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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 세대 어른들은 종종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책으로 내면 한 열 권도 더 낼 수 있을 것이라고들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생 60이 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을 반추하면 책으로 써도 모자랄 수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 세대가 겪어 온 세월은 탄생부터가 격동의 시간이었으며 성장기 내내 격동의 세월을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는 전기가 없어서 초꼬지(호롱불) 하나에 의지했던 수많은 밤들을 보냈습니다. 수도가 없어서 100여 호 마을 사람들이 공동 우물 하나로 모든 식수와 빨래, 생활용수로 써야했습니다. 대처로 나갈 버스를 타기 위해 10리길도 멀다 않고 다녔습니다. 지게 하나로 모든 무거운 것을 운반해야 하는 인간의 힘만 의지했던 삶이었습니다. 무릎터진 바지를 입어도, 구멍뚫린 고무신을 신어도, 우산 대신 거름종이를 뒤집어 써도, 도시락을 못 싸 점심을 맹물로 채워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느끼며 살았던 세대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할 말이 참 많은 세대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세대의 삶은 누구를 막론하고 책 몇 권씩은 낼 수 있는 깊은 사연들을 가슴에 담고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연재되는 이 소년의 삶만 유독 특별히 피폐했다는 생각은 하면 안 됩니다. 다만 이 소년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행동에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소년은 지나 온 세월들을 특별하게 뒤돌아보며 지금 자신이 컴퓨터로 스마트폰으로 모든 문명의 이기가 주는 편리함을 맛보면서…어디가 조금만 이상하다면 아내와 자녀들의 성화 때문에 병원을 들락거려야 하는 자신을 보면서…지나온 자신의 삶들이 과연 이런 호강을 누려도 되는가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 소년의 이야기 시작은 이런 감사함에서 발단된 ‘치기’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이 자신의 담벼락에 ‘초등학교만 졸업했는데 매우 당당한 분이 계시다’는 글을 올렸고 그걸 읽으면서 그냥 댓글보다는 ‘여기 초등학교 졸업자 또 있습니다’를 조금 재미있고 길게 쓰려했던 것이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담입니다. 소년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아내와 살림을 차렸을 때입니다. 단칸방이지만 아내가 해온 혼수였던 장농과 화장대, 텔레비젼과 냉장고와 책상이 방 안을 차지하고 남은 곳에 이불을 펴면 잠자리요, 이불을 걷으면 거실 식당 다용도실이었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그 방에 앉아 아내가 차려 온 밥상을 처음 받았습니다. 햐안 쌀밥에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이었습니다.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복바쳐 올라 숟가락을 들 수 없었습니다. 잠깐동안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 간 스물 아홉해의 삶들…이제 나도 이런 밥상을 받을 수 있구나 하는 감격...그때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밥 한 그릇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감사가 이후 소년의 삶 전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실패, 웬만한 상처는 실패도 상처도 될 수 없었습니다.부자도 아니고 높은 자리에 오른 고위직을 지내본 것도 아니고, 주변 곳곳에서 늘상 보이는 그냥 보통의 할아버지…평범한 60대의 장삼이사일 뿐이지만 소년은 그만큼이라도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 감사를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주심도 감사하면서…
다시 소년의 이야기. 청년이 된 소년은 새벽 5시에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손에는 한 마을에서 자랐으나 인천에서 큰 부자인 큰아버지의 부름으로 일찍 고향을 떠났던 친구의 전화번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소년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직장, 밥먹을 곳, 잠잘 곳, 이런 것 전혀 준비되지 않은 소년, 수중에는 단 몇 천원의 돈과 친구의 전화번호 하나…참 무모한 상경이었습니다.
새벽시간이므로 전화를 걸 수가 없어서 무작정 서울역 앞에서 동인천 역을 다니는 한진고속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인천은 참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새벽 6시인데 역 광장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수십년 전이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배다리입구 포장마차 군단, 순대국이나 만두 같은 먹음직한 음식들에서 뜨거운 김이 오르고 사람들이 그걸 맛있게 먹는 광경…그거 한 그릇을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친구를 만나기 전이므로 돈을 한 한푼이라도 아껴야 해서 사먹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신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전화를 받은 친구가 역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안내로 찾아간 곳은 여관이었습니다. ‘인천시 중구 용동 95번지 희진장 여관’ 소년이 인천에서 얻은 첫 직장입니다.
돈도 벌고 공부도 해야 한다는 소년의 희망을 들은 친구는 소년에게 합당한 자리를 그곳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일단 여관이므로 자는 곳이 해결되었습니다. 당시 희진장 여관은 1박 손님보다 장기계약 손님이 많아서 여관 자체에 찬모를 두고 그 손님들의 조석 식사를 제공했기에 밥도 그들과 함께하므로 해결되었습니다. 하는 일은 단순했으나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시 희진장 여관은 객실 난방이 기름보일러가 아니고 개별 연탄난방이었습니다. 객실이 서른 일곱 개였는데 그 서른일곱 개의 방 밑에 연탄불을 넣는 각각의 아궁이가 지하에 있었습니다. 또 목욕물을 데우는 연탄 보일러는 한 번에 연탄을 여섯장을 넣어야 하는 대형 보일러였습니다.
하루에 두번, 이 서른일곱 개의 연탄 아궁이와 목욕용 보일러에 여섯개, 총 마흔세 개의 연탄불을 갈고 연탄재를 내다 버리는 일…그리고 낮 시간에 손님들 나가면 방 청소하는 일, 월급은 없으며 청소 잘했다고 손님이 주는 팁과, 조바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손님들에게 파는 맥주나 안주에서 남긴 돈을 분배받는 조건이었습니다. 노동의 조건에 비해 대우는 형편없는 그런 일자리기에 누구도 오래 일하지 않아서 빈자리가 되었으므로 소년은 당일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년에겐 당시 얻을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자리였습니다. 소년은 일단 돈버는 일보다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공장엘 가거나 점원으로 들어가면 돈은 벌고 기술이나 장사를 배울 수는 있지만 일이 먼저이므로 공부는 뒷전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따라서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시간을 쓸 수 있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마침 그 여관 주인집 아들이 고등학교에 막 진학한 상태라 그 애가 보았던 중학교 교과서와 참고서 등 책값을 따로 내고 책을 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희진장 여관은 그래서 소년에게 맞춤직장이었습니다.
한 번 파뭍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소년은 어떤 책이든지 손에 들면 그 책을 다 읽어야 손에서 놓는 습성을 지녔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한글로 씌어진 모든 책을 그냥 외워버리는 방식의 공부, 국어책도 외우고 국사책도 외우고 외울 수 있는 것을 다 외웠습니다. 하지만 영어나 수학은 도대체 모르는 것들이라서 외울 수가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잠깐의 재건학교와 강의록으로 영어와 수학의 기초는 깨우쳤지만 그러나 영어 수학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생인 여관집 아들이 이렇게 씨름하는 소년에게 자신이 공부한 참고서에 착실하게 메모까지 해서 주는 친절을 배풀어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선생님’에게서 배워야한다는 욕구는 높아졌습니다. 거기다 시간이 갈수록 소년은 자신의 정신이 몽롱해져 간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잘 외워지던 책이 아무리 읽어도 외워지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고, 판단력도 감각도 점점 뒤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년은 늘 오후 6시 쯤 객실 연탄불을 갈아야 합니다. 이는 손님이 들어와서 방이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새벽에 불이 꺼지면 방이 차거워 지니까 새벽 서너시에 불을 점검하고 꺼진 연탄 있으면 불붙어 있는 예비연탄으로 교체도 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아침 6시에 다시 연탄불을 갈아주는 것입니다.
서른일곱 개의 연탄 아궁이가 미로처럼 얽혀 있는 지하…일본식 건축물인데 지하는 환기나 통풍은 신경쓴 흔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대로 방에 불 넣는 아궁이만 있는 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지하에서 연탄불과 씨름하고 나오면 늘 정신이 몽롱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 잠시 바람을 쐬면 금방 말끔해졌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자 금방 말끔해지지 않고 평소에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때 맞춰 여름이 왔습니다. 여름이 오면 연탄불을 피울 일이 없었으므로 그곳에서 할 일이 없었습니다. 머리가 몽롱한 것이 연탄불 때문이란 걸 직감한 소년은 겸사겸사 그곳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 생활 몇 개월 동안 저장된 고향 사람들의 연락처를 더듬어 새로운 자리와 거처를 물색하다가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에서 만두와 꽈배기 도너츠를 만들어 공급하는 동네 형의 공장에 취업했습니다.
광주대단지…서울의 판자촌 철거민 이주를 위해 35만 평 규모의 대단지를 조성, 1969년부터 이들이 이주한 곳입니다. 당시 농촌에서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 대다수는 건설 일용노동직, 비정규직, 하층 판매직, 단순 임시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청계천 영등포 등지 판자촌에 기거했는데 이들이 사는 판자촌을 강제로 철거하면서 광주 대단지로 강제이주를 시켰습니다. 따라서 그곳 초창기에는 제대로 된 집보다는 대부분 임시거처였습니다.
소년의 고향 선배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허름한 건물 지하에 만두 꽈배기 도너츠 등을 만드는 공장을 차린 뒤, 밤에 그것들을 만들어서 새벽이면 자전거로 곳곳의 건설현장에 있는 함바나 포장마차에 물건을 댔죠. 여기서 일하는 사람의 종류는 두 부류, 만드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만들어주는 것으로 월급을 받고, 자전거로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들은 배달양만큼 이문을 배당받는 조건의 일명 ‘배달꾼 중간상인’이었습니다.
키는 직지만 악바리 기질이 있는 소년은 만드는 기술이 없으니 ‘배달꾼중상’의 일자릴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돈벌이가 매우 좋았습니다. 새벽에 짐자전거 뒤에 박스를 가득 싣고 지금의 상대원동 하대원동 단대동 일대 새로 집짓는 곳 함바들을 한 군데라도 더 돌아 한 박스라도 더 팔면 그만큼 이문도 더 받았습니다. 돈 버는 재미에 참 열심히 자전거를 탔습니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배달이 끝나면 온종일 남는 시간은 다 공부하는데 썼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학원이란 곳에 돈내고 선생님으로부터 공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이 청년은 어찌 되었을까요? 이 소년의 자전적 이야기는 그의 삶이 소년에서 청년, 청년에서 장년, 장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안에서 살아 온 때문에 통상의 용어에서도 종종 기독교적 언사가 동원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인이 아니신 분들은 이런 점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시 기독인 얘기를 첨언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성령의 역사,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 삶, 모든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이런 말들이 바로 기독인들이 많이 쓰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는 기독인은 자신의 모든 삶을 감사의 삶으로 승화시킵니다. 이제 노년이 된 소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 보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건강하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음도 감사합니다. 그럼 왜 그런 감사가 나오는 것인지 다시 청년이 된 소년의 얘기로 돌아갑니다.
건방…’스스로 잘났다고 여기면서 주제넘게 구는 짓이나 태도’라고 사전에는 적혀있습니다. 이런 사전적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건방지다. 건방을 떤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변에서 노골적으로 건방지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은 다른 모든 것에서의 평가도 그리 좋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청년으로 성장한 소년은 당시로 보면 참 건방진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당시의 이 건방짐 때문에 지금 이나마 살고 있습니다. 당시의 ‘건방짐’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살아오면서 늘 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악전고투 끝에 잠잘 곳, 밥 먹을 걱정을 덜고 수중에 돈이란 것이 조금은 생겨가는 청년, 그 청년은 이제 불과 2~3년 전의 생각들…이발사만 되어도 먹고 사는 것은 해결 돼. 양장 재봉사 기술을 가진 재단사만 되어 여성복 맞춤집만 하면 성공이야. 같은 것을 철없던 시절의 ‘과거’로 치부하고 정말 제대로 된 '성공'이란 것이 욕심이 났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 욕심이 넘어서 건방이 되었습니다.
늦은 취학, 그러다 어물어물 스무살…당시 청년은 같이 국민학교를 나온 동기생들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나이 또래의 대학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같이 국민학교를 나온 동기생들은 고등학교 1학년, 한해 늦은 애들이 중학교 3학년, 그렇지만 청년의 또래들은 대학생…청년은 그 대학생들이 눈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많이 늦었으므로 어떻든 그들을 따라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처음에 발을 디딘 곳은 검정고시 학원이었습니다. 당시 소속된 반은 고입반(중학교 졸업자격시험반), 여기서 중학교 1학년 과정부터 3학년 과정까지를 속성으로 공부하여 1년 안에 고입자격을 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학원에 한 달 쯤 다닌 뒤로 그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제대로 된 안정적 거처도 없었으나 있는 곳이 어디든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는 청년인지라 이미 ‘잡학’에는 상당한 소득이 있었습니다. 이런 청년이 ‘고입’검정고시 과목 안에 국어 영어 수학 사회 말고도 과학 체육 음악 미술 실업(농업 공업 중 택1) 이런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냥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이런 ‘부질없는’ 공부를 한 뒤 ‘고입’ 자격을 따고 '대입(고등학교 졸업자격)반'에 가면 또 거기서도 국어 영어 수학 외에 과학(물리 화학 생물 지학 중 택1) 체육 음악 미술과 실업(농업 공업 상업 수산 중 택1)같은 과정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머리를 짓눌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다 하려면 입대 전에는 도저히 아무 것도 이뤄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공부는 하면서도 방황을 하고 있을 때 학원에서 사법행정요원예비시험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사법시험 행정고시 외무고시 입법고시 기술고시 등으로 다양하게 시험이 분화되었으나 당시는 고등고시란 말로 다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즉 고등고시 사법과, 고등고시 행정과 뭐 이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당시는 이 고등고시 응시자격은 4년제 대학졸업자로 학력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지금의 9급 공채인 5급을류 공채 응시자도 고졸자로 학력제한이 있었습니다. 소년이 검정고시를 준비했던 이유도 바로 5급을류 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모든 학력제한이 없이 아무나 응시할 수 있는 사법행정요원예비시험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특히 이 시험에 합격하면 4년제 대학 졸업자만 응시할 수 있는 고등고시 응시자격을 준다는 것이 청년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즉 단 한번의 시험으로 대학졸업장은 아니어도, 또 대학졸업자격을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어도, 그들과 같은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랬습니다.
청년은 그 시험을 응시하기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러나 국졸자인 청년에게 그 시험은 보통 어려운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기초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참 난해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시험과목 10과목 중 외국어만 빼면 다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든지 읽고 외우는 방식의 공부를 했던 청년이었으므로 외우는 것에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어 국사 문화사 경제원론 자연과학개론 정치학 행정학개론 법학개론 철학개론 영어 참 단순하고 무모하게도 헌책방에 가서 사법행정요원예비시험용으로 나온 시험과목의 텍스트 한 권씩, 그리고 기출문제집 한 권씩…이 정도 준비로 검정고시 준비를 때려치웠습니다. 고입 대입 검정고시 과목에 있는 수학이 없는 것이 또 청년에게 준 메리트였습니다. 그래도 영어는 넘기 힘든 산이었습니다. 단순한 발음기호 정도와 기초 단어 및 숙어 몇 개만 아는 사람에게 영어 텍스트나 기출문제집은 하얀 종이와 까만 글씨였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어장 숙어장을 사가지고 그 단어 곁에다 한글로 음을 달아서 하루에 한장씩 무조건 외우는 방식이란 무식한 방식의 도전을 했습니다.
그러나…청년이 하는 일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새벽 5시에 짐자전거 짐받이에 만두와 도너츠와 꽈배기와 찐빵 등이 들어있는 박스를 높이 싣고 빠르면 7시 늦으면 8시까지 배달판매를 하고 나서 아침먹고 씻으면 9시였습니다. 이런 일이 매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생계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격은 작은데 악만 있는 청년이라도 몸이 따라주지 않은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성남시를 아는 분들은 이해하겠지만 상대원동 하대원동 단대동 등은 가파른 고갯길 천지입니다. 이 고갯길을 짐자전거로 다니는 고역은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때문에 학원에서는 졸기 일쑤요. 악으로 책을 펴도 잠깐잠깐의 졸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도전을 포기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뭔가를 이뤄내지 않으면 꼭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다가 힘들면 예비시험 과목도 아닌데 헌법 민법총칙 행정법 같은 3급을류(행정 고등고시) 시험과목의 책들도 들여다보며 죽지 않을 만큼 책과 씨름을 했습니다. 남들은 절에도 가고, 모든 것을 작파하고 공부만 해도 이 예비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데 이 청년은 자신은 꼭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몸과 머리를 함께 혹사시켰습니다.
이 건방짐…국민학교 졸업자가 단숨에 대학졸업자와 같은 반열에 오르겠다는 건방짐…이 건방짐이 당시는 건방짐인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때의 ‘훈련’도 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 안에서 시킨 인생훈련이었습니다. 이 훈련이 준 교훈…그것은 지금 60이 넘은 나이에 생각해도 당시의 소년에게 감사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에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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