있다.
진관동 서쪽에 구파발동, 남쪽에는 불광동.
진관동 지명은., 응봉 기슭 진관사에서 유래.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혈면에 속했다.
1914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津寬外里).
1973년 진관외리는 서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79년 은평구 관할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이 동은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이 같다.
197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진관동.
인구증가로 1975년 진관내동과 외동으로 분리.
진관내동에서는 구파발동 행정도 담당한다.
옛 지명은 탑골, 삼천리골, 못자리골(못절터),
여기소, 마고정, 재각말, 잿말, 폭포동 등이 있다.
동의 많은 지역이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
북한산국립공원 행락객 등 유동인구 및 교통량 증가.
통일로, 진관사길 주변에 개발집중, 기자촌, 은평경찰서.
진관사 경내
동 불암사, 서 진관사, 남 삼막사, 북 승가사.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1번지.,진관사(津寬寺).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아 왔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명령에 의하여
조종선령(祖宗仙靈)과 순국충열(殉國忠烈),
희생당한 고려 왕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수륙대재(水陸大齋)를 베풀어 왔었다.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상문, 신숙주, 박팽년 등을 독서하게 한 진관사.
본래, 1010년(고려 현종 1년)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
진관사는 고려 8대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을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 은혜에 보답하고자 절을 짓고 진관사라고 하였다.
.................신혈사(神穴寺)...................
은평구 진관동 진관사(津寬寺)에 있었던 절.
고려 성종 때 여철(如哲)이 창건했던.,신혈사.
고려 5대 경종의 비였던 천추태후(千秋太后)는
7대 목종에게 후사가 없음을 기화로 김치양과 짜고
차기 왕위계승자인 대량원군을 몇차례 죽이려 하였다.
태후는 대량원군을 없애고 자기 사생아를 키워
차기 제8대 왕위계승자로 삼으려는 심산이었다.
태후는 목종에게 말하여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게 하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다시 신혈사로 옮기게 한 것.
당시 신혈사는 진관조사(津寬祖師) 혼자 수도하고 있던 작은 암자였다.
그래서, 목종을 죽이기 쉬울 곳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진관조사가 이를 간파하고 방밑에 굴을 파고
그 위에 침상을 놓아서 12세의 대량원군을 숨겼으므로
왕태후가 보낸 자객은 대량원군 숨은 곳을 찾지 못하였다.
대량원군이 이곳에서 3년을 보낸 뒤 목종이 죽자
송도로 돌아와서 대량원군은 제8대 현종이 되었고
현종은 옛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절을 중창하였다.
1090년(선종 7) 10월 왕은 이 절에 행차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베풀었다고 하며,
1099년(숙종 4) 윤9월, 1110년(예종 5) 10월 행차.
그뒤로 신혈사 역사 및 폐사 연대는 전해오지 않는다.
......................................................................
대량원군은 12살때 궁에서 쫓겨난 이후에
심혈사에 숨어 있다가 1009년(목종 12년)에
대신들의 몽영으로 제8대 고려 왕위에 올라
심혈사를 진관대사 이름을 따 진관사라 했다.
조선시대 진관사는 나라의 수륙대제를
왕이 여러번 행차해 물속의 외로운 넋과
아귀를 위해 법석을 베푸는 제를 올렸던 곳.
신혈사는 삼천사 암자였다고도 전하며
그 위치는 부왕동암문 또는 환희대 인근.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는 전하지 않는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진관동 문화재로는.,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보물 657)
삼천사지 담벽에.,고려 초 마애여래입상(불상 높이 2.6m)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127·1., 삼천사(三川寺) .
신라 원효(元曉)가 흥국사(興國寺) 등과 함께 창건.
그 뒤 중창 및 중수에 관한 역사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고려 현종 때 이 절 등의 승려들이 쌀로써
술을 빚어 처벌을 받았다는.,고려사 기록이 전하며,
6·25 때 불탄 뒤 1960년 중건한 대웅전과 선실(禪室) 등.
대웅전 위쪽 30m에 보물 제657호 석가여래입상.
자연바위에 새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듯.
양각과 음각을 함께 섞어 조각하여 선을 잘 살린 작품.
삼천사(三川寺) 경내에는 오래된 큰 석조(石槽)와
고려시대 이영간(李靈幹)이 쓴 비명(碑銘)이 있다.
조선중기 연산군이 사냥 나왔다가
이곳 선왕의 후궁과 궁녀들이었던
비구니들을 희롱한 야사가 전한다.
삼천사계곡은 '시크릿 가든' 비경지
삼천사~환희대~부왕동암문~증취봉.
연산군이 흥청들과 환락을 즐겼다는 곳.
부왕사지
부왕동암문 안 증취봉 인근에 청단풍 숲.
옛 야영장터 넓은 공터에 주춧돌과 기와들.
그곳 부왕사지가 연산군 유흥터로도 전한다.
이말산
조선왕실을 대대로 섬긴.,내시부 상선 및
역대 왕의 유모였던 상궁들의 묘터.,이말산.
얼마나 많은 잊혀진 사연들과
묻혀진 전설을 품고있던 곳일까?
이말산.,옥궁임씨 묘소.
......이말산.,상궁 옥궁임씨 묘소.....
2004년 은평 뉴타운 지표조사 당시 발견.
상궁 임씨(1635~1709)는 본관)이 옥구(玉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임효원.
할아버지는 통정대부를 역임했던.,임회.
어머니는 '해주오씨'인 오금금의 딸이다.
상궁 임씨는 13살때인 1648년(인조26년)
액정서에 배속되어 궁궐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현종'이 된 원손의 동궁에.,30년간 소속.
액정서는.,왕이 쓰는 벼루 및 궁궐의 열쇠를 보관,
궁궐 정원의 설비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상궁 임씨는숙종과 각별한 사이.
숙종이 어린 시절에 "이모"라고 불렀다.
인조 계비와 숙종의 생모를 모신 때문이다.
1709년(숙종35년) 임 상궁이 75세 병사하자
관재와 포복을 하사하여 장사 지내게 하였다.
부모와 조부의 선영에 묻힌지 4년 후의 일이다.
...............................................................
아말산 일대에는
그 후손들이 끊겨
제멋대로 나뒹구는
묘비가 많았던 곳이다.
2015년 5월 서울시 지원으로
은평구 문화관광과에서 정비
서울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이말산(132.7m)은 은평구민 휴식처이자
은평뉴타운을 애워싸고 품고있는 산책로.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올라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가도.,이말산 등산로.
조선시대 성저십리에 해당하는 이곳 지명은 '신혈'
'신혈' 지명은 신혈사(神穴寺)에서 유래되었다.
북한산 서쪽 기슭에 있는 진관사의 옛 이름으로,
고려 8대 현종이 왕에 오르기 전에 숨어 지내던 곳.
당시 주지였던 진관조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유지.
대량원군(大良院君)이 즉위 한후,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를 '진관사'라 한것이 오늘날 진관동 지명의 유래.
이말산(李末山)
이말산(莉茉山)이
곧, 현재 진관공원.
약 30만평 규모.,아말산.
이말산은 매장문화재 보고이며.
말리(茉莉 : 자스민)의 자생지였단다.
즉, 이말산은 말리(茉莉)에서 유래된 지명.
한양 도성 및 한성부로부터 경계 지점의 시작이었다.
이곳은 내관, 궁녀, 중인, 사대부 묘역이 혼재되어 형성.
그중에서도 내관 및 궁녀 묘역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묘비 주인공들의 신분은
비문 글귀와 석물들로 보아
대부분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
이말산 묘역은
상궁 임씨 처럼
조선왕실과 밀접한
가문들 또는 인물들이
묻힌 묘역으로 추정된다.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 98만3천㎡ 일대
조선시대 내시와 궁녀들의 다양한 분묘.
1746기 분묘와 1488기 석물이 널려있던 곳.
............이말산 묘역.........
이말산 북사면 서에서 동으로
해주오씨, 밀양천씨, 우봉김씨.
영천이씨, 한산이씨, 완산이씨,
칠원윤씨, 묘역이 분포하고 있다.
이말산 남사면 사에서 동으로
청주한씨, 임천백씨, 임실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 환관 노윤천 친가,
선산백씨, 옥구임씨, 전주이씨 은언군파,
안산이씨, 김해김씨, 청주방씨, 청주한씨.
통진최씨, 김포김씨, 온양정씨, 수원최씨,
백천조씨, 진주강씨, 광주이씨, 제주고씨 묘역.
이외에도 내시 궁녀 모역, 중인계급인 역관 묘역,
평민시인 '위항시인' 묘, 집단 아기 묘, 등이 산재.
그중 은평뉴타운 지역 전주이씨 효령군파 묘역은 이장.
2010년 이말산에는 무연고 묘지313기,
유연고 묘지1433기 등 총 1746기 분묘.
또한 비석277기, 비신69기,문인석42기,
망주석64기, 동자석66기, 향로석238기,
상석435기,산신단8기,기단 254기, 제단2기,
장명등3기, 표지석4기, 혼유석26기 등이 조사.
............................................................
덧말.
초안산.,세대공감공원.
'도봉구 창동~ 노원구 월계동' 나지막한 야산.,초안산.
319,503㎡ 면적에 조선 시대 환관 묘역을 비롯하여 양반,
중인(中人), 궁녀(宮女), 서민 등 다양한 계층 묘 1,000여 기.
초안산.,위령제.
무덤을 지키는 여러 석물이 흩어져있는.,초안산.
이곳에 조선시대 묘역이 밀집해 있는 이유가 뭘까?
도봉산 자락 도봉구는 하늘의 중심이자 옥황상제 거처.
자미원(紫薇垣)의 기를 집중적으로 받는 명당이라고 한다.
초안산은 배수가 잘되는 마사토 지질 야트막한 야산이며
산 왼쪽에 중랑천이, 오른쪽에 우이천이 흘러 풍수상 명당.
조선시대 한성 사자(死者)의 문은.,광희문, 수구문, 시구문 뿐.
광희문 밖 성저십리(약 3.93㎞)에 있는 도봉산 & 북한산.
두 산의 경우 풍수지리상으로 서울을 지키는 진산이므로,
일반인 묏자리로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이 두 산을 제외하면
초안산 만이 일반인 묘를 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된다.
이런 기준에 의해 초안산은 한양 동북쪽에 가장 적합한 묘지.
그 결과 사대부, 내시, 궁인들이 초안산을 묘지로 사용함으로써
현재, 1,000여 기 묘가 산재해 2002년 3월 9일 사적 제440호로 지정.
초안산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무려 40여 개.
대부분의 진입로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졌으나,
2000년대 이후 공원과 산책로가 많이 정비된 것.
노원구 월계동에 2008년 만들어진 ‘비석골 근린공원’
그 안에는 초안산 주변에 흩어진 비석 30기를 모아 전시.
노원구 월계동 쪽에서 초안산을 만날 수 있지만,
도봉구 창 2동 주택가 골목을 지나면.,초안산 자락.
초안산에 수많은 묘가 모두 내시와 궁녀 무덤은 아니다.
현재 어느 정도 분묘가 남아 있는 묘를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사대부의 이름 모를 묘도 초안산에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
현재, 그 존재가 확인된 내시 묘소는 ‘승극철 부부 묘’가 유일.
이것이 현재 초안산에서 유일하게 묘비를 갖춘 내시 묘인 때문.
또한 초안산에서는 상궁 개성 박씨(開城朴氏)의 묘도 발견되었다.
이들을 통해서 조선시대 내시와 궁녀의 삶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
............
승극철 부부 묘는 초안산 동남쪽 정상 녹천정(鹿川亭) 아래.
묘비의 전면에 ‘통훈대부 행내시부 상세 승공 극철 양위 지묘'.
'通訓大夫行內侍府 尙洗承公克哲 兩位之墓’ 라고 표기되어 있다.
뒷면에 ‘숭정 기원 후 갑술 삼월 일 립(崇禎紀元後 甲戌三月日立)’
승극철이 내시부 정6품 상세직(尙洗職)에 있었으며 통훈대부라는
정3품 품계를 받았던 인물로, 부인과 함께 쌍분으로 합장한 양위 지묘.
승극철 집안의 족보.,『연양군파 가승록(延陽君波家乘錄)』
승극철은 선조 대 상선(尙膳)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이 있는 연양군(延陽君) 김계한(金繼韓)의 맏손자이며, 아들은
박중창(朴重昌)이고, 손자는 오윤환(吳允桓)으로 표기되어 있다.
1990년 대 초반 승극철 부부 묘 일대가 개발되기 전까지
50기 내시 묘가 있었으나, 현재 화장되거나 어디론가 이장.
조선 시대에 이장한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양주 사내리(沙乃里)
현재,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로 이장한 연양군 파조(波祖)인
숭록대부 김계한의 묘와 그 아들인 상선 김광택(金光澤)의 묘가 있다.
김광택의 묘비 명문에 따르면, 김계한→김광택→김선필→
정중명→서경달→최봉좌→백희장→홍명부 등으로 이어지는
내시 가계가 선산인 초안산을 묘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관들은 양자(養子)로 대를 잇기 때문에
김계한의 족보에서 볼 수 있듯이 부자간에도
성이 다른 경우가 많았으며 김계한의 부인은
복천 오씨로 그 5대 족산이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그 후손들이 효촌리 뒷산과 초안산에 묘소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김계한 이후, 즉 17세기 중엽 이후부터
초안산이 내시 가계 선산으로 묘가 계속 만들어진듯.
이장 전 김계한 묘 위치는 승극철 묘 위쪽인
현재 녹천정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승극철 가계는 선조 대 김계한을 시조로 하며,
역대를 거쳐 가장 번성하였던 내시 가계이다.
이들은 각심사(角心寺)가 있던 선산에 모셔졌고,
대를 이어 이곳 선산인 초안산에 묻혔던 것 같다.
이들 내시족의 한 계파가 수백 명에 달하는 것을 보면
조선 시대 가장 번창하였던 내시들은 이곳이 공동 묘역.
현재 확인되는 비문의 주인 외에도 마모되어 지워졌거나
흩어져 분식되었을 묘비, 묘만으로도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수색산 ~봉산 ~ 이말산' 일대는
내시 및 궁녀들의 공동묘지 묘터가 많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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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정원 - '여기소 ~ 이말산 진관공원'
선경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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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22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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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북한산에 앍힌 해박한 설명으로 좀더 친근해질수가 있었네요...
곳곳에 어린 말로 못다한 기막힌 사연들이 많이 있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예전에는 늘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곳들이었지만
지금은 멈춰 서서 그곳에 관한 유래를 찾게 됩니다.
'여기소~이말산' 발걸음마다., 묻혀진 역사의 흔적들.
'한문 각자, 비문'들이 많이 보이지만 해석이 어려워요.
예전에는 낫 놓고.,알파벳 L 자는 모르지만
한자 수만자 아는 지인이 있어 해석이 되었는데
요즘, 고령이라 함께 산에 오르지 못해 답답합니다.
여기에 올린 답사 기록이
제 한계인 점이 아쉽습니다.
이글 사진은 Daum에서 발췌.
배려 깊은 덕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