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건넨 명함을 받아 든 순간 “에고, 난 명함이 없는데요. 어쩌지. 잠깐만요. 여기 제 주민등록증요. 최양락 맞죠?” 어릴 때부터 들어 온 낯설지 않은 하이 톤의 목소리와 함께 느닷없이 지갑 속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개그맨 최양락(46세)과의 유쾌한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1980~90년대 브라운관을 종횡무진 누비며 ‘남 그리고 여’, ‘고독한 사냥꾼’, ‘네로 25’, ‘괜찮아유~’ 등으로 사람들을 웃긴 최양락. ‘네로 25시’를 시작으로 ‘코미디 전망대-모의국회’ 등 출연한 콩트마다 세태와 정치상황, 그리고 사회지도층의 행태를 비꼬는 등 당시만 해도 금기였던 정치풍자와 시사개그라는 분야를 개척하며 웃음을 주었다. KBS코미디연기대상, 백상예술대상 코미디연기상, 한국방송대상 코미디디언상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으며 개그맨으로서는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그가 언제부턴가 TV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는 더 즐거운 개그를 만들기 위해 1998년 호주 액터 스쿨로 유학을 떠났고, 그 사이 웃음에 대한 대중들의 취향도 변했다. 2001년 ‘알~까~기’ 라는 유행어를 만들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듯했지만 대중의 시야에서 그는 점점 사라져 갔다. 그런데 요즘 30~50대 직장 남성 사이에서 그의 인기가 되살아나고 있다.
매일 저녁 8시 10분 MBC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 그는 배칠수와 함께 성대모사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오랫동안 한국 정치를 주름잡았던 김종필 씨 등 ‘정치 9단’ 3김을 어수룩한 ‘퀴즈 9단’으로 변신시켜 말도 안 되는 퀴즈 쇼를 벌인다. 이른바 ‘3김 퀴즈’.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YS와 DJ, JP. 각 당이 국회의원 선거 공천자를 발표하던 날의 문제는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어 버린다는 뜻의 고사성어는 무엇일까요?”였다. YS가 가장 먼저 ‘정답’을 외친 후 “필요할 땐 쓰고 필요 없어지면 버린다. ‘세상이치’”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사회자가 틀렸다고 하자 “세상이치가 그래. 다 그런 거지. 뭐 그라노?”라고 항변하고, 뒤이어 DJ, JP의 엉뚱한 대답과 함께 세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대충토론’은 요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정치인들을 성대모사로 재현해 정치상황과 세태를 풍자한다.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한 번쯤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최양락식 정치풍자, 시사개그를 부활시킨 것.
“제 또래에게 시사는 재미있는 개그 소재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이다, ‘반독재’다 하면서 함께 암울했던 시대를 보냈기에 세태나 정치를 비꼬고, 풍자하는 것이 막힌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었을 겁니다. 5~6공 때 누군가를 연상시킨다고 ‘순자’라는 이름이나 주걱턱과 관련된 개그는 엄두도 못 냈습니다. 대머리나 느릿느릿한 말투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런 시대에 ‘네로’ 같은 정치풍자 개그를 하면 사람들이 통쾌해하기도 하고, 걱정도 하면서 개그맨들을 예뻐했습니다.”
최양락은 자신이 세태와 정치풍자를 무기로 개그 무대를 누빌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가장 크게 달라진 건 꼭꼭 숨기고 닫혀 있다 모든 것이 허용되고 열린 사회로 바뀌었다는 것이죠. 우리와 달리 지금 세대에겐 더 이상 시사나 정치가 관심 대상이 아니에요. 인터넷만 들여다봐도 ‘MB가 어떠니, 노통이 어떠니’ 하며 속된 말로 ‘제일 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까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개그맨들이 나와 떠드는 이야기가 관심 대상이 될까요? 그러면서 시사개그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런데도 그가 여전히 시사개그를 고집하면서 각광받는 이유는 뭘까? 그는 “시사나 정치풍자는 40~50대인 우리 또래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라고 했다.
“여전히 제 개그를 원하고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을 저와 함께한 40대, 50대들이죠. 이들이 즐거워하고 재미있어하는 이야기가 바로 시사개그예요. 브라운관에서 사라진 시사개그를 그리워하는 세대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거죠.”
잔잔한 웃음 주는 시사개그 부활시켜
<재미있는 라디오>가 출발한 것은 2002년 4월. 함께 성대모사를 하는 파트너 배칠수 씨, 작가 박찬역 씨와 함께 끊임없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며 호흡을 맞춰 온 것이 귀갓길 중년 남성들의 귀를 사로잡은 비결이다. 그는 “칠수가 없었다면 지금 같은 맛을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건 영업 기밀인데”라면서 소시민이 나누는 정치풍자 개그를 새로 준비 중이라고 한다.
“세상 걱정은 지들이 다 하는 것 같은 충청도 아저씨 걸빙이(야당)와 절빙이(여당)를 캐릭터로 내세우는 거죠. 술자리에서 안줏거리로 등장할 수 있는 그런 시사개그를 준비 중입니다.”
1981년 MBC 라디오의 개그콘테스트로 데뷔해 개그맨의 길에 들어선 지 28년. 그는 “웃음에는 정석이 없다”며 “야구에서 가운데 담장을 넘겨야만 홈런이 아니잖아요? 오른쪽 담장이든 왼쪽 담장이든 일단 넘기면 홈런입니다. 후배들도 폭소를 자아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잔잔한 웃음을 주는 것도 개그맨으로서 롱런할 수 있는 바탕이 되죠.”
그는 개그맨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단다.
“요즘은 6~7명이 나와서 정신없이 떠들고 노는 <무한도전>식 개그와 <개그 콘서트>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들)> <개그야> 같은 공개방송 개그가 주를 이루죠. <무한도전>식 개그는 개그맨들이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을 담아 감독이 편집을 합니다. 개그맨의 작품이라기보다 감독의 개그죠. 공개방송 개그는 예전 우리가 했던 것과 비슷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말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웃음에 대한 대중들의 기호가 너무 빨리 변해 후배들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 때는 보통 한 코너를 맡으면 일 년 이상 했는데, 요즘은 반응이 없으면 2주 만에도 무대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니 ‘웃겨야 한다’는 강박감이 강하고, 코너 간 경쟁뿐 아니라 같은 코너에서 호흡을 맞추어야 할 동료들과도 경쟁이 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악쓰듯 내지르는 개그를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페이스를 잃고 오버하게 되죠. 잔잔한 웃음이나 여운이 남는 웃음이 아닌 그때그때 자지러지듯 폭발하는 폭소만을 좇게 되죠. 처음에는 특이하고 재미있어 하던 사람들도 금방 식상해해요.”
평범한 듯하지만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편안히 웃을 수 있는 개그를 하고 싶다는 그는 스스로 ‘시사개그 프로그램의 진행자’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시사’란 무엇일까?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의 보통사람이 알고 있는 정치와 세상이야기가 ‘시사’아닐까요? 시사개그를 하는 저도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는 정도의 이야기만 알고 있어요. 정치에 대해 많이 알거나 자세히 공부해야 한다면 개그 안 하고 정치를 해야죠.”
인터뷰 말미에 그는 또 한 번 개그를 했다.
“이거 꼭 내주세요. 제가 지금 기러기입니다. 얼마 전에 현숙(최양락 씨 아내인 개그맨 팽현숙 씨)이가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호주에 갔어요. 그래서 인터뷰 나온 최양락이 무척 꾀죄죄했다고 써주세요. 그래야 내가 불쌍하다고 빨리 돌아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