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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7. 사로베쓰 평야
젖은 손수건을 든 다카기가 단젠 차림으로 방으로 들어왔다.
“역시 온천이 최고야. 뱃속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군.”
“그래?”
게이조는 읽고 있던 신문에서 얼굴을 들었다.
“무려 3백 40킬로미타나 되는 강행군이었어. 어깨가 아주 뻐근한걸.”
다카기는 털이 무성한 종아리를 내놓고 한쪽 무릎을 세웠다.
“수고했네. 난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자네는 운전하느라 애썼어. 안마라도 해달라고 부탁할까?”
“응, 그럴까? 아직 아홉 시밖에 안 됐군.”
다카기는 도코노마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안마사를 좀 불러 주겠나? ......응, 남자? 여자? 좋아, 잘만 만져 준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다카기는 찰칵 하고 소리나게 수화기를 내려놓아싿.
두 사람은 오늘 와쓰카나이에서 가까운 도요토미 온천에 왔다. 산 속에 있는 조용한 온천장이었다.
게이조는 2주일쯤 전, 한밤중에 다카기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샤리에 살던 여동생이 올 봄에 와쓰카나이로 이사를 했는데 적적하다며 한번 오라고 해서 틈을 내어 한번 가려고하니 차로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게이조는 잠깐 망설였다.
“이봐, 내 운전 솜씨가 못 미더워서 그래?”
다카기가 웃었다. 게이조는 문득 학창 시절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와쓰카나이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서로 여행을 떠나자고 얘기를 꺼내 본 적도 없는 바쁜 생활이었다. 게이조는 마음이 움직였다.
“가지, 와쓰카나이는 전쟁 전에 한 번 가보았을 뿐이니까.”
“정말 갈 거야? 자네도 이제야 집을 비울 생각이 들었나? 작년에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삿포로에조차 얼씬도 하지 않더니.......”
“아, 그랬었나?”
“그럼. 그 후 벌써 1년 반이 지났는걸. 그동안 자네는 아사히가와에만 틀어박혀 있었잖아.”
“1년 반이나 되었나? 아니, 정확하게는 1년하고 4개월이야.”
게이조는 그답게 정확하게 고쳐 말했다. 다카기의 너털웃음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1년 반이든 1년 4개월이든 아무래도 좋아. 여러 번 말하지만, 그처럼 놀라운 일은 난생 처음이었어. 요코는 대담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아가씨야.”
“너무 폐를 끼쳤네.”
“아니, 폐를 끼친 건 내 쪽이야. 요코는 잘 있나?”
“덕택에 그만그만하네.”
전화를 끊고 나서 게이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요코가 자살을 기도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 같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분명히 1년 몇 개월 전의 일이다. 그 후 겉으로 보기에 쓰지구치 집은 평온한 것 같앗다. 그러나 게이조에게는 늘 무슨 달갑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한 나날이었다.
다카기는 오늘 아침 삿포로를 출발하여 아사히가와의 쓰지구치 집에 들러 20분 가량 휴식을 취했다.
“요코, 아저씨는 말이야, 차만 타면 술을 마시고 싶어진단다. 게다가 시속 백 킬로미터 이하의 거북이 운전은 딱 질색이야.”
다카기는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옆에 앉아 있던 나쓰에가 그 말을 곧이듣고는 불안한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돼요. 그럼 저 못가게 말리겠어요.”
“쓰지구치도 이제 퇴물 아닙니까? 지금 바로 생명 보험을 크게 들어 두는 것이 좋겠군요. 그러면 오늘 중으로도 큰돈이 굴러 들어올지도 몰라요.”
“전 돈 같은 건 필요없어요.”
나쓰에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게이조는 그런 나쓰에를 유머를 모르는 꽉 막힌 여자라고 생각했으나, 다카기는 차에 올라타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쓰에 씨는 아직도 소녀 같군. 외곬으로 생각하는 점이 아주 귀엽단 말이야.”
게이조는 나쓰에와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요코의 얼굴을 차 안에서 몇 번이나 떠올렸다. 그러자 그는 문득 요코를 두고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카기의 운전은 생각보다는 신중했다. 그에 대해 게이조가 감탄하자 다카기는 웃었다.
“자네답지 않은 말은 하지 말게. 나같이 쓸만한 인간이 바보같이 함부로 속도를 낼 리가 없잖은가? 저 치지들은 좀 모자라거나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거야.”
다카기는 역시 믿음직스러운 사나이라고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텔레비전이라도 볼까, 쓰지구치?”
다카기는 옆방으로 갔다. 복도 바로 옆의 양실에 텔레비전이 있었다.
“아냐. 난 읽다 만 책이 있어.”
“무슨 책인데 읽다 만 거야?”
“응, 사이토 모키치의 단가집이야.”
“단가집? 31자로 노래를 짓는 거 말이야? 자네도 짓고 있나?”
“아니.......”
게이조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짓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에게 보여줄 만한 노래는 없었다.
“쓰지구치, 단가 따위에 골치를 썩일 게 아니라 도이쓰[속곡(俗曲)의 일종으로 가사는 7.7.7.5조, 주로 남녀의 사랑을 읊음]라도 지으면 자네도 쓸만한 인물이 될 텐데.....”
다카기는 웃으면서 소파를 짐대로 고쳐 거기에 드러누웠다.
“다카기........”
“응?”
“아니......., 요코 일인데 말이야.”
“요코가 또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나?”
“아니, 요코가 말이야. 고아원에 가보고 싶다는 거야.”
“그래?”
다카기는 팔베개를 한 채 다다미에 앉아 있는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요코가 고아원에 가보고 싶어하는 이유가.....”
게이조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짐작이 가는군, 요코니까.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가엾은 거야. 자신이 있던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대학 진학은 뒤로 미루고 올 한 해 동안은 실제 사회에 나가 보고 앞날의 진로를 정하겠대.”
“좋잖은가? 찬성일세, 난.”
양실 소파에 누워 있던 다카기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하지만 난 찬성할 수가 없어, 유아원이나 고아원은 요코에게 지나치게 강한 자극을 주게 되지 않을까?”
“그야 물론 그럴 테지. 그곳엔 버림받은 아이도 있고 부모가 헤어지는 바람에 온 아이도 있어. 그야 말로 가엾다고 밖엔 달리 말할 수가 없지.”
“맞아. 그곳에서 요코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생각하니 도저히......”
게이조는 불안한 얼굴로 다카기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야. 아무튼 너무 염려 할 건 없어.”
“그래.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성경에도 씌어 있긴 하지만 말이야. 난 5년 후, 10년 후의 일까지도 신경이 쓰이네......그런데 다카기, 오타루에 산다는 요코의 친어머니는 요코가 어디 있는 지 알고 있나?”
가끔 복도에서 발소리만 들릴 뿐 밖에서는 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밖은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 가라앉은 조용한 온천장이었다.
“그쪽에선 모르고 있을 거야. 아사히가와의 어딘가에 살고 있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이야. 헌데 그게 어쨌다는 거야?”
“아니, 그냥 마음에 걸려서 그래.”
“이봐, 쓰지구치, 날 너무 몰아세우지 말게. 나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지 나쁠지 생각해보지 않은 게 아니니까.”
“아니, 몰아세우는 게 아니네. 처음부터 내 잘못인걸.”
“어느 쪽 잘못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순 없잖은가? 다만 요코의 입장에서 보면 사이시의 딸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뭐라고? 사이시의 딸이 살아 있나?”
“살아 있고말고. 부모 없이도 자식은 자란다네.”
다카기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디 있지?”
“삿포로에 있어. 난 조마조마해. 언제 어디서 도오루와 마주치게 될지 몰라서 말이야.”
이때 노크 소리가 나더니 여자 안마사가 들어왔다. 다카기는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끄고는,
“잘 부탁합니다.”
하고 엎드렸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여자는 작은 입을 약간 벌리고 다카기의 커다란 몸뚱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게이조는 할 수 없이 단가집을 폈다.
여자 안마사는 말없이 다카기의 등을 주물러 내려갔다.
“힘이 꽤 세군요.”
다카기가 말했으나,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도요토미에서 와쓰카나이까지는 몇 킬로미터쯤 되나요?”
“글쎄요, 기차로 40분쯤 걸려요.”
뜻밖에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혼자 사세요?”
“혼자 살면 어떡하시겠어요?”
여자는 가볍게 웃었다.
“아니, 별의별 손님이 다 있을 거라고 생각돼서.......”
다카기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검은 선글라스와 대조적으로 뺨이 무척 뽀얗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의 입가에 엾은 미소가 떠올랐다.
“네, 남자분들도 여러 부류가 있더군요.”
“나쁜 남자도 있죠?”
“나쁘지 않은 남자는 없을 거예요.”
공허한 목소리였다.
“난 좋은 남자요, 독신이고.”
여자는 대담하게 웃었다.
“아니, 믿지 않는거요?”
“아뇨, 방금 손님은 좋은 남자고 독신이라고 말씀하셨죠? 좋은 남자와 독신은 어떤 연관성이 있지요?”
여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허하게 울렸다. 그것이 다카기의 마음을 끌었다.
“역시 혼자 사는군요?”
“어머, 왜요?”
“난 심리학자라서 몇 마디 말만 들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당신들도 손님의 직업쯤은 금방 알겠지요?”
“몰라요, 전. 저는 눈도 보이지 않고 마음도 늙었으니까요.”
“뭐요? 꽤나 빈정거리는군.”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여자는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정말이오? 하지만 당신은 눈이 보이겠지?”
“요즘은 눈이 보이는 안마사도 많긴 해요. 하지만 전 보이지 않아요.”
게이조는 문득 얼굴을 들고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와 비슷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단가집을 읽기 시작했다.
“이 근처에서 태어났소?”
“바다 저쪽 사할린 땅에서 태어났어요.”
“사할린? ....지금은 다른 나라 땅이잖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요토미는 참 조용한 곳이군. 도착했을 때 꾀꼬리가 울고 있었소. 여관은 대여섯 개쯤 되나?”
“열 개쯤 될 거예요.”
하고 여자는 다소 쌀쌀하게 대답했다.
다카기는 애교는 없지만 안마 기술이 좋은 여자에게 이상한 흥미를 느꼈다. 흥미라기보다는 연민인지도 몰랐다. 그는 이 여자도 혹시 고아원에서 자란건 아닐까 하고 그다운 관심을 보였다.
다카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입은 작고 코는 쥐었다 놓은 것처럼 귀여웠으며 피부는 희긴 하지만 다소 거칠어 보였다. 피부가 거친 것은 마음이 거칠기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나이는 서른을 넘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모는 계신가요?”
“벌써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런 건 물어서 뭐하시려고 그러죠?”
다카기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긴 그렇군. 아무 소용도 없을지 모르지. 미안하오. 기분이 언짢았소?”
다카기는 고아원 아이들을 대할 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의 손놀림이 순간 멎었다.
“남의 신상에 대해 묻는 건 악취미에 속하니까요.....”
“괜찮아요. 요즘은 남의 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어디서 태어나 어디든 죽든 관계없는 시대지요.”
여자는 갑자기 솔직한 어조로 말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기 위해 소파를 따라 걷다가 옆의 테이블에 걸려 넘어졌다.
“아, 괜찮소?”
“육감이 둔해요, 전. 서른이 넘어서 소경이 되었기 때문인가봐요.”
“서른이 넘어서?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되었소?”
“손님, 제 신상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요?”
“그래, 듣고 싶군요.”
친절한 다카기의 말에 여자는 사할린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와 사별하고 패전 후 오빠와 둘이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 관현악이 나직하게 흘러 나왔다.
“.........전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아내가 있었어요. 그리고 직장에 고약한 남자가 있었는데......, 전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말았어요.”
“그래서요?”
“그 밖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제가 좋아했던 사람은 절 거들떠보지도 않아 그분 곁에 있는 게 괴로워서 어느 날 갑자기 그곳을 떠나고 말았어요.....”
무심히 듣고 있던 게이조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게이조는 벌떡 일어났다.
‘마쓰사키다! 마쓰사키 유카코다!’
게이조는 깜짝 놀랐다.
‘살아 있었구나!’
게이조는 멍하니 다카기의 몸을 주무르고 있는 흰 옷 차림의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틀림없이 유카코였다. 게이조는 무릎이 와들와들 떨렸다.
‘마쓰사키 양!’
하마터면 입밖에 나올 뻔한 말을 게이조는 간신히 삼켰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름을 불러도 좋을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유카코가 게이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게이조는 갑자기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검은 선글라스 속에서 유카코의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유카코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손님, 전 역시 벌을 받아 소경이 된 걸까요? 아내가 있는 남자를 좋아했으니까요........”
“천만에요. 물론 남의 남편은 좋아하지 않는 게 좋겠죠. 하지만 눈이 먼 것은 그 일과는 관계가 없어요.”
“그럴까요?”
여자는 힘없이 웃었다.
“벌을 받는다면 나 같은 사람이 받아야지. 난 나쁜 놈이니까.”
“어머, 아까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셨잖아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법이니까요. 어쨌든 당신은 지금도 그 남자를 만나고 싶겠지요?”
“천만에요. 이런 꼴을 하고 만날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나아요.”
요카코의 말이 게이조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전 행복한 여자예요. 이렇게 마음껏 그분을 그리워할 수 있으니까요.”
“............”
“그분을 사모하여 한때는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할 지경이었는데.......그것도 앞을 못 보게 된 원인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어쨌든 저는 그분에게 제 두 눈을 바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게이조는 잠자코 있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당신은 놀라운 사람이군요.”
다카기는 감동 어린 어조로 말했다. 게이조는 문득 다카기가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대 갑자기 다카기가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게이조는 당황하여 단가집을 마고 넘겼다.
“죄송하지만 반듯이 누우세요.”
유카코의 말에 따라 다카기는 그 커다란 몸집을 소파 위에 반듯이 눕혔다. 유카코는 다카기의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다카기는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음, 아프네요.”
“굳어 있으니까요.”
“삿포로에서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왔으니까요.”
화제가 바뀌자 게이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텔레비전에서 남자의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래층 욕실에서 김에 서린 목소리가 들려오고 순간 형광등이 깜박거렸다.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했소?”
“5,6년, 아니 7년쯤 되었을 거예요.......그런데 손님은 혼자서 여행하고 계세요?”
텔레비전 소리 때문인지 안쪽에 있는 게이조를 유카코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이조는 유카코의 뒤를 쫓아 여관을 나왔다. 바로 앞에는 작은 산이 있고, 근처에는 집이라곤 한 채도 없었다. 여관 창문을 통해 새어나오는 불빛이 비치는 것 외에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이 여관은 온천가에서 2,3백 미터 떨어진 안쪽에 있었다.
프런트에서 빌린 성능 좋은 회중 전등 빛에 유카코의 뒷모습이 드러나 보였다. 유카코는 흰 지팡이를 짚으면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게이조는 뛰어가 소이라도 잡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40보쯤 되는 거리를 게이조는 좁히지 못했다. 신사 앞의 쓸쓸한 길을 유카코는 지금 불안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몇 해 동안이나 유카코는 이런 모습으로 걸어다니고 있었단 말인가.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어디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 유카코에게로 다가갔다. 유카코는 허리를 굽혀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스사카 양!’
게이조는 멈춰 섰다. 소리내어 유카코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자신이 무척이나 매정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말을 걸 용기가 없었다.
“이런 꼴을 하고 만날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나아요.”
“어쨌든 저는 그분에게 제 두 눈을 바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까 요카코가 했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여기서 말을 건넨들 그녀에게 대체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앞에서 걸어가는 유카코의 지팡이가 이따금 번쩍였다. 살아 있는 동안 유카코는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게이조는 망설였다. 과거에 자신의 병원에서 일한 직원이 아닌가. 자신에 대한 유카코의 감정이 어떠했든 지금 이대로 모른 체하는 것이 과연 인간으로서 취할 태도일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게이조는 부르짖고 싶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문득 게이조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무라이란 놈!’
무라이가 유카코를 농락하지만 않았어도 유카코에게는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았다. 분명히 유카코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실종되기 전에,
“원장님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하고 전화를 걸어 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게이조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이미 육체 관계를 지속해 온 무라이의 결혼이 역시 큰 충격을 주어 유카코로 하여금 그런 전화를 걸게 한 것이 아닐까. 유카코가 실종된 원인의 태반은 무라이에게 있다고 게이조는 지금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 때문에 무라이는 유카코의 묘비를 세워 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남자가 여자를 농락하는 것이 얼마나 그 여자의 운명을 크게 뒤흔드는가를 생각하자 게이조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 있나? 오늘 아침엔 유난히 말이 없군.”
다카기는 핸들을 잡으면서 곁눈질로 게이조를 보았다.
“아니, 별로.........저, 미안하지만 온천가에서 잠시 차를 세워 주게.”
“쇼핑하려고?”
“아니, 사진 좀 찍으려고.”
게이조는 급히 차에서 내렸다. 그는 유카코가 살고 있는 이 거리를 카메라에라도 담아 두고 싶었다. 오른쪽에는 여관이 많고 왼쪽에는 음식점이 많았다.
그리고 백 미터쯤 떨어진 저쪽 막다른 곳에 있는 여관이 있었다. 게이조는 그 한 집 한 집을 빼놓지 않고 찍으려는 듯이 몇 번이나 셔터를 눌렀다. 그 어느 집엔가 유카코가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너절한 곳을 왜 그렇게 많이 찍나? 시시콜콜하게 아내에게 보고라도 할 작정인가?”
다카기가 운전석에서 얼굴을 내밀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차는 온천가를 뒤로 하고 산간의 목초지 등을 좌우로 바라보면서 몇 킬로미터쯤 달렸다. 얼마 후 차는 도요토미 거리에 접어들었다. 주유소 앞에서 사로베쓰 평야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작업복 차림의 젊은 사나이가,
“지금은 사로베쓰 평야에 가도 별로 구경할 만한 것이 없을 텐데요.”
하고 웃었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윽고 흰색 파초가 무리지어 자라고 있는 들판에 이르렀다. 군데군데 노란 야치부키 꽃이 피어 있고, 연푸른 현호색(玄胡索) 꽃이 물을 통해 보듯이 일대에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파초는 목초지까지 퍼져 있었고 소 몇 마리가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아름답지, 쓰지구치?”
“응, 근사해.”
“이렇게 멋진데 별로 구경할 만한 것이 없다니 말도 안 돼. 구경할 만한 게 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가까이 있으면 감동도 없어지는 모양이야.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도 익숙해진다는 건 두려운 일이야.”
“아름다운 아내가 곁에 있는데도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네도 비슷해. 어쨌거나 어머니를 모시고 왔더라면 좋았을걸 그랬어.”
“맞아,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쓰에 씨도 함께 왔더라면 더 좋았을 테고.”
“글쎄........”
게이조는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흰 파조를 유카코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유카코는 이 고장에 살면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꽃무리를 ㅈ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쳐야 하는 것인가. 게이조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이윽고 자작나무가 섞여 있는 꽤 넓은 잡목 숲을 빠져 나왔을 때, 게이조는 무심코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다갈색의 광활한 평야 위에 먹구름이 무겁게 내리덮여 있고, 저쪽 지평선에 언덕으로 보이는 나무숲이 한 줄기 선을 그은 듯이 뻗어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새 한 마리 날지 않았고, 새가 머물 만한 나무 한 그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드넓은 바다를 보는 것보다도 더 망망하고 황량한 광경이었다. 바다는 그래도 꿈틀거리며 살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이곳 사로베쓰 평야는 지금 무거운 하늘 아래 처참하게 죽은 듯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무가 한 그루쯤 서 있다고 해서 벌을 받을 리도 없을 텐데.......”
길을 따라서 마른 갈대가 쓰러져 있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카기가 그 물줄기를 뛰어넘었다.
“에이, 기분 나빠. 자네도 와 보게.”
다카기의 말에 따라 게이조도 물줄기를 뛰어넘었다. 거대한 매트리스 위에 띄어내린 듯한 묘한 감촉이 구두 바닥에 전해졌다. 대지에 서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굉장한 습지대야. 이쯤 되면 습기가 너무 많다는 것도 한번 생각해볼 문제인걸.”
“응, 하긴 그래.”
게이조는 다시 유카코를 생각했다.
“여긴 불모지야.”
“그렇군.”
게이조는 자신도 불모지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에 무엇이 확실하게 열매를 맺고 있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아무것도 대답할 게 없을 것 같았다.
나무 한 그루도 자기 안에서는 자라고 있지 않다. 나쓰에에 대한 애정도 확실하지 않다. 요코에 대해서도 참된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갖지 못하고 말 것 같다. 친아들인 도오루에게까지도 자신 있게 가슴을 펴고 아버지라고 말할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기만 하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이조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물렁물렁한 땅 위에서 있었다.
“2만 5천 헥타르라. 약 2만 5천 정보다. 굉장히 넓군.”
다카기는 자작나무에 박아 놓은 표지판을 읽으며 말했다.
“정말 아깝지 않나, 쓰지구치?”
“그렇기도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런 자연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난 인간을 냉정하게 평가해 버린 듯한 이런 꾸밈없는 경치가 좋아.”
“난 반대야. 마치 부잣집 탕자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 제멋대로 마구 탕진하는 바람에 돈이 너무 아깝다고나 할까. 뭐, 그건 농담이고. 요즘은 개척하여 천 헥타르나 되는 큰 목장도 만들었다더군.”
“난 말이야, 자연이 자연 그대로인 점이 좋다고 생각해.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니까.”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지 못했다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
게이조는 어젯밤 여관에 걸려 있던 달력에서 본 글 귀를 떠올리고 있었다.
차는 다시 평야의 한복판을 가로지른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희부옇게 바랜 마른 조릿대가 끊임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길가에는 머리 잎이 군디ㅔ군데 널려 있었다 또다시 파초가 여기저기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구릉 지대가 가까워지더니 차는 곧 사구림으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숲 속에 깊은 늪이 보였다.
”내려가볼까? 크고 작은 늪이 많이 있다고 하더니 이곳인 모양이야.“
지팡이를 짚고 어둠 속을 걸어가던 유카코의 모습을 아까부터 머리에 떠올리고 있던 게이조는 다카기의 말에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리니 바다 내음이 풍겨 왔다.
“바다가 가꾸운 모양이지?”
“그래. 방금 보고 온 습지대도 원래는 바다였던 모양이야. 바람에 의해 이 모래 언덕이 생겨나 저 습지대가 된 모양이야.”
다카기는 길 오른쪽에 있는 ‘원생사구림(原生砂丘林)’이라는 커다란 팻말 앞에 멈춰 섰다. 그 글자 아래 ‘리시리 레분 국립공원, 와카사쿠나이 지역’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래, 모래 언덕은 원래 바다 옆에 있는 거지. 그런데 이곳은 깊은 산속 같은 느낌이 드는군.”
군데군데 숲 그늘에 눈이 남아 있고, 나무들은 겨우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나무숲에 깊숙이 에워싸인 늪이 흐린 하늘을 비추며 남빛을 머금은 채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꾀꼬리가 가끔 앳된 소리로 울고, 기슭에 서 있는 벚나무 한 그루가 희끄무레하게 수면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사내들 둘이서만 올 곳이 아니군.”
다카기는 웃으면서 늪가로 다가가다가,
“엊저녁에 왔던 그 안마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가?”
하고 갑자기 게이조를 돌아보았다. 게이조는 움찔했다.
“가엾게도 육감이 둔한 여자였어. 자네가 가까이 있는 것도 모르고 혼자 여행하고 있느냐고 묻지 않겠어? 그런 얘기를 들은 뒤라서 혼자라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게이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쓰러진 고목으로 눈길을 돌렸다.
“잘하면 고칠 수 있는데도 그런 줄 모르고 저러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여자의 말에 의하면 별로 의사 치료도 받지 않은 것 같던데.”
다카기는 유카코에 대해 알 리가 없다. 다카기는 낯선 여자에게도 이처럼 친밀감을 갖는 것일까? 게이조는 유카코에 대해 밝히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다카기, 어젯밤 그 여자 말이야.”
“응……?”
두 사람은 늪가에서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냐. ….무라이한테 진찰을 받아 보게 하면 어떨까 하고 문득 생각해 보았어.”
“무라이? 응, 그 녀석은 인간으로는 결함이 많지만 의술 하나만은 뛰어나니까. 무라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키코는 두 아이를 기르면서 집안 일을 잘해 나가고 있어. 하지만 여자 혼자 산다는 건 어쩐지 가엾어. 어젯밤 그 여자나 사키코나……하긴 다쓰코 씨는 예외지만.”
눈 아래 와쓰카나이 거리의 지붕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이고, 그 맞은편으로는 바다로 뻗어 나간 소야 곶이 보였다. 다카기와 게이조는 지금 사사 산 위의 공원에 올라와 ‘빙설의 문’을 보고 있었다. 8미터 가량 되어 보이는 문기둥 사이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녀상이 세워져 있었다. 눈과 얼음뿐인 사할린에서 죽은 수많은 동포의 영혼을 위로 하기 위해 이곳에 ‘빙설의 문’을 세웠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사할린으로 건너가고 사할린에서 이곳으로 돌아왔다.’
비문 첫머리의 한 구절을 읽었을 때, 게이조는 또다시 어젯밤에 본 유카코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유카코는 분명히 사할린에서 태어나 홋카이도로 왔다고 했다.
“이봐! 저게 뭐지?”
갑자기 다카기가 외쳤다. 게이조는 그가 가리키는 쪽을 유심히 보았다. 먼 하늘 아래 납작한 섬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오른쪽 산에서는 흰 눈이 또렷이 보였다.
“다카기, 사할린이야.”
“그래, 틀림없이 사할린이야!”
다카기는 팔짱을 끼고 사할린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사할린은 1년에 몇 번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 만큼 두 사람은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사할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라보면 그야말로 감개무량할 거야.”
‘유카코는 저 사할린도 볼 수 없겠구나.’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전화 교환수의 조상(彫像) 옆으로 다가갔다. 석 장의 네모진 돌이 병풍처럼 세워져 있고 오른쪽 끝에는 조상, 왼쪽 끝에는 아홉 명의 소녀의 명단, 그리고 한복판에는 비통한 글이 새겨져 있었다.
‘여러분,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그것은 1945년 8월, 소련의 포화에 에워싸인 마오카(眞岡)에서 끝까지 직장을 사수한 교환수들의 마직막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들은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전쟁이 다시 되풀이되지 말기를. 평화를 기원하면서 존귀한 아홉 처녀의 영혼을 위로한다.’
비문을 다 읽은 게이조는 아홉 명의 처녀의 명단으로 눈길을 돌려 그것을 읽기 시작햇다. 다카이시 미야, 와타타베 아키라, 요시다 에에코……
“……마쓰사키 미도리.”
게이조는 무심코 소리내어 읽었다. 혹시 마쓰사키 유카코의 친척이 아닐까? 친언니일까, 사촌 언니일까, 아니면 고모일까? 게이조는 왠지 전혀 관계없는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게이조는 시선을 돌려 다시 푸른 섬의 모습을 한 사할린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강한 바람 속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게이조에게 다카기가 말했다.
“왜 그래? 사할린에 잊을 수 없는 여인이라도 있나?”
“응, 있었어.”
게이조는 계속 사할린을 바라보면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 정말이야? 놀리는 거 아냐?”
다카기는 의연히 사할린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게이조의 진지한 표정에 놀랐다.
“여기 마쓰사키 미도리라고 씌어 있지?”
게이조가 손가락으로 비문의 명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라고? 그 여자가 자네 애인이었나?”
“내 말을 잘 들어 봐.”
게이조는 유카코의 일을 다카기에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뭔가 묘한 일이 있는 것 같군. 아무튼 좋아. 차 안에서 듣도록 하지. 이렇게 거센 바람 속에선 몸이 떨려서 안 되겠어.”
5월의 햇살은 따스했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꽤 쌀쌀했다.
다카기는 먼저 차에 올라탔다.
“마쓰사키 미도리란 여자는 어디서 알게 되었나?”
“아니, 마쓰사키 미도리라는 여자는 난 몰라….다카기, 어젯밤 그 안마사 말이야.”
프런트 유리창 너머로 게이조는 여전히 사할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젯밤……?”
“응, 그 여자 말이야. 전에 우리 병원에서 일하던 사무원이야.”
“뭐? 뭐라고?”
“마쓰사키 유카코라고…..”
“그게 정말이야?”
다카기는 핸들 위에 몸을 싣듯이 하고 옆에 앉은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10년쯤 전에 갑자기 실종되었어…..설마 소경이 되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다카기는 게이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제야 알겠군. 그녀가 사모했던 남자란 바로 자네였군 그래. 그럼 그녀를 농락한 녀석은……”
다카기는 흰 파도가 솟구치는 눈 아래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무라이군.”
게이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 그랬었군. 그런데 어째서 말을 건네지 않았나? 매정한 친구 같으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다카기, 말을 건넨들 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나?”
“하긴 그래. ‘오랜만이오. 어쩨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소? 건강에 조심해야지’하고 끝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어떻게 해줄 수 없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은가. 그녀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도 이상하게 항상 마음에 걸렸어. 그런데 그런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니. 정말 견딜 수 없는 심정이야.”
“물론 그럴 테지. 아무튼 놀라운 얘기군.”
잔설이 보이는 사할린 섬 위의 하늘에는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구름이 퍼져 있었다.
“어젯밤에 그 여자가 돌아간 후 목욕하고 오겠다면서 나도 바로 방을 나갔잖아?”
“응, 목욕을 꽤나 오래 한다고 생각했지. 먼저 잠들었지만 말이야.”
“그 여자 모르게 배웅이라도 해 주고 싶었어. 그래서 몰래 뒤따라갔지. 그녀가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 그녀는 가엾게도 흰 지팡이를 짚고 터벅터벅 걸어가더군.”
“그래, 지팡이를 짚고서 말이지.”
“유감스럽게도 그 여자는 또 손님이 있는지 다른 여관으로 들어가 버렸어. 난 한동안 밖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다가 나중에 물어 보면 알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돌아왔어.”
“아, 그랬었군. 그래서 오늘 아침에 그 온천가의 사진을 찍었군.”
게이조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창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쓰지구치, 자네 그 여자에게 반했었나?”
이윽고 다카기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아니, 반하고 말고 할 일도 없어. 나한테는 그냥 여사무원이었으니까. 다만 실종되기 전에 갑자기 그녀가 전화를 걸어 내 아이를 낳고 싶다고 하길래 불쾌하여 전화를 끊어 버렸었지.”
“과연 자네답게 처신했군. 알 만해. 그래, 자넨 그 여자와 무라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나?”
“아니, 그땐 물랐어. 그 여자는 무라이가 결혼하기 직전에 자취를 감춰 버렸거든.”
“결혼하기 직전에?”
“응, 결혼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무라이가 몹시 취해서는 우리 집에 찾아 왔더군. 그때 비로소 나에 대한 유카코의 심정과……무라이가 그녀와 육체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네.”
“망할 녀석. 아주 악독한 놈이야.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사키코와도 잘도 결혼했군.”
“하긴 무라이도 한 번은 마쓰사키에게 청혼을 했던 모양이지만…..”
“천벌을 받을 놈 같으니.”
게이조는 화를 내는 다카기에게 말했다.
“무라이도 충격이 컸던 모양이야. 마쓰사키 양의 묘비를 세워 주었다니 말이야.”
“묘비? 나쁜 녀석!”
다카기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으나 게이조에게로 몸을 돌리고 말했다.
“이봐, 무라이한테 그 여자를 맡기는 게 어때? 뒷일은 그 녀석이 책임지게 하는 거야.”
“아냐, 그건 안 돼. 무라이한테 맡긴다면…..그 여자가 너무 가엾어.”
“아니, 책임만 지게 하는 거야.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말이야. 생활비는 그 녀석이 부담해야 해. 눈은 그 녀석 전문이잖아. 고칠 수만 있다면 고치게 해야지.”
다카기는 무라이와 먼 친척간이었다. 한 집안 사람으로서 다카기가 화를 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다의 흰 물결이 더욱 맑아졌다.
두 사람은 차를 세운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무라이에게 눈만은 진찰 받게 했으면 싶어. 하지만 마쓰사키 양을 떠맡길 수는 없어. 무라이가 눈을 멀게 한 것도 아니고…..”
“그럼 어떡할 거야? 그대로 온천에서 안마사로 일생을 마치게 할거야?”
“글쎄, 어젯밤에는 그 생각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못 말리는 친구로군. 왜 곧바로 말하지 않았나?”
“아니,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네. 하지만 여기 와서 결심하게 됐어.”
“어떻게?”
“역시 아사히가와로 데려가고 싶어. 생활비는 내가 댈 거야.”
“조심하지 않으면 세컨드로 오해받게 돼. 나쓰에 씨의 입장도 생각해야지.”
“물론 생각하고 있어. 그러나 나쓰에보다는 마쓰사키 양에게 더 신경이 쓰여. 그 여자는 어젯밤 그런 꼴을 하고 만날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고 했잖은가? 난 다시는 만나지 않을 생각이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난 직접적으로는 그 여자와 아무 관련도 맺지 않겠다는 말일세. 아사히가와에 작은 집을 한 채 얻어 심부름할 사람을 한 사람 두는 거야. 그렇게 하면…..”
“이봐, 가만 있어 보게. 그럼 누가 그 여자를 데리러 가지?”
“그게 문제야. 자네가 가 줄 수 없겠나?”
“내가? 그래, 뭐 그건 좋다고 치자구. 그런데 누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아사히가와로 데려가고 싶어하는지 모르면 그 여자가 응하지 않을 게 아닌가?”
“하긴 그래. 쓰지구치 병원이라고 해도 응하지 않을 거고…..”
“첫째, 그런 모습으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아사히가와에는 절대 가려고 하지 않을 걸세.”
“그럴까? 그럼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나?”
게이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쓰지구치, 자네 그 여자에게 마음이 있나?”
“당치 않은 소리. 그냥 가엾게 여길 뿐이야.”
“음, 가엾게 여긴다는 건 마음이 있다는 것이라고 어느 대사에 있었던 것 같은데?”
다카기는 시동을 걸었다. 금세 바다가 비스듬히 기울고, 차는 가파른 고갯길을 내려와 4차선을 따라 길게 뻗은 와쓰카나이 거리를 달렸다. 미군 기지를 왼쪽으로 하고 차는 노샤프 곶의 등대에 도착했다. 오늘 아침 와카사쿠나이의 바닷가에서는 보이지 않던 리시리후지가 일본해의 거센 파도 위에 유유히 그 끝자락을 펼치고 서 있었다. 새하얀 눈이 푸른 산으로 인하여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