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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간 속에서의 모노레터
―객체로 바라본 시간들의 페이지
최영애
1. 프롤로그 - 나를 깨우는 소리
여행은 숨 가쁘게 달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그 중간쯤에 잠시 멈춰 서서 숨 고르기를 하는 휴지부(休止符)와 같은 것. 여행 중에 인생은 잠시 유예된다. 여행 중에는 모든 일상의 의무와 책임이 유예된다.(장석주, 『추억의 속도』)
바바, 책 속의 한 여행 경구가 나를 떠밀 듯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먼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는 터키의 옛 노래 구절을 전하는 활자도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 소리에 이끌린 한 작가는 그리스와 로마의 섬에 몇 달이나 자신을 배처럼 정박시켜 놓았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북소리를 찾아 길을 가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늘 자신에게 견고한 성을 쌓고 두터운 아집을 벗지 못하는 나 자신을 깨우는 소리일까요. 그것으로부터 부수고 나오라는 저 간절한 속삭임. 어쩌면 그것은 나의 내면에 울려 나오는 갈망과 동경의 울림 같기도 합니다.
삶이 유예된다는 것은 어느 바닷가에 묶어 놓은 배 한 척 같은 걸까요. 시간의 바늘을 내려놓고 정지된 시간의 축 위에 잠시 내 몸을 내려놓는 것. 지금 내게 제일 필요한 것은 나와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거울 앞의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자아와 대면하는 일이며, 낯선 물음에서 시작하는 길 위의 여정입니다.
나의 무의식 속에서 늘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존재인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붙여 준 이름인 바바, 나 자신을 객체(客體)로 아니 여체(旅體)로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번 여정은 나와 분리되는 시간 여행입니다. 내 안의 당신, 전아(全我)의 그림자처럼 머물던 그대는 잠시 이 편지의 수신인으로 남깁니다. 생경한 나의 독백이 또 새로운 시간의 자리에 남겠지요.
인도와 네팔, 신비스러운 성소를 간직하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한 자락을 가지고 떠납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나를 깨운 것은 여행의 시작지인 네팔의 트리무반 공항에서입니다. 신기루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무지개가 전하려는 진실은 무엇인지. 물리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자연현상의 원리에서 논구를 시도하였다고 하지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순간일 뿐이며 그것은 곧 사라진다는 진리의 명제 앞에서 잠시 망연해집니다. 화두 하나를 던지듯 눈앞에 잠시 보이다 없어진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꿈의 허상일까요. 그러나 무지개는 신령이 물을 마시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라는 아시아 어느 원시 부족의 믿음은 또 다른 순수함으로 우리를 깨우칩니다.
버스는 에베레스트 산정을 향해 어둠 속을 달립니다. 멀리 보이는 집들이 호롱불처럼 서서 외롭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밖을 잘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존재는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심미안적 문구와 가공된 정보로 가득한 머릿속의 풍경을 지우고 있습니다.
꽤 깊은 곳에 들어온 듯 숙소의 하늘은 옻칠한 듯이 막막합니다. 먼 길을 달려왔지만 어제와 다름없는 이 우주의 공간을 올려다보며 국경을 나누는 일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계획된 일정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별자리의 행방은 아득하고도 묘연해지고 있습니다.
밤새 내리는 비가 여행자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내 안의 등불을 찾아가는 시간
히말라야의 신성은 오롯이 일출만을 보고자 했던 우리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범인에게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려 하지 말라는 신의 뜻은 아닐는지요. 볼 수 있는 것들이 물상만은 아닐 터,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었을지. 감히 그 뜻을 가늠하지 못한 채 방향을 바꾸어 리틀 티베트라고 불리는 난민촌에 들어섭니다.
부끄러움을 가두어 놓은 눈망울들이 내미는 손, 캔디를 달라고 외칩니다. 긍휼한 상황 앞에 왠지 낯설지 않은 과거의 풍경이 있습니다. 허기진 본능이 그대로 노출되는 눈빛을 지구촌의 어디에도 없는 맑은 호수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대체시켜 놓는 우리입니다. 아마도 낭만적 서정에 가두어 놓으려는 여행자의 욕심이자 모순입니다. 이방인들은 렌즈에 담을 그들의 표정에 주목하고, 그들은 우리의 손에 주목합니다. 참 어색한 현실입니다. 출발하려는 버스 유리창 너머에도 물건을 팔기 위해 눈 맞춤을 시도하려는 간절한 눈빛들이 있습니다.
차마 외면하기 힘든 마음은 애써 다른 풍경을 더듬고 있습니다.
자연 풍광을 찾아 들어온 곳은 패와 호수입니다. 햇빛이 물비늘 속에 조용히 놀고 있습니다. 사공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착한 미소와 함께 배를 건네주는 곳입니다. 작은 종이배를 엎어 놓은 것 같은 모자와 카키색 제복이 잘 어울립니다. 물은 그다지 맑지 않지만 유예된 시간 속에 모처럼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숙소는 조금 모험을 필요로 합니다. 도마뱀이 짝을 지어 노래하는 곳,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깨면 천장 위에 한 쌍이 떨어질 듯 붙어 있습니다. 이것도 그들만의 사랑의 포즈일까요. 아무튼 도마뱀과의 동침은 조금 아찔하기도 합니다.
밤새 빗소리까지 심란하게 가슴을 헤집는 이곳은 현재 우기입니다. 폭포가 쏟아지는 듯이 어지러운 빗소리는 여행자의 잠을 붙잡고 순안한 여행이 걱정되는 현실적 고민과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로부터 달아난 시간들은 이제 멀리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단단한 자의식으로 무장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마음의 경계를 허물려 합니다. 의식이 존재하는 영역보다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사는 무의식은 늘 더 많은 영역을 지배하고자 했으니까요. 그 사이에는 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계의 대상이 아닌 자아 관여의 존재였을지라도 그 목소리를 듣지 않고자 빗장을 걸어 두었던 기억들과의 만남은 쉽지 않은 일, 번민의 순간들과 만나고 표토의 시간들을 벗겨내고 나 자신과 만나는 머나먼 여정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진리입니까? 진리의 지름길을 묻는 제자 아난에게 석가모니는 지름길은 없다. 너 자신의 힘으로 너 자신의 등불로 진리를 찾아가거라. 내가 나의 주인이요 내가 나의 등불이다. 우리는 오직 진리를 등불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그 물음의 길 위에서 주렴처럼 가려진 답을 찾고 서 있습니다.
다음 날 네팔 국경은 톨게이트를 지나듯 간단한 절차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룸비니 행 십구 인승 경비행기는 굳이 창가 쪽 예약이 필요 없는 각각 한 라인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나 자신, 나나와 바바로 분리되어 서로의 자리를 고집하기만 했는지요.
이성과 감성의 불일치로, 때로는 자아와 초자아의 역할로 분담된 채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나일 뿐이라며 나나라는 이름을 고집하고 살아온 듯하지만, 의식은 숨어 버리고 무의식이 더 지배해 온 시간, 사회적 가면으로 포장되어 온 시간. 아파도 아프다 소리 지르지 못했던 시간들의 굴레는 더욱 단단한 몸피가 되어 벗을 수 없는 페르소나로 남았습니다. 사적인 시간보다 공적 시간에 갇혀 있던 그 시간 속에는 늘 이성적 사고가 우위였지요. 시간의 굴레 속에 본래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던 삶, 그저 견디어 내는 것이 삶의 득도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어느 일간지 칼럼에는 붓다는 산스크리트로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둘 사이에는 필경 알지 못하는 틈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인생의 네모 칸에 퍼즐을 풀 듯 그것을 아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 되는 건가요. 우문우답입니다.
마야 부인이 석가모니를 낳았다는 룸비니 동산에 와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는 유네스코 지원 아래 복원 공사가 한창입니다. 복원할 곳이 어디 문화유산뿐일까요. 나의 숨어 버린 자아의 원형은 어디에서 회복할 수 있을까요. 보리수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을 거부하고 햇빛에 달구어진 붉은 벽돌의 원형반석 위에 앉아 봅니다. 나무 아래 득도하는 석가의 모습을 그려 보려 했지요. 자신을 객체로 보기 위해 이렇게 먼 거리를 달려와야 했을까요.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시간, 투사의 대상이 필요한 공간적 배경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황색 가사를 걸친 스님이 놀라 뛰어오지 않았다면 큰 결례를 할 뻔했습니다. 사리 위에 앉는 우를 범한 여행자에게 꾸짖음 대신 한 컷을 장식해 주신 그 사진에는 자비의 마음도 함께 찍혀 있습니다.
3. 과거와 현재로 만나는 삶의 진실
희붐한 새벽, 가트로 이동하는 길엔 가랑비가 동행을 합니다. 갈색 홍채 너머 마주치는 사람들의 옷차림만으로는 걸인과 수행자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온갖 고난을 짊어진 듯한 표정들입니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지, 남루한 모습과는 대조로 강렬한 눈빛들은 그 자체로 두려운 존재가 되어 여행자의 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갠지스 강 위에 여기저기 꽃등이 불을 밝히고 피어납니다. 보트 위에서 강물 위에 꽃등을 띄워 봅니다. 신들의 영역, 강가(ganga)에서 소멸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저질러진 여러 업장이 소멸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신분이 세습되는 사공 부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즐거운 표정 자체를 아예 모를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저 습관대로 규칙적인 물살의 율격에 맞추어 노를 젓는 네 개의 손. 얼굴 근육이 기억하는 그 일상은 희망 없는 고달픈 삶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빨래와 목욕, 시체를 태우는 일이 모두 한 장소에서 이루어집니다. 삶과 죽음이 무엇이 다를까요. 모두 하나의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이분법은 산 자가 나눈 경계입니다. 우리들의 잣대로 나눈 이기적인 습성일 뿐입니다. 인도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모두 보여 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구극 목적(究極目的)에 의문을 던진 후 고행을 찾아 나선 싯다르타처럼.
모처럼 청량한 하늘에 구름이 잠시 쉼표를 찍고 있습니다. 인도가 보여 주는 수순대로 일정을 밟아 가는 것, 이것도 순리인가 봅니다. 또 어디론가 여행자를 데려다 놓겠지요.
타지마할 궁전, 왕 샤자한이 죽은 왕비를 그리워하며 만들었다는 곳. 궁전이면서 묘이기도 한 이곳은 순백의 아름다운 대리석 속에 많은 노동 착취와 희생으로 이루어진 사연을 숨기고, 상반된 진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서 있습니다. 눈물겹게 아름답다는 이 모순형용이 말해 주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타지마할 궁전이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잠시 자리를 내어 준 의자가 있습니다. 일명 다이아나 벤치입니다. 그녀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앉았다는 자리. 그녀도 살고 있던 궁에서 나와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 안의 샹들리에처럼 화려하기만 했던 시간 앞에 은폐되었던 삶. 밖에서 가늠할 수 없는 것들과 싸우며 지키려 했던 무형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온 하늘엔 그녀의 삶과 영혼을 기억하는 바람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습니다.
먼 과거 속의 무굴 제국의 왕비는 현재 속에서 사랑의 자취로 고고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기의 사랑으로 회자되던 영국의 황태자비는 비감한 사랑 속에 관심의 표적이 되어 과거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서로 다른 한 남자와의 운명에 얽히어 각기 다른 아이러니한 역사의 인물로, 대비되는 진실로 남았습니다.
왕 자신이 새로 지은 곳에서 아들에 의해 갇힌 아그라 성도 어리석은 진실의 모델이 되어 역사 속에 붉은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바는 내게 강한 자의식으로 무장한 성을 허물고 이제 그 관념의 집에서, 아니 베일에 가두었던 시간 속에서 나오라 속삭였습니다. 스스로를 가두고 만 시간들은 아늑했습니다. 누구도 의식할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나만의 성에서 늘 탈출을 꿈꾸기도 했지요.
저무는 아름다움으로 모습을 감추려는 석양 속에 열차가 푸른 데칸 고원을 달리고 있습니다. 덜컹거리는 열차의 문 난간에 기대어 서 있습니다. 객차의 열려 있는 문은 멀리 달아난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입니다. 삶의 지나간 흔적이 고원의 풍경과 하나 되어 만나고 있습니다. 달리는 열차에 서서 맞던 사선으로 그어 대는 비는 양파처럼 기억을 한 꺼풀씩 벗겨냅니다. 돌아보는 삶은 왜 이렇게 아픈 모습을 하고 있는지요, 달아나는 지난날의 풍경이 나를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도 객차와 객차를 잇는 연결 판처럼 맞닿아 있습니다. 어느 한 부분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그 시간들의 고리는 한 몸이며, 같은 목적지를 향하지만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그것과 소통하려는 진정한 악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내 삶의 부분과 만나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안과 밖,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4. 시간이 만들어내는 풍경
여행은 나 자신과 만나는 것. 삶이라는 도정도 뒤에 남긴 풍광처럼 아쉬움을 남기지만, 행도(行途)는 되돌아오는 과정 속에 묻어 오는 삶의 구도(求道)입니다.
콘서트에서 긴 머리의 록 가수가 부르던 강해야지라는 후렴구가 환청처럼 귓가에 속삭입니다. 갑자기 낯선 기억이 이 순간 뛰어드는 연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나의 목소리입니다, 이 울림의 진동이 삶의 고막에 이르기까지는 얼마나 자신을 담금질했을지요. 이제는 나를 놓아주고 싶습니다. 방목된 삶 속으로 나에게 관대해질 시간입니다. 기차와 버스를 바꾸어 타고 아잔타의 석굴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내리던 비는 얼굴을 타고 살그머니 흐르는 눈물을 희석해 버립니다. 아이처럼 무념의 상태로 엎드려 울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달려든 병마 앞에 방치된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공연히 반기를 들고 아망스레 굴었던 순간들. 눈물 앞에 진실할 수 있는 시간들이 지나갑니다. 자신의 삶조차 마주 보기를 주저하던 이들이 수백 년 전 그들의 삶을 벽화를 통해 들여다보려 합니다. 한 선배 작가는 석굴 내부의 모습을 담기 위해 땅바닥에 엎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팔꿈치를 바닥에 칠십 도로 붙이고 구도를 맞추는 신중한 손놀림이 마치 신 앞에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성스럽기만 합니다. 아니 몇 백 년 전의 이 모습을 담아 가려면 경배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의 각도에서 보면 누가 피사체인지 붓다는 이 사바의 여인이 예술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캘커타의 뒷골목에는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 곳이 있습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낡고 초라한 액자 속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맞이합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가 어린 수녀의 기도를 방해하고 말았군요. 모두들 이곳에 온 목적은 아예 잊었는지 그 숭고한 시간을 헤집어 놓았습니다. 오직 여행자의 기록만을 위해 차가운 디지털 기계의 정지된 셔터를 눌러 대고 있습니다. 그저 눈에 비친 실체, 그 내부의 영혼을 보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 한가운데 나 자신도 서 있습니다.
거리 곳곳에서 만나는 낯설고도 정겨운 풍경. 먼지 앉은 검정 파라솔과 달랑 의자 하나, 기둥에 걸린 조그만 사각 거울이 고작입니다. 손님도 이발사도 한 명인 거리의 간판 없는 정겨운 이발소. 대기석은 필요 없습니다. 몇 개의 파라솔이 더 있으니까요. 과연 이 모습을 지구촌 어디에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문명이 비켜 간 곳에는 오랜 시간의 얼굴이 정지된 흑백 사진의 모습으로 흔적을 남깁니다. 그들에겐 생존, 여행자에겐 풍경이 되는 이 문명의 아이러니가 또 다른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꼬지지한 손으로 옥수수를 건네주는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득 담고 바라보는 시선 속엔 서로가 이방인입니다. 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을 바라봅니다. 벗어 놓은 간디의 신발 두 짝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정신은 영원히 계승되어 계속 릴레이 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나는 사람들 거의가 맨발입니다.
인간과 가축, 우마차와 자동차들이 공존하는 거리, 신호등이 필요 없는 초자연적 거리에서는 버팔로가 길을 막아도 좋았습니다. 국경을 대나무 하나로 나누고, 무질서 속에 질서가 말없이 존재하는 지구의 삼분의 일쯤에서 가치관이 충돌하는 풍경 속에 눈에 비치는 실체와 인간이 그어 놓은 잣대만큼의 혼란을 경험합니다.
누군가는 인도를 가난, 네팔은 평화라고 간단히 정의하지만, 지금은 공존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내게 필요한 것도 공존입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습들이 풍경이 되고 또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네팔 카트만두로 돌아온 시간 속엔 새장처럼 가두어진 또 하나의 시간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살아 있는 신, 어린 소녀에게 덧씌워진 꾸마리는 그 굴레 속에 멍들고 있습니다. 한 사원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체투지하듯 자신을 낮추며 엎드려 있습니다. 그들이 암송하는 옴 마니 밤메 훔은 다 헤아리지 못할지라도 다만, 각 글자의 공덕으로 그 깊은 곳까지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본래 진언은 해석하지 않는다지만, 어떤 이는 저의 일상에 돌아가서도 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일 거라고 일러 줍니다. 어떤 뜻이라도 좋습니다. 각자의 마음에 간구하며 받아들이고 싶은 내용이 어디 하나뿐일까요. 저들의 낮게 엎드린 몸의 언어로 가늠해 보면 그들의 기도는 곧 여행자의 기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시작점에 와 있습니다.
5. 에필로그 - 객체로 바라본 시간들의 페이지
꿈꿀 수 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오래도록 꾼 꿈이 현실로 된 지금. 과연 그곳의 시계는 몇 시인지,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돌아간 시간. 영화 「페르시아의 왕자」에서 소용돌이와 함께 먼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의 모래처럼, 아득했던 그곳에서 인도의 꿈이 아닌 실체를 확인하고 돌아온 이 시간에는 데칸 고원의 평화가 떠오릅니다.
여행 내내 자신과 나눈 무수한 대화들과 삶의 생채기들을 보듬고 연마한 시간들의 흔적은 다이아몬드만큼 영롱한 보석 같은 시간으로 세공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삶의 길 위에서 길어 올리는 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며, 깊은 우물 속에서 퍼 올리는 두레박 속의 물 같은 것입니다. 깊이 고여 있던 물과의 청량한 교감. 그것은 의외로 메말라 균열된 내부 조직을 흔들던 낯선 틈입을 메워 주리라 생각합니다. 벽은 처음부터 없었을 터, 스스로 쌓은 담을 허무는 것. 나에게 관대해질 때 진정한 삶의 화해에 이르는 것임을, 그리고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입니다.
여행자의 소득이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과 나눌 수 있는 마음으로 경계를 허물 수 있다면 붓다의 깨달음을 구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인도는 그 어떤 환상도, 신비의 세계도 아니었습니다. 지구촌의 또 하나의 세계. 가감 없이 그대로 담고 온 사람들의 진실, 그냥 인도의 실상 그대로가 존재할 뿐입니다. 내 마음도 그대로이듯이.
붐바이 행 열차 안에서 인도와 함께 나를 찾아가던 여행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은사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함께 한 여행, 교수님의 육필이 전해오는 한 장의 엽서를 받아 읽고 있습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시간이 멈추는 곳에서 자유가 시작됩니다. 명상에서 터득한 삶이 던져 준 아름다움의 물결을 발견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에서 멈추어 버린 듯한 인도에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시간은 무용지물임을 깨닫기까지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잠시 정지해 놓은 내 일상의 시계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시간을 되돌릴 때입니다. 늦추어 놓았던 시간, 그 유예된 시간 속에서 무엇을 찾았는지, 그대로의 삶을 사랑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요. 구도의 여행지에서 묻어 온 삶, 그 시간도 우리의 인생 어디쯤에 존재하겠지요. 그 시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세계의 큰 페이지인 인도를 넘기며 이 글의 행간을 메우고 있습니다. 붓다의 깨달은 사람과 진정으로 아는 사람 사이의 알 수 없는 미묘한 간극처럼, 그것은 조언자를 넘어선 대상이자 조력자로서의 보이지 않던 바바와의 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을 찾기 위한 진공 같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나의 유예된 시간들의 정의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인지. 내 안의 또 다른 객체로 바라본 시간들의 페이지는 어디쯤에 존재할까요. 그 공간의 그 시간들은 이제 일상의 자리에 낯선 시간 속에서의 모노레터로 남겠지요. 언제쯤인가 다시 읽을 페이지를 위해 나머지의 여백은 어디쯤인가 남겨 두고자 합니다.
여행으로 인한 충족 지수가 한 달이 갈지 일 년이 갈지 모르겠습니다. 인도가 만들어내는 커리 향과 민트 향의 여운이 다해지면 다시 고개 드는 역마살에 몸살을 앓겠지요. 순례자의 고행만큼 느껴지던 인도 기행이 먼 훗날엔 그리움의 하나로 자리하리라 여겨집니다. 또 언젠가 길을 떠날 때가 있겠지요. 그때는 객체가 아닌 주체로 당당히 마주 볼 수 있기를.
바바,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라는 말에는 그대로 담는다는 뜻이 같이 존재합니다. 말없이 바라보고 바라보기만 했던 시간들, 아니 보이지 않던 시간들이 더 많았겠지요. 이제 당신과 만날 시간입니다. 가득하고도 빈 화이버 트렁크에 무엇을 담고 또 내려놓고 왔을까요. 오리무중 같은 삶의 여정에서 다시 짐을 싸고 풀어 놓으며 또 터득해 가는 것, 그것은 우리의 긴 숙제입니다.
뿌우연 먼지 앉은 풍경이 벌써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