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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하십니까?
모놀에서 답사를 가게되면 불교양식에 대해서 많이 접하게 됩니다.
제가 아직 모르는것이 많아서 사찰과 탑에 대해서 Internet에서 찾아서 올려 놓습니다.
혹시 답사전에 필요하시면 한번씩 읽어 보시면 대장께서 설명 하실 때 이해하시기에
도움이 될것 같아 올립니다.
출처는 각각 시작에 표시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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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210.97.92.3/leeram/HISTORY/STUPA.HWP
우리 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전국적으로 석탑이 많다. 이렇듯 석탑은 한국미술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불교조형미술품 중에서도 그 주류인 탑파의 중심이 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품질이 우수한 화강암이 많다. 그러므로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적인 유적 . 유물가운데 석조미술품이 다른 어느 것보다 그 수효가 단연 많다. 물론 석조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점판암이나 대리석 등으로 이루어진 석조미술품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보다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것이 훨씬 많으며 실제로 조사된 수에서도 화강암으로 된 것이 훨씬 많다.
이러한 현상은 화강암이 다른 암석보다 풍부하였고 특히 암질이 채석(採石)과 치석(治石)을 하기에 손쉬워 여러 가지 조각과 건조물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조나 지물(紙物), 토제(土製), 금속제(金屬製) 등의 여러 조형물이 재난을 당할 때마다 모두 불에 타버리고 파괴되어 때로는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와는 달리 석조물은 내구성이 있고 화재에도 잘 견디기 때문에 다른 어느 유물보다도 많은 수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많은 조형물이 석재로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도 손쉽게 다량으로 채취되는 화강암이 대부분이었으며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불교가 들어온 이후부터는 불교미술품 전반에 걸쳐서 화강암이 그 조성재료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불교의 융성은 곧 장엄미(莊嚴美)를 갖춘 여러 가지 조형물의 조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때 다량으로 필요했던 화강암 등의 석재가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충당되었고, 이러한 연유로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탑이 건조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우리 나라 탑의 기원과 시대별로 탑의 특징과 대표적인 탑의 양식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탑의 일반
탑의 개념과 목적
탑이란 갖추어 말하면 탑파(塔婆), 즉 범어(梵語, Sanskrit)의 스투우파(Stpa), 또는 팔리(Pli)어 투우파(thpa)의 음사(音寫)에서 유래된 약칭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는 사리(舍利, Sarira)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불교의 독특한 조형물이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불도들은 인도의 장례법에 따라 화장의 예를 갖춤으로써 그 유신(遺身)인 사리를 얻게 되었고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구조물을 쌓은 것이 바로 탑파, 즉 불탑(佛塔)이 되었다. 그러므로 불탑은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탑의 어원에 대하여는 사리의 봉안유무에 따라 탑파, 또는 지제(支提, Chaitya)라고 하는 별개의 용어가 있다. 먼저 사리를 봉안한 탑을 '스트우파'라고 함에 비하여 사리가 없는 탑을 '차이티야'라고 구별하기도 하였다. 즉 앞의 것은 방분(方墳) . 원총(圓塚) 또는 고현처(高顯處) 등의 뜻이 있고, 뒤의 것은 영묘(靈廟) . 정처(淨處) . 복취(福聚) 등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스트우파'는 부처님의 신골을 봉안하는 묘소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비하여 '차이티야'는 신령스런 장소나 고적을 나타내는 기념탑적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자는 순전히 불사리(佛舍利) 봉안처로서의 탑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석가와 관계되는 역사적 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석가의 사리는 양적으로 제한된 것이므로 차츰 사리신앙에도 변화가 있었다. 석가의 몸에서 출현한 진신사리(眞身舍利)뿐 아니라 불경(佛經)인 법신사리(法身舍利)를 봉안한 모든 탑이 있어서도 단순한 탑이란 용어로써 통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불사리를 봉안한 탑과 함께 불교의 모든 기념물적인 성격을 지닌 '차이티야'까지를 통틀어서 넓은 의미로서 탑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탑파 건립의 목적은 사리신앙에 있으므로 이는 불상과 함께 불교의 양대 예배대상으로서 널리 추앙되었다. 즉 불사리를 지닌 불탑과 부처님의 품격을 형상화한 불상이 가람의 중심에 위치함으로써 소위 당탑가람(堂塔伽藍)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불사리의 전래가 바로 탑파 건립의 직접적 동기가 되고 있으나 이들은 호국(護國) . 호법(護法) 또는 기복(祈福)과 같은 시대적 상황, 그리고 종교적 동기에 연관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이곳에 탑파 건립의 외형적 동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신라 말기부터 일기 시작한 도참사상과도 더욱 밀접한 연관을 지니면서 지세(地勢)나 형국(形局)에 따라 산천을 돕고 보호하려는 성격 아래 조성되었던 사례도 일단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한국적 특징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리라 본다.
탑의 기원과 전개
한국의 탑은 어떠한 경로와 내용을 가지게 되는가에 관해서는 문헌 기록과 함께 현존하는 유적 . 유물에 대하여 짐작할 뿐 보다 명확한 근거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4세기 후반 불교의 전래와 함께 탑의 건립도 시작되었으며 양식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전수한 중층(重層)의 목탑형식이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구체적인 물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현존하는 유물 . 유적에 의하면 한국 탑의 기원은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삼국 말기의 시기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석탑을 가리켜 [始原石塔]이라 부르는데 백제(百濟)의 것은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五層石塔과 익산의 미륵사지(彌勒寺址) 多層石塔을 들 수 있으며 고신라(古新羅)에 있어서는 경주 분황사의 모전석탑(模塼石塔) 1기를 지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양국의 석탑은 그들이 석재로 건립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그들이 각기 지니고 있는 양식은 서로 다르다. 바꾸어 말하면 백제의 石塔은 石塔발생 이전에 유행했던 목조탑을 모범으로 삼아 석재로서 번안함으로써 최초의 석탑을 건립하였고 이와는 달리 경주의 분황사탑은 전탑을 모범으로 삼아 안산암을 벽돌 크기로 작게 절단하여 쌓아 올린 점에서 그 양식의 특색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목탑이 지닌 내구성에 대한 취약점을 보완하는 한편 탑파가 지향하는 종교적 영원성을 석재로서 완성한 탑이다.
그후 삼국통일을 계기로 그 발생사유를 달리하는 목탑계와 전탑계의 석탑양식이 하나로 종합됨으로써 새로운 양식의 석탑을 낳았으니 오늘에 전래하는 신라통일 초기인 7세기 후반의 작품에서 그 事例를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신라의 석탑은 典型的인 양식에서 독특한 한국적인 양식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출발한 탑파형식은 그 전파국에 따라 각기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다. 그것은 불상과 같은 엄격한 규범 속에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운 건축기술이 적용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불교가 전파되는 각국의 건축기술에 의지하여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그대로 탑파건축에 적용하였다.
이로써 인도의 탑이 覆鉢形임에 비해 북방불교 계통에서는 한결같이 층수를 지닌 중층의 탑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결과 신라의 전형탑의 경우는 이중기단 위에 중층의 층탑으로 전개되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매우 독특한 건축양식과 조화미를 창안해 내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이것은 신라인의 예술적 천재성과 심미안의 접합에서 이룩된 일대 개가라 할 것이다. 이 조화미의 절정은 신라 8세기의 불국사 다보(多寶), 석가(釋迦) 양 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석가탑은 앞서 말한 전형 양식을 대표하는 석탑임에 비하여 다보탑은 소위 이형(異形)양식을 대변하는 절묘한 석탑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탑은 우리의 산하 도처에서 생산되는 화강석을 주재로하여 수많은 석탑을 만들기에 족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의 탑파미술은 10세기에 들어와서 태조 왕건의 불교진흥정책에 힘입어 수많은 불교사원의 건립과 함께 불사가 도모되었으나 그 조형미에 있어서 다시금 신라시대와 같은 불교예술의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기단부에 비하여 더욱 둔중해진 탑신부는 상하에서 조화를 찾지 못하였고 예술적인 면에서 더욱 낙후되었다. 이는 신라말 9세기경에 일기 시작한 선종(禪宗)의 발달로 조사(祖師) 숭배의 풍조가 유행되자 그 문도들에 의해 건립되는 부도나 석비의 제작에 그 찬란했던 예술적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따라서 고려에 있어서는 석탑미술보다는 석조부도의 조성으로서 한국 석조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각부에 나타난 조각수법은 장식적 문양으로 더욱 화려해지고 복잡해지면서도 앞 시대와 같은 생명력 있는 예술적 기량은 영영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후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예술적 감각을 잃고 말았다. 이는 유교사회에 처한 불교예술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하겠지만 장인을 천시하던 조선시대의 사회풍조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석탑은 초기의 몇몇 석탑을 제외하고는 더욱 치졸한 느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는 바로 조선의 국운과 함께 불교정책에 가해진 외적 요소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탑의 형식
한국 석탑의 형식은 정방형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여 기단과 탑신, 그리고 상륜부로서 형성되나 기단은 이중 기단이 보편적이다. 이들 상하 기단과 탑신부에는 모두 목조탑의 결구 방식인 기둥을 모각(模刻)하였는데 이것이 각면의 모서리에 있다 하여 우주(隅柱)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단부에는 우주와 우주사이에 다시 수 개의 버팀기둥 즉 탱주( 柱)를 모각하여 목조탑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대체로 탱주의 수는 시대가 내려오면서 줄어든 경우를 볼 수 있으며, 옥개석의 층급받침 역시 초기의 5단 받침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줄어든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옥개석 네 모서리[전각(轉角)]가 보다 경쾌하게 들려 반전(反轉)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초기의 경직되고 단조롭던 형식에 비추어 시대가 지나면서 더욱 반전이 심해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또 석탑 내부에는 사리를 봉안하게 되는데 그 소장처는 대체로 탑신 내부 사리공(舍利孔)이고 드물게는 기단 또는 지하에 봉안되는 수도 있다.
상륜부의 노반(露盤) 상부는 인도탑 형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 즉 최상층 옥개 상부에는 인도탑의 기단 형식에 해당되는 노반을 설치하고 그 상부에 복발(覆鉢)을 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도탑의 탑신 형식이다. 다시 그 상부에는 인도탑의 기단 형식에 해당되는 노반을 설치하고 그 상부에 복발을 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도탑의 탑신 형식이다. 다시 그 상부에는 앙화(仰花)라든지 보륜(寶輪)과 같은 장엄구가 설치되지만 이들은 인도탑의 형식이 우리 나라의 탑에 있어서는 그 상부 상륜부로서 대치되고 있다.
탑의 종류
주재료별 구분
우리 나라의 탑을 재료면에서 본다면 흙 . 나무 . 쇠 . 돌 . 벽돌의 다섯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반도 내에서 흑으로 만든 토탑이나 금속제의 소위 금탑이라 할만한 것은 주로 사리장엄을 위한 공예적인 소탑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국 탑의 범주에서 제외한다면 명실공히 한국의 탑은 목탑 . 석탑 . 벽돌탑 3종류에 국한시킬 수 있다.
목탑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 55호)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에 전해지자 가람을 장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새로운 건축이 가미되었다고 짐작되는 바 이것이 바로 탑전(塔殿)의 형식이다. 이는 중국 고유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서 사리신앙을 위한 불전이면서 동시에 높은 누각형식의 목조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짐작된다.
목탑의 형식은 전형적인 건축구조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단층기단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각 층의 옥개는 기와를 덮고 기둥사이에는 창방을 일종의 문호(門戶)로서 내어 내부에 출입을 가능케 함으로써 내부공간을 활용하는 건조물의 기능을 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상부에는 금속제의 상륜을 설치하여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냄으로써 석탑의 3부작이라 할 수 있는 기단 . 탑신 . 상륜부를 형성하였다.
전탑은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는데 탑의 건립에 앞서 벽돌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공정이 복잡하고 작업과정이 어려워 전국적으로 파급되지 못한 것 같다. 전탑의 형식은 목탑 . 석탑과 동일하지만 다만 옥개의 상하에 층급을 나타내고 있음이 일반 목탑이나 석탑의 형식과는 다른 점이다. 특이한 것은 안동 동부동 5층전탑(보물 제56호), 안동신세동 7층전탑(국보 제16호), 안동조탑동 5층전탑(보물 제57호), 그리고 칠곡 송림사 5층전탑(보물 제189) 등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다수의 전탑이 전해지고 있으며 기록상의 전탑까지 합하면 10여 개에 달하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게다가 인접한 지역에서 모전석탑이 다수 건립되어 더욱 특이하다.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우리 나라 탑의 전형이다. 현존하는 탑의 대부분이 석탑인데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활발한 건립이 있었으며 예술적으로도 가장 뛰어났다.
지역별 구분
시대별 구분
삼국시대
◆ 미륵사지 석탑(彌勒寺址 石塔) :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석탑이지만 근세에 이르러 그 상층이 붕괴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만 서탑의 6층까지의 동면(東面)만을 남기고 있어 그 모습을 추정할 뿐이다. 이 탑은 가장 충실하게 목탑을 모방하여 목재대신에 각 부재를 화강암 석재로서 사용하고 있다. 단층의 낮은 기단을 갖고 있으며 제1층은 3칸4면을 모하여 중앙 칸을 통하여 내부에서 十字로 교차되고 있다. 넓은 옥개와 그리고 그 밑에 층급형(層級形) 받침도 모두 목탑의 그것을 모방하였거나 변형하고 있다. 이 탑에서는 예술적인 창안이나 변형을 찾기보다는 목탑을 충실하게 돌로서 번안하려는 의사만이 일관하고 있다.
◆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夫餘 定林寺址 5層石塔) : 이 탑은 오늘날 그 상륜부(相輪部)를 잃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미륵사지 탑과 같이 단층의 기단 위에 8매(枚) 구성인 제1탑신을 가지고 있으며, 넓고 얇은 옥개석과 그 밑의 2단(段) 받침으로서 구성되었는데 이는 모두 목탑양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미륵사지탑에 비교할 때 목탑의 충실한 번안이라기보다는 이 탑에는 예술적인 변형이 곳곳에 가해져서 작품 그 자체로서 가치를 한층 더하고 있다. 각 층의 감축비율이나 석재 짜임의 규칙성 등은 이 작품에서 지적할 수 있는 높은 예술성이라고 할 수 있다.
◆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模塼石塔) : 이 탑은 삼국사기에 분황사가 선덕여왕 3년(622)에 낙성기록에 따라 이 석탑의 연대를 추정할 수가 있다. 탑의 기단(基壇)은 잡석으로 쌓은 넓은 단층기단인데 탑신을 받기 위하여 1매(枚)의 화강암 부재를 그 중앙에 두었다. 감실(龕室)은 1층 4면에 마련되었으나 미륵사 석탑과는 달리 서로 교우(交又)되지 않았다. 현재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발굴된 석재로 미루어 5층탑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백제의 탑이 목조탑의 영향이 강한데 반하여 오히려 전탑의 영향이 강하여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感恩寺址 東西3層石塔) : 이 탑에서는 삼국의 시원석탑에서 볼 수 없었던 정비된 2층기단을 지니고 있다. 1탑신은 4우주(隅柱)와 4매의 벽판석으로 조립되었으며 그 옥개석은 8매의 낙수면 돌과 다시 4매의 받침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층의 받침은 모두 5단이다. 이 같은 탑신과 옥개의 석재조립은 상층도 같은데 기단의 광활함에 대하여 탑신 또한 거대하여서 그 탑신이 주체적인 비중을 지니고 있다.
이 감은사탑은 통일 직후에 조성됨으로써 통일의 기념탑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이에 따라 탑이 지니는 양식은 삼국에서 각기 시원된 석탑양식이 종합됨으로써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낳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불국사 석가탑(佛國寺 釋迦塔) : 석가탑은 신라 전형석탑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석탑이다. 이 탑의 형태는 2중 기단 위에 건립된 3층의 석탑이다. 상하, 좌우의 비례가 뛰어나서 다른 석탑의 모범이 되고 있으며 기단을 위시한 탑신, 옥개석 모두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듬직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각 부분에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탑 주변에는 장방석을 돌려서 탑구(塔區)를 형성하고 또 그 사이에 연꽃을 배치하였는데 그것을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고 한다.
석가탑은 1966년에 해체 수리 복원되었는데 2층 탑신의 상면 중앙부에 사방 50cm의 사리공(舍利孔)에서 금동제사리외함(金銅製舍利外函)을 비롯하여 은제사리함(銀製舍利盒) 등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고 그리고 사리병에는 사리 1과(顆)가 있었고 또 곡옥(曲玉), 환옥(丸玉), 수정, 유리 등의 장엄을 위시하여 청동제 비천(靑銅製 飛天), 구리, 거울, 향목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유물 이외에 사리함 위에 얹혀 있던두루마기 경전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장경으로 판명됨으로써, 세계 인쇄 기술사상 다시 한 번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 경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서 신라시대 조탑(造塔)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이 경전은 글자의 도법(刀法)으로 보아서 목판경전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 탑이 건립될 당시 신라에는 목조 인쇄술이 상당히 보급돼 있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이로써 우리 나라의 인쇄술의 경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불국사 다보탑(佛國寺 多寶塔) : 이 탑은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완전히 규범에서 벗어난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으로 이루어졌다. 각부의 조각수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의 구조물을 보는 듯 아름다우며 복잡한 상하의 가구(架構)가 중심에 통일되어 하나도 산란함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인상적인 균정미(均整美)를 보이고 있다.
다보탑에서 볼 수 있는 특수 양식을 종합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평면경영에서 전형양식의 기본인 방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바, 탑신부와 옥개석 등 각부를 8각 부재로 복잡하게 가구(架構)하였으나 상하부분이 서로 균형된 비율과 정형미를 보이고 있다.
둘째로 기단부 사방에 보계(寶階)를 가설하였다.
셋째로 상층 기단에 방주를 세우고 목조건축의 두공을 연상시키는 받침부를 시설하였다.
넷째로 갑석의 신부(身部)에 가구한 상하부의 난간과 죽절형(竹節形) 석주 및 앙련대석(仰蓮臺石) 등은 마치 목조 구조를 방불케 하고 있다.
다섯째로 전 부재의 치석과 결구수법의 문제인데, 화강암을 이렇게 목재 다루듯이 석재로서 수려하게 각 부재를 조성하여 촉감마저 온유한 조형미를 보이고 있다.
◆ 화엄사 4사자 3층석탑(華嚴寺 4獅子 3層石塔) : 이 석탑은 상층기단에 돌사자 4마리를 배치하였는데 신라시대의 사자탑으로는 유일하며 그 작품이 뛰어나서 다보탑과 함께 한국 이형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이 석탑의 특수양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상층기단의 구조에 있어서 판석으로 이루어진 면석을 조립한 것과는 달리 4마리의 사자를 배치함으로써 각 면의 양 우주와 탱주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사자상을 일반형 석탑에 사용한 예는 이 석탑이 최초이며 이후 이러한 용례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여러 기가 있다.
사자는 특히 불교적인 조형미술품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사자가 불교에서 연꽃과 함께 상징적인 존재로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는 관념에서 여래의 위치에 비유한 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하층 기단 면석의 각 면에 여러 종류의 천인상을 각양각태로 조각하고 초층 탑신에도 각 면에 문비를 모각한 좌우에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양각하여 장엄을 다하였다. 이러한 여러 조각은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의 정형에서는 볼 수 없는 이후 전형에서 장식적으로 변한 특수형 석탑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고려시대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탑(塔)의 의미와 변천
출처 : http://user.chollian.net/~mansegmi/main.htm
탑은 탑파(塔婆)를 줄인 말로 원래는 범어(梵語 ; Sanskrit)의 'Stupa' 또는 파리어(巴梨語 ; Pali)의 'Th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탑파는 불교가 발생하기 전부터 고대인도에서 '무덤'의 뜻으로, 즉 사람이 죽고나면 화장(火葬)을 한 후 흙과 돌로 돔(Dome)과 원분(圓墳)을 만든 것을 가리켰다.
이러한 탑파는 불교발생과 더불어 교주인 석가모니가 입멸(入滅, 涅槃)하자 제자들이 그의 유해를 당시의 사회 장속(葬俗)에 따라 다비(茶毘 ; 火葬)하였고, 다비 후 그 유골인 사리(舍利)를 봉안하면서 불교적인 조형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탑파의 의미는 '신골(身骨)을 담고 흙과 돌을 쌓아올린 불신골(佛身骨, 眞身舍利)을 봉안하는 묘(墓)'라는 뜻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당시 인도에서는 8국이 석가모니의 사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제자인 도노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사리를 똑같이 나누어 각각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 한다. 사리신앙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며, 불탑의 기원 역시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백년이 지나서 대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Maurya)왕조의 아육왕(阿育王 ; Asoka, 272∼232 B.C.)은 불사리를 봉안한 8개의 탑을 발굴하여 다시 8만 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우고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따라서 불탑의 성격은 처음에는 불신골을 모신 무덤이었으나 점차 불교의 거룩한 가르침을 뚜렷이 표시함으로써 그 믿음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기 위한 기념물로 바뀌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도의 불탑으로 초기의 것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3세기경의 산치(sanchi)대탑을 보면, 반구형의 복발(覆鉢)을 봉분(峯墳)하듯 흙과 돌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는 제단에 비유되는 판석(板石)을 방형(方形)으로 울타리같이 짜서 평두(平頭)라는 것을 만들고 불사리를 안치하였으며, 평두의 중앙에는 다시 산간(傘竿)을 세워 세계의 중추 내지는 '생명의 나무'란 뜻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반구형의 분묘 모양은 후대로 오면서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상륜(相輪)도 그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주위에는 돌난간을 돌리고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넣었다.
중국에서는 후한 명제때(57∼75년)인 1세기경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탑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당시의 불탑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운강석굴 등에 새겨진 모습을 보면 초기의 탑들은 목조에 의한 다층누각(多層樓閣)형식이었으며, 꼭대기에는 인도탑형식이 그대로 축소된 상륜부가 얹혀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북조시대에 이르면 중국탑의 양식이 정립되는데, 숭악사8각15층전탑(嵩岳寺八角十五層塼塔 ; 523년 건립)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후 주로 8각형의 전탑이 중국탑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수용되면서 불탑이 만들어지는데 그 형식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목탑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차츰 우리나라의 독특한 양식으로 석탑(石塔)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석탑(石塔)의 역사
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탑. '석조탑파(石造塔婆)'의 줄인 말로서, 재료로는 화강암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안산암이나 점판암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구조는 크게 기단부(基壇部)·탑신부(塔身部)·상륜부(相輪部)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기단부가 생략되고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석탑의 발생과 시원 양식]
우리 나라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木塔)의 건립 시기로, 오랜 목탑의 건조에서 쌓인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목탑은 삼국이 모두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 양식의 조형을 모방하여 누각형식(樓閣形式)의 다층으로 건립하였을 것이며, 방형 혹은 다각의 평면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평양시의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에서 8각전(八角殿)의 8각탑파(八角塔婆)와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상오리사지(上五里寺址)에서 8각당의 기단부가 조사되어 목탑지로 추정된 바 있기 때문이다. 또, 백제의 유구로는 부여의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와 익산시 왕궁면의 제석사지(帝釋寺址)에서 방형의 목탑 기단부가 확인되었으며, 신라의 유지로는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에 거대한 방형 9층목탑지(九層木塔址)가 남아 있다.
이러한 목탑의 유행에 이어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에서 석탑이 건조되었는데, 그 양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목탑을 본뜬 것이었다. 석탑이 백제에서 비롯된 데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이 발달하였던 나라로 이미 '사탑심다(寺塔甚多)'의 나라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또 신라의 황룡사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빙되어 공사를 담당하였으며, 일본의 초기사원 창립에 백제의 사공(寺工)이나 와박사(瓦博士) 등이 건너가 공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발전하에서 백제에서는 7세기 초반에 이르러 석재로 목탑을 모방하여 탑을 건립함으로써 석탑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백제 시대의 석탑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미륵사지 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뿐이지만 이 2기의 초기석탑에서 석탑의 발생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미륵사지 석탑은 현재까지 원위치에 남아 있는데, 이 탑을 한국 석탑의 시원으로 보는 이유는 그 양식이 목탑과 가장 흡사하다는 점에 있다. 이 탑은 당시 유행되던 목탑의 각 부 양식을 목재 대신 석재로 바꾸어 충실하게 구현한 것으로, 특히 기단부는 목탑에서와 같이 낮고 작다. 또 탑신부의 중심에 거대한 방형석주 (方形石柱)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석탑의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로서 이러한 방주(方柱)가 지탱하고 있는 것도 목탑의 형식과 같은 점이다.
각 면에는 엔타시스(entasis : 배흘림)를 표시한 장방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가설하였으며, 다시 두공(枓?)양식을 모방한 3단의 받침이 있어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다. 이것 또한 목조 건물의 가구(架構)를 본받고 있는 것이다. 즉, 목조 가구의 세부까지도 석재로 충실히 모방한 한국 최초의 석탑으로서, 백제에서 석탑이 발생하는 과정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도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 석탑이 목탑의 모방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 층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에 보이는 엔타시스의 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轉角)에 나타난 반전(反轉), 옥개석 하면의 목조 건물의 두공을 변형시킨 받침수법, 특히 낙수면 네 귀퉁이의 두두룩한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마루) 마루형 등에서 목탑적인 면을 볼 수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露盤石)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점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모방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부 수법에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풍을 풍기고 있다. 즉, 미륵사지 석탑을 본받기는 하였으나 그 시원에서 다소 벗어나 발전된 수법을 보이고 있어 석탑 발달과정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유구로 주목되고 있다.
한편, 신라의 석탑은 전탑(塼塔)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의 분황사 석탑(芬皇寺石塔, 국보 제30호)으로 이 탑은 전탑 양식에 속하는 것 같으나 그 재료는 벽돌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탑은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의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탑신부를 받기 위한 널찍한 1단의 화강암 판석 굄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탑재는 백제 석탑과는 달리 흑갈색의 안산암이다. 즉, 안산암을 소형의 장방형 벽돌같이 절단하여 쌓아올린 전탑형을 이룬 것이다. 이 탑은 634년(선덕여왕 3)에 건조된 것으로 신라 석탑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분황사 석탑과 관련된 탑으로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의성 탑리 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국보 제77호)을 들 수 있다. 이 탑도 석재로서 전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광대한 석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는데, 탑신을 받기 위한 1매의 판석과 옥개의 상하받침이 5단인 점, 기단이 광대한 점 등은 곧 분황사 석탑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석탑은 분황사 석탑과는 달리 새로운 착상과 수법의 간략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기단이 잘 정비된 건축기단의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탑신부의 옥신(屋身)에는 우주 외에 주형(柱形) 1개를 만들었고, 사방에 설치하였던 감실(龕室)을 한 면에만 두고 있다. 이 석탑은 백제의 두 탑과 같이 기단부의 우주·탱주나 옥신의 우주·주신(柱身)에 엔타시스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석탑도 백제의 두 석탑과 같이 양식 발생의 초기 유구에 속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탑들에서 살펴 보았듯이 백제계의 석탑은 화강암만을 사용하여 목탑계 양식을 따른 반면, 신라는 화강암을 혼합하였으되 안산암을 주재료로 삼아 전탑계 양식을 모범으로 삼았다. 또 양국의 초기석탑은 그 기본 평면을 정방형으로 하여 다층을 이루었다는 사실과 석재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신라 석탑의 전형]
백제와 신라의 초기 석탑들은 서로 그 양식을 달리해서 출발했지만, 얼마 뒤 하나의 양식으로 통일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비로소 한국 석탑의 전형이 성립되었는데, 이러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바로 신라의 삼국 통일이다. 신라의 석탑은 삼국 통일과 함께 백제와 고신라의 각기 다른 두 양식을 종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새로운 계기를 맞아 집약, 정돈된 형식으로 건조된 석탑 중 가장 시원적인 양식의 표본을 보이고 있는 것은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 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국보 제38호)이며, 그뒤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月城羅原里五層石塔, 국보 제39호)과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국보 제37호)의 과도기적인 양식을 거쳐, 8세기 중엽에 이르러 불국사 삼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 국보 제21호)·갈항사 동삼층석탑(葛項寺東三層石塔, 국보 99호)에서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定型)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8세기 중엽에 완성된 신라식 일반형 석탑의 정형은 그 뒤 전시대를 통하여 오랫동안 지켜진 형식으로, 이러한 방형 평면의 기본양식과 괴체성(塊體性)의 중층형식(重層形式)은 한국 석탑의 주류이며 또한 특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 전형 양식의 건조 형식은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그 위에 2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하기단 면석(面石)에는 각 면에 양쪽 우주(隅柱:모서리기둥)와 2주의 탱주(撑柱:받침기둥)를 각출(刻出)하였으며, 상층기단 갑석(甲石)에는 하면에 부연(副椽)을 새겼다.
그리고 상면에는 각형(角形) 2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구성하였다. 탑신부에는 옥신과 옥개석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여 쌓았으며, 옥신에는 각 층 각 면에 양 우주가 각출되었다. 옥개석은 하면에 각형 5단의 받침이 마련되고 상면 정상에는 2단의 각형굄으로 그 위층의 옥신석을 받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복발(覆鉢 : 탑의 노반 위에 놓는, 엎은 주발 모양의 장식)과 앙화(仰花)가 놓이고, 그 위에 보륜(寶輪)·보개(寶蓋)·수연(水烟)·용차(龍車)·보주(寶珠) 등이 긴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에 꽂혀 장식되고 있다.
[후기 신라 석탑의 변형]
신라의 석탑은 8세기 이후 시대가 내려오면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고 전체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이 엿보인다. 예를 들어 옥개석의 받침이 5단이던 것이 3,4단으로 줄어든다든지, 기단부 면석의 탱주가 상층부터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거나 혹은 없어진다든지 하며, 또 옥개석 정상면의 옥신굄도 2단에서 1단으로 약화되고 각형에서 호형(弧形)으로 변하는 등 전체적인 규모에 있어서 거대한 것이 중형·소형으로 위축되는 식으로 변형을 보이고 있다. 대체로 9세기에 들면서 점차 변형이 나타나며 9세기 후반에는 현저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870년(경문왕 10)경에 건립된 보림사 삼층석탑(寶林寺三層石塔, 국보 제44호)이다. 이 석탑은 상층기단 면석의 탱주가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고 옥개석이 얇아졌으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도 아주 심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석탑에서는 아직도 하층기단의 탱주 2주, 옥개받침 5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 형식의 석탑에 속하는 것으로는 부석사 삼층석탑(浮石寺三層石塔, 보물 제249호)을 비롯하여 단속사지 동삼층석탑(斷俗寺址東三層石塔, 보물 제72호)·청량사 삼층석탑(淸凉寺三層石塔, 보물 제266호)·청송사지 삼층석탑(靑松寺址三層石塔, 보물 제382호) 등을 들 수 있다.
좀더 말기로 내려오면 석탑 자체의 규모가 작아질 뿐 아니라 각 부 양식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보이게 된다. 즉 기단부에 있어서 석재가 줄어들고 각 면석의 탱주도 약화되며, 탑신부는 각 층 옥개석 받침의 층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탑신굄의 조각 수법이나 옥신굄 및 낙수면과 전각의 다듬기 형식에서 통일 신라 전성기의 전형으로부터 변형되어 약화 혹은 부분적으로 생략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형은 조형 미술품 자체의 양식적인 여러 가지 여건에 기인되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9세기 이후 왕실의 골육상쟁과 지방 군웅의 할거로 사회가 혼란해져서 예술성이 위축되고, 특히 조형미술은 힘찬 기상에서 가냘픔과 허약함으로 변했으며, 따라서 자연히 각기 조형물의 규모가 작아지고 각 부의 양식도 약화, 생략된 변모를 보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하층기단의 탱주도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고 옥개받침도 5단에서 4단으로 약화된 형식의 석탑이 신라 하대의 후기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실상사 삼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 보물 제37호)을 비롯하여 월광사지 동삼층석탑(月光寺址東三層石塔, 보물 제129호)·경주 효현리 삼층석탑(慶州孝峴里三層石塔, 보물 제67호)·탑곡리 삼층석탑(塔谷里三層石塔) 등이 모두 이러한 예에 속한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또 하나의 변형된 작풍이 생겨난다. 즉 일반형 석탑에서 기단부의 구조가 2층기단이라는 기본형을 벗어난 단층기단으로 변화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고 있는 형식이다. 이 형태는 양식적으로는 낮은 하층기단이 생략되어 지대석 위에 바로 하층기단이 놓이게 된다. 이러한 양식이 나오게 된 동기는 목조 건축의 기단이 단층이고 목조건축을 모방한 백제계의 석탑들이 모두 단층 기단인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층기단을 갖춘 작품에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결구하여 지대석을 마련한 위에 기단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따금 통례와는 달리 지대석 대신에 자연암반 위에 기단면석을 조립한 석탑도 볼 수 있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慶州南山茸長寺谷三層石塔, 보물 제186호) 같은 것은 자연암반의 상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높직한 굄대를 마련하여 기단을 받았는데, 단층으로서 2층기단부의 상층만을 놓은 것 같은 형식으로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그리고 옥개받침은 각 층 4단씩으로 역시 1단이 줄어들고 있다.
한편, 이러한 형식들의 석탑은 곧 고려 시대의 석탑 건조 양식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신라시대 전형적인 기단 양식인 2층기단의 석탑이 유행하는 한편, 이와 같은 단층석탑도 많이 건립되어서 그 유례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과 그 변천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형 양식의 정형에서 말기의 약화된 양식에 이르기까지 몇 단계로 나누어 보면, 첫째 단계는 전형 양식의 정형이라 볼 수 있는 석탑으로 경주 천군리 동서삼층석탑(慶州千軍里東西三層石塔, 보물 제168호)·월광사지 서삼층석탑(月光寺址西三層石塔, 보물 제129호)·광주 동오층석탑(光州東五層石塔, 보물 제110호) 등을 들 수 있다. 또, 월성 장항리 서오층석탑(月城獐項里西五層石塔)·원원사지 서삼층석탑(遠願寺址西三層石塔) 등은 탑신부나 기단부 표면에 인왕상(仁王像) 혹은 사천왕상(四天王像)·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들의 조각으로 장식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석탑 자체의 구성이나 각 부의 양식수법에 있어서는 상·하층 기단의 탱주가 2주씩이고 옥개받침도 5단씩이어서 역시 전형양식의 정형기 작풍을 보이고 있다. 둘째 단계는 상층기단의 탱주만이 2주에서 1주로 변하고 있는 석탑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 이외에 대흥사 응진전전 삼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 보물 제320호)·영광 신천리 삼층석탑(靈光新川里三層石塔, 보물 제504호) 등이 있다. 이것들은 아직 하층기단에 2주의 탱주를 가지고 있다.
셋째 단계는 9세기 후반에 들면서 규모가 위축되고 탱주도 상·하층 기단이 모두 1주씩으로 약화되었으며 옥개받침은 4단으로 줄어든 형식이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桐華寺毘盧庵三層石塔, 보물 제247호)·동화사 금당암 서삼층석탑(桐華寺金堂庵西三層石塔, 보물 제248호)·불굴사삼층석탑(佛窟寺三層石塔, 보물 제429호)·봉화 서동리 동서삼층석탑(奉化西洞里東西三層石塔)·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聖住寺址中央三層石塔)과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 등 각처에서 상당히 많은 유례가 발견된다.
넷째 단계는 기단부의 단계가 2층기단이라는 기본형을 벗어나 단층기단으로 변화한 석탑을 말한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이외에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聞慶內化里三層石塔, 보물 제51호)·봉암사삼층석탑(鳳巖寺三層石塔, 보물 제169호)·화엄사동오층석탑(華嚴寺東五層石塔, 보물 제132호)·표충사삼층석탑(表忠寺三層石塔, 보물 제467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양식과 각부 수법은 신라에서 그치지 않고 고려 시대까지 미쳐 하나의 양식으로 계승되어 곳곳에 많은 예를 남기고 있다.
[특수형 석탑의 발생과 조형]
통일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기본으로 하는 석탑들이 건립되는 한편, 전형 양식과 형태를 달리하는 ‘이형적(異型的)인 석탑’이 출현하였다. 즉, 신라의 전성기인 8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러서는 전반적으로 건축적 결구의사(結構意思)가 단일된 조각적인 의사로 기울어져가는 동시에 탑 그 자체에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전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비건축적인 장식적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경주의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 국보 제20호)·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35호)·정혜사지 십삼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국보 제40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건조 연대는 모두 8세기 중엽으로, 통일 신라 전성기에 유행한 수식적 의장은 곧 석탑에까지 미쳐 이형양식(異型樣式)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따라서, 시대가 내려올수록 여러 가지 유형의 발생을 보게 되었으며, 동시에 전형적인 석탑 그 자체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게 되었다.
이형 석탑이란 석탑의 건조 양식이나 각 부재의 결구 방법이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탑을 말한다. 즉,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의 기본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탈피하여 외관상으로 특수한 가구(架構)를 보이는 것인데, 이형 석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태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이형적인 석탑으로서 석탑의 건조 방법이나 각 부재의 결구 방식이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석탑이다.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석탑은 대체로 8세기 중엽부터 그 뒤에 나타난 것으로서 불국사 다보탑과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화엄사 원통전전 사자탑(華嚴寺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300호)·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장식적인 석탑으로, 외형은 신라의 전형 양식인 방형 중층의 기본형을 갖추고 있으나 기단 및 탑신부의 각 면에 천인상(天人像)·안상(眼象)·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십이지신상·사방불(四方佛)·보살상·인왕상 등 여러 상을 조각하여 표면장식이 화려하며 장중한 석탑이다. 여기에 속하는 석탑으로는 원원사지 동서삼층석탑을 비롯하여, 화엄사 서오층석탑(華嚴寺西五層石塔, 보물 제133호)·경주 남산리 서삼층석탑(慶州南山里西三層石塔, 보물 제124호)·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實相寺百丈庵三層石塔, 국보 제10호)·진전사지 삼층석탑 (陳田寺址三層石塔, 국보 제122호)·선림원지 삼층석탑(禪林院址三層石塔, 보물 제444호)·산청 범학리 삼층서탑(山淸泛鶴里三層石塔, 국보 제105호)·중흥산성 삼층석탑(中興山城三層石塔, 보물 제112호)·남산 승소곡 삼층석탑(南山僧燒谷三層石塔)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탑신부는 방형 중층의 전형을 보이고 있으나 기단부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도피안사 삼층석탑(到彼岸寺三層石塔, 보물 제223호)의 경우 탑신부는 방형 평면이나 기단부에서 8각형의 평면을 이루어 하층 기단 면석에 안상이 조각되고, 상층기단 상하갑석에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각하여 마치 불상 대좌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석굴암 삼층석탑(石窟庵三層石塔)은 탑신부는 방형 중층으로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의 탑신을 이루고 있으나 기단부에서는 전혀 이형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다. 즉, 상하 2층의 기단이나 평면은 면석과 갑석이 같지 않고 면석은 8각형으로서 각 모서리에 우주가 각출되었고 갑석은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석굴암 본존불(石窟庵本尊佛)의 대좌에서 본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넷째,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건조 재료는 석재이나 그 형태가 전조탑파(塼造塔婆)의 양식을 갖추고 있어 각 부재의 축조 및 결구 방법이 특이하므로 괴체성의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과는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분황사 석탑·봉감 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 국보 제187호)이 여기에 속한다. 또, 모전석으로 건조한 것은 아니나 외형으로 보아 모전석탑의 형태와 비슷한 모전석탑류도 이형 형식에 속하는데, 예를 들어 의성 탑리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善山洛山洞三層石塔, 보물 제469호)·경주 서악리 삼층석탑(慶州西岳里三層石塔, 보물 제65호)·경주 남산리 동삼층석탑(慶州南山里東三層石塔, 보물 제124호) 등은 모전석이 아닌 치석(治石)한 작은 석재로 탑을 조성하였다.
다섯째, 청석탑류(靑石塔類)로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 보물 제518호)은 가장 오래된 청석탑으로 주목된다. 이 탑은 건조 석재가 점판암이라는 특수한 용재이기 때문에 화강암으로 만든 일반형 석탑과는 구별된다. 청석은 그 자체가 크지 못하므로 모두 소규모의 탑뿐인데, 석질이 약해서 각 부재가 파손 혹은 결실되고 있어 완전한 형태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 탑에서 기단부는 모두 화강암으로 형성되고 탑신부 이상만이 점판암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석재가 모자라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시대의 석탑]
불교의 교세는 고려시대에 와서 절정에 달하였다. 따라서 불교적인 조영(造營) 작업도 거의 고려 일대를 통하여 국가적 혹은 개인적으로 되었으며,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석탑과 유례가 남아 있다. 고려 시대의 특징은 우선 석탑건립 이전 시대에 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된 점이다. 다만 수적으로는 왕도(王都)인 개경 부근이 우세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이러한 분포상의 변화는 시대상의 변혁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즉, 왕실 불교적 위치에서 출발한 우리나라 불교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대중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고려 시대적인 조영은 역시 전국적인 형태를 띠게 되는데, 특히 태조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도 반영되어 있듯이 도참 사상(圖讖思想)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개경의 7층석탑의 건립과 연관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옛 도읍인 서경(西京) 구층탑의 건립,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의 황룡사 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의 중수, 백제 옛도읍 부근의 거대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의 예, 그리고 후백제군을 격파한 곳에 개태사(開泰寺)를 건립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면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더구나 주목되는 점은 고려 시대의 조탑 활동에 순수한 지방세력 내지는 민중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개심사지 오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 보물 제53호)의 명문(銘文), 정도사지 오층석탑(淨兜寺址五層石塔, 보물 제357호) 안에서 발견된 조성형지기(造成形止記)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시대에는 대부분 그 지방민의 발원에 의하여 석탑이 건립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은 고려 시대 석탑을 전국적으로 분포시키는 데 보다 더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 석탑의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전대의 왕도 중심의 일률적인 탑파 건립에서 벗어나 각 지방의 토착 세력이 건탑(建塔)에 관여하였을 때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제 나름대로의 특징이 반영되어, 곧 다양성 있는 건탑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시대의 석탑은 그 조형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신라의 고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신라 석탑계를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세부에 있어 변형을 보이고 있다.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연화문이 조식(彫飾)된 판석 1매를 끼워 탑신굄대를 삼고 있으며, 정도사지 오층석탑은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이 있고 그 내면에 지선(地線)으로부터 귀꽃무늬가 조식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또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남계원 칠층석탑(南溪院七層石塔, 국보 제100호)·현화사 칠층석탑(玄化寺七層石塔)·흥국사 석탑(興國寺石塔) 등과 같이 일반형 방형중층탑이 고려 석탑으로서의 특징을 지니면서 유행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도 광주 춘궁리 삼층석탑(廣州春宮里三層石塔, 보물 제13호)·안성 죽산리 오층석탑(安城竹山里五層石塔, 보물 제435호)·천흥사지 오층석탑(天興寺址五層石塔, 보물 제354호)·금산사 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보물 제25호)·정산 서정리 구층석탑(定山西亭里九層石塔, 보물 제18호) 등 상당수의 일반형 석탑이 건립되었는데, 모두 신라식을 계승하고는 있으나 옥개석의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추녀가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하였다든가 단층 기단이 많아지고 상층 기단 갑석의 부연이 형식화되거나 생략되는 등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둔중해진 고려 석탑 특유의 작풍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고려 사회의 새로운 성격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10세기 후반부터는 양식상 전대에 비하여 현저한 변화를 보인다. 그러한 고려석탑의 새로운 양상으로서 첫째, 지방적인 특색이 현저해진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석탑에서 지방적 특색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설령 신라의 중심이었던 경주를 벗어난 지방에 석탑이 건립되었다 하더라도 중앙인 경주 지역의 양식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지방에 따라 각기 특색 있는 양식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신라의 고토인 경상도 지방에서는 신라 시대 석탑의 계통을 충실하게 계승한 데 비하여 백제의 고토인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백제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예가 많다. 무량사 오층석탑(無量寺五層石塔, 보물 제185호)·부여 장하리 삼층석탑(扶餘長蝦里三層石塔, 보물 제184호)·비인 오층석탑(庇仁五層石塔, 보물 제224호)·계룡산 청량사지 쌍탑(鷄龍山淸凉寺址雙塔, 일명 男妹塔,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호) 등과 전라북도의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정읍 은선리 삼층석탑(井邑隱仙里三層石塔, 보물 제167호)·귀신사 삼층석탑(歸信寺三層石塔)·죽산리 삼층석탑(竹山里三層石塔) 등 백제계의 석탑은 특히 옥개석의 구성에서 백제 양식을 본받고 있다.
즉 옥개석 양식이 모두 판석형의 낙수면석이고, 대개의 경우 그 밑의 받침부가 별석으로 조성된 목조가구의 일면을 보이고 있는 점 등이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각 부를 모방하고 있어 ‘백제계의 고려 석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백제 고토에서만 볼 수 있는 백제계 고려 시대 석탑의 건립 현상은 고려의 불교가 전대인 신라 시대의 중앙 집중에서 벗어나 좀더 지방에까지 파급되고 한층 토착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고려 시대의 석탑에서는 신라 시대에 볼 수 없었던 각양각색의 새로운 특수형식의 탑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수한 양식이란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의 형식에서 벗어나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새로운 특수한 형식이 가미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예는 신라시대부터 나타나던 것이었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도 사사자 석탑(四獅子石塔)의 양식을 계승한 사자빈신사지 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 보물 제94호)이나 홍천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洪川掛石里四獅子三層石塔, 보물 제540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전대의 이형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라적인 이형 석탑의 예는 사실상 극히 한정되고 개별적인 것에 그쳤으며, 그에 비하여 고려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은 새로운 유형을 이루는 데까지 진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방형에서 다각형으로, 그리고 다층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석탑 중에서 8각형의 석탑은 나름대로 하나의 유형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비하여 원광사지 육각칠층석탑(元廣寺址六角七層石塔)이나 금산사 육각다층석탑(金山寺六角多層石塔, 보물 제27호) 등 6각형의 석탑은 좀더 특이한 형이라 할 수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月精寺八角九層石塔, 국보 제48호)·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普賢寺八角十三層石塔) 등은 일반형 석탑처럼 기단부 위에 탑신과 상륜부를 건조한 형식이지만 8각형의 평면을 이룬 점이 특이하다.
[조선 시대의 석탑]
이성계(李成桂)는 새 왕조를 건립하면서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유교를 새로운 국가통치의 교화이념(敎化理念)으로 삼았다. 이로써 신라·고려를 통하여 1,000여년간 국교적 위치에 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아직도 불교의 영향력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더욱이 태조·세조 등과 같이 불교에 귀의하거나 호불(護佛) 정책을 표방한 군주도 있어 그런대로 불교 미술의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의 여운이 아직도 엿보이는 시기여서 불교 미술의 분야에서도 조성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던 반면, 조선 후기에는 고려 시대의 영향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전란으로 인하여 고려적인 전통은 대부분 단절되었고, 다소 그런 전통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느 일부분에서 변형을 일으키고 있었고, 조형 미술은 점차 소멸되어가는 상태에 있었다.
고려 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던 조선 초기 석탑 중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으로는 낙산사 칠층석탑(洛山寺七層石塔, 보물 제499호)·신륵사 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 보물 제225호)·벽송사 삼층석탑(碧松寺三層石塔, 보물 제474호) 등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또 이형 석탑으로는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 국보 제2호)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水鐘寺八角五層石塔)을 들 수 있다.
우선 일반형 석탑을 볼 때 방형 중층의 신라석탑의 기본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은 벽송사 삼층석탑으로서,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하여 신라식 일반형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각 층의 체감률도 착실하며 석재의 결구 ?峙壎? 정돈되어 있는데, 기단에 있어서 상층 면석에 탱주가 생략되고 탑신부에 있어서는 옥개 받침이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들어 일률성이 없어 기본형식에서 벗어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전체의 조형이 무기력해진 점 등과 아울러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또한 이형 석탑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고 수법이 세련되었으며 의장이 풍부하여 조선 시대의 석탑으로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우수한 석탑이다. 이 석탑은 전체 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 조각 등이 고려 시대의 작품인 경천사 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국보 제86호)과 흡사할 뿐 아니라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주목된다. 또 하나의 이형 석탑으로는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은 평면이 8각인 원당형(圓堂形)을 이룬 탑으로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희귀한 예의 8각형석탑으로 손꼽힌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에는 전대인 고려 시대와 같이 다양한 형식의 탑이 조성되지 못하였으며 고려 시대 석탑의 조형과 양식을 따르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억불 정책 아래에서도 전대의 불교적인 양식을 전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여줄 뿐 아니라 불교 미술을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의 문화적인 전통이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탑. '석조탑파(石造塔婆)'의 줄인 말로서, 재료로는 화강암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안산암이나 점판암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구조는 크게 기단부(基壇部)·탑신부(塔身部)·상륜부(相輪部)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기단부가 생략되고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석탑의 발생과 시원 양식]
우리 나라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木塔)의 건립 시기로, 오랜 목탑의 건조에서 쌓인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목탑은 삼국이 모두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 양식의 조형을 모방하여 누각형식(樓閣形式)의 다층으로 건립하였을 것이며, 방형 혹은 다각의 평면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평양시의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에서 8각전(八角殿)의 8각탑파(八角塔婆)와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상오리사지(上五里寺址)에서 8각당의 기단부가 조사되어 목탑지로 추정된 바 있기 때문이다. 또, 백제의 유구로는 부여의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와 익산시 왕궁면의 제석사지(帝釋寺址)에서 방형의 목탑 기단부가 확인되었으며, 신라의 유지로는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에 거대한 방형 9층목탑지(九層木塔址)가 남아 있다.
이러한 목탑의 유행에 이어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에서 석탑이 건조되었는데, 그 양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목탑을 본뜬 것이었다. 석탑이 백제에서 비롯된 데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이 발달하였던 나라로 이미 '사탑심다(寺塔甚多)'의 나라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또 신라의 황룡사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빙되어 공사를 담당하였으며, 일본의 초기사원 창립에 백제의 사공(寺工)이나 와박사(瓦博士) 등이 건너가 공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발전하에서 백제에서는 7세기 초반에 이르러 석재로 목탑을 모방하여 탑을 건립함으로써 석탑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백제 시대의 석탑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미륵사지 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뿐이지만 이 2기의 초기석탑에서 석탑의 발생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미륵사지 석탑은 현재까지 원위치에 남아 있는데, 이 탑을 한국 석탑의 시원으로 보는 이유는 그 양식이 목탑과 가장 흡사하다는 점에 있다. 이 탑은 당시 유행되던 목탑의 각 부 양식을 목재 대신 석재로 바꾸어 충실하게 구현한 것으로, 특히 기단부는 목탑에서와 같이 낮고 작다. 또 탑신부의 중심에 거대한 방형석주 (方形石柱)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석탑의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로서 이러한 방주(方柱)가 지탱하고 있는 것도 목탑의 형식과 같은 점이다.
각 면에는 엔타시스(entasis : 배흘림)를 표시한 장방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가설하였으며, 다시 두공(枓?)양식을 모방한 3단의 받침이 있어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다. 이것 또한 목조 건물의 가구(架構)를 본받고 있는 것이다. 즉, 목조 가구의 세부까지도 석재로 충실히 모방한 한국 최초의 석탑으로서, 백제에서 석탑이 발생하는 과정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도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 석탑이 목탑의 모방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 층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에 보이는 엔타시스의 수법,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轉角)에 나타난 반전(反轉), 옥개석 하면의 목조 건물의 두공을 변형시킨 받침수법, 특히 낙수면 네 귀퉁이의 두두룩한 우동(隅棟 : 탑 옥개석의 귀마루) 마루형 등에서 목탑적인 면을 볼 수 있다. 현재 상륜부를 결실한 노반석(露盤石)까지의 석재가 149개나 되는 점도 이 탑이 목조가구의 모방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부 수법에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풍을 풍기고 있다. 즉, 미륵사지 석탑을 본받기는 하였으나 그 시원에서 다소 벗어나 발전된 수법을 보이고 있어 석탑 발달과정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유구로 주목되고 있다.
한편, 신라의 석탑은 전탑(塼塔)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의 분황사 석탑(芬皇寺石塔, 국보 제30호)으로 이 탑은 전탑 양식에 속하는 것 같으나 그 재료는 벽돌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탑은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의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탑신부를 받기 위한 널찍한 1단의 화강암 판석 굄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탑재는 백제 석탑과는 달리 흑갈색의 안산암이다. 즉, 안산암을 소형의 장방형 벽돌같이 절단하여 쌓아올린 전탑형을 이룬 것이다. 이 탑은 634년(선덕여왕 3)에 건조된 것으로 신라 석탑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분황사 석탑과 관련된 탑으로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의성 탑리 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국보 제77호)을 들 수 있다. 이 탑도 석재로서 전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광대한 석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는데, 탑신을 받기 위한 1매의 판석과 옥개의 상하받침이 5단인 점, 기단이 광대한 점 등은 곧 분황사 석탑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석탑은 분황사 석탑과는 달리 새로운 착상과 수법의 간략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기단이 잘 정비된 건축기단의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탑신부의 옥신(屋身)에는 우주 외에 주형(柱形) 1개를 만들었고, 사방에 설치하였던 감실(龕室)을 한 면에만 두고 있다. 이 석탑은 백제의 두 탑과 같이 기단부의 우주·탱주나 옥신의 우주·주신(柱身)에 엔타시스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석탑도 백제의 두 석탑과 같이 양식 발생의 초기 유구에 속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탑들에서 살펴 보았듯이 백제계의 석탑은 화강암만을 사용하여 목탑계 양식을 따른 반면, 신라는 화강암을 혼합하였으되 안산암을 주재료로 삼아 전탑계 양식을 모범으로 삼았다. 또 양국의 초기석탑은 그 기본 평면을 정방형으로 하여 다층을 이루었다는 사실과 석재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신라 석탑의 전형]
백제와 신라의 초기 석탑들은 서로 그 양식을 달리해서 출발했지만, 얼마 뒤 하나의 양식으로 통일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비로소 한국 석탑의 전형이 성립되었는데, 이러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바로 신라의 삼국 통일이다. 신라의 석탑은 삼국 통일과 함께 백제와 고신라의 각기 다른 두 양식을 종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새로운 계기를 맞아 집약, 정돈된 형식으로 건조된 석탑 중 가장 시원적인 양식의 표본을 보이고 있는 것은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 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국보 제38호)이며, 그뒤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月城羅原里五層石塔, 국보 제39호)과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국보 제37호)의 과도기적인 양식을 거쳐, 8세기 중엽에 이르러 불국사 삼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 국보 제21호)·갈항사 동삼층석탑(葛項寺東三層石塔, 국보 99호)에서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定型)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8세기 중엽에 완성된 신라식 일반형 석탑의 정형은 그 뒤 전시대를 통하여 오랫동안 지켜진 형식으로, 이러한 방형 평면의 기본양식과 괴체성(塊體性)의 중층형식(重層形式)은 한국 석탑의 주류이며 또한 특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 전형 양식의 건조 형식은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그 위에 2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하기단 면석(面石)에는 각 면에 양쪽 우주(隅柱:모서리기둥)와 2주의 탱주(撑柱:받침기둥)를 각출(刻出)하였으며, 상층기단 갑석(甲石)에는 하면에 부연(副椽)을 새겼다.
그리고 상면에는 각형(角形) 2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구성하였다. 탑신부에는 옥신과 옥개석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여 쌓았으며, 옥신에는 각 층 각 면에 양 우주가 각출되었다. 옥개석은 하면에 각형 5단의 받침이 마련되고 상면 정상에는 2단의 각형굄으로 그 위층의 옥신석을 받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복발(覆鉢 : 탑의 노반 위에 놓는, 엎은 주발 모양의 장식)과 앙화(仰花)가 놓이고, 그 위에 보륜(寶輪)·보개(寶蓋)·수연(水烟)·용차(龍車)·보주(寶珠) 등이 긴 찰주(擦柱 : 탑의 중심기둥)에 꽂혀 장식되고 있다.
[후기 신라 석탑의 변형]
신라의 석탑은 8세기 이후 시대가 내려오면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고 전체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이 엿보인다. 예를 들어 옥개석의 받침이 5단이던 것이 3,4단으로 줄어든다든지, 기단부 면석의 탱주가 상층부터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거나 혹은 없어진다든지 하며, 또 옥개석 정상면의 옥신굄도 2단에서 1단으로 약화되고 각형에서 호형(弧形)으로 변하는 등 전체적인 규모에 있어서 거대한 것이 중형·소형으로 위축되는 식으로 변형을 보이고 있다. 대체로 9세기에 들면서 점차 변형이 나타나며 9세기 후반에는 현저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870년(경문왕 10)경에 건립된 보림사 삼층석탑(寶林寺三層石塔, 국보 제44호)이다. 이 석탑은 상층기단 면석의 탱주가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고 옥개석이 얇아졌으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도 아주 심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석탑에서는 아직도 하층기단의 탱주 2주, 옥개받침 5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 형식의 석탑에 속하는 것으로는 부석사 삼층석탑(浮石寺三層石塔, 보물 제249호)을 비롯하여 단속사지 동삼층석탑(斷俗寺址東三層石塔, 보물 제72호)·청량사 삼층석탑(淸凉寺三層石塔, 보물 제266호)·청송사지 삼층석탑(靑松寺址三層石塔, 보물 제382호) 등을 들 수 있다.
좀더 말기로 내려오면 석탑 자체의 규모가 작아질 뿐 아니라 각 부 양식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보이게 된다. 즉 기단부에 있어서 석재가 줄어들고 각 면석의 탱주도 약화되며, 탑신부는 각 층 옥개석 받침의 층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탑신굄의 조각 수법이나 옥신굄 및 낙수면과 전각의 다듬기 형식에서 통일 신라 전성기의 전형으로부터 변형되어 약화 혹은 부분적으로 생략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형은 조형 미술품 자체의 양식적인 여러 가지 여건에 기인되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9세기 이후 왕실의 골육상쟁과 지방 군웅의 할거로 사회가 혼란해져서 예술성이 위축되고, 특히 조형미술은 힘찬 기상에서 가냘픔과 허약함으로 변했으며, 따라서 자연히 각기 조형물의 규모가 작아지고 각 부의 양식도 약화, 생략된 변모를 보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하층기단의 탱주도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고 옥개받침도 5단에서 4단으로 약화된 형식의 석탑이 신라 하대의 후기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실상사 삼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 보물 제37호)을 비롯하여 월광사지 동삼층석탑(月光寺址東三層石塔, 보물 제129호)·경주 효현리 삼층석탑(慶州孝峴里三層石塔, 보물 제67호)·탑곡리 삼층석탑(塔谷里三層石塔) 등이 모두 이러한 예에 속한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또 하나의 변형된 작풍이 생겨난다. 즉 일반형 석탑에서 기단부의 구조가 2층기단이라는 기본형을 벗어난 단층기단으로 변화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고 있는 형식이다. 이 형태는 양식적으로는 낮은 하층기단이 생략되어 지대석 위에 바로 하층기단이 놓이게 된다. 이러한 양식이 나오게 된 동기는 목조 건축의 기단이 단층이고 목조건축을 모방한 백제계의 석탑들이 모두 단층 기단인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층기단을 갖춘 작품에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결구하여 지대석을 마련한 위에 기단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따금 통례와는 달리 지대석 대신에 자연암반 위에 기단면석을 조립한 석탑도 볼 수 있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慶州南山茸長寺谷三層石塔, 보물 제186호) 같은 것은 자연암반의 상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높직한 굄대를 마련하여 기단을 받았는데, 단층으로서 2층기단부의 상층만을 놓은 것 같은 형식으로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그리고 옥개받침은 각 층 4단씩으로 역시 1단이 줄어들고 있다.
한편, 이러한 형식들의 석탑은 곧 고려 시대의 석탑 건조 양식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신라시대 전형적인 기단 양식인 2층기단의 석탑이 유행하는 한편, 이와 같은 단층석탑도 많이 건립되어서 그 유례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과 그 변천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형 양식의 정형에서 말기의 약화된 양식에 이르기까지 몇 단계로 나누어 보면,
첫째 단계는 전형 양식의 정형이라 볼 수 있는 석탑으로 경주 천군리 동서삼층석탑(慶州千軍里東西三層石塔, 보물 제168호)·월광사지 서삼층석탑(月光寺址西三層石塔, 보물 제129호)·광주 동오층석탑(光州東五層石塔, 보물 제110호) 등을 들 수 있다. 또, 월성 장항리 서오층석탑(月城獐項里西五層石塔)원원사지 서삼층석탑(遠願寺址西三層石塔) 등은 탑신부나 기단부 표면에 인왕상(仁王像) 혹은 사천왕상(四天王像)·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들의 조각으로 장식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석탑 자체의 구성이나 각 부의 양식수법에 있어서는 상·하층 기단의 탱주가 2주씩이고 옥개받침도 5단씩이어서 역시 전형양식의 정형기 작풍을 보이고 있다.
둘째 단계는 상층기단의 탱주만이 2주에서 1주로 변하고 있는 석탑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 이외에 대흥사 응진전전 삼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 보물 제320호)·영광 신천리 삼층석탑(靈光新川里三層石塔, 보물 제504호) 등이 있다. 이것들은 아직 하층기단에 2주의 탱주를 가지고 있다.
셋째 단계는 9세기 후반에 들면서 규모가 위축되고 탱주도 상·하층 기단이 모두 1주씩으로 약화되었으며 옥개받침은 4단으로 줄어든 형식이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桐華寺毘盧庵三層石塔, 보물 제247호)·동화사 금당암 서삼층석탑(桐華寺金堂庵西三層石塔, 보물 제248호)·불굴사삼층석탑(佛窟寺三層石塔, 보물 제429호)·봉화 서동리 동서삼층석탑(奉化西洞里東西三層石塔)·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聖住寺址中央三層石塔)과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 등 각처에서 상당히 많은 유례가 발견된다.
넷째 단계는 기단부의 단계가 2층기단이라는 기본형을 벗어나 단층기단으로 변화한 석탑을 말한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이외에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聞慶內化里三層石塔, 보물 제51호)·봉암사삼층석탑(鳳巖寺三層石塔, 보물 제169호)·화엄사동오층석탑(華嚴寺東五層石塔, 보물 제132호)·표충사삼층석탑(表忠寺三層石塔, 보물 제467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양식과 각부 수법은 신라에서 그치지 않고 고려 시대까지 미쳐 하나의 양식으로 계승되어 곳곳에 많은 예를 남기고 있다.
[특수형 석탑의 발생과 조형]
통일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기본으로 하는 석탑들이 건립되는 한편, 전형 양식과 형태를 달리하는 ‘이형적(異型的)인 석탑’이 출현하였다. 즉, 신라의 전성기인 8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러서는 전반적으로 건축적 결구의사(結構意思)가 단일된 조각적인 의사로 기울어져가는 동시에 탑 그 자체에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전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비건축적인 장식적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경주의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 국보 제20호)·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35호)·정혜사지 십삼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국보 제40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건조 연대는 모두 8세기 중엽으로, 통일 신라 전성기에 유행한 수식적 의장은 곧 석탑에까지 미쳐 이형양식(異型樣式)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따라서, 시대가 내려올수록 여러 가지 유형의 발생을 보게 되었으며, 동시에 전형적인 석탑 그 자체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게 되었다.
이형 석탑이란 석탑의 건조 양식이나 각 부재의 결구 방법이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탑을 말한다. 즉,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의 기본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탈피하여 외관상으로 특수한 가구(架構)를 보이는 것인데, 이형 석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태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이형적인 석탑으로서 석탑의 건조 방법이나 각 부재의 결구 방식이 전형적인 양식의 정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석탑이다.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석탑은 대체로 8세기 중엽부터 그 뒤에 나타난 것으로서 불국사 다보탑과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화엄사 원통전전 사자탑(華嚴寺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300호)·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장식적인 석탑으로, 외형은 신라의 전형 양식인 방형 중층의 기본형을 갖추고 있으나 기단 및 탑신부의 각 면에 천인상(天人像)·안상(眼象)·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십이지신상·사방불(四方佛)·보살상·인왕상 등 여러 상을 조각하여 표면장식이 화려하며 장중한 석탑이다. 여기에 속하는 석탑으로는 원원사지 동서삼층석탑을 비롯하여, 화엄사 서오층석탑(華嚴寺西五層石塔, 보물 제133호)·경주 남산리 서삼층석탑(慶州南山里西三層石塔, 보물 제124호)·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實相寺百丈庵三層石塔, 국보 제10호)·진전사지 삼층석탑 (陳田寺址三層石塔, 국보 제122호)·선림원지 삼층석탑(禪林院址三層石塔, 보물 제444호)·산청 범학리 삼층서탑(山淸泛鶴里三層石塔, 국보 제105호)·중흥산성 삼층석탑(中興山城三層石塔, 보물 제112호)·남산 승소곡 삼층석탑(南山僧燒谷三層石塔)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탑신부는 방형 중층의 전형을 보이고 있으나 기단부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도피안사 삼층석탑(到彼岸寺三層石塔, 보물 제223호)의 경우 탑신부는 방형 평면이나 기단부에서 8각형의 평면을 이루어 하층 기단 면석에 안상이 조각되고, 상층기단 상하갑석에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각하여 마치 불상 대좌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석굴암 삼층석탑(石窟庵三層石塔)은 탑신부는 방형 중층으로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의 탑신을 이루고 있으나 기단부에서는 전혀 이형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다. 즉, 상하 2층의 기단이나 평면은 면석과 갑석이 같지 않고 면석은 8각형으로서 각 모서리에 우주가 각출되었고 갑석은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석굴암 본존불(石窟庵本尊佛)의 대좌에서 본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넷째,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건조 재료는 석재이나 그 형태가 전조탑파(塼造塔婆)의 양식을 갖추고 있어 각 부재의 축조 및 결구 방법이 특이하므로 괴체성의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과는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분황사 석탑·봉감 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 국보 제187호)이 여기에 속한다. 또, 모전석으로 건조한 것은 아니나 외형으로 보아 모전석탑의 형태와 비슷한 모전석탑류도 이형 형식에 속하는데, 예를 들어 의성 탑리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善山洛山洞三層石塔, 보물 제469호)·경주 서악리 삼층석탑(慶州西岳里三層石塔, 보물 제65호)·경주 남산리 동삼층석탑(慶州南山里東三層石塔, 보물 제124호) 등은 모전석이 아닌 치석(治石)한 작은 석재로 탑을 조성하였다.
다섯째, 청석탑류(靑石塔類)로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 보물 제518호)은 가장 오래된 청석탑으로 주목된다. 이 탑은 건조 석재가 점판암이라는 특수한 용재이기 때문에 화강암으로 만든 일반형 석탑과는 구별된다. 청석은 그 자체가 크지 못하므로 모두 소규모의 탑뿐인데, 석질이 약해서 각 부재가 파손 혹은 결실되고 있어 완전한 형태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 탑에서 기단부는 모두 화강암으로 형성되고 탑신부 이상만이 점판암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석재가 모자라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시대의 석탑]
불교의 교세는 고려시대에 와서 절정에 달하였다. 따라서 불교적인 조영(造營) 작업도 거의 고려 일대를 통하여 국가적 혹은 개인적으로 되었으며,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석탑과 유례가 남아 있다. 고려 시대의 특징은 우선 석탑건립 이전 시대에 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된 점이다. 다만 수적으로는 왕도(王都)인 개경 부근이 우세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이러한 분포상의 변화는 시대상의 변혁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즉, 왕실 불교적 위치에서 출발한 우리나라 불교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대중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고려 시대적인 조영은 역시 전국적인 형태를 띠게 되는데, 특히 태조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도 반영되어 있듯이 도참 사상(圖讖思想)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개경의 7층석탑의 건립과 연관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옛 도읍인 서경(西京) 구층탑의 건립,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의 황룡사 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의 중수, 백제 옛도읍 부근의 거대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의 예, 그리고 후백제군을 격파한 곳에 개태사(開泰寺)를 건립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면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더구나 주목되는 점은 고려 시대의 조탑 활동에 순수한 지방세력 내지는 민중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개심사지 오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 보물 제53호)의 명문(銘文), 정도사지 오층석탑(淨兜寺址五層石塔, 보물 제357호) 안에서 발견된 조성형?仄?(造成形止記)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시대에는 대부분 그 지방민의 발원에 의하여 석탑이 건립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은 고려 시대 석탑을 전국적으로 분포시키는 데 보다 더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 석탑의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전대의 왕도 중심의 일률적인 탑파 건립에서 벗어나 각 지방의 토착 세력이 건탑(建塔)에 관여하였을 때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제 나름대로의 특징이 반영되어, 곧 다양성 있는 건탑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시대의 석탑은 그 조형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신라의 고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신라 석탑계를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세부에 있어 변형을 보이고 있다.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연화문이 조식(彫飾)된 판석 1매를 끼워 탑신굄대를 삼고 있으며, 정도사지 오층석탑은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이 있고 그 내면에 지선(地線)으로부터 귀꽃무늬가 조식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또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남계원 칠층석탑(南溪院七層石塔, 국보 제100호)·현화사 칠층석탑(玄化寺七層石塔)·흥국사 석탑(興國寺石塔) 등과 같이 일반형 방형중층탑이 고려 석탑으로서의 특징을 지니면서 유행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도 광주 춘궁리 삼층석탑(廣州春宮里三層石塔, 보물 제13호)·안성 죽산리 오층석탑(安城竹山里五層石塔, 보물 제435호)·천흥사지 오층석탑(天興寺址五層石塔, 보물 제354호)·금산사 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보물 제25호)·정산 서정리 구층석탑(定山西亭里九層石塔, 보물 제18호) 등 상당수의 일반형 석탑이 건립되었는데, 모두 신라식을 계승하고는 있으나 옥개석의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추녀가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하였다든가 단층 기단이 많아지고 상층 기단 갑석의 부연이 형식화되거나 생략되는 등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둔중해진 고려 석탑 특유의 작풍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고려 사회의 새로운 성격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10세기 후반부터는 양식상 전대에 비하여 현저한 변화를 보인다. 그러한 고려석탑의 새로운 양상으로서
첫째, 지방적인 특색이 현저해진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석탑에서 지방적 특색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설령 신라의 중심이었던 경주를 벗어난 지방에 석탑이 건립되었다 하더라도 중앙인 경주 지역의 양식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지방에 따라 각기 특색 있는 양식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신라의 고토인 경상도 지방에서는 신라 시대 석탑의 계통을 충실하게 계승한 데 비하여 백제의 고토인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백제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예가 많다. 무량사 오층석탑(無量寺五層石塔, 보물 제185호)·부여 장하리 삼층석탑(扶餘長蝦里三層石塔, 보물 제184호)·비인 오층석탑(庇仁五層石塔, 보물 제224호)·계룡산 청량사지 쌍탑(鷄龍山淸凉寺址雙塔, 일명 男妹塔,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호) 등과 전라북도의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정읍 은선리 삼층석탑(井邑隱仙里三層石塔, 보물 제167호)·귀신사 삼층석탑(歸信寺三層石塔)·죽산리 삼층석탑(竹山里三層石塔) 등 백제계의 석탑은
특히 옥개석의 구성에서 백제 양식을 본받고 있다.
즉 옥개석 양식이 모두 판석형의 낙수면석이고, 대개의 경우 그 밑의 받침부가 별석으로 조성된 목조가구의 일면을 보이고 있는 점 등이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각 부를 모방하고 있어 ‘백제계의 고려 석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백제 고토에서만 볼 수 있는 백제계 고려 시대 석탑의 건립 현상은 고려의 불교가 전대인 신라 시대의 중앙 집중에서 벗어나 좀더 지방에까지 파급되고 한층 토착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고려 시대의 석탑에서는 신라 시대에 볼 수 없었던 각양각색의 새로운 특수형식의 탑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수한 양식이란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의 형식에서 벗어나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새로운 특수한 형식이 가미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예는 신라시대부터 나타나던 것이었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도 사사자 석탑(四獅子石塔)의 양식을 계승한 사자빈신사지 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 보물 제94호)이나 홍천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洪川掛石里四獅子三層石塔, 보물 제540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전대의 이형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라적인 이형 석탑의 예는 사실상 극히 한정되고 개별적인 것에 그쳤으며, 그에 비하여 고려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은 새로운 유형을 이루는 데까지 진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방형에서 다각형으로, 그리고 다층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석탑 중에서 8각형의 석탑은 나름대로 하나의 유형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비하여 원광사지 육각칠층석탑(元廣寺址六角七層石塔)이나 금산사 육각다층석탑(金山寺六角多層石塔, 보물 제27호) 등 6각형의 석탑은 좀더 특이한 형이라 할 수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月精寺八角九層石塔, 국보 제48호)·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普賢寺八角十三層石塔) 등은 일반형 석탑처럼 기단부 위에 탑신과 상륜부를 건조한 형식이지만 8각형의 평면을 이룬 점이 특이하다.
[조선 시대의 석탑]
이성계(李成桂)는 새 왕조를 건립하면서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유교를 새로운 국가통치의 교화이념(敎化理念)으로 삼았다. 이로써 신라·고려를 통하여 1,000여년간 국교적 위치에 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아직도 불교의 영향력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더욱이 태조·세조 등과 같이 불교에 귀의하거나 호불(護佛) 정책을 표방한 군주도 있어 그런대로 불교 미술의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의 여운이 아직도 엿보이는 시기여서 불교 미술의 분야에서도 조성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던 반면, 조선 후기에는 고려 시대의 영향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전란으로 인하여 고려적인 전통은 대부분 단절되었고, 다소 그런 전통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느 일부분에서 변형을 일으키고 있었고, 조형 미술은 점차 소멸되어가는 상태에 있었다.
고려 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던 조선 초기 석탑 중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으로는 낙산사 칠층석탑(洛山寺七層石塔, 보물 제499호)·신륵사 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 보물 제225호)·벽송사 삼층석탑(碧松寺三層石塔, 보물 제474호) 등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또 이형 석탑으로는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 국보 제2호)과수종사 팔각오층석탑(水鐘寺八角五層石塔)을 들 수 있다.
우선 일반형 석탑을 볼 때 방형 중층의 신라석탑의 기본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은 벽송사 삼층석탑으로서,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하여 신라식 일반형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각 층의 체감률도 착실하며 석재의 결구 수법도 정돈되어 있는데, 기단에 있어서 상층 면석에 탱주가 생략되고 탑신부에 있어서는 옥개 받침이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들어 일률성이 없어 기본형식에서 벗어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전체의 조형이 무기력해진 점 등과 아울러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또한 이형 석탑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고 수법이 세련되었으며 의장이 풍부하여 조선 시대의 석탑으로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우수한 석탑이다. 이 석탑은 전체 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 조각 등이 고려 시대의 작품인 경천사 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국보 제86호)과 흡사할 뿐 아니라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주목된다. 또 하나의 이형 석탑으로는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은 평면이 8각인 원당형(圓堂形)을 이룬 탑으로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희귀한 예의 8각형석탑으로 손꼽힌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에는 전대인 고려 시대와 같이 다양한 형식의 탑이 조성되지 못하였으며 고려 시대 석탑의 조형과 양식을 따르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억불 정책 아래에서도 전대의 불교적인 양식을 전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여줄 뿐 아니라 불교 미술을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의 문화적인 전통이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앗! 아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