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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마음공부방] 정전 제3 수행편 제 8장 참회문
참회문2
설교:규산 이광규 교무님
일시: 원기 107년 12월 14일
교정: 주진성
지난 시간은 참회문의 첫시간으로 참회의 원리와 의의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회(懺悔)는 음양상승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새롭게 거듭날 수 있으므로 참회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며, 아무리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선도(善道)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알려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번 뒤쳐졌는데 회생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며,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게 이번 학기에는 공부가 잘 안되어 시험을 망쳐서 장학금을 받을 대상이 영영 사라진다면 공부를 한들 내 마음을 다시 잡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쉼 없이 분발하고 촉진하는 것은 다음의 기회가 순환 반복되기 때문에 지금의 부족함을 채워 또다시 노력하면 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것 아닌가요. 혹 졸업을 못할까봐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한 노력이니 현재의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판단하여 다시 분발의 계기를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학금을 받는 성적이 나왔든, 그렇지 못한 성적이 나왔든, 아니면 이보다 더 못한 성적이 나왔든 이 또한 누가 만든 결과냐 생각해 보면 결국 내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결과를 불교적인 용어로 ‘업(業)’이라고 합니다. 내가 선한 인연을 지어 선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을 선업(善業)이라 하고, 내가 악한 인연을 지어 악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을 악업(惡業)이라고 합니다. 악업을 달리 표현하면 죄업(罪業)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악과 죄의 차이는 악(惡)은 인간의 의지ㆍ태도ㆍ행위가 도덕적 규범에 어긋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물이나 행위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와 반대될 경우에 적용되는 말입니다. 정당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동기’ 입니다.
죄는 도의에 벗어난 악행(惡行). 벌을 받을만한 잘못. 인과의 이치에 따라 악행을 지으면 그에 따른 벌을 받게 되는데 악행을 죄라 합니다. 그릇된 ‘결과’라 하겠습니다. 죄업이라는 것은 악행이 동기가 되어 나타나는 결과 값 입니다.
연말이라 모임에서 술을 한잔씩 해야 하는 일도 있을 텐데, 사회 통념상 술을 한잔하는 것은 악행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가는 계문을 비추어 볼 때 연고 없이 마시는 술은 악행이 됩니다. 다만, 술을 마시되 연말 모임을 잘 하기 위한 술이 되어야지 판단이 흐려지고, 인사불성이 되는 것은 죄업(罪業)이 됩니다. 판단이 흐려져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다던가’, ‘해야 할 일을 안한다던가’, ‘남에게 불편을 주는 일을 하던가’ 하는 등의 일은 죄업의 결과로 나타나 스스로 몸이 괴롭거나, 함께하는 주위 인연에게 미움을 받거나, 사회적 제재를 받는 등의 죄업이 따르게 됩니다.
죄업의 근본 즉 악행을 저지르는 원인은 삼독심(三毒心)이라는 탐심(貪心)과 진심(嗔心)과 치심(癡心)에서 비롯됩니다. 탐심 진심 치심은 선택의 임계점에서 악행을 유발하도록 하는 마음입니다.
탐심(貪心)은 탐욕(貪欲)ㆍ탐애(貪愛)ㆍ탐착(貪着)이라고도 하며 자기의 뜻에 맞는 일이나 물건을 애착하여 탐내고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세간의 색(色), 재물들을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을 뜻합니다. 진심(瞋心)은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미워하고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하는 심리작용, 또는 마음을 덮어서 선한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는 성내는 마음을 말합니다. 치심(癡心)은 현상과 도리에 어두워서 사물의 진상이나 이치를 바르게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말합니다.
지난 월요일 산책을 갔다가 오르막에 계단이 400여개쯤 놓인 공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계단인데 “얼마나 힘이 들겠어.” 하며 오르기 시작한 계단이 1/3쯤 다다르자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내 몸이 왜 이러지 하며 다시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다 오르기는 올랐지만 불과 몇 개월 전과는 다른 저의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서 운동하기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좋아해 이런 저런 운동을 시간 되는 대로 했던 터라 어지간한 체력은 괜찮다고 하며 지냈는데, 그동안 공사(公事)를 우선 한다는 핑계로 사무실에 앉아 지내기를 수년에 안암교당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운동을 더 멀리한 치심(癡心)의 결과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치심(癡心)이라는 것이 어떤 상황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이 치심이라 생각했는데, 내 몸의 기본 리듬을 놓치고 내가 하자는 것에만 익숙해져 내가 챙겨야 할 것을 놓치는 것도 치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상황이거나 곤란한 상황이 되면 그 상황을 외면 하려 하고, 밀쳐내려 하면서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려하듯이 해야 하는 것을 이런 저런 이유로 밀어내는 마음도 치심이라는 것입니다.
얘기가 잠깐 다른 곳으로 흘렀는데, 죄업은 결국 이 삼독심(三毒心)의 마음이 일어나 본래 청정한 마음을 덮어버리고, 내게 유리하고 편리한 쪽으로 끌고 가고자 하여 편협에 이르도록 하여 이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포장을 지속적으로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의 길로 나아가려던 마음이 전도몽상(顚倒夢想)이 되어, 결국 내가 영생(永生)을 오고갈 때 소유할 수 없는 현상에 탐착하게 되고, 모든 것이 진리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에 맞도록 하는 어리석음에 진실이 왜곡되는 진심(嗔心)이 일어나고, 익숙한 것에 매몰되고, 합리화하는 치심(癡心)이 일어나 육도윤회(六度輪廻)의 굴레에 한없이 돌고 도는 윤회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경계(境界) 속에서 수 없는 마음을 일어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의 죄업에 대한 참회로 삼독심의 마음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 일어낸 마음에 대한 죄업은 가벼워지거나 달게 받을 수 있으나 또다시 경계를 당하여 지어진 죄업은 면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대종사님께서는 법문에서 ‘부와 중생은 자성의 본래와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관계로 이 천업에 끌려 무량고(無量苦)를 받게 되므로, 부처와 조사며 범부와 중생이며 귀천과 화복이며 명지장단(命之長短)을 다 네가 짓고 짓나니라‘라 하십니다.
부처와 조사도 범부와 중생도 천업(天業)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뜻한바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짓고 받는 이치에 자유를 얻게 되면 귀함과 빈천함도, 재화를 얻는 것과 복을 받는 것도, 심지어는 목숨의 길고 짧음도 모두 내가 지어서 받는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귀천(貴賤)과 화복(禍福)과 명지장단(命之長短)을 임의로 하려거든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참회(懺悔)로 악행을 짓는 횟수를 점차 줄이거나, 그 수위가 점차 약하게 짓도록 하여 죄업이 가벼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참회의 방법은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의 방법이 있습니다. 사참(事懺)이라는 것은 드러난 죄업의 사실을 더 이상 같은 업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 악행을 단속하여 죄업이 되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정산종사께서는 사참(事懺)의 방법을 첫째는 대원(大願)을 발하여 작은 욕심을 끊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삼독심(三毒心)을 내는 것은 당장은 나의 작은 이익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이익은 오래가지 못하며, 그 미치는 영향도 넓지 못하여, 지속적인 삼독심을 일어내는 악순환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원(願)을 크게 세우고, 그 원이 실현되도록 정성을 다하기로 하면 그 준비의 시간이 오래 걸리면 걸리는 만큼, 그 원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하는 만큼의 깊이와 넓이가 있으므로 그 원을 이루기로 하는 동안에는 죄업과는 멀어질 수 있습니다.
둘째는 사실을 대조하여 선악의 이해를 판단해 보는 것이요. 죄업을 짓던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밑에서 타는 불을 꺼버려야 냉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생깁니다. 사실을 진리적으로 대조하여 선악의 이해를 판단해 봄으로써 진리를 알아차리는 지혜가 밝아져 무명번뇌로 인한 악행을 짓지 않는 실행의 힘이 생길 수 있습니다.
셋째는 진정한 마음으로 항상 법신불전에 참회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요. 거짓 없는 마음으로 법신불 전에 참회의 기도를 올리면, 올리는 그 순간에 청정한 마음이 다시 샘솟아 죄업에 고통 받는 마음이 가라앉아 원래 맑고 조촐했던 그 마음에 청정심이 생겨나 선업을 짓게 될 것입니다.
넷째는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으로 매양 악업을 고치기에 노력하는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고 또 하는 공부입니다. 어제가 별 날이 아니고, 오늘이 별 날이 아니지만 지나간 시간은 지나간 시간대로 두는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인 것입니다.
현재의 주어진 이 순간을 새롭게 하여 또다시 죄업에 물들지 않도록 하고 또 하면서 참회를 해나갈 때 구업은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업은 선업이 되어 죄고에 신음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참회의 방법은 이참(理懺)입니다. 이참(理懺)은 죄업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죄업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요달(了達)하여 죄업이 나의 영생의 진로를 막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죄업을 짓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정산종사께서는 경의편 32장에서 이참의 방법을 첫째 일체를 다 자기 마음이 짓는 것임을 요달(了達)하는 것입니다. 인식론의 입장에서 마음은 그 형체가 없으므로 관념적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육근작용(六根作用)을 통해 인식되는 것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현재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서 또 다른 업을 짓고 있는 그 무엇조차 육근 작용으로 알 수 없지만 존재를 인식한다면 이 또한 관념적 인식이라 하겠습니다. 마음의 존재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표현해 주신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이라 내 놓을 것은 없지만 분명 있다는 것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꿈도 없이 잠들어 있을 때의 나는 누구이며, 잠에서 깨어나 알아차리는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입니다. 본성자리에 합일된 그것도 나요, 사사물물을 알아차리는 주체 역시 나라고 하는 것이며 마음이라 하신 것입니다. 청정한 가운데 경계를 대하여 알아차림으로써 업을 짓는 주체가 마음이기 때문에 내 마음의 짓는 바에 따라 있어지기도 하고,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의 이참의 방법은 인과가 우주의 원리인 것을 요달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선한원인을 지으면 선한 결과가 나타나고, 악한 원인을 지으면 악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인간관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 그 어떤 것에도 적용되는 우주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관계를 지속해 나감으로써 상생의 선연(善緣)이 되고 진급의 선연이 된다는 것을 일원상 서원문에서 밝혀두신 것입니다.
셋째 이참의 방법은 자성(自性)의 원래가 죄업(罪業)이 돈공(頓空)한 것을 요달(了達)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일어나기 전을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우주만유의 본원이라 하셨고, 제불제성의 심인이라 하셨고, 일체 중생의 본성이라 하셨습니다. 일체 중생의 본성을 개개인 별로 또 나누어 표현하면 자성(自性)이라 표현을 합니다.
자성은 어떤 제품의 포장을 뜯기 이전의 상태, 포장을 뜯는 순간 지문도 남고, 먼지도 쌓이고, 나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이런 저런 분별(分別)을 낼 수 없는 그 상태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품을 풀어 내용물이 확인되면 좋은지 나쁜지, 내 것 인지 남의 것인지, 맞는지 맞지 않는지 알아차려 분별이 생겨나게 됩니다.
분별(分別)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떠한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는 상태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죄업이 돈공(頓空)한 상태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참의 방법은 자성(自性)의 공(空)한 것을 관하여 동정간(動靜間)의 삼매(三昧)의 힘을 얻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무시선법의 강령이 일이 없을 때는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는 것이고, 일이 있을 때는 불의(不義)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표준에 맞추어 마음이 고요할 때는 본성으로 돌아가 죄업이 공한 청정심을 모으는데 일념집중하는 것이고, 마음이 일어날 때는 불의는 버리고 정의는 취하는 취사의 힘을 얻는데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할 때 죄업이 멸도(滅道)되는 이참(理懺)이 되는 것입니다.
대산종사께서는 교리편 71장에서
사참(事懺)은 외적인 현실참회를 이름인바 매일 마음을 대중잡고 반성하며 고쳐나가라 하셨고, 이참(理懺)은 내적인 진리 참회를 이름인바 성품(性稟)에 반조(返照)해서 삼세(三世)의 모든 업장을 녹여버리라 하셨습니다.
앞서 저의 신체가 변하는 예를 통하여 몸 불공(佛供)에 게을리 한 죄업의 결과가 나타남을 말씀드렸습니다. 어쩌면 내 몸이라 하는 이 몸도 그 쓰임과 단련에 따라 나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고 괴로움을 주기도 하는 진리의 화신(化身)일 뿐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진 것이지 내 것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내 것이라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그것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잘 관리되는 방법이 참회입니다. 죄업이 되지 않도록 드러난 면을 고쳐가는 것도 방법이고, 그 원리를 알아 근본을 요달(了達)하여 죄업의 원인제공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진리께서는 늘 우리가 부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길을 나의 속 깊은 참회로 먼저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또한 이 회상(會上)을 만났을 때입니다.
더욱 면밀히 내 마음을 살펴서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진 죄업이 그쳐지도록 함께 정진했으면 합니다.
첫댓글 진성교우님 합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성교우님!
용어 나오니까 어지럽네요 감사합니다 진성 교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