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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05
12월15일[대림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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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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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5TTKiMM4OU
[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님 집전(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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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1)따뜻하고 편안하신 하느님>
오늘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던진 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는 말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천 년간 기다려왔던 메시아,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다들 그분이 과연 어떤 분이실까, 과연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 주실까, 무척이나 궁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너무나 따뜻하고 편안하신 분, 너무나 자연스럽고 인간미가 넘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완전히 동떨어진 신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너무나 소탈하고 평범한 예수님의 모습에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던 백성들은 환호하고 안심하였지만, 나름 한 가닥 하던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도저히 이 특별한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녕 파격과 놀람의 연속입니다. 당대 가장 몹쓸 인간의 대명사였던 세리의 친구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로 발탁하셨습니다. 스승이셨지만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허기진 제자들을 위해 직접 아침상을 차리시던 스승이셨습니다. 아흔아홉 마리 건강한 양들을 남겨둔 채 길 잃은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기괴해서 다들 멀리 피해가던 한 여인을 치유하시고, 당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목숨 걸고 있던 안식일 규정, 그러나 백성들은 그로 인해 죽어나고 있던 안식일 규정을 하나하나 깨트리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잔칫집에 들어가시면 최대한 즐기셨습니다. 기쁜 얼굴로 식탁에 앉으셨고,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행복해하셨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흥을 즐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로 축제였습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짧은 생애를 살다가셨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 30년, 출가 후 공생활 3년, 그리 길지도 않는 삶이었습니다.
당연히 수학여행 떠난 아이처럼, 따사로운 봄날 오후 소풍 나온 연인처럼 최대한 즐기면서, 최대한 만끽하면서 지내셔야 마땅했습니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언행을 종합해볼 때 예수님의 얼굴은 절대로 경건하거나 엄숙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목이 뻣뻣하다거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편안한 분이셨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세리와 죄인들로 붐볐습니다. 그분의 성품이 얼마나 소탈했으면 가시는 곳마다 아이들이 졸졸 뒤따랐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당대 지도자들처럼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던지 강의를 시작하면 수만 명의 사람이 운집해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 내면에 형성된 하느님 상을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혹시라도 그 하느님 상이 왜곡된 것은 아닙니까? 두려운 하느님, 처벌자 하느님, 진노하는 하느님,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은 이미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명확하게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하느님은 자비와 연민,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을 등지고 떠나간 둘째 아들, 순식간에 유산을 다 까먹고 맨발의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참된 우리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걱정, 우리 죄에 대한 걱정, 종말에 대한 걱정은 이제 한쪽으로 밀쳐두길 바랍니다. 대신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따뜻하고 자상한 하느님, 그분이 차려놓으신 이 세상이란 잔칫상 앞에 기쁜 얼굴로 앉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감미로운 포도주를 우리 각자 인생의 잔에 담아 감사하며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단 한 번뿐인 이 ‘이승의 삶’에 최대한 감사하며 온몸과 마음으로 만끽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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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의 등장으로 이제 슬픔과 눈물의 시대는 지나가고 기쁨과 축제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
한 인간 존재가 이 세상에 왔다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여러 호칭이나 애칭, 별칭들이 자신의 이름 뒤에 붙는 것 같습니다.
저같은 어린 시절에는 우량아를 넘어 과도 비만이다 보니, 돼지라는 별명을 늘 달고 다녔습니다. 수도원 들어와서 첫 서원을 하고 나서는 수사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 사제품을 받고 나니 갑자기 다들 신부님! 신부님! 하고 부르니, 한동안 적응이 안 돼 혼났습니다. 그 뒤에도 호칭은 자꾸 추가되었습니다. 시설장, 원장, 관구장.
얼마 전 다 읽고 나서 그 허접함과 허무맹랑함에 기가 차지도 않았던 반일종족주의의 공저자들 이름 뒤에 붙은 호칭을 보고 나서는 쓴웃음이 저절로 지어졌습니다. 전 ××대학교 교수 ㅋㅋㅋ 본인의 이름만 걸어도 되는데, 현직에 있지도 않으면서, 굳이 전 대학교 교수라고 밝혀, 현직에 있는 교수들이나 동문들, 재학생들의 큰 수치심을 유발하는 걸 보면서 참으로 웃겼습니다.
이름 앞에 붙이는 칭호나 수식어가 제대로 살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는 큰 모욕이요 수치가 될수도 있기에, 심사숙고해서 붙여야 하며, 칭호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 붙는 칭호나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메시아,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어린 양, 주님 나의 주님, 착한 목자, 스승님, 랍비, 선생님…….
대체로 예수님이란 존재에 걸맞는 영예로운 호칭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도 일부 유다 지도층 인사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그분께 아주 부정적인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먹보요 술꾼, 창녀들과 죄인들의 친구!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마태오 복음 11장 19절)
오히려 사악한 적대자들이 예수님 이름 앞에 붙였던 부정적인 칭호가 제게는 더 큰 호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분께서 당대 잘 나가던 왕족이나 귀족들, 세력가들이나 지역 유지의 친구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으며 먹보요 술꾼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스럽고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주님께서는 나처럼 흠 많고 허물투성이인 사람에게도 친구 맺기 하자고 다가오실 것이니, 이 얼마나 은혜롭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아주 엄격한 금욕과 속죄의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산해진미 앞에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식했으며, 최고급 포도주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향긋한 포도주 앞에만 서면 급격히 작아지는 저와는 달리, 세례자 요한은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하게도 자신을 통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 다음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잔칫집에 가면 ‘이게 웬 떡이냐?’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사정없이 주린 배를 채우셨습니다. 포도주가 나오면 서둘러 코르크 마개를 따셨고, 제자들과 함께 건배도 하시며, 원 없이 드셨습니다. 얼마나 잘 드시고 잘 마시었으면,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먹보요 술꾼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 창녀들과 이방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은 기쁨의 때, 축제의 순간, 완성의 시기가 도래했으므로 더 이상 단식이나 금욕은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이 순간의 축제를 즐기고 만끽하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삶이 비록 고통과 슬픔, 눈물과 상처로 가득한 나날이라 할지라도,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매일 삶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 암담하고 착찹할지라도 부단히 우리 삶을 긍정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매사를 언제나 좋게, 너그럽게, 관대하게 생각하고 낙천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이제 슬픔과 눈물의 시대는 지나가고 기쁨과 축제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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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FBNpM1Ek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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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복음에 무감각한 이유>
예수님은 당신과 세례자 요한에게 무관심한 이 세대를 질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여기서 피리는 세례자 요한을 의미할 수 있고 곡을 함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춤을 춘다는 행위는 자기를 버리는 행위이고 곡을 한다는 행위는 누군가의 마음과 하나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구원에 무관심할까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안 믿어야 할 ‘핑계’만 늘어납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핑계 대지 않고 믿게 할 마음, 곧 “착한 뜻”을 갖게 만드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먼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착한 뜻이 생기지 않습니다. 착한 뜻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은 가치를 잃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반면 지혜가 들어가 그 사람 안에 착한 뜻을 갖추게 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놀라운 표징이 됩니다.
곽상빈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스팩을 지녔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공인회계사, 증권분석사, 감정평가사, 변호사, 손해사정사, 가맹거래사, 경영지도사, CIIA(국제공인투자분석사) 등 전문직 자격증 30여 개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150년이 걸려야 할 따낼 수 있는 자격증을 10년에 다 땄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머리가 좋았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했던 사람은 아닙니다. 고등학교도 선린인터넷고등학교란 곳을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다섯 가족은 거의 길거리 나앉다시피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형제들마저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상황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마음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우리 안에 주님께서 능력을 넣어주셨고 그 능력으로 이웃을 위해 무한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불만과 죽고 싶은 마음을 접고 공부해보기로 합니다. 죽기 살기로 하니 3개월 만에 열 개의 자격증을 따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광야의 삶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을까요? 바로 세례자 요한을 만난 것입니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만난 이유는 세상에 좋은 일을 하려는 ‘착한 뜻’을 장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와 싸워 이기도록 이끄는 인물입니다.
이것을 넘어서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감사’입니다. 곽상빈 씨가 군대에 들어갔을 때 악마 같은 선임이 있었습니다. 그를 너무 견디기 어려워 그는 친구를 모아 하느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니 일이 잘 풀렸습니다. 시험을 얼마 앞두고 맹장이 터졌을 때도 주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니 이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감사하여 보답하는 삶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요한을 만나는 것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모두 지혜가 심어준 착한 뜻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착한 뜻이 없으면 그 착한 뜻의 열매를 맺게 하는 예언자와 주님에게 무관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에게는 이 광야가 신학교였고 세례자 요한이 ‘하.사.시’였습니다. 하.사.시를 읽은 것은 주일 학교 교사를 하는데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더 잘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려는 착한 뜻 때문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는 착한 뜻을 실천하는 방법과 힘을 주시는 분들입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러면 그분들을 순서대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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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끔 미사를 봉헌하는 ‘꿈’을 꾸지만, 며칠 전에는 아주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미국에서 사목하는 선배 신부님의 서품 4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신부님들이 10명 이상 모였고, 교우들도 많이 왔습니다. 신부님 중에 한분이 몸이 불편하신 장애인이었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주례 사제 옆에서 복사를 서는데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였지만 제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미사에 함께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제의를 깜빡하고 놓고 와서 다시 제의를 가지러 갔습니다. 교구청에서 5년, 미국의 가톨릭평화신문에서 5년째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10년 가까이 본당을 떠나있었기에 그런 꿈을 꾼 것 같았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살아야 하듯이, 사제는 교우들과 함께 지낼 때가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것 같습니다. 황량한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어서 먼 길 가는 나그네에게 위로가 되는 것처럼, 매 주일 함께 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는 제게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지난 10월 한국에 휴가 갔을 때입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내던 동창신부님이 20년 만에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사제생활 32년 중에 10년은 유학 갔었고, 20년은 학생들을 가르쳤고, 드디어 첫 본당의 주임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SNS에 교우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사진과 글을 통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참기름이 고소한 것처럼, 신부님의 첫 본당 생활에 깨가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본당의 외벽을 도색한 이야기, 사목위원 연수 이야기, 시니어 아카데미 학생들의 공연 이야기, 레지오 단원들 훈화 이야기, 장례 미사 이야기, 혼배 주례 이야기, 주일학교 학생들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마치 먼 여행을 마치고 그리운 가족들의 품으로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행복은 거창한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모든 것이 충족되면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작은 것들에서도 감사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해야 할 것들을 마땅히 사랑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행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행은 결핍과 가난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불편할 수 있지만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결핍과 가난 속에서도 행복은 씨를 뿌리고 꽃이 피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오늘 제1 독서는 불행의 시작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에서 멀어지면 불행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어버리면 불행은 불쑥 찾아옵니다. 그렇습니다. 불행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멀리하면서 찾아옵니다. 행복은 작은 일에 감사하고, 해야 할 일을 사랑할 때 찾아옵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래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하여도 아쉽지 않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불행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사랑하며 행복한 날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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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였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17절), 즉 우리는 너희가 선행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17절),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두 가지 선포, 즉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이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마귀 들렸다 하고, 예수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했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비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마르 1,4)할 때, 자신을 회개해야 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했고,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4,23; 9,35)하실 때, 당신 안의 빛나는 자유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그려 보여주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지혜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서 자신이 전에 주었던 선물을 빼앗아, 순종하며 믿음 깊은 백성에게 선물로 준다. 지혜의 선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리고도 알지를 못한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삶이 달라졌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유다인들은 요한의 단식과 금욕적인 삶을 보고서도, 주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의 모습과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완성하신 분을 단죄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는 고약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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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장터의 아이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가장 놀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놀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한편에서는 놀이에 적극적인데, 다른 편에서는 반응이 영 시큰둥합니다. 전혀 맞장구를 쳐 주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며 혼례식 놀이를 유도하여도, 곡을 하며 장례식 놀이를 제안하여도, 반대편에 서 있는 아이들은 호응하여 주지 않습니다. 놀이를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입니다. 장례식 놀이를 연상하게 하는 세례자 요한의 금욕적인 모습(“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을 본 사람들은 회개로 응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처럼 대합니다. 그리고 혼례식 놀이를 연상하게 하는 예수님의 비금욕적인 모습(“먹고 마시자”)은 하느님 나라 잔치에 대한 초대였으나, 사람들은 그 초대에 응답하기는커녕 사람의 아들을 방종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버립니다.
하느님 편에서는 늘 최선을 다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을 비롯하여 그전에도 끊임없이 파견되었던 예언자들의 활동, 그리고 외아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적과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내고자 노력하시는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 주지 않을까? 혹시 곡을 하면 가슴을 쳐 주지는 않을까?’ 그들의 반응을 초조하게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간절한 요청에 얼마나 성심성의껏 응답하고 있습니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은지,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는 경우는 없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의 부주의한 태도를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더 적극적으로 호응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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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6-19)
복음서를 보면,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아주 많은 사람이 그에게 가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5-6)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르 1,5) 표현만 보면,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회개’는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만(또는 겉으로만)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8)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 또는 “삶을 완전히 바꿔라.”라는 뜻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는 회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삶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는 하지 않으면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일은, 고해성사를 보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핑계를 대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을 가리킵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라는 말은, ‘저자는 미쳤다.’ 라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는(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세례자 요한이 미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요한 탓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았을까? 아마도 처음에는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랬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자,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종말 선포’로 생각하고서 심판을 피하려고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것 같은데(마태 3,7), 처음의 그런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고 금방 가라앉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탓을 한 것은, 세례자 요한을 보내신 하느님 탓을 한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저런 이상한 사람을 예언자로 보내셨을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자기 죄에 대해서 아담이 ‘하느님 탓’을 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 말은, 아담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열매를 따서 준 여자와 그 여자를 아담에게 주신 하느님에게 잘못이 있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회개의 출발점은 “내 탓이오!”입니다. 남 탓을 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느님 탓을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서 “저자는 미쳤다.”라고 말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미친 사람의 말이니 그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일 수 없다.” 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회개하기가 싫어서, 또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싫어서 핑계를 댄 것뿐입니다. (오늘날에도 고해성사를 보면서 ‘남 탓’만 하고 ‘내 탓이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의 생활을 보면 그는 예언자가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처럼 생활하셨다면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을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도 미쳤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해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하는 말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를 “일상생활 속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자고 해도 세례자 요한은 듣지 않고 극기고행만 한다.”로,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를 “우리는 엄숙하고 근엄한 종교생활을 하기를 원하는데 예수는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 생활만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탓을 하면서 회개하지도 않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비록 수는 적었지만, ‘회개 선포’와 ‘복음 선포’를 믿고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나의 복음 선포는 모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다.”라는 뜻입니다.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세례자 요한의 생활 방식과 예수님의 활동 방식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었지만, 그 방식은 하느님의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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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우상숭배로부터 하느님 신앙으로 나아가기>
최고선의 가치로부터 공동선의 가치로 우리의 성찰이 옮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이 오래되고 끈질긴 풍조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에덴 동산 시절부터 활약해 온 마귀의 세력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수하로 삼고 죄를 저지르게 하고 있어서 생겨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될 수 없었고, 오히려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신성을 모독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된 역사상 최대의 수수께끼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거짓 목자들의 우상숭배를 따라하다가 하느님을 알아보는 감수성을 아예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최고선 가치들에 무심하고 우상숭배에 기울어졌던 백성들에게 한탄하였고(이사야 예언서 48,18-19), 유감스럽게도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여전히 우상숭배 풍조에 물들어 있던 세태에 대해 한탄조로 말씀하셨습니다.(마태오 11,16.18-19)
우상 숭배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최고선의 가치들에 대한 영적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같은 인간에게 필요한 가치들도 우상숭배자들이 꾸며 놓은 거짓 가치들에 현혹되면 하늘나라 대신에 지옥 나라가 펼쳐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선사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비록 당신이 오해를 받아 십자가형을 받아 죽임을 당하시면서도 그 전에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을 누누이 약속하시면서 당신 현존의 징표와 조건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 징표를 따라서 그 조건을 채우기만 하면, 예수님 당시의 어리석은 유다인들처럼 우상숭배에 빠지는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풍성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노선을 계승하는 역대 교황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현존하시는 양식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는 말씀으로서 그분은 선포되는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신앙을 불러일으켜 주십니다.(루카 24,13-35) 둘째는 성찬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신 그분은 성체성사에서 거룩하게 변화되시어 우리에게 오십니다.(루카 24,13-35; 22,19-20) 셋째는 사랑의 섬김으로써,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서로에게 발을 씻어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요한 13,5.14-15.34) 넷째는 세례 받은 모든 신자에게 성령께서 이끌고 계시고 이를 알아볼 능력인 신앙 감각이 있음을 존중하는 것입니다(요한 6,56; 14,20).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로가 서로 안에 존재하시듯이,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 안에 믿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다섯째는 둘이나 셋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신자들이 각자의 신앙 감각에 입각하여 평등하게 논의에 참여하여 공동으로 합의하는 교회 구조를 이룩하는 것입니다.(마태 18,19-20) 그리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화의 빛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다섯 가지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성을 온 세상에 증거할 수 있게 되고, 사회의 구성원들도 우상숭배의 풍조에서 벗어나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 가치를 체화하신 존재로서 그분의 현존 자체가 이 가치들을 자동으로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 이 최고선의 가치와 배치될 뿐만 아니라 이 가치들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우상들과 맞서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든 우상은 거짓 자유로 포장하여 자유를 억누르고, 돈을 섬기게 만들어 평등을 해치며, 기득권 카르텔로 정의를 짓밟는 사회적 불의를 용납하고, 전쟁을 선호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반평화적이고 반생명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므로 그러합니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게 되면 이 최고선의 가치들을 수호하고 증진하는 파수꾼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이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삶을 역사 안에서 계승하게 됨으로써 교회가 세상에 대해 최고의 봉사를 하는 것이며, 또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도직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건, 또 얼마 만큼의 성과를 내건 상관없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책임이 바로 우상숭배 풍조에 맞서고 하느님 신앙의 감수성을 살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최고선 가치의 수호로 인해 이룩되는 사회적 변화를 인간화와 민주화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사회에 대해 교회가 이바지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요 사회가 교회로부터 입을 수 있는 최대의 혜택입니다.
인간화와 민주화의 원리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면 적어도 우상숭배의 풍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임으로 최고선의 가치를 수호하는 일이 우상숭배 풍조를 배격하고 하늘나라를 이룩하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마태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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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조건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 ‘자기중심’이라는 명찰을 떼어 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도 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진정한 천상의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감옥이 워낙 깊고 그 벽이 두꺼워서 그곳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어렵기에 ‘철들자 망령’이라는 말이 나왔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과 당신을 두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며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객관적이라기보다 자신을 둘러 싼 주관적이라는 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전전 교구장이신 지학순 주교님께서는 ‘욕먹는 신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신품 받는 그날에 그 말씀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왜 하필이면 욕 먹는 신부람’이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주교님의 그 말씀이 ‘줏대 있는 사제의 삶’,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뿌리도 없고 부평초처럼 기준도 없는 판단이 빚어낸 말들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줏대 있는 사람들은 비록 세상의 비판을 받더라도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고 때로 외롭고 힘들더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민심을 ‘장터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에 비유를 하십니다. 철부지 아이들이 떠드는 말, 노래가 어떤 기준이 있겠어요? 그래도 많은 사람이 그 민심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있지요.
인기라는 것, 한때 얻은 평판은 안개와 같아서 해가 나면 언제 있었나 싶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인데요.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오 11,18-19ㄱ)
이렇게든 저렇게든 세상 사람들은 말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터의 아이들의 노래와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마치시며 이런 진리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ㄴ절) 믿는 이들의 많은 교우들이 신앙을 ‘마음의 평온’으로 꼽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유를 대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함이고 가정이 건강과 복을 얻기 위함’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서 생명를 잃었고 주님께서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박해와 고통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세상에 아부했다면 그들은 적어도 생명을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뜻을 어긴 분들이시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분들은 적어도 세상의 복과 평화만을 구하지는 않지요. 그리스도께서 가신 ‘줏대 있는 길’을 따르려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은 자기중심에서 가족들을 위하고 건강을 챙깁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며느리라 시어머니를 거스를 수 있음을 시사하셨습니다. 혈육이라고 해서 나와 가깝다고 해서 가던 길이 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서 복음의 가르침을 위해서 신조를 지키고 생명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따르는 박해와 고통도 감수해야 하지만 줏대 있는 신앙인이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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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지만, 유다인들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도 마음을 열지 않는 완고한 이 세대를 비난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혼례를 거행한 뒤 시장에 모여 춤을 추었고, 장례 뒤에는 죽음을 슬퍼하며 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른들의 이러한 생활 양식을 모방하여, 어린이들은 피리를 불며 춤을 추거나 가슴을 치며 곡을 서로 주고받으며 놀았나 봅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즐거운 가락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데, 다른 무리의 아이들은 함께 흥을 내고 어울려 춤을 추기는커녕 팔짱을 끼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울한 곡을 연주하거나 장송곡을 불러 보아도 함께 슬퍼해 주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거나 곡을 하는 아이들에게 장단을 맞추지 않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종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그는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고행자의 삶을 삽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마귀 들린 자’로 취급하면서 배척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선포하시고 죄인들과 어울리시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면서, 단식을 하고 죄인들과 어울리지 말라며 배척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합니다. 그것이 조작된 것인지 참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워 주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열어 예수님의 상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이웃과 형제의 상처에 눈을 떠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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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1,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동시대의 사람들을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哭을 하여도 울지 않는 아이들에 비유하였습니다. 누가 무엇을 하든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자기 좋을 대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해서 말씀하셨는데, 이는 비단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만의 성향이 아닌 모든 시대의 사람들의 한결같은 성향이나 심리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아집과 편견에 갇혀 있어서, 자기 옳음과 자만에 빠져 있어서 어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뿐더러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았고 배척했던 것입니다. 극단적인 자기 아집과 편견에 갇혀 있기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하고 무조건 시비를 걸고 무조건 비난할 뿐입니다. 도대체 사람들 안에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과 다른 것은 무조건 틀린 것이다.’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끊임없이 자신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심판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든 늘 세상과 타인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세상과 타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이나 타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불평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의 마음 깊이에 에고(=이기적 자아)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고, 이런 이기적 자아를 자각하지 않은 이상 어느 경우이든 어떤 사람이든 극단적인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성향 때문에 자신의 관점에서 다른 것은 무조건 받아들일 수 없으며 매사에 불평불만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요한의 처신도 예수님의 행동도 마땅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거부하고 배척했다고 봅니다. 중요한 점은 바로 주님의 구원,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으로 역사하시며 활동하신다는 것이 엄밀한 진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류시화’가 번역한 「삶으로 다시 태어나기」(에크하르트 툴레 지음)에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평은 에고Ego가 자신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잘 쓰는 전략 중 하나다. 불평은 어떤 것이든 마음이 만들어 내는 작은 이야기로, 당신은 그것을 완전히 믿는다. 큰 소리로 불평하든 생각 속에서만 하든 아무 차이가 없다. 자기와 동일시할 대상이 그다지 많지 않은 어떤 에고들은 혼자서 불평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살아나간다. 그런 에고에 붙들려 있을 때는 특히 타인에 대한 불평이 습관적인 것이 되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생략) 타인에 대해 마음속으로 늘 부정적인 분류표를 갖다 붙이는 것이 에고의 행동 양식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불평하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머릿속 목소리를 붙잡아서 그것을 관찰하라. 그것은 에고의 목소리이며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 하나의 생각 이상의 것이 아니다, 자신은 그 목소리가 아니며, 그것을 자각하는 존재임을 알때 에고로부터, 관찰되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신 안의 에고를 자각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에고가 아니며, 단지 정해진 오래된 마음의 방식일 뿐이다. 에고는 자각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우리는 자각하여 일어나야 하며, 일어나려는 그 마음 안에 지혜는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 집회서에서 말하기를, “하느님의 지혜는 자신의 백성 한가운데에서 자랑하고, 자기 백성 앞에서 입을 열고, 자기 백성 안에서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높은 하늘에 거처를 정하고, 심연의 밑바닥을 거닐면서 온 땅을 온 백성과 모든 민족들을 다스렸다. 하느님의 지혜는 누구의 땅에 머물까 하고 이 모든 것 가운데에서 안식처를 찾고 있었다.”(24,1-7)고 합니다. 자기의 편견과 아집을 깨고 나와 하느님의 지혜를 살려고 할 때 하느님은 그 마음 안에 자리를 잡고 사실 것이며, 그때야말로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가야 할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이48,17 참조) 아마도 하느님의 지혜가 머문 그의 마음 안에서는 “평화가 강물처럼,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릴 것입니다.”(48,18) 그렇습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1,19)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대로 지혜의 말씀이고, 그 지혜의 말씀은 당신 삶으로 입증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 혹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옳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십자가의 구원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십자가의 지혜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누구도 십자가의 지혜를 깨닫지 못했지만, 십자가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심을 주님께서 이룬 십자가의 사건으로 온전히 확연히 드러났습니다.(1코1,18~2,16 참조) 유다인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하느님의 어리석음 곧 십자가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합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에고의 어둠과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자아가 이끄는 삶을 고집하며 장터에서 노는 아이로만 살고자 하십니까? 깨어 일어나십시오. 그때만이 걸어가야 할 진리와 생명의 길로 주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며, 마음에 어둠이 아닌 참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넘칠 것입니다. 눈을 뜨고 세상과 이웃들을 보십시오. 이미 주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지혜와 힘으로 구원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 더 이상 어린이와 같은 장난질 그만 멈추고 성숙한 어른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십자가의 지혜를 살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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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본당에 어떤 행사를 계획하면 꼼꼼하게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집니다. 다가오는 성탄 자정 미사를 위한 준비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성가는 무엇이 좋을지, 미사 후의 뒤풀이는 어떻게 할지, 그날의 봉사자는 어떤 단체가 해야 할지 등등…. 신경 쓸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매일 하는 것이 아닌 일 년에 딱 한 번 맞이하는 예수님의 기쁜 성탄이기에 특히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면서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일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하나도 없습니다. 분명히 중요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무계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무계획은 주님을 오롯이 따르겠다는 고백을 통해, 즉 주님께 바치는 기도로 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께 대한 믿음, 당신 뜻을 따르는 사랑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무계획이 조금씩 채워져 구원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씀만 보고서 아직도 그날이 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으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기에 아직 무계획처럼 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으로 채워지는 계획이기에 지금은 무계획처럼 보이지만, 계속 미루다가는 커다란 후회만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대를 장터에서 노는 아이에 비유하십니다. 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추면서 즐겨야 하고, 곡을 하면 함께 가슴을 치면서 아파해야 하는데, 지금 세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만 현세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귀를 막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드시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또 받아들이지 않으니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뜻에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무계획을 채워야 하는데, 예수님을 오히려 반대하면서 하느님의 계획에 동참하지 못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뒤로 미루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세상 것을 모두 채우고 나서야 하느님의 일을 따르겠다는 안일하고 자기 편한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크게 후회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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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뜻 이루는 지혜>
마태오 11,16-19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하느님의 뜻 이루는 지혜>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오 11,19)
하느님의 뜻 이루려
비워야 할 때
비우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채워야 할 때
채우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부숴야 할 때
부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이뤄야 할 때
이루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끊어야 할 때
끊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이어야 할 때
잇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외쳐야 할 때
외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일해야 할 때
일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쉬어야 할 때
쉬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삼가야 할 때
삼가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즐겨야 할 때
즐기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없어야 할 때
없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있어야 할 때
있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죽어야 할 때
죽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살아야 할 때
사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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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어주고>
자기주장을 펴고 그것만이 옳다고 우기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자기 뜻대로 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틀렸다고 말합니다.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서로를 비난합니다. 정치 현실을 보면, 여당과 야당은 옳고 그름, 더 큰 선을 지향하는 정책과는 상관없이 갈라져 싸웁니다.
세대 간의 갈등도 만만찮습니다. 마음 한 번 굽으면 모든 것이 굽어 보이게 마련입니다. 거짓은 거짓을 키워가고 결국 악은 악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넉넉함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성숙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고 말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드러내 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다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이 뜨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줄 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인정하고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함께 피리를 불 줄 알아야 하고, 함께 장례 놀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 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 영혼을 환하게 비추어 언제나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서로를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에페 1,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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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旅程)>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이다-
“주님이 오시니 마중나가자. 주님은 평화의 임금이시다.”(복음 환호송)
대림시기 매일미사 전례문이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본기도부터 영성체 후 기도까지 내용이 주옥처럼 빛납니다. 지난 12월12일은 멕시코의 과달루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날 87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터뷰 기사중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과의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선종한 지 오래된 느낌인데 작년 2022년 12월31일에 선종한 전임 교황입니다.
“나의 건강은 좋아지고 있다. 나는 사임할 계획은 갖고 있지 않다”라는 제하에 계속된 다음 전임 교황과 이어진 우정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와 교황 베네딕도와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다. 때때로 나는 그분께 상의하러갔다. 위대한 지혜를 지닌 그분은 나에게 그분의 의견을 주곤 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너는 네가 생각한 것을 안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나의 손에 놓아 주셨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도왔으며, 이점에 있어 참 관대하셨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모습도 잊지 못한다. 그분의 의식이 또렸했으나(lucid) 더 이상 말씀하시지 못했고 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작별이었다. 3일후 그분은 돌아가셨다. 교황 베네딕도는 위대한 분이셨고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을 때 ‘충분하다(enough)’ 말할 용기를 지녔던 참으로 겸손하고 단순한 분이셨다. 나는 이분을 숭배한다(admire).”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참 진솔한 고백입니다. 얼마나 교황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우정의 관계, 우정의 여정인지 깨닫습니다.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두분의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통해서 우리는 또 우정을 배웁니다. 평생 주님의 섬김의 배움터인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평생 학인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배움과 섬김”, 제가 좋아하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이런 평생 배움의 학인들에게 경청과 겸손은 필수덕목입니다. 수도자의 두 특질(特質)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이란 아름다운 정의도 잊지 못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들의 공통적 자질일 것입니다. 어제 어느 유명한 물리학자의 인터뷰 기사도 생각납니다.
“생명은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자로 되어있지만 우주는 죽음으로 충만하다. 생명은 지구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니, 지금까지 지구밖에서 생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우주 전체를 통해 보면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생명이야말로 부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물리학자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면 생명은 더없이 경이(驚異)롭고 삶은 더욱 소중(所重)하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생명은 참으로 경이롭고 신비롭고 소중합니다. 한편 하느님을, 파스카의 신비를, 생명의 신비를 모르는 무지에 눈먼 물리학자의 그 많은 지식이 참 허무하고 빈약하게 느껴집니다. 새삼 하느님 믿음의 은총이 얼마나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위대한 겸손한 대학자가 되려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하루하루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배움중의 배움이 하느님 공부요 참나의 공부요 평생 과정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탄식하는 세대는 말그대로 무지한 세대입니다. 배움의 여정에 참으로 소홀했을 때 살아있는 사람이라 볼 수 없는, 편견으로 굳어진 완고한 사람, 공감과 배려 감각이 사라져 반응할줄 모르는 무감각한 사람이 됩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무지한 세대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편견으로 굳어져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제멋대로 마귀들렸다 하며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며 굳어진 편견의 확증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또한 무지의 병입니다. 깨어 배움의 여정에 소홀할 때 누구나 이런 무지한 꼰대가 될 가능성입니다. 그러니 희노애락 온 감정을 담아 깨어 찬미감사 기도를 바치는 공동전례은총이 무지의 병에 대한 참 좋은 치유제이자 예방제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말씀이 오늘 복음에 빛을 던집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전생애가 하늘나라의 실현이자 지혜의 발현입니다. 지혜의 빛이자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가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 말씀은 그대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 말씀처럼 들리는 다음 말씀이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 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작금의 한국 현실에 대한 비판같기도 합니다. 저출산이 한국보다 심각한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후손들이 모래알처럼 많아지기는커녕 지금같은 추세라며 현재 5171만명 인구는 50년후 2072년에는 2천만이 감소한 3017만. 100년후에는 4천만이 감소한 1085만명에 불과할 것으로 통계청은 내다 봤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대한민국의 소멸입니다. 성소자가 없어 사라져가는, 문닫는 수도원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를 여자라 했습니다.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면 결국 사회도 사라지듯 여자인 교회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들을 끊임없이 낳지 않으면 교회나 수도원도 사라지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입니다.
말 그대로 희망이자 꿈이요, 길이자 빛이요, 생명이자 진리인 하느님을 잊고 무지와 탐욕의 늪에 빠진, 깊이 병든 사회 현실을 반영합니다. 기후위기와 더불어 총체적 위기에 처한 세계요 저출산의 대한민국은 특히 그러합니다. 일본은 세자녀 이상 둔 가정의 아이들은 나라에서 대학까지 완전 무상 교육시켜 준다 합니다. 새삼 깨어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배움의 여정에 충실한 경청과 겸손, 배움과 섬김의 평생학인으로 정진해야 할 대림시기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지혜의 빛이신 주님을 모심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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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장단에 춤 추는>
오늘 주님께서는 짧은 비유를 드시는데 당신 세대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같다고 하십니다. 당신 세대가 아이들처럼 미성숙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미성숙하냐 하면 자기가 반주해주는 대로 춤추지 않고 장송곡을 연주해도 같이 애도하지 않는다고 서로를 탓합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기는 남의 장단에 춤추지 않는 완전히 자기중심의 미성숙이지요.
그런데 이런 미성숙도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고 아무 장단에 춤추는 미성숙입니다.
이런 미성숙도 또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아예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이는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고 어느 것에도 공감하지 못하며 완전히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고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미성숙이 있습니다. 미성숙 1: 내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의 미성숙. 미성숙 2: 아무 장단에나 놀아나는 줏대 없는 미성숙. 미성숙 3: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경직되고 자폐적인 미성숙.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란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지도, 남의 장단에 내가 놀아나지도 않으며, 아무 장단에나 춤추지 않지만, 어느 장단에는 춤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성숙한 사람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요? 사랑의 장단에는 춤을 추고, 신앙적으로는 하느님 장단에는 춤을 춥니다.
자기 사랑,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에 어긋나는 장단에는 놀아나지 않고, 사랑의 장단에는 어울려서 춤추고 신명 나게 춤을 춥니다.
쓸데없는 말이나 남을 해치거나 흉보는 말은 듣지 않고, 하소연과 도움이나 동감을 얻으려는 말은 귀담아들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그런데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요한의 말도 듣지 않고 주님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요한은 굶는다고 비난하고 주님은 먹는다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거부하면 그 사람의 어떤 말도 거부하기 마련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계명을 들을 것이고, 그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함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이 대림 시기에 귀담아들어야겠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장)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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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마태11,16)
<회개하지 않는 이들!>
오늘 복음(마태11,16-19)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예수님도 그리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11,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이사48,18)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사람들, 마침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다교 지도자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왜 그랬을까?'
'율법이라는 틀' 안에만,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메시아의 틀' 안에만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 마음 안에 참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 안에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그런 모습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틀, 사제에 대한 틀, 너에 대한 틀, ...' 이 틀들이 구원의 장애물이 되고, 오늘 내게 오시는 주님을 가로막는 결정적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안에서 성령의 힘으로 이러한 장애물과 장벽들을 부수어 내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껏 노력해 봅시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주님, 세상을 떠나 당신 품으로 돌아간 사제 김용민(레오나르도)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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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mXtNhEV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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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 19)
온전한 생각은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하게 하는
마음의 실천인
지혜로
드러납니다.
지혜는
사람을
자라게 하듯
아름다운
꽃을 더욱
아름답게
만듭니다.
삶의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를
일깨워주는
지혜가
우리 곁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지혜입니다.
지혜와 인격은
실천으로
드러나는
옳은 기쁨입니다.
늘 우리의
어리석음이
불행을
자초합니다.
어리석음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지혜입니다.
삶의 깊이를
더하는
지혜입니다.
지혜로
한 걸음
다가가는
대림입니다.
지혜는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부정당한
사람들을
끌어안는 사랑이
지혜입니다.
사랑이
옳다는 것은
그 사랑이
이룬 일로
드러납니다.
최고의 지혜이신
사랑이
우리와 함께
사랑을
시작하십니다.
사람을 기쁘게
살게 하시는
지혜를 믿습니다.
지혜가
이루시는
오늘의
일입니다.
지혜와 함께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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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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