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인종, 그리고 그들의 음식과 패션을 매개로 한 문화들이 뒤섞여 또 다른 문화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이곳에서 '불가능'이란 없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무한한 자유, 그리고 세계의 맛을 보러 이태원으로 향했다.
대학시절, 방학이면 배낭여행을 떠나는 동기들이 있었다. 다음 학기 충당할 밥(술)값이며 작업비를 비축하느라 각종 아르바이트로 방학을 보내야 했던 청춘에게 훌쩍 떠나는 그들은 '자유' 그 자체로 보였다. 쳇바퀴 도는 현실을 뚫고 '지구의 모든 땅과 물, 하늘을 직접 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당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세계지도 한 장 펼쳐놓고 여행 동선을 짜는 게 전부였지만 그렇게라도 지구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면 어디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 서울이 품은 섬(島), 이태원.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는 그곳에 가면 세계 각국의 음식과 문화는 물론 쇼핑까지 즐길 수 있어 해외여행 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여행에 목마른 이에게 이처럼 달콤한 유혹이 또 어디 있을까. 떠나는 이유의 8할은 현실에서 탈출해 이방인이 되는 것 아니던가. 그것을 지하철 표 한 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니. 편안한 신발과 지도 한 장만 있으면 OK!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당장 닿을 수 있는 이태원으로 세계여행 떠나보자!
무한대의 자유, 이태원 여행의 첫 번째 매력
이태원 소방서를 왼쪽에 두고 언덕으로 올라서면 이슬람 문화와 게이바 등이 뒤섞여 자리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해밀톤호텔>을 등에 두고 직선으로 뻗은 길을 내려오면 고가구점들을 구경할 수 있는 '앤틱가구 거리'가 펼쳐진다아프리카 음식점과 헤어숍 등이 몰려있어 '아프리카 거리'라고도 불리는 이화시장 거리
이태원의 원(院)은 조선 초 한양 여행자를 위한 4대 역원 중 하나였던 데서 비롯된다. 시작부터가 들고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사령부가 들어섰고 6·25전쟁 이후에는 미군기지가 용산에 들어서면서 '다를 이(異)'와 '아이밸 태(胎)'를 써서 '다른 아이를 밴 동네'라고도 풀어내기도 했다. 사람이 들고나고 또 뒤섞이면서 생긴 생채기들은 '시간'을 품고 모든 종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유의 공간'으로 태어난다.
이태원으로 향하는 버스도 있지만 여기서는 좀 더 찾기 쉬운 지하철로 소개하려 한다.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또는 그 앞뒤를 잇는 한강진역이나 녹사평역에서 내리면 된다. 초행길이라면 이태원대로 초입과 닿는 녹사평역 3번 출구에서 출발하는 편이 좋겠다. 이태원 중앙으로 시원하게 뻗은 큰길의 본명은 '이태원대로'. 여기서는 '이태원 메인 거리'라고 부르기로 하자. 아치형 조형물이 이태원 입성을 반긴다.
길 위에 오르면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제 땅 인양 편안하게 거니는 그들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이쪽이 이방인 같다. 여기는 어디일까. 지금 걷고 있는 이땅은 누구의 것일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각양각색 피부색에 예민해졌던 신경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어느 여름인가 우리를 열광케 했던 UV의 노래가 떠오른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무한한 자유를 허락하는 공간에서 부르는 이태원 프리덤!
<지도제공·네이버>
쫄깃하면서도 끈적한 이태원의 자유를 구석구석 만끽하기 위해 여행 시작 전 지도부터 살펴보자. '이태원 메인 거리'를 중심으로 크게 '패션·이슬람·세계식도락·앤틱가구·아프리카(이화시장) 거리' 등으로 볼거리들이 갈라진다. 첨부된 이태원 지도에서 각각의 거리를 확인할 수 있게 이름을 붙여 표기했다. 거리 이름은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름 자체에 성격을 드러내 의미 전달에 큰 무리는 없을 듯 싶다. 거리마다 특색이 있으니 기호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쇼핑과 식사를 겸할 수 있는데다 동양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이슬람 문화'까지 볼 수 있어 다양한 재미가 넘쳐난다.
쇼핑과 맛, 이태원 여행의 기본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이태원에 브런치 바람을 몰고 온 <수지스>가 보인다. 지도에 표기된 <한스양복> 건물 2층이다. 이태원 중앙으로 시원하게 뻗은 '이태원 메인 거리' 초입의 <이태원재래시장> 뒤편으로 메인 거리와 수평으로 '패션 거리'가 펼쳐진다. 패션 전문가들의 보물창고로 소개되는 <이태원지하상가>를 비롯한 패션·잡화점들이 몰려있다. 물론 '이태원 메인 거리'에도 로드숍들이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불가리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젤렌>은 <해밀톤호텔> 뒷골목 세계 식도락 거리에 자리한다. 메뉴를 살피는 것도 쉽지가 않다. 직원에게 천천히 물어보며 무엇을 맛볼 것인지 골라보자. 불가리아에서 유명한 요거트와 치즈는 빼놓지 말고 맛보도록 하자
메인 거리를 따라 이태원역에 닿으면 <해밀톤호텔>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된다. <해밀톤호텔> 뒤편은 1년 365일 '맛'으로 세계일주를 즐길 수 있는 '세계 식도락 거리'다. 이태원역 1번 출구로 나와 <케이에프씨>를 오른쪽에 두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인도 궁중요리를 맛볼 수 있는 <모글>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맛 거리가 펼쳐진다. 이태원 전역에 각양각색의 음식점들이 산재해있긴 하지만 '이태원 식도락'하면 가장 먼저 꼽히는 공간은 이곳이다.
그리스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산토리니>부터 불가리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젤렌>까지. 각국 음식을 비롯해 간단한 요기와 맥주 한잔 할 수 있는 펍도 몰려있다. 최상의 수질과 분위기로 유명한 <글램>도 이곳에 자리한다. 올해 초 용산구는 이곳을 '세계음식 특화거리'로 활성화 해 관광명소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해밀톤호텔>을 등 뒤에 두고 마주한 일직선의 길은 앤틱가구점이 몰려있는 '앤틱가구 거리'다. 중간중간 구제 매장도 있어 쇼핑 애호가들의 발길도 이어진다.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4번이나 3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3번 출구에서 앤틱가구 거리 방향으로 가다 좌회전 하면 이화시장거리가 나온다. 아프리카 음식점과 헤어숍 등이 몰려 있어 '아프리카 거리'라고도 불린다.
극과 극의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곳, 여기는 이태원
여기서 쭉 직진하다 만나는 사거리는 이태원의 검은 과거를 오롯이 품은 시작점이다. 계속 직진하면 용산 미군기지가 있던 시절, 미군을 상대로 한 유흥업소가 몰려있던 골목과 닿는다. '후커스 힐'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야트막한 언덕길이 시작된다. 무슬림들을 위한 할랄(hallal, 이슬람 율법에서 무슬림이 먹고 쓸 수 있도록 허용된 제품) 음식점과 트랜스젠더·게이바가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있다.
이슬람 중앙성원으로 향하는 길 풍경. 무슬림을 위한 음식점과 관련 문화를 접할 수 있어 '이슬람 거리'라고 불린다 이슬람 중앙성원 전경(왼쪽)과 그곳에서 만난 꼬마아이. 아이 아버지는 "아랍어 못해요, 한국말만 한다"며 꼬마를 소개했다
이슬람 중앙성원(한국 이슬람교 중앙회)까지 이어진 길인 '이슬람 거리'는 '후커스 힐'과 '게이 힐'에 밀집된 유흥업소들과 묘하게 겹쳐진다. 여성들의 얼굴과 신체를 가리는 '히잡(부르카·니캅·차도르)'으로 대표되는 보수성의 상징 이슬람 문화와 성적 소수자도 포괄하는 유흥업소가 사이좋게 자리한 그림은 '이태원'이 허용하는 '자유'의 경계가 무한함을 역설한다. 바로 찾아가려면 이태원역 3번 출구로 나와 이태원 소방서를 왼쪽에 두고 우회전하면 된다. '이슬람 거리'를 채운 탄두리와 커리 전문점에 들러 그들의 문화를 맛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인도식 볶음밥인 브리야니(왼쪽)과 우리에게도 친숙한 커리(오른쪽). 밥 또는 난에 커리를 찍어 먹는다
보광초등학교를 앞에 두고 좌회전해서 직진하면 이슬람 중앙성원(한국 이슬람교 중앙회)과 닿는다. 1976년 세워진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원은 이태원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흰 건물과 독특한 모형, 그리고 아랍어가 눈길을 끈다. 2층에는 남자 예배실, 3층에는 여자 예배실이 있고 이슬람 학교인 '프린스 술탄'과 할랄 음식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