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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선생과의 논지
O. C선생
[추석은 차례(다례)가 아니다.]
모 T.V. 방송국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에 望日(秋夕)의 參禮를 시연 설명하는데 완전 왜곡된 내용을 아무런 검증 없이 방영됨을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秋夕의 예를 茶禮(茶禮)라 하지 않는 사실을 간과하고 世設에서 이 날을 와전되어 茶禮라 거리낌 없이 칭하고 있는 것을 아마도 아래 (1)번을 오해한 결과인데도 이를 알지 못한 듯 하다.
옛날에는 祠堂禮의 하나로 每月 1일과 15일 마다 後孫들이 모여 參拜를 하였는데 매월 1일은 出主 降神 參神 獻酒 獻茶 主人主婦皆再拜降復位 辭神而退의 禮로 行하고 매월 15일에는 不設酒 不出主 焚香 參神 獻茶 主人再拜降復位 辭神而退로 간략한 예로 마치는 禮이다.
따라서 매월 15일 날의 禮를 獻酒치 않고 茶만 올렸으므로
茶禮(茶禮)라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秋夕은 (3)번과 같이 俗節의 예법에 따라야 함은 (4)번을 참고컨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고로 秋夕의 禮는 茶禮(茶禮)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祠堂 奉事하는 몇 家門을 제외하고는 紙榜 奉祀 家門에서는 이미 茶禮의 禮는 廢하여진지 오래다.
(1). 家禮祠堂篇正至朔望則參條望日不設酒不出主主人點茶長子佐之先降主人立於香卓之南再拜
乃降餘上儀
(2). 家禮祠堂篇正至朔望則參條云云主婦升執茶筅執事者執湯甁隨之點茶如前命長婦或
長女亦如之子婦執事者先降復位主人出笏與主婦分立於香卓前之前東西再拜降復位與在位者
皆再拜辭神而退
(3). 家禮祠堂篇俗節則獻以時食條云云禮如正至朔日之儀
(4). 要訣俗節(謂正月十五日三月三日五月五日六月十五日七月七日八月十五日九月九日及臘日)
獻以時食(時食如藥飯艾餠水團之類若無俗尙之食則當具餠果數品)如朔參之儀
▲陶庵曰中州人重茶每食必設若古之食竟飮酒湯口安食之義也祭祀亦用之我國以水代茶而至
於調飯卽是俗禮故好禮之家徹羹進水而已
▲ 退溪曰今人進湯水是古進茶之意
▲ 便覽望日不設酒不出主餘如上儀
▲ 栗谷曰不出主只啓櫝不酹酒只焚香
오해치 않기를 바란다.
△ 이이록
[매월 15일 날의 禮를 獻酒치 않고 茶만 올렸으므로 茶禮(茶禮)라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秋夕은 (3)번과 같이 俗節의 예법에 따라야 함은 (4)번을 참고컨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고로 秋夕의 禮는 茶禮(茶禮)가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전 국민이 ‘추석 차례를 지낸다.’라고 합니다.
설날도 마찬가지입니다.
‘秋夕의 禮는 다례(茶禮)가 아니다.’ 라고 하신 말씀에 당황스럽습니다.
추석의 예를 ‘다례’가 아니라는 말씀은 매월 15일 날의 禮를 獻酒치 않고 茶만 올렸으므로 차례(茶禮)라 이르게 된 것인데 추석은 15일이지만 俗節의 예법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이를 茶禮(茶禮)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매월 15일의 茶禮(茶禮)를 명절이라고 해서 추석의 예를 茶禮(茶禮)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날 단잔 무축으로 추석에 조상님에 대하여 ‘차례’라고 하여 예를 올리고 있습니다.
추석 명절이라고 하지 말고 15일이라고 한다면 ‘차례를 지낸다.’ 라고 말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추석절에 차례를 지낸다.’ 라는 말 대신에 ‘추석 제사를 모신다.’라고 말해야 하는지요?
유학에 대하여 무지한 관계로 잘못된 말씀을 드리는지는 몰라도 이해가 안 되고 궁금합니다.
아래 검색된 글을 참고로 올립니다.
(야후 백과 사전 - 차례茶禮)
음력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지내는 제사이다.
절사(節祀) 또는 차사(茶祀)라고도 하며 현재는 설과 추석에 가장 많이 지내고 있다.
지역이나 가문에 따라 대보름· 한식· 단오· 칠석· 중양절· 동지 등에 지내기도 한다.
조상에게 달· 계절· 해가 바뀌고 새로 찾아옴을 고하고 절식(節食)과 절찬(節饌)을 올리는 의례이다.
원래는 다례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다례라고 하면 옛날 궁중의 다례나 불교의 다례 등을 뜻하게 되었고 명절에 지내는 속절제(俗節祭)를 차례라고 한다.
차례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관혼상제의 규범이었던 주자(朱子)의 《가례》에 차례와 형식이 같은 참례(參禮)와 천신례(薦神禮)라는 제의(祭儀)가 있는데, 그 내용 가운데 차를 올리는 절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 유래한 듯하다.
그러나 한국은 중국과는 달리 차를 올리는 절차는 없다.
《가례》의 참례와 천신례의 절차는 진설(陳說)· 출주(出主)· 강신(降神)· 참신(參神)· 단헌(單獻)· 점다(點茶)· 사신(辭神)· 납주(納主)로 요약되는데, 차례 절차에는《가례》에서 보이는 ‘점다’는 없다.
정초와 추석 때는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차례를 지낸다.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의 4대조와 불천위(不遷位;나라에 공훈이 많아 사당에 모셔
4대가 지나도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한 분의 위패)를 모시는 것이 원칙이나, 가정의례준칙 반포 이후에는 조부모와 부모 2대만을 제사지낸다.
사당이 있는 집은 사당에서 지내지만 대부분 지역에서는 안방· 대청에서 지내고, 여자는 참석하지 않는다.
한편 참례와 천신례는 사당에서 행하고 여자들도 제사에 참석한다.
옛날에는 정초차례 때 밤중제사(또는 중반제사)라 하여 섣달 그믐날 밤 종가에서 제물과 떡국을 차려놓고 재배(再拜)· 헌작· 재배한 다음
초하룻날 다시 모든 자손이 모여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보통 정초 아침이나 낮에 부계(父系) 친족끼리 모여 지내되 종가에서부터 차례로 지낸다.
절차는 축문(祝文) 없이 한 번의 헌작을 올리는 무축단헌(無祝單獻)을 원칙으로 하여, 종손의 분향을 시작으로 재배· 강신· 일동재배(一同再拜;참신)하고 종손이 술병을 들어 헌작한 후 메를 올린다.
올린 메에 수저로 +자 모양의 자국을 낸 다음 45도 각도로 꽂고 일동이 재배한다.
국을 내리고 숭늉을 올린 뒤에 숭늉에 밥 3숟갈을 만다.
메에 뚜껑을 덮은 다음 차남이 아헌(亞獻), 3남이 첨작한 뒤 일동재배하여 사신한 뒤에 상을 치우고 재실에서 음복한다.
음식은 정초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을 기본으로 하고 과일· 포· 탕· 식혜· 산적· 어적· 나물· 전· 편· 국· 메 등을 차린다.
민간에서는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조상이 사망한 날을 추모하여 지내는 기제사(忌祭祀), 4대조 이상 조상의 묘를 찾아 추모하는 묘사(墓祀)와 더불어 중요한 조상숭배의례로 꼽고 있는데 추석이나 설 이외의 차례는 거의 소멸되고 있는 추세이다.
오늘날에는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추석이나 설의 차례는 외지에 나갔던 부계친족들이 모두 모이고
다양한 민속놀이가 행해지므로 오히려 명절의 의미가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국어사전) - 차례
명절날이나 조상의 생일, 또는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등의 낮에 지내는 간략한 제사.
'차사(茶祀)' 라고도 함. 차례를 지내다.
위의 글을 보면 분명히 ‘명절 날 차례를 지낸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추석 명절에 차례의 의미를 더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 C
이이록선생께 茶禮(茶禮)에 대하여 더 소명할 기회를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百姓 冠婚喪祭 禮法은 朱子家禮를 母體로 하여 我國 先儒들께서 많은 禮書를 남겨 주시어
그 근거에 의하여 지금까지 禮를 갖추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 禮書에 의하면 祭禮는 正寢禮와 祠堂禮, 墓禮, 神禮(竈, 山) 등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祠堂禮에는 ※主人晨謁 ※出入必告 ※正至朔望則參 ※俗節則獻以時食 ※有事則告의 禮 등으로 분류가 되지요.
여기서 茶禮(다례=차례)라 함은 正至朔望則參條에 屬하고 秋夕은 俗節則獻以時食條에 속하여
그 명칭은 俗節 또는 節祀 혹 參禮등으로 표현됨이 옳을 것입니다.
본인은 國語學者가 아니니 茶禮의 語源은 알지 못하나 朝廷禮를 살펴보면 勅使禮로서 茶禮儀가 있으며 書簡牒의 茶禮는 俗節을 稱함이 아니라 祭禮 중 제일 간단한 望日參을 의미함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또 增正交隣志의 茶禮라 함은 宴會 때의 예법의 하나이며 眞殿 茶禮 역시 俗節禮가 아닌 茶禮를 의미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俗節을 儒家의 禮法 어디에서도 茶禮라 命名하여 稱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선생께서 밝히신 俗說이나 國語學的으로 俗節을 茶禮라 칭한다는 말씀은 어디까지나 說者나 辭典의 編者가 어느 근거에 의하여 그와 같이 정의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니 그 당부는 논할 수 없을 뿐이며, 본인은 儒家的 典據에 의한 판단일 뿐입니다.
다만 아래 전거를 뒤집을만한 상당한 전거 제시 또는 추후라도 儒學的으로 상당한 典據가 살펴지면
스스로 俗節을 茶禮라 稱한다로 修正할 것입니다.
▲朱子家禮祠堂章按○君子將營宮室(云云)○爲四龕以奉(云云)○旁親之無後者(云云)○置祭田
○具祭器○主人晨謁(云云)出入必告※正至朔望則參※俗節則獻以時食※有事則告○或水火(云云)
▲朱子曰大祭時每位用四味請出木主俗節小祭只就家廟止二味朔旦俗節酒止一上斟一杯
▲頴西曰秋夕之名古未有也然以意推之七夕秋夕均有所取於是夕之義秋夕之夕亦豈無義也是夕也
月爲一年之最從古爲玩賞之節其必取於期以名爲夕無疑也東俗之以是日上墓行之已久今不可廢
▲南唐曰四時墓祭退溪拘於朔望而欲廢正秋二節是春夏連擧而秋冬專闕也
▲喪禮疏士則月望不盛奠惟朔奠而已
▲韓魏公祭式凡遇節祀祭物以時節所尙不具於正祭
▲晦齋曰按世俗正朝寒食端午秋夕皆詣墓拜掃今不可偏廢是日晨詣祠堂薦食仍詣墓前奠拜若墓遠
則前二三日詣墓所齋宿奠拜亦可
▲南溪曰朔宐行參望宐焚香所以有差等
▲類編東俗不用茶則雖望日不可不用酒卽於卓上斟之無縮酒以殺節也
▲五禮儀朔望或値俗節則兼行與時祭相値則參禮不必行
▲三禮儀俗節饌品每位匙筯一楪果一盤酒一盞蔬一器肉湯一器時食一器
▲勅使茶禮儀下馬茶禮儀云凡茶禮同其日禮賓寺設勅使座於南別宮正廳云云
▲家禮正至朔參條望日不設酒不出主主人點茶云云
▲書簡牒葬事及忌祭茶禮
▲增正交隣志茶禮儀(禮單茶禮附)東來府使釜山僉使先到宴廳(云云)小通事告進茶禮仍進饌卓饌
三味酒五酌然後小通事跪告規例盞畢(云云)
▲邑誌類全羅道篇進貢條八月令(淸)眞殿茶禮(早紅枾)
대단히 감사하였습니다.
△이이록
현재 초암 선생의 위치가 남다릅니다.
성균관 연구생이나 정직원이 아니라고 하지만 성균관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과 ‘무엇이든지 물어 보세요.‘에 답변자로 공히 인정되어 여러 네티즌의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이러한 위치의 초암 선생의 한마디 말씀은 무겁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초암 선생은 [秋夕의 禮는 茶禮(茶禮)가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문의에 대한 답변 또한 많은 전거를 들어 논지의 타당성을 열거하셨습니다.
[茶禮(다례=차례)라 함은 正至朔望則參條에 屬하고 秋夕은 俗節則獻以時食條에 속하여 그 명칭은 俗節 또는 節祀 혹 參禮 등으로 표현됨이 옳을 것입니다.]
‘俗節’은 추석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도 禮입니까?
俗節은 설날이나 추석절을 가리켜 통 털어 말하는 것 같고 參禮는 행사에 참여하여 예를 드리는 것으로 본다면 ‘節祀’라는 어휘가 ‘차례’ 대신 쓰이는 말로 적합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지금은 들어보지 못하는 ‘節祀’라는 말을 어렸을 때 들어 보긴 하였습니다.
“절사를 잘 지내셨습니까?”가 아닌 “節祀에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을요.
그런데 節祀의 말뜻을 새겨보면 ‘추석절 제사’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인사말을 새겨보면 ‘절사’는 추석날을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추석날 아침에 조상님에게 올리는 단잔무축의 제사를 [차례]라고 하지 않고 [俗節. 節祀 參禮]라고 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儒家的 典據에 의한 판단으로 [秋夕의 禮는 茶禮(茶禮)가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누구나 의아해 할 것입니다.
초암선생께서 올리신 전거를 다른 유학자님들은 모르고 계셨을까요?
‘추석의 禮는 茶禮가 아닌 것’으로 말하는 유학자님이 여태껏 왜 한 분도 없었을까요?
많은 유명한 유학자님들이 어떻게 일언반구도 없이 오늘까지 모든 국민이 추석 아침의 조상님께 올리는 禮를 ‘차례’라고 알고 행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올린 글은 제가 발췌한 俗說이 아니고 Yahoo! 백과사전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전거를 뒤집을만한 상당한 전거 제시 또는 추후라도 儒學的으로 상당한 典據가 살펴지면 스스로 俗節을 茶禮라 稱한다로 修正할 것입니다.]
간단하게 이 전거를 뒤집을 수 있는 전거 제시가 있으면 [俗節을 茶禮라 稱한다로 修正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자신을 하고 있으나 수정 운운은 초암 선생님의 위치로 보아 간단히 말할 수도 쉽게 뒤집을 수도 없는 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초암선생의 위치가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차례’는 전거가 어찌되던 우리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추석날 제수를 차려 조상님께 올리는 간단한 제사는 ‘차례’라고 온 국민이 알고 있습니다.
틀리면 바르게 고쳐 써야 하는 것도 있지만 단어로 굳은 것은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바르다는 생각입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쓰임도 다릅니다.
엉뚱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Fight- 싸움, 투쟁의 뜻- 이를 일본 사람 운동선수들이 ‘화이또’라고 한다는데 이를 우리나라 감독과 선수들이 수입하여 Fight에 ing를 붙인 Fighting으로 읽고 ‘파이팅. 홧-팅!’이라고 격려하는 용어로 쓰는데 일상생활 어느 곳에 안 쓰이는 곳이 없습니다.
‘아자!’ 라는 말로 순화했으나 아마 현재 일상생활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용어로 자리매김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옛 고문의 전거로 [秋夕의 禮는 茶禮(茶禮)가 아니다.]라고 하면 지금에 쓰이는 여러 용어들 중에도 옛 것이 아닌 어휘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추석 날 조상님께 올리는 단헌무축의 제사가 ‘차례’라고 알고 지금은 모두 쓰이고 있는 어휘를 ‘차례’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나 짧은 식견으로 약간의 전거와 관련이 있는 추석 명절과 겹친
삭망일에 조상님께 올리는 제사는 ‘차례’라고 해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초암 선생의 유학권내의 위치와 무게를 감안하신다면 [추석절 禮는 ‘茶禮’가 아니다. 俗節. 節祀. 參禮라고 해야 한다.]는 논지는 전거에 의해 바르다고 할지라도 현재 많은 국민들이 ‘차례’라고 하고 있으니 다른 유학자님의 고견도 들어보고 국민들을 계도하는 글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어투에 실례되는 말씀은 이해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C
이이록 선생의 충고적인 말씀 이해되고도 남씁니다.
茶禮(차례)란 일반 禮가 아닌 祭禮의 用語로 쓰이게 된 동기는 아마도 朱子家禮 [正至朔望則參條 望日不設注不出主主人點茶長子佐之先降主人立於香卓之南再拜乃降餘上儀]에서 기인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 정혼(약혼)의 예를 茶禮 또는 聘禮라 이르기도 하나 이는 祭禮의 茶禮와는 무관하니 이에서 연유되었다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각종 사전류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 이뤄졌으니 그 연대는 오래지 않아 선유들의 사후에 발간됨이 대부분일 터이니 아시지를 못하였을 터이라 논함이 없음은 당연할 것입니다.
유학과 국어학은 별개의 학문 같으나 우리의 국어는 유학에 근거하여 낱말이 생성 의사 소통에 이용됨이 부지기수로 그 낱말이 유학에 근거하여 생겨났다면 그 근원의 뜻에서 벗어나 왜곡되어서는 아니 됨은 보통의 상식에 해당될 것입니다.
만약 세간에 왜곡된 용어가 있다면 바르게 잡음이 학자의 직분에 해당될 것이라 유학적으로 아무리 고찰을 하여도 茶禮를 俗節 전체를 통칭하기에는 전거가 전무하여 正朝와 秋夕 등의 명절(俗節)은 茶禮라 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국어학자적 견해는 다를 수가 있겠지요.
한 나라 국어의 상징인 사전을 편찬하면서 茶禮를 [음력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지내는 제사이다]라고 정의할 때는 그와 같이 풀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만한 전거 없이야 개인 소견으로 그 영향이 막중한 사전에 함부로 기록하였겠습니까.
그 전거를 모르니 그에 대한 당부는 논할 수 없다. 라 하였든 것입니다.
특히 茶는 본문 陶庵 선유 말씀과 같이 중국인의 기호품이고 우리나라에서는 茶 대신 水(숭늉)을 쓴다. 라 하심과 같이 지난날에 茶는 특수 계층에서 食飮하였을 뿐으로 지금은 보편화 되었지만 유학의 시대에는 거대 국민의 愛飮된 음료가 아니었지요.
따라서 우리나라의 茶 문화가 보편화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요
아래와 같이 국조례를 살펴보아도 朔望 모두 酌酒獻酌하였으니 國禮 역시 속절은 차례가 아니었습니다.
▲國朝喪禮補編俗節(註正朝冬至寒食端午中秋)及朔望親享魂殿儀(註朔望若値別祭則只行別祭)
○又四時臘及俗節(註正朝冬至寒食端午秋夕)朔望享山陵儀
▲國朝五禮儀朔望享文昭殿儀篇贊者曰行初獻禮謁者引獻官升(云云)執尊者酌酒(云云)執事者以盞
授獻官(云云)獻官執盞獻盞(云云)贊者曰行亞獻禮謁者引獻官(云云)執尊者酌酒(云云)獻官執盞獻
盞(云云)贊者曰行終獻禮(云云)行禮並如亞獻儀(云云)
▲弘齋全書咸興永興本宮儀式序(乙卯)歲凡三十二別大祭曰十月四月正朝別小祭二月曰
春節祭(云云)八月曰山祭秋夕祭十一月曰冬節祭冬至茶禮而朔望祭
▲桃花扇媚座篇花花綵轎門前擠不少欠分毫茶禮
▲儀禮經傳通解聘禮鄭注目錄云大問曰聘諸侯相於久無事使卿相問之禮小聘使大夫
周禮曰凡諸侯之邦交歲相問也疏曰下記云久無事則聘焉注云事謂盟會之屬若有事事上相見也
小聘使大夫者下經云小聘曰問其禮如爲介三介是也
▲內則聘則爲妻注問也妻之言齊也以禮聘問則得與夫敵體
유익한 말씀으로 학문을 넓힐 기회가 되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 C
더 이상 反駁文이나 解明文, 그에 대한 전거문이 오르지 않아 아래와 같이 몇몇 우리 [辭典類]에 [茶禮]를 해설한 뜻풀이를 [日本語 辭典]과 비교하여 그 용어가 일반화된 동기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치의 한일합방 이전에는 祭禮에서 大中小祀를 막론하고 茶禮란 용어는 어느 書에서도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으며 다만 東國歲時記(명치 14년 발행 내국인 편저)와 일본어 사전에서 차례(茶禮)의 용어가 제례에서 사용됨이 발견된다.
이를 미루어 보건대 우리 국어사전의 차례(茶禮)에 대한 뜻 풀이는 일본어 사전에 의존되었음을 비교컨대 의심되기에 충분하리라.
일본과 우리는 국민 정서가 다르고 예법이 다르다.
과거 우리의 유학은 중국 본전에 충실 그에 벗어남은 오류로 취급되어 유학에서 제외시켰다.
따라서 차례(茶禮)란 용어를 위와 같이 두루 통용시킨 원인은 쉽게 찾아지리라.
까닭에 유학적으로는 받아드릴 수가 없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까닭에 유학적으로나 국어적으로나 명절(俗節)은 차례(茶禮)가 아님을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본인 역시 사람인지라 오류를 범할 수 있으니 이후라도 그와 같이 정의된 상당한 전거를 누구라도
일본의 전거가 아닌 유학에서 제시하여 주시어 차례(茶禮)가 올바르게 정의 되게끔 협조를 바랍니다.
⊙國語辭典
가). 차례 茶禮 [명사]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
비슷한 말 : 다례ㆍ차사(茶祀).
나). 차례[茶禮] [명]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 또는 명절날 • 조상의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 다례(茶禮)
다). 차례[茶禮] [명] 음력 설날이나 다달이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간단히 음식을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 다례(茶禮)
라). 차례 茶禮 음력 설날에 가묘(家廟)에서 조상의 신위(神位)나 위패(位牌)에 제사지내는 일. 이것은 차를 바치는 것이 아니고, 간략한 제사를 말한다.
그리고 추석날, 매달 초하루나 보름(15일), 또 명절 날 아침에 사당에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행하던 의식도 차례라 한다.
마). [茶禮] 차례. 차사. 음력 매달 초하루 • 보름날이나 명절 때에 지내는 간단한 제사.바). [茶禮]. 다례. 차례. 음력 매달 초하룻날 • 보름날 • 명절날 • 조상의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祭祀. 茶祀.
사). (위 제시 전거) 음력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지내는 제사이다.
⊙日本語 辭典
[茶禮] [名詞] 陰暦いんれきの毎月まいげつ一日ついたち, 十五日じゅうごにち, また民俗的みんぞくてきな節日せちにち及および祖先そせんの誕生日たんじょうびなどに行おこなう簡略かんりゃくな祭祀さいし。〔同義語〕茶禮
△ 이이록
초암 선생의 글을 보고 처음 느낀 감정이 추석에 조상님께 올리는 단헌무축의 제사를 차례라고
5천만 국민이 모두 그렇게 알고 차례라는 이름으로 모시고 있는데 전거에 ‘추석의 禮는 茶禮가 아니다.’라고 한 다음에 또 올린 글에 ‘속절. 절사. 참례’라고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거기에 반론으로 우리나라의 유명 학자들이 그것을 몰라 ‘차례’라고 하였으며 초암 선생께서 올린 전거를 몰라 아무 말도 없었겠느냐는 논지를 폈다.
따라서 ‘추석의 禮는 茶禮가 아니라.’는 선생의 단언적 말씀에 현재 5천만 국민이 ‘차례’라는 어휘에 익숙해서 사용하는 어휘를 어쩌면 추석의 禮를 ‘俗節. 節祀. 參禮’등으로 해야 한다. 는 듯한 의도가 깔려 있는 논지로 읽었다.
성균관은 유학의 본당이다.
거기에 네티즌의 문의에 일일이 전거를 들어 답변을 주는 만큼 그 위치가 무겁고 한마디 말씀이 무게가 있으므로 신중히 주장을 세우는 것이 인정된 선생의 품위에 손상이 가지 않을 것이란 말을 보탰다.
그리고 차례에 대한 다른 내용을 검색하여 올리려다가 이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달되었다 싶어 글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초암선생의 글이 올라왔군요.
[反駁文이나 解明文, 그에 대한 전거문이...]올라오지 않아 글을 올린다면서요.
글쎄요. 겸손한 사람은 절대로 이러한 문장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빼고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싶어 그냥 덧붙여 몇 말씀 더 올립니다.”로 말을 합니다.
이번의 논지는 [한일합방 이전에는 祭禮에서 大中小祀를 막론하고 茶禮란 용어는 어느 書에서도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으며 다만 東國歲時記(명치 14년 발행 내국인 편저)와 일본어 사전에서 차례(茶禮)의 용어가 제례에서 사용됨이 발견된다.]
[우리 국어사전의 차례(茶禮)에 대한 뜻풀이는 일본어 사전에 의존되었음을 비교컨대 의심되기에 충분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국어사전과 일본 사전을 비교하여 보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추측으로 ‘이것과 저것과 결부시켜 비슷하니까 그럴 것이다.’ 라는 논지는 본의 아닌 오해를 낳습니다.
아래 정동주씨의 차문화를 일독해 보시면 일본이 차문화가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일본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茶禮를 일본 것을 모방했는지를 확인할 것입니다.
차례의식은 삼국시대. 가야. 신라. 고려로 전해집니다.
차례의식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면 초암 선생의 ‘추석의 禮는 茶禮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잘못된 논지일 수도 있습니다.
아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차문화의 일반화를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고구려, 신라, 백제의 인민들이 설과 추석 때 조상께 올리는 차례입니다.]
(정동주의 茶禮의 역사)
차례는 차를 달여서 천지신명께 올린 뒤 차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신명께서 내리신 복을 함께
누리며 마시는 의례(儀禮)이며 차를 큰 그릇에 담아 돌아가며 마시는 회음례(回飮禮)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고구려에서 해마다 10월에 행하던 동맹(東盟) 혹은 동명(東明)과 부여의 영고(迎鼓), 예맥의 무천(舞天)을 증거로 들 수 있지요.
고구려시대 옛 무덤에서 전차(錢茶)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차가 부장품으로까지 쓰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다국(句茶國)이란 고구려의 지방 이름을 적어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평안북도 용호동에서 출토된 굴뚝이 달린 이동식 화덕의 존재는 곧 고구려의 차문화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신라의 차문화는 어떤 이유로도 부정할 수가 없지요.
경주 창림사 옛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조각에 새겨진 다연원(茶淵院)이란 글자가 신라시대의 전문화된 찻집을 뜻한다는 해석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안압지에서 출토된 언정영(言貞榮)이라 새겨진 토기 찻사발이나 용왕 찻그릇, 신라 화랑들이 명상 수행했던 한송정의 차화덕 기록들은 신라 사회 전반에 걸쳐 차마시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 같은 차문화의 일반화를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고구려, 신라, 백제의 인민들이 설과 추석 때 조상께 올리는 차례입니다.
국가가 천지신명께 차를 올려 제례의식을 행하고, 인민들은 자기 조상과 농사신, 용왕이나 농사와 관련된 신들께 차로써 의례를 치렀지요.
가야시대의 차 문화 또한 선명한 증거를 남기고 있지요.
가야지방에서 출토된 토기 찻그릇들의 제작 연대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나
김수로왕의 시제(時祭)에 차를 올렸다는 기록, 김해와 언양, 사천지방에 전해오는 인도 아셈지방이 원산지인 차나무의 존재가 그 증거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차문화의 화려한 전성기였지요.
‘고려도경’에 나타나는 차 관련 제도와 문화는 일반 인민들에게 일반화된 것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신라의 충담선사가 경주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해마다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올린 것입니다.
또한 신라 왕실에서 태어난 왕자였던 김교각(金喬覺·696~794년)이 성덕왕 27년이던 728년에
신라에서 흰개, 볍씨, 차의 종자를 가지고 중국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으로 가서 오늘날 저 유명한 금지차의 원류가 되었지요.
이같은 역사적 사실은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매우 수상한 기록인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에 갔던 사신 대렴이 차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 차의 기원이라고 한
기록의 진실성을 부정하게 해줍니다.
삼국사기라는 것이 고려의 신라에 대한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해 중국에의 정치적 의존과 사대주의 목적이 들어있는 역사책임을 알고 보면 이 기록은 이제라도 부정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 기록을 주장하면서 오늘날 중국 차 문화에 경도된 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한국 차 문화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첫댓글 야후 백과사전은 믿을것이못됩니다 윗글에서도 뫼에 십자로 긋고 45도로꼽고 밥3숫가락을 등 현제예법과 동떨어진 해석을 하고 있으며 또한 누구나 백과사전을 수정할수도있으며 글을 올릴수도있습니다 저도 초암선생의 의견에 동의하며 보통 절사로 부르고있으나 현제 대부분이 차례로 부르고있으니 시류에 따르고있습니다 또하나 우리나라에서 정월초하루 절사를 지내는것은 100년정도밖에 안된전통입니다 옛날 4시제에도 들어가지않았으며 고종황제의 칭제시기에 建陽연호를 쓰며 음력을 폐기할때 그에대한 반발로 음력을 지키기위한 방편으로 설날절사를 시작한걸로 알고있습니다
민희 종친님! 우리나라에서 정월초하루에 절사를 지내는것은 100년 정도 밖에 안된 전통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윗글의 내용을 보시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개화기를 자꾸 강조하시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역사의 왜곡된 부분입니다......그리고 일제시대 운운하는 것도 아주 잘못된 역사관이십니다......우리 동이족 계열의 조상숭배뿐만 아니라 자연신과 천신을 모시는 고유 풍습들이 하/상/은/주나라까지 수천년을 망라합니다..... 개인적인 측면보다는 문헌을 근거해서 올려주세요^^ 차례가 100년 전부터 지내왔다는 말이 경주이씨가문에서 나온다는 말씀이 참 안타깝습니다......
제사는 벌써 그 원시적인 의의를 떠나서도 숭고한 도덕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이말은 <禮記> 제통편에서 볼수 있는데 "祭者所以追養繼孝也孝者畜也順於道不逆於倫" 이라 했다. 이 내용을 종합하면 공양을 생존중에 다한 효도의 연장이라고 본 것이다. 곧 제사는 그 敬愛謝恩의 정을 표기하는 형식에 不外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상숭배는 父祖에 대한 효심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냥일반적인 제사가아니라 정월초하루날 제사지내는것을 말합니다 정월초하루날 제사모심이 100년밖에 안되었다고 제가주장을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반론자가 오랜전통을이어온 풍습인것을 근거를 제시하셔야지 어찌 주장자에게 근거제시를 요구하시는지요?
종친님 차근차근 올리겠습니다. 길제와 흉제를 말하는데 상중의 제사는 흉제라고 말한다. 3년상을 마치고도 해마다 삭망에 전하고 오곡백과가 숙하면 곧 천신전하고 시식에는 언제나 상식함을 예로 한다고 했다. 그래서 조선조 숙종때에서는 박세당이 이러한 번거로움에 대해 상소를 올리자 불경하다고 삭탈관직은 물론 仕版을 削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文公家禮>에서도 사시제에 관한 기록에는 춘하추동에 당에 삼가 봉사된 祖靈을 위해 동지에는 始祖를 제사하고 입춘에는 先祖를 제사하고, 계추에는 示+爾/이를 祭祀한다고 했다. 그 또한 시제와 다르지 않는데 간혹은 이제/示+爾祭를 행함에 先考의 生辰까지도 茶禮에 代한다고 했다.
제가 원조절사가 100년정도라고 주장한근거는 이미 읽어보셨으라라고생각합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검색해보시면 인터넷에 내용이 있을것입니다 제가주장하는근거는 老石 呂九淵[1865-1938] 老石集입니다
제례에서 가장 중요시 했던 것이 기제였다. 기제는 선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조고비의 기일에 행하는 제사였다. <가례>에서는 기일에만 행하는 것이 기제사였으나 인정에 이끌려서 매월 正朔/ 상원/한식/삼진/단오/유두/추석/중양/의 절사를 빠짐없이 행하여 졌다고 하고 있다. 회재 또한 사계와 마찬가지로 이를 취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묘제까지 겸하는 수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묘제는 그 연원이 매우 오랜데 왕실에 한하여 종묘라고 일렀고, 사유에 있어서는 가묘라 칭하였다. 특히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서인의 입묘를 借禮라 하여 금지한 것은 없었지만 사당을 갖는것은 사유계급에 국한되었고..
.....일반인들은 住家內의 사당방 또는 대청으로써 대행함을 통례로 한다고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당의 규묘를 <문공가례>에서 보면 삼간오가로서 同堂異室의 제를 취하였다. 더하여 상세한 가옥구조까지를 겸하여 밝히고 있다. 문헌 자료와 참고 자료가 이렇게 많고 관련서적들이 일관성있게 간단명료하게 있어도..... 단지 예서를 펼쳐보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일관된 잣대로 말씀하시면 안될것 같아 댓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는 개인의 자료정리이기도 하지만 많게는 경리 120 여만명의 지식의 수단으로 여기신다면 충분한 사료가 뒷받침 되어야 함을 다시 밝혀 둡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설날과 추석에 조상님께 올리는 제사를 옛적부터 차례라고 합니다. 한식과 중구절에도 차례라고 하는 줄로 압니다. 추석을 차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추석의 禮를 차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추석은 추석절. 한가위. 가배. 팔월대보름이지요. 이때 조상님께 올리는 단헌무축의 제사를 차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절사라는 말로도 쓰입니다.
민희 종친님. 한 부분을 두고 전체같이 말씀하시면 안되지요. 그래도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야후나 위키나 네이브 사전인데 이것을 믿을 것이 못된다라고 하시면 곤란하지요. 이를 참고로 하는 사람은 모두 엉터리라는 뜻이 아닙니까? 추석의 예는 차례가 아니다라는 주장에 반론을 펼친 것입니다. 논지는 각자의 주장이 있으니 거기에 따르면 됩니다. 백과 사전이 잘못 된 것이 많으면 두번째 올린 정동주 선생의 '차례의 역사'는 어떠하지요? '추석의 예는 차례가 맞다.'는 것을 근거로 올린 것입니다.
茶禮의 역사가 오래되고 옛전통이라면 茶나무가또한 많아야합니다 왕실에서나 민가에서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는 어디에서 차를 구해서 올렸을까요 지금현제 구례 함평 익산 변산 금산등에 일부존재하며 멸종위기입니다 신라때부터라면 2000년동안 애용해왔는데 제배는없고 모두 야생종입다 재배는 일제시기이후입니다
고유의 풍습은 꼭 한시적으로 보시면 안될것 같습니다. 예를들면 지금 우리나라는 석유 한빵울 안나도 석유 수출국입니다..... 물론 동해안 울산 앞바다에 GAS 층의 시추로 경남과 울산지방에서 가정용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십수년 전부터는 산유국들과 통상하며 석유를 공동시추하여 일정량의 지분을 동해바다를 통해 들여와 정제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를 상대적 비교를 하는것이 아니라 문화는 큰시류를 따를 수 밖에 없는것이 문화의 이동경로이자 인류의 역사입니다. 예를 포함한 관혼상제들도 또한 마찬가지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수많은 茶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책이나 문헌에서는 하나같이 강조하기를 "차를 마시면 잠이 달아나고 온갖 정신이 맑아 진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유추해 보면 제례에서 술로서 산자와 죽은자가 서로를 교감하고 신기를 감응했다면 반면에 茶禮나 獻茶는 혼령들의 정신을 맑게 한다는 의미도 담겨져 있지나 않을까 생각듭니다. 그리고 <天台山記>에서는 차를 오랫동안 마시면 날개가 생긴다고 했으며, 그후에는 몸이 가벼워서 날아다닐 수 있게 하는 의미와 같이 혼령들의 영역을 편하게 하는 의미도 있지않을까 추측 해봅니다. 지금도 석전대제시 대성전에서는 종헌을 마치고 헌다례를 반드시 하고 있습니다.
민희 종친님이 알고 계시는 차의 역사와 인터넷과 책자에 의한 차의 역사는 차이가 납니다. 단편적인 이야기로 귀족층의 차의 수탈로 영조이 차대신 물로 바꾸어 제사에 올리도록했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한 때 차문화가 번성했음을 알 수 있고 그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니까 영조(?)께서 차대신 물이라는 특단의 조처를 강구한 것이 아닐까요?
녜 아직 제가 본 문헌이나 열람해 본 자료로는 그런 내용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 내용아래 참고해 보세요 라는 글에 음운학적인 면에서 문제의 답이 있을것 같아서 중국의 음운학 자료를 찾아 보고 있습니다. 물론 동국정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차피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우리 종친님들과 함께 의견을 교환하고 수렴하고.... 차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듯하여 여가나 짬이 나면 관련서적들을 읽고 찾아보고 있습니다.
차의 효용에 대해서는 <오흥기>에 차를 마시면 취기가 꺠고 졸립지 않게 된다, <광아>에서는 잠은 만병의 근원이다. <본초>에서도 수면을 적게하고 갈증을 없애고, <식론>에서는 차를 오랫동안 마시면 기력이 증진되고, <천부>차는 정신을 안정시키고 편안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차의 효용이라면... 술의 생리는 사람이 술을 마시면 반드시 목이 마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혼백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를 유추해 본다면 제사나 많은 제례에서 음식과 술을 편하게 흠향하시고 종헌을 마친연후에 다례를 올린 것이 아니였을까!....종일도록 많은 예서를 보면서 느낀 저의 생각입니다.
그간 두 분이 의견을 많이 교환했네요. C 라고 가명을 섰는데 민희 종친님이 초암 선생이라고 알아버렸네요. 실은 성균관 홈페이지에서 초암 선생이 [추석의 禮는 茶禮가 아니다]라는 논지로 글을 올렸기에 5천만 민족이 차례라고 알고 있고 유명 한학자. 유명 학자 유명 교수. 유명 유학자도 이를 인정하고 추석 때 조상님께 단잔무축축으로 올리는 제사를 차례라고 하는데 이런 글을 올린다는 것은 잘못 알고 있다고 첫 번째. 두번째까지 성균관 홈피 답변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기에 점잖게 말을 하면서 할 말은 있지만 그 다음은 댓글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올라온 초암 선생의 처음 서두가 댓글을 기다렸다는 식으로 '반박문. 해명문. 그에 대한 전거문이 올라오지 않아 글을 올린다.'는 오만한 글을 보고 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세 번째 반론을 폈습니다. 정동주님의 '차례의 역사'를 올려 드렸지요. 한글로 쓴 글이지만 고전. 역사서를 위주로 쓴 글입니다. 추석의 예는 옛날부터 차례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그랬더니 원형이정님께서 초암선생이 그토록 원하던 한문 전거 사례 하나를 찾아 올려 주셨네요. 결국 우리 선조 지식인들은 추석의 예를 차례라고 하엿고 우리들은 그것을 전래 받아 차례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자를 처 올리니까 다른 내용밑에 가서 나타납니다. 올린 댓글에 답한 댓글이 내용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민희 종친님께서 야후 백과사전은 믿을 것이 못된다면서 예를 든 것이 [올린 메에 +자 모양의 자국을 낸 후 45도 각도로 꽂고 일동이 재배한다.국을 내리고 숭늉을 올린후에 숭늉에 밥 3숟가락을 만다.]의 예법을 말하는 것 같은데 숭늉을 갱과 바꾼 후 밥3숟가락을 물에 마는 예법은 종전까지 어느집안에서나 행사는 의식이고 숟가락을 45도로 각도로 메에 꽂는 것은 조상신이 숟가락을 잡기 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직각으로 꽂으나 45도로 꽂는 집안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가례입니다. 단 메에 +자모양으로 자국을 내는 이유는 알지 못하겠네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 자국을 내는 것도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요
종친님^^ 그 이유는? 아랫글을 참고 하세요^^
윗글은 추석차례에대한 내용입니다 추석차례에 떡국을 안올리고 밥을올리나요? 아니면 떡국에 삽시를 합니까?
또 차남이 아헌을 하고등 백과사전내용 앞뒤가 서로맞지않습니다 무축단헌이라해놓고 다음에은 아헌운운하고 떡국을 올린다고해놓고 삽시운운등 여로곳이 오류투성이입니다
민희 종친님? 추석차례에 떡국 올린다는 얘기는 또 어디서 나온 얘기 입니까? <논어>에서 예를 사용함에는 조화가 가장 중요하다라고 했습니다. 곧 예는 생활양식에 맞게 조화로움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예란 인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만 특히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예는 철저하게 역사적인 구습을 근본 바탕으로 합니다. 특히 관혼상제가운데 제레에 대해서는 기제와 묘제를 포함한 사시제에 관해서는 반드시 그 예의 참뜻과 홀기의 과정을 몰라 조상들을 모독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송나라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역신은 수레에서 내려 차나무에 예의를 표한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본초습유>에서 목마름을 멈추고 역병을 없앤다. 라고 쓰여 있다. 차는 얼마나 귀한것인가?. 위로는 신령들과 여러 하늘의 신들의 경계와 통하고 아래로는 포식하여 침해된 사람들을 구한다 라고 적고 있다 . <本草拾遺> 에 이르기를 "宋人歌云 疫神捨駕 禮茶木 是故本草拾遺云 止渴除疫 云云 貴哉茶乎 上通神靈諸天界 下資飽食侵害之人倫矣..."이런 문헌을 볼때 "茶/차"는 이미 제례를 통해서 신들과 동기교감을 이루는 음식으로 오래전 부터 음용하고 또한 전해 옴을 알수 있는 자료이다.
오늘 날에는 떡국은 설날 차례에 올리고 추석에는 송편을 올립니다. 밥을 올려도 상관없습니다. 추석 차례는 속절에 속하니까 축문이 없고 한잔 술을 올리고 일동 재배로 끝난다고 하나 이에 제사 절차를 더하는 이유는 일부 사람들은 가가례로서 제사 절차를 더하거나 어떤 책에 보면 절사의 제사는 기제사에 준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에 준하다보니 기제사와 같이 초아종헌도 하고 술도 여러 잔 올리며 삽시정저도 하는 것입니다. 본래 추석 차례는 단헌무축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