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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附錄)
능엄징심변견 혹문
원(元) 천목(天目) 중봉(中峰)선사(*중국 원(元)나라 때 고승(高僧)으로, 저서인 <광록(廣錄)> 30권 중 제13권에 <능엄경>에 대하여 마음과 견(見)을 간단하게 설명한 글이 들어 있다. <능엄경>을 처음 공부할 적에 생기는 의문을 분명하게 밝혀서, 초심자가 읽으면 핵심을 파악할 수가 있게 하였기에 참고(參考)로 초역(抄譯)하였다.*)
능엄(楞嚴) 징심변견(徵心辯見) 혹문(或問)
그윽한 지도리인 현추(玄樞)가 조용히 운행하여 찰토(刹土)에 미치니 법(法)마다 모두 두루하고, 신령스런 비춤인 영감(靈鑑)이 높이 매달려서 사계(沙界)를 통섭하되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모습을 감추지 않는 것을 견(見)이라 하고, 법마다 모두 두루한 것을 심(心)이라 하는데, 견(見) 밖에 심(心)이 없고, 심(心)을 떠난 견(見)이 없다.
마치 순금(純金)으로 만든 상(像)과 같고, 담수(湛水)에서 일어나는 파랑(波浪)과 같다. 상(像)을 버리고 금(金)을 찾을 수가 없으니 모든 금(金)이 다 상(像)이고, 파랑을 버리고 물을 구할 수가 없으니 물이 바로 파랑을 만든다.
이름은 달라서 차별(差別)이 있는 것 같으나, 바탕은 항상 하나이니 별다른 것이 없다. 이리하여 세존(世尊)께서 현추(玄樞)의 정체(正體)를 의거하여 여러 각도에서 질문(質問)을 하셨고, ‘아난’은 영감(靈鑑)의 진광(眞光)을 몰라서 칠처(七處)를 가리켰다.
■혹문(或問): ‘아난’이 칠처(七處)를 가리키는 그 행동이, 말세(末世) 중생(衆生)의 미혹(迷惑)을 제거하고자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까, 아니면 정말 몰라서 답답하게 헤매었습니까?
답(答): 지혜(智慧)를 보지 않으면 그 우치(愚癡)를 알 수가 없다. 우(愚)는 지(智)를 펴는 단서(端緖)요, 지(智)는 우(愚)를 털어내는 근본이다. 여래(如來)는 대웅(大雄)의 정지(正智)를 품고 있어 영감(靈鑑)이 소소(昭昭)하게 밝고, ‘아난’은 소승(小乘)의 편우(偏愚)를 보여서 현추(玄樞)에 어둡다.
그러나 지(智)는 우(愚)를 털어내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智)를 기르니, 여래(如來)는 징험(徵驗)하되 징험(徵驗)함이 없었고, 또 우(愚)는 지(智)를 펼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우(愚)를 지키니, ‘아난’은 대답(對答)하되 대답(對答)함이 아니었으니, 일시(一時)의 방편(方便)을 세워서, 만고(萬古)의 원문(圓聞)을 열었던 것이다.
크도다! ‘아난’의 자비(慈悲)여! ‘아난’은 과거의 부처님들이 설명하신 법요(法要)를 듣고 모두 다 기억(記憶)하여 빠트림이 없는데, 그 심법(心法)들을 상세하게 알지 못하면 어떻게 모두 다 기억할 수가 있겠는가!
말세(末世) 중생(衆生)들을 불쌍하게 여기어서, 이렇게 짐짓 어리석음을 보여, 여래(如來)가 품은 뜻을 곡진(曲盡)하게 풀이하시도록 연출하시어서, 후학(後學)들에게 근거(根據)를 만들어 주고자 하셨다.
■혹문(或問): ‘아난’이 칠처(七處)를 가리켰으나 모두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모두 「마음이 없다」고 하면, 옳습니까?
답(答): 심(心)은 사구(四句)를 떠났으니, 그 당체(當體)가 유무(有無)에 걸리지 않고, 도(道)는 백비(百非)가 끊어졌으니, 응념(應念)을 어떻게 이(離)와 재(在)로 논(論)하겠느냐!
모르면 시비(是非)가 봉기(鋒起)하고, 알고 나면 범성(凡聖)의 정(情)이 융화(融和)한다. 그러므로 ‘아난’이 가리킨 곳에 “마음이 없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오직 심원(心源)을 몰라서 치우쳐서 편소(偏小)에 떨어져 있으므로, 여래(如來)께서 곡진(曲盡)하게 잘 설명하시어 그 치우친 것을 공박(攻駁)하신 것이다.
또한 마음의 이(理)는 일체 중생(衆生)이 제각기 구족(具足)하고 있다. 하물며 사람이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데, 어떻게 심체(心體)를 구족(具足)하지 않았겠느냐! 만약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면, 참으로 스스로 미혹(迷惑)한 것이다.
■혹문(或問): 가리킨 바 칠처(七處)가 모두 치우친 편(偏)이라면, 어떤 것이 올바른 정(正)입니까?
답(答): 코끼리는 몸을 감추지 않았는데, 코끼리 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장님들의 잘못이다. 허공에는 본래 방위(方位)가 없지만, 방향(方向)은 중생들의 집착 때문에 있는 것이다.
코끼리는 장님 때문에 일부러 숨지 않으며, 허공이 중생들의 집착 때문에 방향을 정하겠는가. 성심(聖心)에는 정(正)과 편(偏)이 없는데, 편(偏)과 정(正)은 그 소견(所見) 때문에 생긴다.
이제 비유(譬喩)를 들어서 밝혀보자. 어떤 사람이 칠처(七處)에서 각각 거주(居住)한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달이 뜨고 지는 방향(方向)이 어디였소?」
그 사람이 처음에 대답하기를, “수(水)의 동(東)에서 뜨고, 서(西)로 지더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전에 수국(水國)에 살면서 본 것을 대답한 것이다.
또 다시 대답하기를, “산(山)의 꼭대기에서 뜨고, 산 너머로 지더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전에 산(山)속에 살면서 본 것을 말함이다.
또 다시 대답하기를, “성(城)의 머리에서 뜨고, 성 밖으로 지더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전에 성내(城內)에 살면서 본 것이다.
또 다시 대답하기를, “뱃머리의 좌(左)에서 뜨고, 우(右)로 지더라.”하고,
“누각(樓閣)의 위에서 뜨고, 아래로 지더라.”하고,
“마을의 앞에서 뜨고, 뒤로 지더라.”하고,
“성곽(城郭)의 동(東)에서 뜨고, 서(西)로 지더라.”고 하였으니,
모두 다 일찍 거주(居住)하던 일곱 곳에서 본 것이 마침내 가슴에 집착을 이룬 것이니, 지혜(智慧)로운 사람이라면 그 설명을 모두 긍정할 리가 없다.
물론 그가 가리킨 곳이 모두 「달이 뜨고 지는 방향」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달이 실제로 이 칠처(七處)에서 출몰(出沒)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방향을 가리킨 대답들이 모두 틀린 것은, 비록 처처(處處)에서 달을 보기는 했으나, 하늘을 한 번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아난’이 가리킨 칠처(七處)를 「심(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다만 그가 스스로 한 번 회광(回光)하여 조견(照見)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문(或問): 당신의 비유에 따르면, ‘아난’이 가리킨 곳에는 「마음이 일찍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답(答): 무형(無形)인 모습을 눈으로 어떻게 볼 수가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존재(存在)를 종적(蹤跡)으로 어떻게 찾겠는가!
피(彼)와 차(此)를 떠나서 탁연(卓然)히 독존(獨存)하고, 중(中)도 아니고 변(邊)도 아니면서 담연(湛然)히 상주(常住)한다. 이것은 일체 중생이 여러 겁(劫)을 거치면서 의지(依支)하던 것인데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은 허공인데, 티끌과 모래 같이 수많은 법계(法界)를 이 허공이 모두 포괄(包括)하고 있다.
여래(如來)께서 능엄경에서, “마땅히 알아라. 네 마음에서 허공이 생긴 것이 마치 하늘에 한 조각의 구름이 생긴 것과 같다”고 하시고, 또 “허공이 대각(大覺)에서 생긴 것이 마치 바다에 물거품 한 개가 생긴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즉 허공이 가장 크지만, 나의 마음인 묘명심(妙明心)에서 보면, 구름 한 조각이나 물거품 한 개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하니, 이러한 마음의 체량(體量)은, 범우(凡愚)가 측량(測量)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난’이 보인 것이 이와 같은 미혹(迷惑)이다. 망견(妄見)이 장애가 되어서 칠처(七處)를 가리킨 것이, 마치 큰 바다를 버려두고 뜬 물거품 한 개를 가지고 바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여래(如來)께서 부득이 이렇게 징심(徵心)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편소(偏小)한 집착(執着)이 분명하여져서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혹문(或問): 심체(心體)가 이미 산하대지(山河大地)에 두루하다면, 어찌하여 내 몸을 떠난 외부(外部)는 지각(知覺)이 전혀 없습니까? 어떻게 마음이 외부(外部)에도 두루한데, 「외부(外部)는 지각(知覺)을 갖추지 않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답(答): 바람이 불면 만개의 구멍이 같이 소리를 내지만 바람은 스스로 유력(有力)한 줄 모르고, 햇빛이 비치면 많은 어둠이 훤하게 밝아져도 아침 햇살은 스스로 무공(無功)인 것과 같다. 지리(至理)에 항상 접촉(接觸)하면서도, 미망(迷妄)으로 인하여 스스로 미혹(迷惑)할 뿐이다.
네가 “몸을 떠난 외부(外部)는 지각(知覺)이 갖추어 지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외부(外部)는 잠시 접어두고, 먼저 몸 안의 지각(知覺)이란 것을 한 번 살펴보자.
이른바 지각(知覺)이란 것이 따져보면, 밥 먹으면 배부르고, 옷 입으면 따뜻하고, 더럽히면 때가 묻고, 씻어내면 깨끗해지고, 또 뜻에 따라가 주면 기뻐하고, 거슬리면 성내고, 영화(榮華)를 즐겨하고, 치욕(恥辱)을 괴로워하고, 사물(事物)에 박통(博通)하고 고금(古今)을 기억(記憶)하는 것 등등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몸 안이 이런 정도인 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以上)에서 열거한 인연(因緣)들은 모두 지각(知覺)과 비슷하지만, 실은 지각(知覺)이 아니다. 어찌하여 “지각과 비슷하다”고 하느냐?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이 상대하여 허망(虛妄)한 연진(緣塵)이 화합(和合)으로 있는 듯하지만, 진짜 지각(知覺)이 아니다.
여래(如來)께서 능엄경에서 징심(徵心)하고 변견(辯見)하신 것은 모두 이것을 밝히고자 하신 것인데, 네가 아직 깨닫지 못하고서 이것을 지각(知覺)이라고 여기고 있구나. 또 너의 몸 안에서 이 허망(虛妄)을 버린다면, 지각(知覺)이라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혹왈(或曰): 이 몸이 지각(知覺)이 없다면 토목(土木)과 같다는 말입니까?
답(答): 이 몸이 허망(虛妄)한 인연(因緣) 기운(氣運)을 버리면 토목(土木)과 전혀 다름이 없다.
■혹왈(或曰): 이 허망(虛妄)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답(答): 일어난 곳이 없다. 이것은 너의 일념(一念)이 스스로 진각(眞覺)의 바탕을 등진 것이다. 즉 진각(眞覺)이 변전(變轉)하여 허망(虛妄)한 연진(緣塵)이 되었다.
■혹왈(或曰): 깨달아 통달한 사람도, 밥 먹으면 배부르고, 옷 입으면 따뜻합니다. 배부르고 따뜻한 줄 알아차리면 허망(虛妄)과 같고, 알지 못하면 토목(土木)과 같습니까?
답(答): 네가 ‘알지 못하면’ 이라고 말하는데, 진각(眞覺)의 바탕이 어떻게 잠시라도 부재(不在)할 수가 있겠느냐!
너는 “미(迷)하면 식(識)이고, 오(悟)하면 지(智)라”는 말을, 듣지 못했느냐? 이름은 바뀌지만 바탕은 안 바뀐다.
그래서 능엄경에서 “근진(根塵)은 같은 근원(根源)이고, 박탈(縛脫)이 둘이 아니다. 식(識)의 성품은 허망(虛妄)하니, 마치 허공 꽃과 같다”고 하였다.
어떤 것이 식(識)인가? 바탕을 인정하여 아(我)라고 여기고, 집지(執持)하여 분별(分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지(智)인가? 바탕이 아(我)가 아닌 줄을 알아서 모든 분별(分別)을 떠나는 것이다.
■혹왈(或曰): 깨달아 통달한 사람도, 산(山)을 보고 수(水)라고 말하지 않고, 중을 보고 속인(俗人)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데도 「분별(分別)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답(答): 진적(眞寂)인 바탕이 본래 영감(靈鑑)의 분별(分別)을 갖추고 있는데, 식(識)의 분별(分別)과는 다르다. 즉 식(識)은 기심분별(起心分別)이고, 지(智)는 무념분별(無念分別)이다.
■혹왈(或曰): 무념(無念)인데 어떻게 분별(分別)을 합니까?
답(答): 세상에 흔한 밝은 거울을 보지 못했는가. 거울은 무정(無情)이라서 식(識)이 없으니, 어떻게 염체(念體)가 있겠느냐. 그런데도 예쁜 것은 예쁘게 비추고, 못난 것은 못나게 비추니, 어찌 분별(分別)을 아니한다고 하겠느냐.
대개 그 바탕이 분명(分明)하므로 비춤이 그러하다. 분별(分別)하는 것 같으나 실로 분별(分別)하는 생각이 없으니, 나의 영감(靈鑑)의 바탕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그래서 “만개의 구멍이 바람만 불면 소리를 내고, 많은 어둠이 햇빛을 만나면 밝아진다.”고 하니, 바람은 구멍에서 소리를 내려는 의도(意圖)가 없이 움직이고, 햇빛은 어둠을 밝히려는 생각이 없이 비춘다.
모두 다 바탕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 유위(有爲)인 것 같으나 실은 유위(有爲)의 마음이 없다. 네가 이것을 체득(體得)하면, 하루 종일 먹고 마시더라도 배부름을 방해(妨害)하지 않고, 실로 음식을 씹는다는 능(能)이 없다. 종일 옷을 입고 있어도 따뜻함을 장애(障碍)하지 않고, 옷을 걸친다는 집착(執着)이 없다.
그래서, “공화(空華)인 범행(梵行)을 수습(修習)하고, 수월(水月)인 도량(道場)에 연좌(宴坐)한다”고 한다. 범성(凡聖)의 정(情)을 잊고, 시비(是非)의 견(見)을 다 없애면, 진지(眞知)인 영각(靈覺)이 일도(一道)로 평등(平等)하다. 그러하니, 어찌 몸 안과 몸 밖으로 나누겠느냐.
네가 앞에서 묻기를, “몸 밖에는 지각(知覺)이 전혀 없다”고 하였는데, 이제 네게 묻겠다. 네가 지금 이 사대(四大) 색신(色身)을 떠나서, 바깥에 ‘물(物)이 있다’고 지각(知覺)하느냐? ‘물(物)이 없다’고 지각(知覺)하느냐?
만약 ‘유물(有物)을 불각(不覺)한다’하면, 마땅히 토목(土木)과 같다.
지금 ‘지각(知覺)이 있다’고 한다면, 능히 요지(了知)하느냐? 요지(了知)가 불능(不能)이냐? 설령 네가 실심(失心)하여 요지(了知)가 불능(不能)하여서, 명(明)을 암(暗)이라 하고, 색(色)을 공(空)이라 하여, 틀리게 말하더라도, 지각(知覺)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 허공과 물상(物象)의 대소(大小)와 미오(美惡)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진실로 지각(知覺)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렇게 하겠는가.
문득, 망혹(妄惑)이 단번에 공(空)하고, 집착하는 정식(情識)을 털어버리면, 시방(十方) 허공(虛空)이 곧 대원경(大圓鏡)으로서 갈고 닦지 않아도 고금(古今)을 비추고, 삼천(三千) 찰해(刹海)가 능엄왕(楞嚴王)으로서 수증(修證)을 빌리지 않고도 범성(凡聖)을 융통하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 도달하면 허망(虛妄)한 지각(知覺)이 의지할 곳이 없다.
그래서 영명(永明)화상은 일심만법(一心萬法)으로 바탕을 삼고서, 여래(如來)의 일대시교(一代時敎) 중에서 중요한 문장을 정리하여 종경록(宗鏡錄)을 지었으니, 일심(一心)으로 종(宗)을 삼고, 만법(萬法)을 조(照)하여 경(鏡)을 삼았다.
비록 100권의 문장이 번잡하지만, 대의(大意)는 오직 허망(虛妄)을 가려내고 무념(無念)인 진각(眞覺)을 홀로 들어내려는 데 있다. 따라서 영명(永明)화상이 종경록을 짓기 전(前)에도 일심(一心)은 만법(萬法)을 비추고 있었으니, 어찌 영명(永明)화상만 그렇겠느냐.
‘석가모니’께서 영축산(靈鷲山)을 나오시기 전(前)에도 일심(一心)은 만법(萬法)을 비추고 있었다. 이 이치(理致)는 고금(古今)을 통하여 무변(無變)이며, 어묵(語黙)을 따르되 변하지 아니하니, 극단적으로 논한다면, 말이나 뜻으로 통달(通達)할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영가(永嘉)대사(大師)가 이르되, “만약 지(知)로 적(寂)을 알더라도 이것은 무연(無緣)인 지(知)가 아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문자(文字)와 능소(能所)에 의지하여 영지(靈知)의 바탕을 아는 것을 깨트린 말이다. 즉 능엄경에서 말한 “지견(知見)에 입지(立知)하면 즉 무명(無明)의 근본이다”는 것이 이것이다.
왜 그런가? 대개 영감(靈鑑)의 바탕에 본래 갖추고 있는 무념(無念)인 지(知)를 묘하게 계합(契合)하려고 하는데, 이 무념(無念)인 지(知)는 따로 소지(所知)가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또 “스스로 지(知)함을 알더라도 역시 무연(無緣)인 지(知)가 아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문자(文字)와 인연(因緣)을 빌리지는 않았으나, 오랜 뿌리가 불매(不昧)하여 태어나면서부터 능(能)히 지(知)하는 것이니, 반연(攀緣) 없이 아는 것이 아니고, 아직 능지(能知)의 흔적이 남아있다.
즉 능엄경에서 말한 “자기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취하면, 환(幻)이 아닌 것이 환법(幻法)을 이룬다”는 것이 이것이다. 왜 그런가? 대개 진적(眞寂)의 지각(知覺)은 원래 일법(一法)도 인연하지 않고도 갖추어져 있다.
진실로 바탕에 의하지 않고 증(證)하더라도, 터럭만큼만 지견(知見)을 허용하면 모두 희론(戱論)에 떨어진다. 네가 몸 안과 몸 밖을 말하는 것이 어찌 희론(戱論)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실로 미친 어리석음이다.
■혹문(或問): 중생(衆生)의 지각(知覺)과 여래(如來)의 지각(知覺)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답(答): 중생이 소금을 먹으면 “짜다.”고 하고, 부처님은 “싱겁지 않다.”고 한다. 부처님이 불을 보면 “뜨겁다.”고 하고, 중생은 “차갑지 않다.”고 한다. 이렇게 차전(遮詮)과 표전(表詮)이 다르지만, 지각(知覺)하는 성품(性品)은 같다. 진실로 진(眞)과 망(妄)이 같이 있는데, 중생과 부처가 어떻게 다르겠는가.
그러나 지각(知覺)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진지(眞知)인 진각(眞覺)이고, 하나는 망지(妄知)인 망각(妄覺)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듯 하지만 다르고, 비록 다르지만 또한 같다. 그래서 범성(凡聖)이 이로서 구분(區分)되고, 미오(迷悟)가 여기서 갈라진다.
배휴(裴休)가 원각경 서문(序文)에서 말하기를 “혈기(血氣)가 있는 종류는 반드시 지(知)가 있고, 무릇 지(知)가 있는 것은 반드시 같은 바탕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진지(眞知)의 바탕을 일체 중생(衆生)이 본래 구족(具足)하고 있어서, 모든 부처님의 상주(常住)하는 법신(法身)과 바탕이 다르지 않음을 바로 지적한 것이다. 이 바탕은 담연(湛然)히 상적(常寂)하되 확연(廓然)히 영지(靈知)하므로 마음이라고 부른다.
두루 법계(法界)를 머금었는데, 비록 모든 세간의 모습들이 찰나 찰나에 생주이멸(生住異滅)하더라도. 이 바탕은 부동(不動)이다.
능엄경에서 여래께서 징험(徵驗)하시고자 하신 것은 바로 이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이 마음은 일체의 명상(名相)과 성범(聖凡)·염정(染淨)·인연(因緣)과 자연(自然)·진망(眞忘)·화합(和合)과 나아가 견문각지(見聞覺知) 등등의 법(法)을 멀리 떠났다.
소위 망(妄)이란 것은 지금 이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근진(根塵)이 상대하여 분별(分別)을 일으켜서, 취사(取捨)와 증애(憎愛)가 염념(念念)이 천류(遷流)하여 쉬지 않는 것이다.
이 망체(妄體)는 근진(根塵)으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화합한 것이니, 그 바탕이 있는 것 같지만, 근진(根塵)이 홀연히 사라지면 이 망(妄)도 역시 소멸한다. 이것을 ‘아난’이 마음이라고 가리킨 것이니, 여래(如來)께서 어찌 배척하지 않으시겠느냐.
그래서 “이 허망심(虛妄心)은 전진(前塵)을 여의면 필경에 바탕이 없다”고 하시고, 다시 “육진(六塵)으로 말미암아 지(知)를 발하고, 육근(六根)을 인하여 모습이 있다. 모습과 견(見)이 성품이 없어서 마치 교로(交蘆)와 같다”고 하셨다. 이것이 같은듯하면서 다름이다.
■혹문(或問): 이 허망(虛妄)한 마음이 진(眞)을 의지하여 존재합니까? 아니면 진(眞)을 떠나서 따로 존재합니까? 만약 진(眞)을 의지하여 존재한다면, 망(妄)이 곧 진(眞)이고, 만약에 진(眞)을 떠나서 따로 존재한다면, 두 개의 바탕을 이루게 됩니다.
답(答): 진(眞)을 의지하여 망(妄)이 생기니,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망(妄)을 말미암아 진(眞)을 나투니, 연기(煙氣)를 보고 불이 있음을 아는 것과 같다.
단단한 얼음이 물이라고 하지만 얼음은 유동(流動)하는 모습이 없고, 맹렬(猛烈)한 불이 연기(煙氣)라고 하지만 불은 막혀서 답답한 성질이 없다.
집착(執着)하면 천 갈래 길이 각각 성립하고, 요지(了知)하면 일도(一道)가 제평(齊平)이다. 법계(法界)의 이치가 이미 이러하여, 여래(如來)께서 침묵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중생이 성인(聖人)의 선권(善權) 방편(方便)을 잘 알지 못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집착하고 얽매이니, 동이(同異)가 없는 데서 치연(熾然)하게 동이(同異)를 이룬다.
여래(如來)께서 동(同)에서 이(異)를 세워 진(眞)과 망(妄)을 분명하게 보이시고, 이(異)를 부수고 동(同)을 세워 진망(眞妄)을 모두 털어내시고자, 능엄경에서 ‘일건육결(一巾六結)’을 비유로 들어서 분명하게 밝혔다.
일건(一巾)은 진(眞)을 비유하고 육결(六結)은 망(妄)을 비유하니, 일건이 아니면 육결을 이루지 못하니 망(妄)은 진(眞)을 의지하고, 육결이 아니면 일건을 표현하지 못하니 진(眞)은 망(妄)을 의지한다.
그래서 여래(如來)께서 이르시기를 “매듭을 푸는 것은 차례를 따르는데, 육결(六結)을 풀면 일건(一巾)도 없다.”고 하시니, 망(妄)을 모두 없애면 일진(一眞)인들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망(妄)으로 진(眞)을 관찰하면, 비록 다르지만 같음이다.
■혹문(或問): 진(眞)은 망(妄)의 가장자리를 껴잡고, 망(妄)은 진(眞)의 근원에 사무치니, 진망(眞妄)이 같은데 중생(衆生)과 부처의 길이 항상 다른 까닭은 무엇입니까?
답(答): 생기(生起)하지만 무생(無生)이니 제불(諸佛)은 중생(衆生)의 식해(識海)에 있으면서 ‘열반’에 들고, 공적(空寂)하지만 상동(常動)하니 중생(衆生)은 제불(諸佛)의 심원(心源)에 있으면서 생사(生死)에 떨어진다. 이(理)로서 구하면 전혀 같고, 사(事)로 미뤄보면 전혀 다르다.
지각(知覺)의 바탕을 같이 갖추었지만, 제불(諸佛)은 공겁(空劫)이래로 여리(如理)하게 이해(理解)하고, 해(解)를 따라 행(行)하고, 행(行)을 따라 증(證)했지만, 중생(衆生)은 미혹(迷惑)하여서 이해(理解)하지 못하고, 해(解)하여도 행(行)하지 못하고, 행하여도 증(證)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서로 다르다.
미혹(迷惑)하여 해(解)하지 못하는 것은 논(論)할 필요조차 없지만, 입으로는 실상(實相)을 이야기하면서 뜻은 반연(攀緣)을 따르고, 행적(行跡)은 공종(空宗)을 밟으면서 정식(情識)은 유해(有海)에 빠져서, 능히 요해(了解)한다는 아름다운 이름을 들으면서, 실은 범우(凡愚)의 열행(劣行)에 떨어지고 있다.
고금(古今)에, 망(妄)을 끊지 않고도 진(眞)에 돌아가거나, 진(眞)을 내버리지 않고도 계리(契理)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오직 돈(頓)과 점(漸)의 차등(差等)은 있으니, 이상(以上)은 사(事)와 행(行)으로 말한 것이다.
다시 이(理)로 말한다면, 십법계(十法界)가 같이 일심(一心)을 갖추고 있으니, <화엄경>에 이르기를 “심(心)과 불(佛)과 중생(衆生)은, 셋이 차별(差別)이 없다.”고 했으니, 어찌 중생과 부처의 과(果)가 다르겠느냐.
서로 달라서 같지 않은 것은, 망(妄)을 보내지 못하고, 진(眞)을 없애지 못하고, 견(見)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유심(唯心)의 이치를 밝히지 못한 탓이다.
■혹문(或問): 진(眞)과 망(妄) 이외에 따로 마음이 있습니까? 따로 마음이 없습니까?
답(答): 가옥(家屋)은 총명(總名)이고, 가옥을 의지하여 성괴(成壞)를 나타낸다. 마음은 정체(正體)이고 마음을 의지하여 망(妄)과 진(眞)을 밝힌다.
아래에 비유하는 글로서 거듭 해석해 보자. 일심(一心)은 허공에 비유(譬喩)하고, 진(眞)은 밝음에, 망(妄)은 어둠에 비유하면, 밝은 낮에는 허공이 같이 밝고, 어두운 밤에는 허공이 같이 어둡다.
진(眞)과 망(妄)이 일심(一心)과 같이 함과 이것과 유사(類似)하다. 허공이 아니면 명암(明暗)을 나타내지 못하듯이. 진망(眞妄)도 일심(一心)을 여의지 않는다.
궁구해 보면, 허공(虛空)의 바탕은 고금(古今)에 확연(廓然)하여 명(明)과 암(暗)에 따라가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일심(一心)이 진(眞)과 망(妄)에 녹아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다면, “많은 산봉우리를 오악(五嶽)에 나열(羅列)하면 고하(高下)의 모습이 다 사라지고, 수많은 파도를 사해(四海)에 끌어오면 심천(深淺)의 흔적이 모두 없어진다.” 어찌 진망(眞妄)을 다시 운운(云云)하겠느냐!
■혹문(或問): 육근(六根)이 모두 묘용(妙用)을 가지는데, 여래(如來)께서 단지 견(見)만 설명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답(答): 오직 견(見)만 설명하신 것은, <능엄경>의 처음에 ‘아난’이 “제가 눈으로 여래의 32상(相)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견(見)을 가지고 설명하시었다. 일근(一根)만 요달(了達)하면 육처(六處)를 모두 다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런데, 견(見)에 두 가지 견(見)이 있다. 여래께서 「심체(心體) 영지(靈知)가 요료불매(了了不昧)하는 것을 견(見)이라」고 하신 것은 진견(眞見)이라 부르고, ‘아난’이 중생들의 버릇에 의지하여 「눈으로 전진(前塵)의 색상(色象)을 대(對)하는 것을 견(見)이라」고 한 것은 망견(妄見)이라 부른다.
망견(妄見)은 여러 가지 전진(前塵)을 여의면 견(見)이 없지만, 진견(眞見)은 전진(前塵)이나 인연(因緣)·화합(和合) 등의 모습과 교섭(交涉)이 전혀 없는 진적체(眞寂體)의 확연(廓然)한 영감(靈鑑)을 가리킨다.
어떻게 해와 달이 능히 견(見)하게 할 수 있겠느냐. 여래(如來)께서 ‘아난’과 더불어 전진(前塵)이 모두 8종(種)임을 간변(揀辨)하시고, 8종을 각각 그 소속(所屬)한 곳으로 돌려보내어서, 전진(前塵)을 여의면 견(見)이 없음을 나타내셨다. 이리하여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은 네가 아니고 무엇이냐!”하시어, 망(妄)을 깨트리고 진(眞)을 보이셨다.
■혹문(或問): 눈이 전진(前塵)을 대(對)하는 것을 견(見)이라 할 수 없다면, 지금 내 눈에는 견(見)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답(答): 산(山)은 청(靑)하고 수(水)는 녹(綠)이니, 본색인(本色人)의 감(鑑)이 기미(機微)보다 앞서 있고, 밤은 어둡고 낮은 밝으니, 영리한(靈俐漢)의 시(視)가 빛깔의 표(表)를 초월한다.
거조(擧措)함에 자기(自己)에게 소귀(消歸)하고, 종횡(縱橫)함에 어찌 전진(前塵)에 떨어지겠는가. 진실로 이와 같지 않으면 전도(顚倒)된 것이다. 왜 그러한가?
들어보지 못했는가. 여래(如來)께서 이르시되 “눈이 본다면, 금방 죽은 사람도 눈은 현재 그대로 있는데, 어찌하여 못 보느냐.”하셨으며, 또 이르시되 “비유컨대, 장님이 수술(手術)을 하여 안광(眼光)이 열린 것을 「눈이 본다」고 말한다면, 만약 눈이 정상적인 사람이 암실(暗室)에 있다가 문득 불을 켜서 밝게 보이면 「불이 본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
불은 빛깔을 능히 나타낼 뿐, 보는 것은 눈이지 불이 아니다. 이와 같이, 눈은 빛깔을 능히 나타낼 뿐, 보는 것은 마음이지 눈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여기서 알아차리면 눈에는 실로 견(見)이 없는 줄을 알 것이다.
■혹문(或問): “만약 물상(物象)이 견(見)이라면, 이 (물상은) 견(見)이니 물상이 아니다. 만약 물상(物象)이 견(見)이 아니라면, 어떻게 물상을 볼 수가 있겠느냐?”하는 법문은, 견(見)과 물상(物象)이 같다는 말입니까? 다르다는 말입니까?
답(答): 낡은 벽돌과 옛 거울이 가지런하지만, 그 암(暗)과 명(明)을 숨길 수가 없고, 큰 대문이 높은 담에 붙어있으나, 그 통(通)과 색(塞)을 감출 수가 없다. 쌍여(雙與)하면 물상(物象)이 생하고 견(見)이 일어나며, 쌍탈(雙奪)하면 견(見)이 사라지고 물상(物象)이 없어진다. 어떻게 동이(同異)를 운운(云云)하겠는가.
요컨대, 물상(物象)은 견(見)이 아니고, 견(見)은 물상(物象)이 아니다. 견(見)은 물상을 나타내고, 물상은 견(見)을 나타낸다. 물상은 견(見)이 아니면 물상이 아니고, 견(見)은 물상이 없으면 견(見)이 아니다.
만약 이해하지 못했다면, 다음 설명을 들어보아라. 만약 물상(物象)이 곧 견(見)이면, 함원전(含元殿)에서 다시 찾을 필요가 없다. 이 견(見)이요 부처가 아니니, 일체의 성현(聖賢)이 번갯불이 번쩍함과 같구나.
만약 물상(物象)이 견(見)이 아니면, 채운(彩雲)이 신선면(神仙面)을 가린다. 어떻게 물건을 볼 수 있겠는가? 거북이의 털을 가지고 허공의 뼈를 묶는구나.
■혹문(或問): 물상(物象)과 상대하여 견(見)을 나타내니 이치(理致)가 분명하다. 지금 물상(物象)을 견(見)할 적에, 「견(見)을 견(見)한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답(答): 등불과 거울이 교광(交光)하여 상재(相在) 상입(相入)하니 진진(塵塵)이 묘(妙)에 합(合)하고, 그물 구슬이 접영(接影)하여 서로 융섭(融攝)하니 처처(處處)에 몸을 나눈다.
기미(機微)를 멈추면 잃고, 마음으로 따지면 어긋나니, 찾고자 하면 스스로 반딧불이 되고, 취(取)하려고 하면 어목(魚目)을 이룬다.
능엄경에 이르기를 「만약 견(見)이 물상(物象)이면, 네가 나의 견(見)을 볼 수가 있다.」고 했으니, 만약 견(見)이 물상이라면 내 견(見)도 물상과 같으므로, 네가 물상을 볼 수가 있다면 내 견(見)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또 「내가 견(見)하지 않을 적에는 어찌하여 내가 불견(不見)하는 곳을 보지 못하느냐? 만약 불견(不見)하는 곳을 보면 자연히 저 불견(不見)의 모습이 아니다.」고 했으니, 물상은 은현(隱現)하는 것이 아니고 견(見)은 이(離)와 재(在)가 있다.
만약 견(見)이 물상이라면, 물상은 은(隱)이 없으니 불견(不見)이란 말은 견(見)이 물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견(見)은 이(離)와 재(在)가 있으니, 견(見)이 물상을 떠난 때를 불견(不見)한 곳이라고 한다. 「불견(不見)하는 곳을 보면」은 내가 물상을 떠나 견(見)하는 것이 없는 시점(時點)에, 네가 나의 불견(不見)한 곳을 정말 볼 수가 있다면, 내 견(見)이 과연 물상과 같다고 하겠다. 이러하면 「자연히 저 물상을 떠난 불견(不見)의 모습이 아니다」.
견(見)이 실로 물상이 아니므로, 견(見)이 물상을 떠나서 불견(不見)하는 것이다. 또 「만약 내가 불견(不見)하는 곳을 보지 못하면 자연히 물상이 아니다」고 했으니, 내가 불견(不見)하는 곳을 보지 못하면, 내 견(見)이 자연히 물상이 아니다.
이 부분은 뜻이 중첩되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곡진하게 비유하셨는데, 그 취지는 「물상(物象)을 견(見)이라고 여기는 잘못」을 깨트리고자 함이다. 즉 「견(見)은 물상(物象)이 아니다」.
■혹문(或問): 물건을 여의면 오직 견(見)이고, 오직 견(見)이라면 바로 마음이다. 「견(見)을 견(見)할 적에 견(見)은 견(見)이 아니다」 [見見之時견견지시 見非是見견비시견]는 무슨 뜻입니까?
답(答): 구름을 벗어난 옥감(玉鑑)거울로 비추면 그림자가 천(千)개의 연못에 떨어지고, 칼집에서 나온 용천(龍泉)칼을 휘두르면 시체가 만리(萬里)에 쌓인다.
대화취(大火聚)가 주박(湊泊)을 용납하지 않고, 금강권(金剛圈)은 촬나(撮拏)를 허락하지 않는다. 발착(撥著)하면 문득 바뀌어서 이미 공훈(功勛)에 떨어지고, 제득(提得)하면 바로 행(行)이니 벌써 도철(途轍)을 이룬다.
원래(原來) 여래께서 영감(靈鑑) 심체(心體)를 직지(直指)하신 것은, 특별히 근진(根塵)이 상대(相對)하여 일어나는 망심(妄心)을 깨트림에 있음이 아니시니, 또한 망(妄)을 여읜 절대(絶對)인 진심(眞心)도 함께 깨트림에 있었다.
무릇 진(眞)과 망(妄) 두 가지는 모두 중생의 무시(無始)로부터 내려온 견병(見病)이다. 그러므로 「명(明)을 견(見)할 적에 견(見)은 명(明)이 아니다」는 구절(句節)은 망(妄)을 깨트리고 진(眞)을 들어내는 것이고, 「견(見)을 견(見)할 적에 견(見)은 견(見)이 아니다」는 구절은 진(眞)도 함께 털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偈頌)에서 이르시되, 「허망(虛妄)을 설명하여 진실(眞實)을 밝히지만, 허망과 진실이 둘 다 허망(虛妄)이네. 원래 진(眞)도 아니고 비진(非眞)도 아닌데, 어찌 보는 견(見)과 보이는 소견(所見)이 있으랴」하시니, 여래(如來)께서 여기에서 말과 이치가 지극(至極)하셨다.
진망(眞妄)을 이미 털어버리고 나서 「견(見)은 견(見)도 여의었으니, 견(見)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신 것은, 영감(靈鑑)의 바탕이 내외(內外)가 원명(圓明)하여 견문(見聞)을 여읜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래서 유마경에서 ‘유마힐’(維摩詰)께서 이르시되 「법(法)은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아니다. 만약 견문각지(見聞覺知)를 구(求)하면, 그것은 견문각지(見聞覺知)를 구하는 것이지 법(法)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대개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모두 허망한 근진(根塵)이 화합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어떻게 적신(赤身)으로 밀치고 들어가는 감과 도수(徒手)로 높이 들어 여는 것에 당(當)하겠느냐.
묘명진심(妙明眞心)은 탁 트이어서 한계가 없으니, 이것으로 견(見)하면 태양(太陽)이 장공(長空)에 떠있는 것이고, 이것으로 문(聞)하면 칩뢰(蟄雷)를 빈 골짜기에서 터뜨림이다. 어떻게 다시 부광(浮光)과 환영(幻影)으로 농락(籠絡)하겠는가.
■혹문(或問): 오랫동안 망(妄)에 묶여있었습니다. 이제 망(妄)을 단절(斷絶)하고자 하나 방편(方便)이 없습니다.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답(答): 나는 망(妄)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모르는데, 그대는 망(妄)을 단절(斷絶)하고자 하는구나. 만약 망(妄)이 마음에서 일어난다면, 망(妄)도 단절(斷絶)할 수가 있고 마음도 역시 단절할 수가 있다.
마음이 단절(斷絶)된다면, 제불(諸佛)의 일승(一乘), ‘보살’의 6‘바라밀’, 연각(緣覺)의 12인연, 성문(聲聞)의 4제(諦), 천인(天人)의 10선(善)을 모두 단절(斷絶)할 수 있다,
그 과(果)를 단절할 수 있다면,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나아가서, 혀의 맛, 의(意)의 연(緣)과 수습(水濕)·화열(火熱)·풍동(風動)·지견(地堅)과 세간(世間)·출세간(出世間)을 모두 단절(斷絶)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인연(因緣)들을 단절(斷絶)할 수가 없으므로, 네가 말하는 망(妄)도 역시 단절(斷絶)할 수가 없다.
■문왈(問曰): 진실로 단절(斷絶)할 수가 없다면, 상속(相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까?
답(答): 쯧쯧! 이 무슨 말인고. 네가 마음을 일으켜서 망(妄)을 단절(斷絶)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데, 어찌 상속(相續)하는 것이 용납되겠느냐. 네 말을 들어보니, 너의 망체(妄體)가 정말 단멸(斷滅)한 때가 있었겠구나.
만약 진실로 단멸(斷滅)한 적이 없다면, 어찌 상속(相續)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네가 아직 모르고 있구나. 무시(無始)인 겁전(劫前)에 최초(最初) 불각(不覺)이 촌념(寸念)을 문득 일으켜 진심(眞心)과 어긋나서, 천류(遷流)하면서 지금까지 새록새록 머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제불(諸佛)의 출세(出世)와 조사(祖師)의 서래(西來)도 모두 너의 망정(妄情)이 집수(執受)한 것이다.
만약 이 망(妄)을 단절(斷絶)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자심(自心)을 밝혀야 한다. 자심(自心)이 한 번 밝으면, 가없는 망연(妄緣)이 바로 융회(融會)한다. 글에 이르기를 「망(妄)은 마음이 밝지 않으면 단절(斷絶)하지 못하고, 마음은 망(妄)이 단절(斷絶)되지 않으면 밝지 않다.
마음이 밝은 것은 망(妄)이 단절(斷絶)되어 밝고, 망(妄)이 단절(斷絶)되는 것은 마음이 밝아서 단절(斷絶)된다」고 하였다.
망(妄)이 단절(斷絶)되는 고로 색공(色空)과 명암(明暗)이 안광(眼光)을 장애(障碍)하지 못하니, 무슨 견(見)을 설명할 것이며, 마음이 밝은 고로 견문각지(見聞覺知)가 호말(毫末)에 돌아가니, 무슨 마음을 징험(徵驗)할 것인가.
객(客)이 마음과 견(見)의 징변(徵辯)에 대하여 의문(疑問)이 있어서 나에게 질문을 하므로, 내가 일부러 문답(問答)하는 형식으로 뜻을 설명하여 상대한 것이나, 마치 저 지팡이와 밧줄을 빌려서 공연히 바람과 달을 휘젓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영령(英靈)한 상근기(上根機)는 형명(形名)의 조짐(兆朕)이 있기도 전에 진심(眞心)을 파악할 것이고, 준매(俊邁)한 납승(衲僧)은 언상(言象)을 보이기도 전에 묘견(妙見)을 갖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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