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계>가 폐간된 이후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하며 새로운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권력과 싸웠다. <씨알의 소리>는 출간하자마자 폐간되고 이에 고소를 진행해 다시 재 발행했으며, 12.12 군사반란 이후 1981년에 폐간되었다가 1988년 이후 재발행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법정 스님도 저서에서 함석헌에 대한 존경을 자주 표현했고 <뜻으로 본 한국사>를 읽으면서 감동 받았던 것을 자주 이야기하였으며, 1970년 <씨알의 소리>가 창간되었을 때 송건호등과 함께 편집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법정의 스승으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이 함석헌과는 같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선후배 사이로 막역한 사이였기에 법정 역시 스승의 친구인 함석헌과 친해질 수 있었다고.
법정의 회고에 따르면 1964년 해인사 퇴설당선원에서 정진하던 시절 종로에 있던 사상계 본사에 장준하를 만나러 갔다가 마침 그날 동국대학교에 가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함석헌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후 함석헌은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기 전에 자신의 책 <뜻으로 본 韓國歷史>를 다시 손질하러 법정이 있던 해인사의 금선암(金仙庵)에 들어왔고, 해인사 큰방인 궁현당(窮玄堂)에서 승려나 사부대중을 상대로 한국의 종교가 나아갈 길에 대한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그만두고 법정이 1975년 가을 송광사 불일암에서 은거하게 되었을 때 함석헌은 법정의 산거(山居)에 한 번 오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고, 법정은 오셔서 쉬어가시라는 회신을 보냈는데, 15-16인 되는 장자모임 회원들과 함께 왔다. 이때 회원들은 아랫절 즉 송광사에 묵고 함석헌은 법정과 불일암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가 법정이 불일암으로 옮겨온지 얼마 안 되어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그릇과 수저가 절에 마련되어 있지 않아, 법정이 함석헌과 함께 온 회원들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밥 대신 감자를 삶아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다들 좋다고 해서 감자를 한솥 삶았는데, 젊은 사람들과 달리 함석헌은 겨우 두 개 정도 들고는 더 먹지 않았다고 한다. 법정은 "하루에 저녁 한 끼밖에 안 드시는 분이 감자로 견디기 힘든 건 당연하고 따로 밥을 지어드려야 했었는데, 융통성이 없이 꼭 막힌 나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그 일이 두고두고 후회된다고 회고했다. 또한 함석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법정은 마침 안거중이었고 함석헌의 영결식날 하필 절에서 예정된 행사가 있어, 인편에만 조문을 대신케 하고 참석하지 못했다며 "고인과 유가족께 죄송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이다."라고 추모글에서 고백했다.
1987년부터 암으로 투병하던 중 1988년 12월 씨알의 소리 복간 96호에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투고하였다. 이는 그가 쓴 마지막 글이었다. 1989년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며 같은해 2월 4일 새벽 서울특별시 서울대병원에서 향년 87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