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수님이 싫다'(2019)는 이 작품으로 주목받은 22살의 천재 감독 오쿠야마 히로시가 만든 영화입니다.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극찬했고, 2018년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에서 쿠스챠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제목과 다르게 종교에 대한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어릴 적 누구나 겪었을 법한 성장통을 섬세한 기억력과 절제된 연출력으로 표현해 냅니다. 산뜻하고 귀엽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지만, 영화를 본 뒤에 남는 여운은 상당합니다.
시골로 전학 온 초등학생 호시노 유라는 새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워합니다. 도쿄의 학교와 달리 시골 학교는 전교생이 얼마 안 되는 조그마한 학교이기도 하고, 기독교 문화를 모르는 유라에게는 생소한 미션스쿨이기도 합니다. 친구가 생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유라에게 작은 예수님이 나타나 그 소원을 들어주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영화 속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성서 속 예수님 이미지와는 확실히 거리가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자 같은 모습이 아니라, 심심해 보일 정도로 유라를 따라다니고, 유라가 친구와 노는 것을 질투하기도 하고, 램프의 요정처럼 어떤 기도든 이뤄 줍니다. 이 작은 예수님은 어린 유라의 경험 속에서 그려진 예수님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지루한 성경책이나 목사님의 설교 속 예수님보다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님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영화 속 작은 예수님의 얼굴은 유라가 교목 선생님께 받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적힌 성화 카드에 나온 얼굴과 똑같습니다.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2019) 포스터.
요정과 같은 조그마한 예수님은 유라의 기도를 모두 이뤄 줍니다. 친구가 생기게 해 달라고 하자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생기고, 돈을 달라고 기도하자 천 엔짜리 지폐를 얻게 됩니다. 유성우가 관측될 것이라고 한 어느 밤, 친구와 함께 유성우를 보고 싶다고 기도하자 유성우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긴장을 이루는 순간은 두 가지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할 때 늘 나타나 줬던 예수님이 막상 친구가 위급할 때는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첫 번째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 친구와 함께 신사에서 소원을 빌고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이야기하는 씬입니다. 이 씬에서 유라에게는 작은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친구 오오쿠마 카즈마는 축구 시합에서 골을 많이 넣게 빌었다고 말하지만, 유라는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친구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습니다. 이때 유라가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관객에게도 알려지지 않습니다.
영화의 흐름상 유라는 친구 카즈마에게 불운한 일이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축구를 잘하는 친구에게 질투를 느껴 더 이상 축구를 못 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수도 있고, 항상 웃는 것만 같아 보이는 친구의 엄마가 안 웃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유라가 예수님이 싫어진 이유는 더 이상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부재하는 예수님에 대한 미움 이전에, 철없는 자신의 개인적인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져 느끼는 회한에 가깝습니다.
카즈마의 추도 예배에서 기도를 맡은 유라 앞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자, 유라는 예수님을 기도하는 손으로 찍어서 없애 버립니다. 여기서 사라지는 예수님은 자신이 그동안 느끼고 그려 왔던 예수님,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님입니다.
소원을 이뤄 주는 예수님이 싫어진 유라. '나는 예수님이 싫다' 스틸컷
3. 나의 소원에서 이웃과의 감각으로 이어지는 성장통 |
영화 속에서 개인적인 소원의 성취를 뜻하던 이미지는 성장통을 겪은 후 공동체적 감각의 이미지로 변합니다. 유라가 소원이 정말 이뤄지는지 실험 삼아 기도해서 얻었던 천 엔짜리 지폐는, 잃어버린 친구 카즈마를 추모하기 위해 그가 생전 좋아한다고 말했던 파란색 꽃을 헌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전에 개인적인 소원 성취가 마냥 기분 좋은 축복이었다면, 성숙해진 이후에는 이웃이 겪는 아픔에 애도하는 표현으로 변합니다.
마지막 씬에서 유라가 손가락으로 문풍지를 뚫어 창밖을 바라보는 씬은 영화의 시작 시퀀스의 적적한 방 안의 풍경에서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문풍지에 구멍을 내는 씬과 교차합니다. 마지막 씬은 친구를 떠나보내고 난 뒤 유라가 느끼는 적적함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고, 여러 개인적 소원의 성취들을 뒤로하고 친구과 함께 웃고 뛰놀며 행복해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공동체적 인식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아주 세련된 연출로 개인적 소원의 성취에서 친구의 빈자리를 통해 공동체의 소중함을 느끼는 경험으로, 이기적이었던 유아적 경험에서 어른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성장통을 그려 냅니다.
어쩌면 지금의 교회는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만을 지상의 복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영화 속 유라가 경험하는 공동체적 성장통마저 겪지 못한 유아적인 모습에 머무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희락·화평 등 교회가 줄 수 있는 축복의 언어는 이제 물질적인 축복으로 완벽히 대체됐습니다. 교회는 그보다 더 커다란 축복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잃었습니다. 과거 교회가 세상을 축복할 수 있었던 시대가 이미 끝났지만, 현재 시장에서 주어지는 개인적 성공보다 거대한 축복을 이야기할 수 없는 궐위의 시간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는 개인적 소원 성취를 절망과 반성으로 뒤집는다는 점에서, 궐위의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공동체적 물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과 기도 제목은 이웃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예수님이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카즈마와 함께 뛰었던 유라를 비추는 마지막 씬. '나는 예수님이 싫다'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