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존스톤 교수 중국예외주의에 빠진 공산당의 역사왜곡으로 중국은 중화사상에 다시 젖어들고 있다
시진핑 코리아는 한때 중국의 속국이었으니 언제고 다시 중화제국의 그늘에 편입시킬 수 있다 라며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중국의 주권과 영토 야욕을 미국에 드러냄
그간 우리는 한자로 쓰인 사료를 중심으로 한중 관계를 조명해옴. 이렇게 접근하면 두 나라 역사를 수직적 관계로 볼 수 밖에 없다. 동북아 역사를 한중 양자관계가 아닌 삼각관계, 즉 중원 한족왕조, 북방 몽골리안- 몽골 만주. 한반도-고려조선 각도에서 보면 중원이 천하의 중심이 아니었고 한반도도 결코 중국의 단순한 속국이 아니었다
특히 92세 나이에 아들의 원고를 꼼꼼히 교정해 주신 어머님께 각별히 감사드린다
1장 - 중국의 ‘코리아 속국론’
2017년 4월 17일 시진핑 플로리다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을 때 역사적으로 코리아는 중국의 일부였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역사 인식이며 대한민국을 우습게 보는 엄청난 외교적 결례다. 그런데 정부는 항의 한 번 안 한다
원래 중국역사에 한족이란 개념은 있어도 중화민족이란 말은 없었다. 12억3천만명 인구중 한 쪽이 92% 장족 1,600만 만주족 천만 무슬림인 회족 980만 묘족 890만 위구르 840만 몽골 족 580만 티베트족 540만 조선족 190만
그간 붉은 중국은 인민해방, 사회주의혁명 같은 공산주의 슬로건을 주로 내세웠는데 갑자기 중화민족의 부흥, 그것도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있다
순수 한족왕조가 중국 전체를 지배한 기간은 딱 681년. 한나라 405년 명나라 276년
중국을 지배한 비한족은 거란 몽골 여진 같은 북방 몽골리안
이들의 통치유형은
- 중국을 완전히 지배하는 경우 : 원나라 108년 청나라 293년
- 한족 왕조와 비한족 왕조가 나누어 지배 : 당나라가 망한 후 5대10국시대도 남중국에 있던 10개국을 빼고 화북지방에 있던 후량 후주 등 5개 왕조가 북방민족 왕조
송나라는 군사력이 약해 중국 전체를 지배하지 못했다. 북송시대 화북지방은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차지. 남송도 여진이 세운 금나라에 수도 카이펑(개봉)이 점령당하고 남쪽 임안(지금의 항저우)으로 쫓겨갔다
중국인들이 한족 왕조라 말하는 수나라도 선비족 출신 양변이 세웠고, 당나라도 탁발선비 계통의 왕조. 선비족은 우리 조상인 예맥인들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랴오둥 반도에 살았는데 고구려에 밀려 중원으로 들어가며 급속히 한화한 민족
한족왕조 입장에서 보면 고려, 조선이 일종의 군사동맹국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제2전선을 형성해 북방민족의 전력을 분산 또는 약화시켜 주었다
1019년 고려 현종 때 강감찬 장군 부대가 거란에 10만 정예부대를 물리치고 한국전쟁사 중 최고의 승전보인 귀주대첩을 울리며, 거란은 정예병력 6만명을 잃었다
1637년 잠실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렸다. 인조실록에 홍타이지가 이를 마친 인조를 올라오게 해 청 태종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환영회식과 활쏘기 시합까지 하고 인조와 대신들을 그냥 한양으로 돌려보낸다
북방민족의 세계관은 만리장성 안쪽은 한족의 세계, 밖은 몽골 초원 만주 한반도는 모두 피를 나눈 북방 몽골리안의 세계 여서 동료의식을 가졌을 것
국가의 정체성 콤플렉스. 동아시아에서 2000년 이상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고유문화를 꽃피운 나라는 딱 둘로, 중국과 한반도의 고려 조선
청나라는 한족에게는 복종의 상징으로 변발을 강요했지만, 유독 조선에는 변발을 강요하지 않았다.
북방민족은 다짜고짜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초기 외교 협상을 통해 관계 개선이나 복속을 요구했다
터키에서는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조상들이 동아시아에서 한국인들과 같이 살다가 서쪽으로 왔다라고 가르친다
장한식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역사해석의 고질적 병폐인 자학적 한풀이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평소엔 국방을 소홀히 하다가 외적의 침략을 당해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초를 겪게 하고는 모든 잘못을 침략자 탓으로 돌린다. 통치자 스스로의 잘못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적어도 고려까지는 우리 조상은 외교도 잘하고 협상도 잘했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 서희는 고려는 송나라와 동맹관계를 끊겠다고 승부수. 그러나 개경에는 강경파인 친송세력이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있어 내가 이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고려 조정은 송과 관계를 끊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며, 증거로 압록강 이남 강동 6주를 달라고 설득
세계역사에서 쳐들어 온 외적을 협상으로 스스로 물러가게 하고, 땅까지 떼어 받은 사람은 서희장군 밖에 없을 것
2장 - 패권국가를 향한 붉은 중국의 야심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딱 100년뿐. 일본 제국주의에 짓밟히고 국공내전과 죽의 장막에 갇혔을 때
중국이 약하면 우리가 힘을 키웠고 중국이 강해지면 우리가 위축됐다. 1960년대 수출 주도형 성장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중국대륙이 문화대혁명의 대혼란에 빠졌었기 때문
그레이엄 앨리슨 리콴유가 말하다
중화제국은 독특한 두 가지 방법으로 끈질기게 영토를 확장하거나 주변민족을 한화시켰다
역사적 종주권과 한화형 제국주의. 과거 중화제국 그늘에 있었다는 조그만한 사료라도 있으면 끈질기게 늘어져 결국 자기 영토로 만드는 것-역사적 종주권
남중국해 영토 분쟁, 신장 위구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1863-1949) 티베트를 인민해방군이 침공해 자국 영토에 편입한 근거도 청나라때 자국 영토였다는 역사적 종주권
위안스카이는 조선은 중국의 일부이니 속국으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사부라는 이름의 관청을 설치. 지금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에 대한 역사적 종주권을 주장
한화의 첫 단계는 무력점령. 두 번째 단계는 한족의 이주
옛날 몽골인이 말을 기르던 내몽고 땅에 많은 한족이 들어가 고추 농사를 짓고 있고,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도 대거 몰려가 장사를 하고 있다
청나라가 서구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울 때 위구르는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으로 독립을 유지.
1949년 마오쩌둥의 무력 점령. 한족 청년으로 구성된 대규모 건설 명단을 신장위구르자치구의 파견해 사막에 길을 놓고 댐을 건설해 대규모 농경지를 만들었다. 한족건설병단 아저씨들 고마워요! 순진한 위구르인들은 현수막을 올렸다. 건설인력이 슬며시 현지에 주저앉았다
1949년 한인은 6.6%에 불과했으나 94년 38% 지금은 위구르인이 소수로 전락
중국 정부는 위구르인과 한인의 결혼을 정책적으로 장려. 학교에서는 한자로 교육하고 TV에서도 중국어 CCTV가 방송된다
한때 토번왕국 였던 티베트도 마찬가지.
한화의 마지막 단계는 문화적 점령. 대만의 고궁박물관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3000년 전 요순시대 씌여진 갑골문자를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라틴어 같이 번창했던 문명의 문자들은 사라지거나 고어가 돼버렸다. 이 같은 한자문명권 형성이 가능한 요인 중 하나는 한자가 영어나 우리말과 달리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상하이와 항저우가 차로 두세 시간 거리인데 쓰는 말이 다르다. 남송의 수도 임안이었던 항조우는 거란을 피해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쓰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정복자였으나 어처구니 없게 한화의 늪에 빠져 정체성을 잃어버린 대표적인 예가 만주족
역사를 읽을 줄 알았던 청태조 누르하치는 한화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공문서는 반드시 만주어와 한자를 병기하도록 했다. 자금성의 현판들을 보면 한자와 만주어가 같이 쓰여 있다
국내 유학생은 교수가 배려해 주면서 물어야 자신이 만주족이라고 말하지 절대 자기 스스로 만주족이라고 밝혀진 않는다. 한인으로 사는게 편하고 굳이 자신들의 뿌리를 밝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대단하다. 중국 옆에 붙어 있으면서 한화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반도는 한화형 제국주의가 실패한 유일한 지역이다. 중국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재미본 적도 거의 없고 그 생활력 강한 한족도 한반도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윈난성, 구이저우성, 광시성 등에 가보면 깊은 산 속에 아름다운 계단식 논과 밭을 만들어 요 족 장족 이족 등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이들은 원래 넓고 농사 잘 되는 비옥한 땅 황하유역에 살았는데 밀려오는 한족 세력에 밀려 깊은 산 속으로 피해 들어간 것이다
많은 소수민족이 한화 했지만 묘족은 한족에 대한 저항정신이 강해 한화를 거부하고 아예 백이숙제처럼 산 속으로 들어가 종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농경사회나 목축사회에서 가장 강한 자는 평지를 지배한다. 약자는 산 속으로 들어가 겨우 명맥을 유지해 하며 허덕거린다
3장 - 한자문명에 의해 왜곡된 북방 몽골리안의 세계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BC202 년에 세운 한나라가 역사상 최초의 한족 왕조
한고조 유방은 북쪽의 야만족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 유인전술에 걸려 백등산에서 흉노의 왕 묵돌선우의 40만 대군에 포위. 왕을 설득해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후 유방은 공주를 보내고 매년 국물을 흉노에 받쳐야 했다. 중국 역사는 하사했다고 말한다
군사력이 약한 북송도 1004년 요나라와 단연의 맹서를 맺고 매년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을 바쳤다. 남송 또한 금나라에 세공을 하며 명맥을 유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나라 이름을 몽고로 부르면 큰일난다. 중국인들이 우매할 몽자를 쓴 것이다. 반드시 나라를 말할 땐 몽골, 사람을 말할 땐 몽골리안이라 해야 한다
흉노는 흉포한 종놈, 돌궐은 마구 날뛰는 야만인이란 뜻. 피해자인 한족이 만든 문자 폭력
아브라함 도손 ‘몽골사’ 몽골비사 집사 등 몽골 쪽에서 쓴 역사가 남아 있다. 무슬림 상인들이 페르시아어로 쓴 역사도 많아 진면모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한자로 쓰인 것 이외에 다양한 역사적 문화를 가지고 동북아역사를 연구해야만 보다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 민족, 일본인 같은 몽골족이지만 중국인은 핏줄이 다른 지나족
무굴제국도 몽골리안이 세운 왕조. 티무르 제국을 세운 무슬림계 몽골인들이 인도 대륙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책에선 7개 몽골 집단만 북방 몽골리안이라고 좁게 해석해 보겠다
-몽골 우루스. 지금 중국땅인 내몽골과 몽골 공화국인 몽골 초원(외몽골)에 산다
-키타이. 거란족 기마 민족으로 요나라를 세웠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전쟁
- 여진. 청나라 이후에는 만주족이라 부른다. 압록강 두만강변 만주 지역에 살았다 자연스럽게 우리와 피가 가장 많이 섞였을 것이다. 금나라 청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 위구르. 고유 문자를 가진 민족
- 투르크. 돌궐 터키계로 중앙아시아. 언어학적으로 알타이어를 쓴다. ‘스탄’국가들로 고구려 고구려 신라 등과 많은 교류
- 일본인. 대륙에서 건너간 몽골계와 남쪽 태평양 쪽에서 온 남방계가 있다. 주류는 북방 몽골리안
‘그 손에는 아무런 감촉이 없었다’ 이탈리아 소설가 알레산드로 바리코 소설에서 주인공이 비단을 처음 만지는 순간 묘사.
구름처럼 가볍고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고 입어도 입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는 신비의 천
비단 제조기술은 천년간 비밀에 가려졌다. 로마 학자 플리니우스도 박물지에서 비단이 나무에서 나는 것으로 기술. 로마 귀족들의 비단 사랑 때문에 연 1억 세스테르티우스(고대 로마의 화폐 단위)가 국외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비단의 25% 수입관세를 매길 정도
브루노 바우만 ‘실크로드 견문록’ 중국 장안의 비단이 유럽에 도착하면 가격이 200배 뛰었고 비단 1kg 값은 금 1kg과 같았다. 실크로드에 늘어선 수많은 위험과 왕국을 지나야 했고 그 때마다 통행세 등 온갖 명분으로 뜯겼을 것이다
몽골제국은 제국내 무역에서 모든 국경 통행세(관세)를 철폐하고 최종 목적지에서 물건 팔 때 가격에 1/30를 상품세로 받았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유목민의 눈으로 보는 세계사’
관세를 낮춰 교역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실크로드 국가들이 자유무역협정 FTA를 맺은 셈
페르시아 위구르 상인들과 몽골제국이 합작해 종합무역상사를 만들었는데 투르크어로 오르톡이라 하는데 동업자 조합이란 뜻
지금의 바그다드에 있던 화레즘 샤 제국을 정벌하러 갈 때, 미지의 길 안내를 한 것이 페르시아와 위구르 상인. 몽골이 군사적으로 정복하면 뒤따라 무슬림 상인 집단이 들어가 징수 교역 행정 일부까지 대행. 군상 복합 글로벌 비즈니스 집단
신분과 각종 혈연으로 뒤얽힌 농경민족과 달리, 유목을 하는 몽골제국은 상당히 개방적 인종 지위 종교를 불문하고 항복한 적의 병사는 원하면 몽골 집단으로 받아주었다
징기스칸 큰 아들 주치가 이끄는 몽골군이 헝가리 폴란드를 덮칠 때 병력이 10만명. 몽골 출발 시는 불과 5천명. 중앙아시아 서쪽 투르크계의 킵차크족을 흡수에 병력을 20배를 늘림
마르코 폴로도 원나라에 머물며 세금징수관으로 일함
종교도 개방적. 수도 카라코룸에는 국교인 라마교와 불교는 물론, 사라센과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까지 있었다
4장 - 몽골제국과 고려
몽골제국은 모두 직접 통치했으나, 단 하나 현지 국왕이 통치하게 한 예외가 있으니 바로 고려
징기스칸은 게임의 룰을 약탈전쟁에서 정복전쟁을 바꿈. 병사 개인의 약탈 금지
병사 한 명이 소 한 마리를 육포(보르츠)로 만들어 양의 오줌보에 넣은 뒤 말꼬리에 달고 다닌다. 그냥 씹어먹기도 하고 여유가 있을 땐 끓는 물에 채소와 함께 넣어 샤브샤브도 해먹는다. 대략 1년치 식량을 자기 말에 싣고 다니는 셈
몽골 병사들은 기동성뿐 아니라 추위에도 잘 견딘다. 기마사술(달리는 말에서 일어나 앞뒤 사방으로 활을 쏘는 것)을 역사적으로 할 수 있는 민족은 몽골 흉노 여진 고구려 정도
몽골말은 주인이 원하면 달리면서 네 발을 동시에 공중에 띄운다. 흔들림 없는 무진동의 순간에 활을 쏘기에 정확도가 놀랍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영토가 편입되고 한자문명권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온 나라는 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 뿐이다. 17세기 프랑스 선교사 알렉산드르 드 로드 알파벳을 이용해 오늘날 베트남 문자를 만들며 한자 문명권에서 빠져 나왔다
외적이 한반도를 쉽게 굴복시키지 못한 요인. 한반도는 대부분 산지와 질퍽한 논이 많아 말이 신나게 달릴 수 없었다.
고려군은 공격에 약해도 산성에 처박혀 활을 쏘는 수성에는 탁월했다. 원래 남한산성에는 반년 정도 버틸 수 있는 5만석 정도 군량미가 비축되어 있어야 했는데 썩을대로 썩은 조선이라 이리저리 다 빼 먹고 겨우 45일분 군량미만 있었다
국궁은 만궁으로 둥그렇게 두 번 휘었는데, 몽골의 활보다 사거리가 길고 관통력도 뛰어났다
귀주대첩. 고려군은 거란 활의 사거리 밖이면서도 고려활의 사거리 안인 황금거리에서 유리하게 싸웠다. 고려 만궁은 60m가 유효 사거리 멀리는 200m 이상 날아간다. 멀리 쏠 때는 45도 각도로 하늘에 활을 쏘아올렸다가 떨어지는 힘으로 적에게 꽂히는데 그 관통력은 직선으로 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징기스칸 대야사 Great Yassa 금령 공포. 물과 비를 겁내던 몽골군
제4조 물이나 재에 방뇨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제5조 천이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옷을 빨아서는 안 된다
제14조 물에 손을 담그는 것을 금한다. 물은 반드시 그릇으로 떠야 한다
신미양요. 그 많은 대포가 미국 전함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지 않고 포구가 고정된 대포를 무조건 허공에 쏘아 된 것이다. 고려시대 활 쏠 때는 훌륭한 강화의 성벽이었으나 이 좋은 성벽이 몇 백년 후 대포시대에 맞게 바꾸지 않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보통 어느 사회나 학대받는 하층계급이나 천민계층이 외세를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 꼴 보기 싫은 지배계급이 외적에 당하는 것을 방관 내지 동조하는 것이다
소련을 끈질기게 막아낸 핀란드의 겨울전쟁
히틀러가 스위스 침략을 안 한 이유는 완벽한 국가 방어체제 때문
항몽기간 30년중 초기4년은 금나라가 몽골의 주적이었고 나머지 26년은 남쪽으로 도망간 남송이 주적이었다.
1225년 고종12년 몽골 황제가 고려에 보낸 사신 저고여가 귀국하던 중 피살되어 이를 빌미로 1231년 살리타가 고려 침공. 항복하면 곧바로 떠난다고 약속해 항복한지 한 달 만에 군대가 철수
1259년 강화도에서 나오는 고종은 세자 원종을 쓰촨성에서 남성과 싸우고 있던 몽케칸에게 보냈다. 도중에 칸의 서거 소식을 듣고 아리크부카와 쟁탈전을 벌이던 쿠빌라이를 방문. 쿠빌라이는 정적이 아닌 자신을 찾아온 것은 고려가 자신을 몽골제국의 새로운 칸으로 인정한다는 행운의 징표였다. 5대 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는 고려 국호와 왕실을 인정.
우리 역사는 전통적으로 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 70년대 이후 무신정권이 주도한 천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등장. 몽골에 황금씨족 청년들은 모두 몽골리안 처녀와 결혼해야 한다. 징기스칸 직계 순수혈통인 황금씨족
고려 여인들은 상당수 몽골 귀족이 되었고 황후도 3명이나 나왔다
청나라도 여진족와 몽골족의 혼인을 장려하고 몽골리안 아닌 한족과 결혼은 기피.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 자체를 금지
진짜 비참했던 것은 당나라의 노예 신분으로 끌려간 고구려의 지배계층. 한족이 북방 몽골리안 보다 우리에게 더 잔혹
원나라 4등급 신분제에서 남송의 한족은 최하위 계층 취급을 받은 반면, 고려는 같은 북방 몽골리안 혈연국가로서 상당한 예우를 받음
몽골 초원에는 6월에 가야 한다. 푸른 초원에는 야생화가 만발하고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솟아오른 허브를 먹고 자란 양고기의 맛은 최고다. 평지에 풀들이 많은데 양떼들이 험한 바위산 쪽에 올라가 풀을 뜯는다. 평지의 풀보다 낭떠러지에 있는 허브들이 훨씬 더 맛있기 때문
한 여름에 가면 양고기 맛이 덜 매력적인 것은 물론이고, 하루살이 떼로 인해 엄청 고생한다
대초원에서 차 2대가 모두 진흙탕에 처박혔다 오토바이가 견인차를 부르러 갔다. 한겨울에는 절대 차 한 대로 눈 덮인 설원을 나가면 안 된다
양과 염소를 섞어 키운다. 양은 땅 위 풀을 뜯는데 염소는 땅속에 풀뿌리를 먹는다
풀뿌리까지 먹어치우는 염소가 사막화의 주범인 셈이다. 늑대가 공격하면 양은 꽁무니를 빼는 반면 염소는 겁도 없이 뿔을 가지고 무리지어 덤벼든다.
몽골초원의 극치는 밤하늘의 별이다
5장 - 정화와 고선지의 실크로드를 재현하려는 중국의 일대일로
명나라 정화제독의 대항해 1405년-1433년 동남아 자바 인도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말린디(지금의 케냐) 몸바사에서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잔지바르까지 7차례 항해. 조공무역 체제 구축
다가마와 콜럼버스는 서너척의 캐러벨선에 척당 3-40명의 선원을 태우고 갔지만, 정화함대는 1차항해 때 무려 317척의 정크선에 2만7천명을 태웠고, 배 바닥에 구멍이 뚫려도 쉽게 침몰하지 않는 격실을 갖추고 180명의 군의관이 타고 있어 선원 150명당 한 명꼴
함대의 주력은 보선寶船 전투함 수송선으로 구성. 단순한 해상 전투력뿐만 아니라 막강한 지상 전투력까지 보유
1433년 7차 항해를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해금정책. 모든 대형선박을 파괴하고 대항해시대 생명처럼 아끼던 항해일지까지 없앴다
어느 나라를 보건 대외정책의 큰 과오는 국내 정치세력 사이에 암투에서 비롯된다.
실속없는 청화의 빈번한 항해가 국가재정만 평진한다고 유교 관료세력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경제성은 정화 대항해의 아킬레스건
바이킹에서 대영제국까지 해양세력의 한 일은 약탈, 정복. 무역. 정화 함대는 대명제국의 위대함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 대규모 함대 나타나 전쟁임무가 아닌 평화임무를 수행한 경우는 아마 정화의 대항해 밖에 없었을 것
영락제는 쿠데타로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권력을 탈취했으나 건문제가 바다 어딘가 도망가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풍문이 있어 계속 정화를 밀어줬다.
영락제가 서거하고 북방민족이 강성해지자, 중국은 스스로 봉쇄
캐러벨선은 2-3개의 삼각돛을 달아 지금까지 배와 달리 맞바람을 받으면서도 항해가 가능
보자도르 곶을 돌파하고 서아프리카로 내려간 질 이아네스함장이 처음 가져온 상품은 흑인노예. 그때까지 쓸데없이 돈만 퍼붓는다는 비난에 시달리던 엔리케 왕자가 훌륭한 항해왕으로 변신
아프리카 노예사냥을 포르투갈인들이 직접 한 것도 있지만, 많은 경우 부족들이 서로 싸워 포로를 노예로 팔았다. 카메룬은 200개 넘는 부족이 있었는데 포르투갈 노예 상인이 부족에게 총을 주며 다른 부족 잡으면 총을 더 주겠다고 했다
다가마 함대가 실제 미지의 바다를 개척한 것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케냐 말린디까지 간 것. 말린디에서 인도까지는 거져 갔다. 아랍인 항해사 안내로 23일 만에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
실크로드는 한나라 때 장건이 개척했지만 중국 군대가 제일 서쪽으로 간 것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8세기말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감.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20만명을 지금의 간쑤성 일대와 윈난성으로 강제 이주시켜 평양에는 노약자 병약자만 남겼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에서도 가장 개방적인 제국으로 능력만 있으면 비한족 외국인도 관직에 등용. 고선지 장군은 토번(티베트)을 정벌하고 석국(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까지 복속시킴
사라센 세력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동진하다가 751년 7월 서진하던 고선지 장군과 사마르칸트 근처 탈라스에서 마주친다. 사라센의 승리로 2만명의 당나라 군인이 포로로 잡혀 제지기술 전파. 꿩털 깃이 달린 모자를 쓴 고구려 사신 벽화가 있는 곳이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박물관
스기야마 마사아키 康강씨는 사마르칸트, 안씨는 부하라에서 유래 주장
고구려 바보 온달이 사마르칸트에서 온 소그드인이라 주장 한양대 이희수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개발은행 ADB
조공무역은 보통 상대가 바치는 조공의 1.5-2배를 후하게 하사
항만이나 철도사업 계약을 중국과 하려면 함정이 있다. 그중 하나는 금융거래는 중국 은행을 거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업 시공은 중국 업체가 하게 된다.
한국은 제2의 중동 붐을 노리고 AIIB 창립회원(3.81%)으로 가입했는데 순진한 기대. 계약서에는 기자재 장비 기술 그리고 서비스의 절반 이상을 중국에서 공급한다는 독소조항이 반드시 들어간다
라오스 노동자 임금이 중국보다 훨씬 싼데도 자기나라 땅에서 벌어지는 건설공사에 참여하지 못한다. 공사 끝난 후에는 상당수의 중국인 근로자가 눌러앉아 현지 상권을 장악한다
AIIB 상당수의 프로젝트 파이낸싱은 ADB가 경제성 때문에 참여하기를 꺼린 것이다
개발도상국은 당장 중국이 돈을 빌려준다니까 항구, 철도를 건설하지만 경제성이 없어 빚을 갚지 못해 국가채무가 된다. 2018년 3월 이미 라오스 파키스탄 등 23개국이 부채의 함정에 빠졌다. 파키스탄은 북한과 함께 전 세계 딱 두 나라 밖에 없는 중국의 동맹국이다
2015년부터 20억달러를 투입해 경전철을 건설했으나 이용할 승객이 적어 경제성이 없었다. 수도 카라티와 북서부 페샤와르 1872km를 잇는 철도사업도 비슷. 무리한 일대일로사업 때문에 IMF에 구제금융 신청. 윈난성과 과다르항을 연결하는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사업은 유사시 미국이 말라카 해협을 봉쇄할 것에 대비해 과다르항으로 송유관, 가스관을 연결해 중동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중국의 속셈
2018년 재집권한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은 전임 나집 라작 수상이 벌인 220억 달러 규모의 동부해안 철도사업이 중국과 불평등계약 이라며 폐기 선언.
라오스 비엔티엔과 중국 윈난성 쿤밍을 있는 414km에 철도공사 58억달러가 투입되는데 라오스 GDP의 40% 이런 철도를 만들어 봤자 라오스 사람과 상품이 중국으로 갈 일은 없다. 결국 중국의 상인과 근로자가 라오스 경제주권만 빼앗을 것이다
과거 서구 식민세력이 제일 먼저 장악한 것이 항구. 포르투갈의 캘리컷항 영국의 홍콩항 네덜란드 바타비아항. 정복이나 식민의 야욕이 없던 정화 제독은 해외에 그 어떠한 거점도 만들지 않았다
스리랑카는 부채탕감조건으로 함반토다항의 운영권을 중국에 넘겨주었다. 중국 해군의 해외기지화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카라반들은 낙타 100마리 이상의 짐을 싣고 이른 봄에 출발. 유럽에서 중국으로 갔던 물건은 유리제품 비누.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장안에서 카라반을 기다리고 있는데 제일 먼저 도착하는 이스탄불 상인들이 높은 가격에 물건을 팔 수 있었다 욕심부리는 일부 상인은 밤에 몰래 빠져나와 호위무사도 없이 샛길로 나가 길을 재촉했다. 그 때쯤이면 도적 떼가 항상 나타나 덮친다. 그러나 도적떼는 절대 상인을 죽이지 않는다. 물건을 모두 털지 않고 일부만 빼서 상인이 돌아갈 차비 정도는 남겨 놓는다. 상인들을 적당히 털고 보내야 그들이 다시 오고 그래야 도적들도 먹고 사는 것이다
6장 - 화교가 뿌리 못 내린 ‘코리아’
전 세계 어딜 가든 번영하는 차이나타운이 있기 마련인데 딱 두 나라만 없다. 한국과 일본
이정희 ‘화교가 없는 나라’ 화교 대부분은 산동성 출신. 1920년대초 조선 농부 하루 임금은 산둥성 보다 2.8배 높았다. 그래서 일제는 각종 공사에 중국인 노동자 즉 화공을 선호
세계 3대 채소산지인 산둥성 출신 화농들은 고추 파 마늘 농사를 지어 채소를 공급
조선은 채소를 자급자족 하지 못해 일본에서 수입했는데 이를 착안해 중국인 농부들이 도시에 공급. 조선최대 화상 동순태는 상해 동태호의 자본이 투입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만 4천만명의 화교가 존재. 현지인구 10%인 화교가 동남아 경제의 2/3 장악.
인도네시아에서는 4% 화교가 경제의 80% 필리핀에서는 1.3%가 60%를 차지
싱가포르 리콴유 전 수상, 필리핀의 아로요 대통령 등도 화교
말레이시아에서는 10대 부호 중 아홉 명의 화교.
태국의 CP 그룹 같이 제조업을 하는 화교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동산 금융 유통 음식료 같은 서비스업종에 종사하고 제조업에 대한 장기적 투자는 꺼린다
인도네시아에서 협상시 절대 화교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9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반화교 폭동이 일어나 종족 갈등이 잠재
인도네시아 한번 접은 100불짜리는 환율이 10%정도 불리. 두 번 접은 100불짜리는 20% 정도 불리. 항상 불안함을 느끼는 화교들은 여차하면 튀려고 100달러짜리 지폐를 금고에 보관하고 있는데 한번 접은 지폐는 오래 보관하면 손상되기 때문에 환율을 적게 계산
말레이시아는 아예 화교로부터 현지인을 보호하기 위해 부미푸트라 정책(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1971년부터 시행하는 말레이계 우대정책)
아프리카에서 공사가 끝나면 상당수가 현지에 슬며시 주저앉는다. 200만 명 정도 중국인이 특의 특유의 강한 생활력으로 현지 유통조직부터 야금야금 장악. 잠비아 구리광산 80%를 소유
하워드 프렌치 ‘아프리카, 중국의 두번째 대륙’ 아프리카가 중국의 두번째 대륙이 되고 있다
과거 유럽인들은 고급 비즈니스만 해서 현지에 힐튼호텔 같은 고급식당에서만 놀았다
그래서 나머지 허드렛일을 하며 아프리카인들이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중국인은 거리의 노점상까지 싹쓸이해서 현지인들과 주먹 다툼. 식당 호텔을 하면서 현지인을 안 쓰고 꼭 중국인만 쓴다
한국 화교들은 짜장면 밥값을 못 올리게 정부의 소비자물가지수를 계산할 때마다 꼭 짜장면 짬뽕 값을 연결시켜 놓아서 차별이라고 생각. 많은 화교가 차별 때문에 등 떠밀려서 한국땅을 떠났다. 1968년 외국인토지법을 개정해 화교의 영업용 점포 규모를 50평 넘지 못하게 하고 토지소유도 제한.
개발도상국이 산업화를 하는 두 가지 전략. 싱가포르나 라틴국가처럼 다국적 기업 주도형 산업화. 우리나라는 국내 대기업 중심의 산업화 전략. 외국의 다국적기업을 잘못 불러들이면 산업 주권을 빼앗긴다고 생각. 외환위기 이후에는 개방적인 사회로 바뀜
미국은 이민의 나라인데 미국 역사상 특정 인정을 겨냥해 이민을 제한한 법이 딱 하나 있었다
1882년 중국인 이민 금지법. 미대륙 횡단철도의 가장 어려운 공사 구간은 로키산맥인데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가 중국서 데려온 7만 5천 명의 노동자 일명 ‘쿨리’가 참여.
1870년대 대륙횡단 철도공사가 끝나고 놀러앉은 중국인은 샌프란시스코 인구의 8%
이에 놀라 중국인 이민을 금지하고 60년 지난 1943년에야 폐지
20세기초 파나마운하 공사시도 미국은 중국인 콜리를 데려왔다. 공사기간만 무려 35년 걸려 1914년 8월 대망의 개통식을 앞두고, 중국인들은 미국으로 가고 싶어했고 미국은 반중이민 분위기 팽배. 그 많던 중국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운하가 완공되면 미국인들이 중국인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린다 하는 루머가 번져, 쿨리들은 옆 나라로 이민도주
콜롬비아 과테말라 베네수엘라 등에 가면 유난히 차이니즈 레스토랑 많다
7장 - 붉은 중국의 역사 왜곡
항미원조 전쟁에서 승리한 상감령전투 때처럼 미국에 맞서겠다. 화웨이 런정페이 회장
북한이 침략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치른 용감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다 시진핑 북침설 주장
엘러스태어 존스톤. 중국예외주의. 중국사회의 뿌리깊은 믿음은 중국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것. 천하를 문명세계인 중원과 끊임없이 중국을 침략한 비문명인 오랑캐로 이분하는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다 외국인을 기본적으로 열등한 존재인 동시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 국민 응답자 가운데 중국인이 평화적이고 협력적이고 책임감 있는 강대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8% 불과.
공산당은 시민사회 입헌정치 같은 7대 금기사항의 하나로 공산당이 만든 역사를 비판하는 역사 니힐리즘을 들고, 이를 금지.
중국은 79년 20만 병력으로 베트남 침공
중국에서 역사 기술은 공산당의 철저한 심사를 거치며 통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것만 허용
공산당이 벌인 전쟁은 모두 정의로운 것이고 항상 승리한다
27일간 싸웠는데 침공 초기 베트남 정규군은 모두 캄보디아에 가 있었다. 초기 싸우는 것은 베트남 민병대였지만 중국 정규군은 베트남 보다 더 큰 전사자를 내고 수도 하노이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북부에서 맴돌다가 스스로 철군
대부분의 영화 스토리는 단순. 마오가 이끄는 항일공산군이 영웅적으로 일본군을 무찌르고 승리. 역사적 사실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쟁을 한 군데는 장제스의 국민군.
진나라에서 청나라가 멸망은 1911년까지 중국에는 49개 왕조의 282명 황제나 왕이 있었다
자연스레 물러난 황제는 절반 이고 나머지는 내부 반란으로 폐위
중국의 역대 지도자들을 위협하는 것은 외적이 아니라 내부 반란세력
안록산의 난 때 당 현종은 경쟁국이자 적대국이었던 위구르에 지원을 요청하여 반란진압
반군에게 지면 왕좌를 빼앗기지만 외적은 참고 때를 기다리면 퇴치하거나 스스로 제풀에 물러난다.
시안사변 장쉐량은 만주군벌로 자기 지역을 침공한 일본군과 싸우고 싶은데, 장제스가 머나먼 서쪽으로 보내 공산당을 토벌하도록 해 불만이 폭발
국공합작이 있었지만 마오의 지시에 따라 홍군과 일본군 사이에 거의 접전이 없었고, 공산당은 병력과 지역적 기반을 엄청나게 키울 수 있었다. 덩샤오핑 평전 70%는 당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 20%는 국민당과 타협을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10%는 항일 작전에 사용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인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도 마오는 항일승전 같은 요란한 행사를 하지 않았다. 전승절 행사는 장쩌민 때부터 시작.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있던 조선의용군 3개 사단 6만명을 군편제 그대로 북한에 주었다. 전투 경험이 많은 이 3개 사단이 주력이 되어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
많은 수가 국민군으로 쓰촨성 등에서 끝까지 항거하다가 부대 단위로 집단 투항. 공산당으로 편입된 군인들은 그냥 입고 있던 얇은 군복을 입고 북쪽 만주로 올라왔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건전하지 않은 골칫거리였는데 한반도에서 싹 정리해 버린 셈
일사후퇴 공산 치하를 경험한 서울시민들은 공산당이라면 치를 떨고 피난. 중공군이 서울 시내에 들어오니 도시가 텅 비어 있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은 고기 인민은 물로, 공산당은 인민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런데 김일성이 어떻게 남조선 인민들을 다루었기에 서울시민들이 저렇게 피난을 가버렸던 말인가
마오쩌둥의 승리를 요인은 인민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 홍군 병사 행동규범에 인민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부득이하게 가지려면 꼭 대가를 지불하라. 말고삐 조차도 농가의 과수나무에 매지 마라.
홍군은 병사를 도시외곽에 주둔시키고 먼저 대민 선무공작대가 시내에 들어와 빗자루로 길거리를 쓸어주는 등 인민의 마음을 먼저 잡았다. 그리고 야금야금 물자와 인력을 차출해 갔는데 결과적으로는 국민군보다 더 많이 빼앗아 갔다
당시 국군은 창군된 지 1년 남짓 때로, 무기나 지휘체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탱크가 한 대도 없었다. 총알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국군 8개 사단 중 절반인 4개 사단이 후방배치.
북한은 기관총부터 박격포까지 자체생산. 일제가 남긴 총 대포를 만드는 군수공장이 북한에 있었고 잡아둔 800여명의 일본인 기술자를 이용해 만들었다.
수류탄 두발에 실탄 20발씩 가진 우리 국군이 3일간 버텼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기적
미국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지원하다가 중국의 장제스군, 베트남 월남군을 버린 이유는 도무지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국군은 단 한 개 대대도 집단투항하지 않았다
6.25 전에는 국군에 침투한 좌익 장교가 근무한 월북 사건이 대대로 있었다
한국인들은 공산치하의 노예같은 삶보다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총검을 꽂고 싸우는 육박전을 제일 잘한 군대 프랑스와 터키군이 중공군 상대로 최초로 버팀
UN군이 지평리 전투를 계기로 인해전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반격
몽클라르 1950년에 이미 중장으로 승진했다. 코리아로 파병되는 대대급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자진해서 중령으로 강등
콜롬비아는 라틴국가 중 유일하게 대대규모인 1080명을 파병
맥아더 특징 꼭 최전선에 가서 전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판단을 하는 것. 30년대 미국 역사상 최연소 육군참모총장
8장 - 붉은 중국의 한반도 징크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조정. 티베트는 영국과 인도 세력이, 신장 위구르에는 러시아 세력이, 조선 땅에는 일본이 호시탐탐
거덜난 국력으로는 세 군데 모두 군대를 보낼 처지가 못 되니, 조선만 스타 장군 위안스카이가 출격. 아산에서 일본군에 참패. 독일에서 최신 전함인 진원함 정원함을 사오고 최신 무기로 무장한 북양함대가 도고제독이 이끄는 일본 해군에 참패
산둥성 웨이하이항에 정박하고 있다, 항구를 봉쇄하며 기습공격한 일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함
1950년 11월 유엔으로부터 침략자 낙인 후 중국은 고립을 피하기 위해 대약진 운동을 벌이다 수천만명 아사. 모든 농민의 땅을 빼앗고 인민공사에 집단 거주케 함.
전 인민 1070만 톤 철강생산 위해 분투할 것. 주민들은 결국 고철을 녹여 철강을 만듦. 솥냄비 숟가락 쟁기 곡괭이 까지 마구 용광로에 집어넣음.
철강 생산하느라 일손이 딸려 곡식을 제대로 추수하지 못해 식량부족
유소기 덩샤오핑 등 개방파가 권력장악. 권력을 되찾기 위해 자신을 광신하는 어린 중학생, 고등학생들을 소위 홍위병을 만듦. 공산당과 정부는 빼앗겼지만 군은 마오쩌둥이 장악
65년부터 10여년간 마오의 개인숭배로 중국대륙을 광기로 몰아간 문화대혁명
한강 이북 포천 의정부 등에 주둔하며 북한군을 견제하기 위해 야전군 형태로 포진하던 미군이, 언제부턴가 평택에 있는 주한미군을 기동군 형태로 집결해 대북견제에서 중국견제로 바꿈 쿠바 워싱턴간 거리는 1933km 평택에서 베이징 사이 986km
만주로 진출한 임표가 이끌던 마오쩌둥군이 장제스군에 밀려 궤멸 직전. 김일성이 압록강 두만강 국경을 열어 중국 공산군은 북한 땅으로 들어와 보강할 수 있었다. 이때 일본군이 북한에 남긴 소총 20만정과 탄약을 마오쩌둥한테 주었다. 원기를 회복한 중국 공산군은 만주에서 승리후 남진하여 중원대륙 몰아붙인 끝에 기적같은 승리를 거둠
1956년 연안파가 김일성을 축출하려다 실패하고 중국으로 망명. 북한 땅에는 20만명의 중국군이 주둔. 1958년 결국 중국군 철군. 북중관계는 악화됐고 그 후 북한은 친소로 돌아섬
9장 - 남중국해 영토분쟁과 중국의 해양굴기
어니스트 킹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은 솔로몬제도-마리아나 제도-사이판-오오키나와 도쿄로 이어지는 최단거리 공격방안 제시. 반면 맥아더는 필리핀을 꼭 되찾자 주장. 남중국해를 장악할 수 있기 때문.
일본의 가장 큰 약점은 기름과 자원부족. 동남아는 전쟁물자 조달처로, 인도네시아의 기름, 말레이시아의 고무와 주석 비행기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보크사이트 조달
44년 레이테만에서 일본이 참패. 필리핀 전투에서 17만명 사망. 미군은 8천명
레이테만 해전에서 가미카제 특공대가 생겨났다.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기지와 수빅해군기지에서 출격하는 공격으로 초기 600만톤이던 수송 군 단위 남중국해에서 거의 격침되어 종전시에는 겨우 30여만 톤만 남았다
중국에 분노한 베트남은 캄란만 해군기지를 미 해군에 개방. 인도 함대가 자국 항구에 기항하는 것도 허용.
반면 필리핀은 어처구니 없는 결정. 반미주의자들이 미군이 철수하고 그 자리에 외국인 투자 전용공단을 만들자고 주장. 당연히 유치 실패. 멀쩡이 자기 나라도 도와주러온 미군을 시위로 쫓아내는 현지인들을 믿고 투자했다가 외국기업 배척, 노사분규로 공장 문 닫기 십상
미군이 떠나자 필리핀이 실효 지배하던 남사군도의 스카버러 섬을 중국이 무력 점령
중국 해군의 주력으로 산둥성 칭다오에 주둔하던 북해함대가 태평양으로 나가려면 만만치 않은 해군력을 지닌 일본 한국 대만이 존재. 결국 중국이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남중국해
2025년까지 6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할 예정. 우크라이나가 건조한 바랴그 항모를 개조해 랴오닝 함으로 취역. 두 번째 자국선 항모인 산둥함도 실전 배치할 예정
한 나라가 가질 수 있는 무기 가운데 가장 공격적인 것이 항공모함.
2차대전 당시 아카키 히류 등 6척의 항공모함과 함재기 제로센은 세계최고 수준. 미쓰비시 중공업이 생산한 제로센은 민첩성과 상승속도로 미국 전투기를 압도. 특히 최대항속거리 3350 km나 되어 대만기지에서 필리핀까지 날아가 미군기지 폭격
진주만 상공에서 어뢰를 투하하면, 떨어지는 속도 때문에 어뢰가 일단 수심이 11피트까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방향을 잡아 군함을 공격해야 한다. 진주만은 너무 수심이 얕아 불가능. 세계 전쟁사를 보면 영원한 난공불락의 요새는 없다. 어뢰의 프로펠러 부분에 나무판을 다니 빨리 부상해 미군함을 격침.
미국에는 항모 6척 트라우마. 역사적으로 6척 이상의 정규 항공모함을 가진 나라는 과거 일본 제국과 지금의 미국밖에 없다
2019년 방일한 트럼프가 호위함을 개조한 경항공모함 가가호 탑승.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위해 일본의 항모 보유를 승인. 아베는 이즈모급 경항공모함 4척을 만들고 1척당 스텔스기 F 35B를 10기씩 실겠다고 발표. 미국으로선 혼자 막기 벅차 일본의 항공항모전단을 활용해 중국을 견제
베트남전에선 팬텀기와 미그기의 공중전 격추비율이 1:3
걸프전이후 F16(falcon)은 적기 76대를 격추시키고 단 한 대만 떨어졌다. F15(eagle)는 단 한 대 손실 없이 적기 100여 대를 격추. 날이 갈수록 기술의 차이가 항공전 에서 결정적 역할
중국이 자체 개발했다고 떠드는 함재기 J-15도 수호이 SU-33을 불법복제한 짝퉁. 수호이 33은 SU-27보다 훨씬 무겁고 비행기 모양도 다른데 SU-27의 엔진을 집어넣음. 이착륙 모습을 보면 폭탄을 장착하지 않고 있다. 엔진 파워가 약해 무거운 폭탄을 달 여유가 없었다
육군과 달리 해군은 프로페셔널. 항모전단 운영은 엄청난 노하우를 필요하고 지휘자의 자질이 절대적. 일본 해군이 급성장한데는 영국해군의 도움이 절대적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도 영국 해군 사관학교 출신으로 러시아 발틱함대 격파. 발틱함대는 수에즈 운하를 거쳐 가려고 했는데 영국이 거부. 중간에 인도 말라카 해협 등에서 중간보급을 받아야 하는데 영연방 국가들 모두 입항을 금지. 대한해협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
영화 해적왕 드레이크 시대 바다에서 싸움은 결국 칼싸움에 의해 승패가 결정
함포전이란 새로운 게임의 룰을 실제로 잘 활용한 인물이 이순신. 화포로 23승
일본 함선은 삼나무로 만든 안택선으로 선체가 약해 화포를 장착할 수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정규 항공모함을 실전배치한 나라는 1922년 호쇼함을 만든 일본
에너지 안보. 중국은 군사훈련을 핑계로 2019.7.3.일-5 3일간 남중국해 파라셀군도에서 스프래틀리 군도까지 22200km 해역을 항해금지구역으로 지정. 자기 영해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지정.
중국은 해양 영토분쟁에서 서슴치 않고 해군력을 사용. 우리의 독자적인 해군력이나 공군력만으로는 대체할 수 없다. 억지력을 한미동맹 밖에 없다
시바료타로 ‘언덕위의 구름’ 지용희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10장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 우리의 선택은?
중국이 패권국가가 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
-막대한 군사비. 6개 항모전단을 운영하려면 우리나라 국방예산의 3-4배를 쏟아 부어야하나, 군비 확장에 퍼붓는 달러 상당부분이 미국에서 흘러들어간 돈.
-미국이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든 기존 글로벌 가치사슬을 재편
-다른 나라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소프트 파워 보편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조지프 나이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대영제국의 민주주의, 미국의 자유 같은 것. 지금 중국이 내세우는 건 고작 위대한 중화사상. 이건 보편적 가치가 아닌 자국우월주의 불과
-세계질서에서 우두머리가 되려면 따르는 무리, 동맹국이 있어야 한다. 중국의 동맹국은 파키스탄과 북한뿐.
-경제패권과 군사패권이 바뀌는데 20-30년 격차가 있는데 너무 성급
우리의 선택은 당연히 미국. 중국해군의 영향력으로 속국. 주한미군 철수시 정치적으로 불아해져 경제에도 영향. 자유민주주의 가치 공유
지금의 압록강 두만강으로 국경을 끌어올린 것은 세종대왕 이후. 말하자면 7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700년간 청천강 이북은 부근 우리 땅이 아니었다.
61년 중조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2조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시 중국군이 자동 개입. 추후 역사적 종주권을 주장하며 청천강 이북에 중국군을 상주시킬지 모른다. 중국에서는 북한을 둥베이사성(동북4성) 고구려성이라 부른다. 지린성 헤이룽장성 랴오닝성의 3성에 이은 4번째 성이라는 것
일본과 독도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철저히 대응하나 중국과 역사전쟁, 영토전쟁인 동북공정이나 이어도 문제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왜 비대칭적으로 대응하는지 모르겠다
중국은 우리를 동쪽 오랑캐라는 뜻을 동의라고 부르면 깔보았다. 명나라는 좀 봐줘서 조선을 順夷 말 잘 듣는 오랑캐라고 불렀다
창조적 두뇌는 사회의 다양성에서 나오고 다양성은 민주사회에서만 싹튼다.
출처:blog.naver.com/tigermas/222117685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