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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0 웨슬리회심기념주일 - 충만교회 민창근 목사
롬 3:21-28 / 존 웨슬리의 생애와 4가지 회심
(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오늘은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회심 269주년을 맞는 주일이다.
그래서 존 웨슬리의 생애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경험한 4가지의 회심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려 한다.
*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생애 (1703-1791)
웨슬리는 전도자, 신학자, 그리고 사회 개혁자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웨슬리의 이러한 세 면과 관련된 중요한 사항을 초반기, 중반기, 그리고 후반기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한다.
제1장 웨슬리의 학창시절부터 사제가 되기까지 (1703-1728)
1. 엡워쓰(Epworth)의 웨슬리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의 동부지역인 링컨(Lincoln)주(州)의 조그만 마을 엡워쓰의 한 영국 국교회 사제관에서 사무엘(Samuel)과 수산나(Susanna)의 열 아홉 명의 자녀 중, 열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추가)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증조할아버지도 목사였습니다. 이런 뼈대있는 집안에서 19명의 자녀 중에 15번째 아이요 아들로는 두 번째로 태어났지만 그의 가정은 급속도로 늘어나는 아이들로 인하여 항상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해에는 통털어 6실링밖에 없는 판국에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열 명은 어려서 죽고 여섯 명의 딸은 뛰어난 교육을 받았으나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난 이유로 평범한 사람들과 결혼했다. 세 아들 사무엘, 존, 챨스는 모두 목사가 되었다. 존 웨슬리는 15번째이며, 찬송가 작가이고 존의 동반자가 되었던 챨스는 18번째 였다.
웨슬리가 태어난 영국은 당시 국교도 즉 지금의 성공회와 청교도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뒤숭숭하였고 게다가 산업혁명이 끼친 사회혼란 등으로 술취함, 싸움질, 도박, 도적질, 자살 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도리어 미신처럼 여겨지고 각처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사람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들 배를 채우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시대는 희망이 안보이고 더욱 암울해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진리를 전파할 시대의 등불로 존 웨슬리를 예비하고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예) 악한 아합왕 시대 - 여호와 신앙 세우는 엘리야
존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은 성실한 목회자였고, 신앙심이 많았던 어머니 수산나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 웨슬리와 엄격한 가정교사로서의 어머니는 철저히 청교도적이어서 근면, 검소, 정직 등의 덕목을 매우 중시하였다. 특별히 수산나는 식당을 교실 삼아 어린 자녀들에게 기도문과 원어성경 그리고 일반과목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청교도들이 힘주어 강조한 대로, 자녀들의 의지가 부모와 하나님 앞에서 전폭적으로 굴복되어야함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11살이 될 때까지 이러한 부모의 영향아래서 보내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인생 전체의 기틀이 되었다.
웨슬리가 6세 되던 1709년에 원인불명의 화재(불량배들의 공격일 것)로 목사관이 한밤중에 전소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웨슬리는 화염에서 구사일생으로 건짐을 받게되었으며, 이것은 웨슬리의 가슴속에 항상 남게 되었다. 그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기 자신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슥 3:2)라고 하였다. 어머니 수산나는 이 화재사건에서 구원을 받은 웨슬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웨슬리 스스로도 이 사건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2. 웨슬리의 학창 시절(1714 - 1724)
웨슬리는 11살 때인 1714년에 당시의 명문 챠터하우스(Charterhouse)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정든 고향을 떠나 런던(Lodon)으로 갔다. 웨슬리는 어머니이며 가정교사였었던 수산나를 통해 익힌 기초과정 위에 중등과정의 학문을 이곳에서 연마하였다. 고전 문학을 배웠으며 특별히 라틴어 시와 문학을 즐겼다.
웨슬리는 만 17세인 1720년에 챠터하우스 졸업한 후 우수 장학생으로 옥스포드(Oxford) 대학교의 인문계열의 대학인 크라이스트 쳐치 칼리지(Christ Church College))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챠터하우스에서 처럼 고전문학과 라틴어 시를 폭넓게 공부할 뿐만 아니라 희랍어 성서를 연구하고 여러 분야의 신학서적을 탐독하였다. 나아가 셰익스피어, 밀턴, 스펜서 등의 문학서적을 읽고 물리서적도 가까이 하였다. 웨슬리는 1724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고 그 대학을 졸업하였다.
(추가) "그런데 신앙적으로는 이 기간이 문제가 있었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 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존 웨슬리는 11살 때 런던에 있던 챠터하우스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갑자기 엄격하게 다스리면서 가르쳐주셨던 부모님이 안 계시자 자연히 신앙생활이 게을러지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그의 생애 중에 가장 신앙적으로 잠들어 있던 시기였다고 그는 후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차터하우스에 들어갈 때는 성자였으나 나올 때는 시커먼 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1720년 초여름 챠터하우스 학교를 마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도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뜻밖에 숨이 막힐 지경으로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 후에는 목구멍에서 직접 입으로 피를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밤마다 계속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육신이 쇠약해진데다가 극심한 궁핍을 겪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깨닫고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그의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회개하고 목사가 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하루 2시간씩 구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고 영적인 진보와 실천적인 삶을 위해 나름대로 20가지의 규칙을 정해놓고 투쟁하였습니다."
3. 링컨 대학 연구원과 엡워쓰의 부사제로서 웨슬리(1724 - 1728)
옥스포드 대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더 공부한 후에 안수를 준비하도록 권했으나, 어머니 수산나는 가능한 한 속히 안수를 받도록 권장하였다. 교회의 사역에 관심이 있었던 웨슬리는 옥스포드 대학교 교구감독 (Bishop)에 의한 사제 안수 고사(examinations for ordination)를 위하여 소정의 과목을 진지하게 공부하며 준비하였다.
특별히 17세기의 고교회주의자들(the high churchmen)과 교부 신학서적을 탐독하였으며,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교회 직제를 이때부터 그리스도인의 행동지침으로 삼게 되었다. 웨슬리는 마침내 1725년 9월에 옥스포드 감독에 의하여 서리 사제(deacon) 안수를 받고 그 주일에 첫 설교를 하였다.
웨슬리는 옥스포드 대학교 졸업 이후에 그의 신학 훈련과 신앙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신비주의적인 서적들을 읽게 되었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범과 실천(Rules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Dying),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mitatio Christi), 윌리암 로(William Law)의 기독자의 완전 (Christian Perfection)과 경건한 부름 (Serious Call)등의 서적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웨슬리는 매일 일기를 쓰면서 시간 사용을 비롯한 모든 면에 엄격한 생활을 하였으며, 성경을 읽을 뿐만 구체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안수를 받은 웨슬리는 링컨 대학 연구원 (Fellow)으로 일하다가 소정의 시험을 통과하여 1726년 3월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1727년부터 엡워쓰에서 목회하는 아버지를 돕던 가운데 포터(Potter) 감독에게 사제(priest)안수를 1728년에 받았다.
(추가) "22세의 나이로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3년 후 마침내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날 웨슬리는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쏟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의 설교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설교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후 잠시 아버지 사무엘 목사를 대신하여 고향에서 설교하였는데 그의 설교는 역시 신통치 못하여 신자들은 또 졸기 시작하였습니다."
제2장 신성클럽과 선교사 시절과 웨슬리의 회심 (1729-1738)
1. 신성클럽(holy club)의 지도자 웨슬리 (1729 - 1735)
웨슬리는 링컨 대학의 부름을 받아 강의를 하기 위하여 1729년에 엡워쓰를 떠나 옥스포드로 되돌아 왔다. 이때 동생 챨스를 중심으로 소수의 학생들이 학문과 경건의 훈련을 위하여 신성클럽을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었다.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기에 전념하며, 성만찬 예배를 중요시하는 모임이었으며, 웨슬리는 자연스럽게 이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감옥을 방문하여 죄수들이 필요로 하는 음식과 의복을 공급하고 그들이 진 부채를 갚아 주기도 하였다. 또 죄수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한 교육프로그램도 만들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시내 거주자의 자녀들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옥스포드 주변의 공장과 작업장을 찾아가서 그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돕기도 하였다.
또한 신성구락부는 초대교회의 신학을 연구하며 성만찬 예배와 금식기도 등의 경건 훈련에 전념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규칙적이고 엄격한 생활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규칙주의자들(Methodists)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것이 감리교회의 명칭이 되었다.
2. 선교사 웨슬리 (1735 - 1737)
웨슬리는 신대륙의 조지아(Georgia) 주에서 선교사역을 하기 위하여 1735년 10월에 런던을 떠났다. 대서양을 횡단하던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하기 약 10일전인 1736년 1월 25일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때 그와는 달리 평안한 가운데 기도와 찬송을 하는 무리가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그들은 영국을 출발할 때부터 함께 하였던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이었다. 웨슬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최초로 발견하였으며, 동시에 그와는 달리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로부터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독일의 루터 전통의 경건주의 생활을 주장하는 이들로서, 독일을 떠나 웨슬리처럼 조지아 주로 가고 있었다. 웨슬리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들 안에 있는 깊은 신앙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들이 신학적으로는 영국국교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1736년 2월 6일에 미국에 첫 발을 내디뎠으며, 조지아주의 사반나(Savannah)촌락에 도착한 웨슬리는 그 곳 사람들에게 무도회를 금하고, 여인들은 사치를 금하는 등, 엄격한 신앙 생활을 강조하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서 두 가지 문제로 마음에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믿음(확신)의 문제였고, 또 하나는 한 여인과의 사랑에 관한 문제였다.
웨슬리는 소피 합키(Sophy Hopkey)라는 여인에게 청혼할 정도로 연심을 가졌으나 그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할 때, 합키는 윌리암슨(Williamson)과 결혼을 하였다. 웨슬리는 이들이 결혼하기 전에 사반나의 담당 사제인 자신에게 사전통보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이 나태해졌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이 성만찬에 참예하지 못하게 하였다.
합키와 윌리암슨은 자신들이 웨슬리에게 모욕을 받았으며, 웨슬리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법정에 고소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것이 사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라고 항변하였으며, 배심원들도 그의 입장을 충분히 변호하였으나, 상황은 악화되어 마침내 웨슬리는 1737년 12월 22일에 챨스타운(Charlestown)에서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3. 웨슬리의 회심(1738)
1738년 2월 1일에 영국에 도착한 웨슬리는 심신이 매우 피곤하였다. 미래가 불확실하였다. 링컨 대학에서 가르치며 신성구락부 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으나 깊은 좌절에 빠진 그에게 있어서는 믿음과 구원의 문제가 절박하였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던 웨슬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던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1738년 5월 24일 오후 8시 45분쯤 런던 시내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거리에 있는 교회에서 한 예배 사회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도중 웨슬리는 구원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날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올더스케잇 거리로 가서 한 신도 모임에 참석하였다.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45분 경,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변화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을 때, 이상하게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신이 생겼는데,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으며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하셨다는 확신이었다."
존 웨슬리는 그 길로 동생 챨스(Charles)를 찾아가 "나는 믿는다."라고 외쳤다.
제3장 웨슬리의 전도 운동 (1739-1751)
1. 브리스톨(Bristol) 집회
(추가) "계속해서 그는 같은 해(1738년) 10월 9일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1703-1758)가 쓴 『노스햄튼 대부흥운동사』라는 책을 읽으면서, 거듭나게 하신 성령의 역사는 거듭날 뿐 아니라 그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은혜를 갈구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 31일 밤 페터레인 집회소에서 기도하다가, 같은 날 밤인 1739년 1월 1일 새벽 3시경에 웨슬리는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로 바닥에 쓰러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위로부터의 능력의 입히움’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아들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 수 있는 실력을 얻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738년 그는 '올더스게이트사건'이라 불리는 가슴이 타오르는 뜨거운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 이때부터 무서운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맨 처음 설교는 옥스퍼드대학생들 앞에서 하였습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설교내용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은 가슴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였습니다.
뉴게이트의 감옥에서도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죄수 앞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웨슬리가 크게 믿음의 구원을 외치자 여기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그의 말은 칼날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박혀들고 많은 나무를 태우는 뜨거운 불길과 같았습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목사들이 웨슬리에게 비웃으며 구원이 믿음으로만 된다면 교회제도나 성찬식은 쓸데없는가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존 웨슬리를 비방하는 근본 이유는 실제 존 웨슬리가 교회의 사치와 목사들의 타락을 사정없이 후려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존 웨슬리의 모든 교회에서의 설교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더 큰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 화이트필드의 도움으로 그는 킹스우드 지방 광부들에게 교회대신 넓은 언덕에서 즉석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그대로 불덩어리였습니다.
막혔던 화산이 터져 오르듯이 그의 입에선 불덩어리가 뿜어 나왔습니다. 처음 모인 사람들이 200명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5번째 설교할 때는 그곳에 1만 명이 훨씬 넘었고 다음엔 1만 8천명이 몰려왔습니다. 그때부터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이 설교를 사방에서 요청해 왔습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2만 명이 넘는 숫자가 가득 집회장을 메우기도 하였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1739년11월 11일 그는 낯선 두 신사의 기증으로 대포공장을 개조하여 훌륭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을 사람을 살리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으로 만들어 이곳을 중심으로 감리교단이 성장하였습니다. 모이는 사람이 점점 늘자 웨슬리는 그 많은 사람을 다 돌볼 수 없어 구역마다 '속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일을 나누어 맡겼습니다.
이런 조직적인 체계를 이루자 그후에는 사람이 아무리 늘어도 빈틈없이 착착 모임이 커가게 되었고 이 무렵 비로소 '감리교도'라는 말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도를 이끌며 무엇보다도 신자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며 설교하였습니다.
모임이 더욱 커지자 국교회에서는 깡패를 동원하여 핍박을 본격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모임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웨슬리를 납치한 깡패들은 '이 자식! 너 말씀 전할래, 안 전할래'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말씀을 전함으로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웨슬리가 대중의 지도자요 설교자가 되는 전초전은 브리스톨에서 1739년 4월 2일에 행한 옥외설교였다. 이사야 61장 1절을 본문으로 한 옥외설교는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그 이후 그는 순회전도자로서 마상(馬上)여행을 시작하였고, 가는 곳마다 날씨에 관계없이 몰려든 무리들은 회개와 회심의 변화를 갖게 되었다.
웨슬리는 소그룹 모임을 만들었으며, 1739년 6월에는 땅을 구입하여 뉴 룸(the New Room)이라는 건물을 신축하였다. 순회설교를 통한 회심자가 늘어감에 따라 영국국교회의 교구 목사들은 웨슬리의 그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자신은 옥스포드 대학 교수로서 어느 특정교구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안수를 받은 제일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면서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항변하였다. 옥스포드의 신성구락부원들이 옥스포드 감옥소의 죄수들과 그 자녀들 그리고 빈민가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였듯이, 브리스톨의 집회가 활발하여짐에 따라 광부들의 자녀와 노년들을 위하여 킹스우드(Kingswood)에 학교를 세웠다.
2.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결별
브리스톨을 중심으로 신앙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때 런던에서는 웨슬리가 원하지 않는 분열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모라비안 교도들과 웨슬리가 함께 시작한 훼터레인(Fetterlane)의 무리들이 모라비안 설교자 몰터(Molther)의 극단적인 정적주의(Quietism or Stillness)를 추종하게 되자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과 결별하게 되었다.
화운더리(Foundery)모임이 런던에서 출범되었고 웨슬리의 독자적인 신앙 운동이 출범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모든 신도들에게 일종의 회원증과 같은 표(ticket)를 부여하였다. 신도 연합회(United Societies)를 조직하고, 그 구성원들은 다시 소집회(band, class meeting)로 나누어 신앙훈련을 강화하였다.
3. 반대와 비난과 박해
웨슬리의 신앙운동이 평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웨슬리가 어느 해 신년 첫날에 엡워쓰에 갔을 때 그곳의 목사 로밀리(Romilly)에 의하여 성만찬 예배참석을 거부당하였다. 그는 선친의 묘비에서 설교를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는 영국국교의 가르침에 충실하였으나 그의 행보는 당시의 보수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친근감을 표시하는 감독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웨슬리의 옥외설교와 평신도 설교자들의 사역에 대하여는 분명히 부정적인 반응을 표시하였다.
특히 대부분의 교구 사제들은 웨슬리의 신앙 운동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웨슬리는 그들의 신자들을 회유하여서 불법적인 집회를 가지며, 이로 인하여 자신들의 목회가 실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웨슬리에게 설교할 기회를 일체 주지 않았다. 웨슬리의 설교는 믿음에 의한 구원, 구원의 확신, 온전한 성결 체험, 죄로부터의 자유 등이 골격을 이루었으며, 영국 성직자들에게는 이러한 신학이 행위를 무시하고 감정적인 신앙을 부추긴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웨슬리의 신도들을 "광신주의" 혹은 "반 도덕주의" 라고 몰아 부쳐 반대하였다.
영국교회의 성직자들의 반대 못지 않게 웨슬리의 신앙운동을 괴롭힌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웨슬리와 순회전도자들이 설교할 때 나타나 설교를 못하도록 소동을 피웠다. 심한 경우에는 성난 소를 설교단상 방향으로 몰아 부치기도 하였다. 이들은 웨슬리의 죄를 꾸짖는 설교를 싫어하였고 자신들의 생활이 방해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웨슬리의 설교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웨슬리의 신앙운동은 더욱 활성화되고 일반화됨에 따라 이들의 반대소동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1747년경에는 전국에서 폭도들의 소요를 단 한 차례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웨슬리와 그의 신앙운동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노골적인 반대도 수그러들었다.
제4장 연회 조직과 웨슬리의 사회운동 (1751 - 1791)
1. 평신도 설교자의 활동
웨슬리 생애의 마지막 40년간은 그의 신앙운동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뿐만 아니라 확장하는 기간이었다. 웨슬리의 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던 여러 이유가운데 하나는 평신도 순회전도자들의 활약이었다. 웨슬리는 그들을 직접 선발하고 임명하였으며 신앙적인 훈련과 더불어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이었고, 지적으로도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었다. 때문에, 웨슬리는 그들이 성서 읽기와 기도생활에 전념할 뿐만 아니라 하루에 최소 5-6 시간 책을 읽도록 강조하였다. 이들은 1751년에 68명이었으나 1784년에는 192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훗날 영국 국교회와 비 국교회의 성직자가 되었다. 이들 중에는 웨슬리를 떠난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웨슬리와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떠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웨슬리의 끊임없는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 신도회와 연회의 조직
웨슬리 신앙운동의 최고의 행정조직체는 설교자들로 구성된 연회(年會)였다. 1744년 6월 25일부터 6일간 런던 화운드리에서 조직된 이래 웨슬리의 주도 아래 신학적인 확립과 설교자 임명과 파송 등에 관한 제반 사항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1751년에 웨슬리 형제는 설교자들이 갖추어야 할 7가지 사항(이해력, 기억력, 성서와 희랍어와 철학 등에 관한 지식, 사고력, 상식, 양육, 음악성과 설교 전달법)을 작성하였다.
웨슬리 운동의 조직은 대도시에 연합신도회(United Society)가 있고, 이것은 속회(Class meeting)로 나누어지고, 속회는 다시 소그룹(band)으로 나누어졌다. 1742년 2월 15일, 브리스톨에서 시작된 속회에서는 회원들의 상호 신앙상태를 점검하며 권면하였고, 필요할 때는 연합회 활동을 위한 헌금을 하였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소그룹 지도자가 먼저 자신의 최근의 삶을 고백하고 돌아가면서 어떻게 승리하고 실패하였는지를 말하게 하였다. 이들의 모임이 기본적으로는 신앙의 권면을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친교도 도모하였다. 세속적인 오락행위는 없었지만 차를 나누고 담소하며 생활품을 필요에 따라 나누기도 하였다. 환자들을 심방하고 가난한 자들의 궁핍함을 살폈다.
3. 후계자 문제
웨슬리가 노년에 접어들면서 후계자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지만, 그의 사후의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생 챨스는 세월이 흐를수록 웨슬리와 그의 신앙운동에 대하여 형과 다른 견해를 갖게되고, 신학노선에도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웨슬리는 1773년에 존 훌레쳐(John Fletcher)를 후계자로 택하였으나, 겸손한 그는 이를 사양하였다. 더욱이 건강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던 그는 웨슬리 보다 6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력한 다른 한 사람은 토마스 콕(Thomas Coke)이었다. 콕은 원래 영국교회의 신부였으나 웨슬리의 신앙운동에 깊이 관여함에 따라 1776년에 영국 국교회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는 1784년에 신생독립국 미국으로 떠나게 됨에 따라 미국에서 감리교 운동을 계속하게 되었다.
4. 안수문제
1783년에 미국의 독립전쟁이 종결될 즈음에, 미국에서의 웨슬리 신앙운동의 신도들은 애즈베리(Asbury)를 통하여 성례전을 집례할 수 있는 성직자를 파송할 것을 급히 요청하였다. 독립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영국교회의 성직자들은 모두 영국이나 캐나다로 돌아가고, 애즈베리를 제외한 모든 순회전도자들도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미국의 신도들이 세례나 성만찬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음을 알게 된 웨슬리는 런던 감독에게 그들에게 성례를 베풀 수 있는 성직자들을 파송할 것을 요청하였다. 런던감독은 웨슬리에게는 개인적으로 친근하게 대해 주었지만, 그의 요청을 당시의 영국과 미국의 민감한 정치적 상황에서는 수락할 수 없었다.
미국의 상황이 급박하여 짐에 따라 웨슬리는 토마스 콕(Thomas Coke)을 감독(superintendent)으로 임명하고, 리차드 홧코우트(Richard Whatcoat)와 토마스 베이지(Thomas Vazey)를 목사(Elders)로 1784년 10월 연회에서 안수하였다.
이 세 사람은 11월 3일에 미국에 도착하였고 같은 해 12월 25일에 미국동부의 발티모어(Baltimore)에서 열린 연회(年會)에 참석하였다. 이틀 뒤인 27일에 토마스 콕은 애즈베리를 감독(Superintendent)으로 안수하고 여러 사람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이 문제로 웨슬리는 영국국교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생으로부터도 질책을 받았다. 웨슬리의 안수행위는 영국교회로부터 이탈하려는 시도로 해석되었기 때문이었다.
5. 웨슬리의 사회운동
웨슬리는 정치적으로 항상 보수주의자로서 부모와 함께 왕권을 지지하는 토리(Tory)당의 정치철학을 초지일관 견지하였다. 영국이 프랑스와 7년 전쟁을 치루는 기간에는 지원병을 모집하는데 적극협력하기도 하였고, 영국 헌법이 자유를 보증하는 가장 우수한 법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영국의 사회와 경제의 문제에 있어서는 예리한 비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예언자적인 자세로 사회와 경제 부조리의 원인을 지적하고 해결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밀을 부유한 자들의 말먹이와 술을 빚는데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작업장을 만들고 직업을 창출하였다.
옥스포드의 신성구락부 때부터 행한 감옥 방문과 킹스우드 학교를 통한 가난한자들에 대한 관심은 노인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웨슬리는 노예 해방을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노예제도를 "모든 사악함의 총합체"라고 규탄하였고, 1788년에는 노예시장의 중심지인 브리스티오(Bristio)에서 노예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설교를 하였다. 웨슬리는 1791년 2월 24일에 당시의 저명한 정치인 윌리암 윌버훠스(William Wilberforce)에게 편지를 보내 노예폐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강한 어조로 권면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나가시오. 인류의 역사가 태양을 본 이래 가장 사악한 악(惡)인 노예제도가 영국과 미국에서 사라질 때까지 투쟁하시오!"
결 론
웨슬리의 초기는 영향을 받던 시기였다. 부모로부터 종교와 정치와 삶의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것은 일생을 통하여 계속되었다. 일생을 거쳐 영국국교회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는 일생동안 영국국교회의 신부로 남아있었고, 그의 신도들이 영국국교회로부터 분리하기를 주장할 때마나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왕권지지의 토리주의자였으며, 생활은 철저한 청교도주의자가 된 것도 부모의 영향이었다.
옥스포드에서 졸업한 직후에 읽은 신비주의적 신학자들의 글도 그의 일생전체에 걸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을 섬기되 한 마음을 품고 전폭적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거룩한 삶, 곧 "그리스도의 완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웨슬리의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만남은 그가 지금까지 받은 이론적인 신학과 성서의 가르침이 개인적인 체험으로 실제화 되게끔 하였다.
몇 가지 신학적인 견해차이로 모라비안 교도들과 결별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믿음에 의한 구원 체험, 성령의 내적인 증거, 소그룹을 통한 신앙 훈련 등은 웨슬리의 신앙운동의 골격이 되었다.
중반기와 후반기의 웨슬리는 초반에 받은 영향에서 벗어나 대중의 지도자로 영국 국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부르짖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견지하지만 종교적으로는 영국국교의 기본신학과 법규를 준수하면서도 옥외설교를 하며, 평신도 전도자를 임명하고, 심지어는 안수까지 시행하는 진보적인 노선을 "복음전파와 선교"의 이름아래 수행하였다.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윌리암 로(William Law), 모라비안 교도들과 결별을 하면서도 그들의 모든 것을 결코 버리지는 않았다. 이것이 웨슬리의 삶과 신학과, 신앙운동의 특징이다. 그의 신학은 인간의 죄성과 더불어 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함께 주장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 믿음과 행함, 개인과 사회, 보수적인 정치관과 진보적인 사회관등을 함께 주장하는 "기독교적 변증법"이 그의 신학의 원리가 되고 신앙운동의 원천임을 깨달을 때 그의 생애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추가) "존 웨슬리--- 그는 외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 들어 있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하여 50년 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10바퀴 이상 되는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틈에 2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내었습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60년 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2시간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존 웨슬리는 성경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80세가 되었을 무렵 그가 전도를 다닌 곳마다 어느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86세의 나이에 자신을 핍박했던 아일랜드 콘웰에서 2만5천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말년일지라도 자신에게 남은 한순간 한순간을 쓸모없이 살아가지 않고자 촌음을 아껴서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쇠약하여 죽기 5일전까지도 그는 32km 떨어진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 때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찻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의 임종을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웨슬리는 평안한 가운데 멀고 먼 인생의 길을 다 마치고 천국의 영광의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웨슬리가 이 땅을 떠날 당시, 영국에는 294명의설교자와 71668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선교부에는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의 회원이 있었고 미국에는 198명의 설교자와 43265명의 회원을 가질 만큼 그의 인생은 큰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생애연표 (1703-1791)
1703. 6. 17. 링컨(Lincoln)주 엡워쓰(Epworth)에서 출생
1709. 2. 9. 목사관 화재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출됨
1714. 1. 28. 런던에 있는 차터하우스(Charterhouse) 사립학교 입학
1720. 12. 24. 옥스포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쳐취(Christ Church)대학 입학
1724. 크라이스트 쳐취 대학 졸업 (B. A.)
1724.- 1725.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단
1725.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저서를 통해 거룩의 삶 추구
1725. 9. 19. 서리 사제(Deacon) 안수, 옥스포드 대학교 교구감독 포터 (Potter)가 집례하다.
1726. 3. 17. 링컨대학교 교수(Fellow)로 선발되다.
1728. 엡워쓰에서 보조 목회하던 가운데 안수 받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포터 감독이 집례하다.
1729. 엡워쓰에서 링컨 대학으로 돌아오다.
신성구락부(the Holy Club)의 지도자가 되다.
1735. 10. 21. 복음선교단(S.P.C.K.) 기관사제(Chaplain)로서
미국의 죠지아(Georgia)주(State)를 향하여 출범하다.
1736. 1. 폭풍으로 죽음의 공포 속에 처하여 있을 때 26명의 모라비안 교도들(the Moravians)의 평안한 상태를 보고 충격을 받다.
1736. 2. 1. 조지아 주의 사반나 시에 내리다.
1737. 12. 2. 쏘피아 합키(Sophia Hopkey)사건의 악화로 귀국길에 오르다
1738. 2. 1. 영국 딜(Deal)에 도착
5. 24. 존 웨슬리의 회심 체험(evangelical experience)
6. 23. 독일의 허른허트(Herrnhut)의 모라비안 교도들을 방문
1739. 5. 2. 브리스톨(Bristol)에서 최초로 옥외설교를 하다.
11. 20. 화운더리(Foundery)에서 설교를 하다.
1740. 7. 20. 훼터 레인(Fetter Lane)의 무리들과 결별하다.
1742. 5. 28. 뉴캐슬(Newcastle)을 최초로 방문하다.
1743. 5. 29. 런던의 웨스트 스트리트(West Street Chapel)채플을 열다.
8. 26. 콘월(Cornwall) 집회를 시작하다.
10. 20. 웬스베리(Wednesbury)에서 폭도들을 만나다.
1744. 6. 25. 최초의 연회(Conference)를 열다.
8. 24.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설교를 하다: 최후의 설교가 되다.
1747. 8. 9. 아일랜드(Ireland)를 최초로 방문하다.
1751. 2. 18. 바자일레 부인(Mrs. Vazeille)과 결혼하다.
4. 스코틀랜드(Scotland)를 최초로 방문하다.
6. 링컨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다.
1753. 11. 26. 루이스햄(Lewisham)에서 자신의 묘비문(Epitaph)을 쓰다.
1755. 1. 신약성서주해(Notes Upon the New Testament)를 출판하다.
5, 6-8. 영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리즈(Leeds)에서 논의하다.
1764. 1. 12. 도킹(Dorking)을 최초로 방문하다.
4. 19. 복음주의적 성직자들에게 서신을 보내다.
1766. 1. 31.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평이한 해설을 출판하다.
1768. 4. 27. 유언(will)을 쓰다.
8. 24. 트레베카(Trevecca) 대학을 설립하다.
* 신앙인의 완전을 향한 웨슬리의 4대 회심 - 웨슬리의 여러 성령체험
(김진흥 / 충무감리교회 목사 글 참조)
웨슬리(John Wesley)는 루터(M. Luther)나 칼뱅(J. Calvin)처럼 교리 문제를 가지고 평생 씨름한 분이 아니다. 영국 감리교회와 그 외 이 교회와 역사적인 유대관계에 있는 감리교회들에서는 상식화된 것으로서 웨슬리안 전통주의(Wesleyan Orthodoxy)가 명백히 표현된 교리로 사용되어온 네 가지 교리(Methodist Four Alls), 즉 “①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②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 ③ 모든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④ 모든 사람이 완전 성화를 얻을 수 있다”에서 밝히는 대로, 이론에서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죄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어떻게 하면 빨리, 실제적으로 이룰 수 있는지 고민하고 기도한 분,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분이 바로 웨슬리이다.
그래서 웨슬리의 가르침은 신학적 이론으로만 들여다봐서는 잘 정리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지는가 하면 모든 교리를 다 포함하고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처럼 모든 모순된 신학적 이론들을 다 포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여간 웨슬리는 한 사람의 온전한 신앙인으로서 살기 위해 평생 몸부림치신 분이다.
이런 맥락에서 웨슬리의 생애와 신학을 보면 지금 내가 말하려는 ‘웨슬리의 4대 회심’(Four Conversions; 이것은 내가 처음 사용하는 것일 뿐 공인된 학술용어가 아니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웨슬리가 웨슬리일 수 있게 된 데는 그의 일생에 네 번의 중요한 회심이 있었다.
첫째는 종교적 회심(宗敎的 回心)으로 그가 옥스퍼드에 다니며 신성클럽(Holy Club)을 만들 때이다. 나중에야 웨슬리 스스로 깨달은 것이지만 이 회심은 철저한 한 사람의 종교인이 된 회심이었다. 그는 이때 오직 성경의 사람으로 살려고 엄청난 수고를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 있을 뿐이었다.
어떤 이는 이때의 상황을 단지 확신이 없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건 웨슬리의 고백과 일치하지 않는다. 웨슬리는 올더스게잇 체험이 있기 전에는 그의 설교처럼 단지 ‘99%의 종교인’이었을 뿐이다.
두 번째는 저 유명한 올더스게잇 스트리트에서의 신앙적 회심(信仰的 回心)이다. 이 체험으로 웨슬리는 비로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 부분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한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이때 웨슬리는 비로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더스게잇의 체험이 웨슬리의 전부가 아니다. 거듭나는 것이 가장 귀한 은혜인 것이 사실이지만 웨슬리나 몇몇 위대한 그리스도인들만 체험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세 번째는 ‘성령의 사람으로의 회심’인데, 그가 신앙적 회심을 경험한 1738년 12월 31일 밤 런던 페터레인 집회소에서 몇몇 기도동지들과 심야기도를 하던 중 위로부터의 능력을 입히우는 경험을 한 것을 말한다.
웨슬리는 올더스게잇에서의 경험으로 ‘종의 믿음’에서 ‘아들의 믿음’을 가지게는 되었지만, 아들의 자격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아들로서 사는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초보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듯이, 웨슬리는 중생의 경험 후에 찾아오는 딜레마에 빠진다. 불안과 두려움과 의심 등 여러 가지 시험을 겪게 된 것이다.
일찍이 사도 바울이 자신을 곤고한 자라고 탄식하던 것처럼 웨슬리도 성령충만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곤란의 늪에서 일순간 방황하지만 찾는 자가 찾을 수 있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어주시는 주님께서 웨슬리를 인도하신다.
우선 1738년 여름에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임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영적 원리를 배운다.
계속해서 그는 같은 해 10월 9일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1703-1758)가 쓴 『노스햄튼 대부흥운동사』라는 책을 읽으면서, 거듭나게 하신 성령의 역사는 거듭날 뿐 아니라 그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은혜를 갈구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 31일 밤 페터레인 집회소에서 기도하다가, 같은 날 밤인 1월 1일 새벽 3시경에 웨슬리는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로 바닥에 쓰러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위로부터의 능력의 입히움’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아들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 수 있는 실력을 얻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중생했다 할지라도 웨슬리의 페터레인 체험 같은 회심이 없이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절대로 살 수 없다.
바울 사도는 이를 로마서에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0-11)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회심은 거의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바다. 웨슬리가 웨슬리되게 한 또 하나의 회심이 있었으니 바로 사명적 회심(使命的 回心)이다.
거듭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웨슬리는 기쁨 가운데서 교구목회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1739년 4월 1일에 지기인 조지 휫필드(George Whitfield)의 강권으로 처음으로 노천설교를 하게 되는데 웨슬리는 여기서 그의 신앙에 또 한 번의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바로 사명적 회심이다.
내키지 않는 상태로 웨슬리는 광부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웨슬리를 깜짝 놀라게 할만큼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큰 충격을 받는다. 교회 밖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고, 그들은 구원의 복음을 기다리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시기를 시급히 원하시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의 신앙구조에 대변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교회는 교회 자체의 존립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교인들만을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교회 밖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주님은 신앙인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거룩한 성품에 참여해 가게 하기 위해서만 자신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신 것이 아니다.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셔서 위로하시고 능력 있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서 죄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고, 결국 지옥으로 갈 운명에 처해 있는 영혼들을 구원의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며 하나님은 이 일을 매우 기쁘게 여기신다는 것을 웨슬리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보다 우선하는 일은 없다.
이때부터 웨슬리는 복음전도를 위한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성령충만케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주시는 것은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은혜만 받고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다. 웨슬리는 비로소 신앙의 완성을 향하여 놓여 있는 길을 찾은 것이다.
웨슬리 신앙만이 갖는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독교인의 완전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서도, 신학교의 강단에서도 웨슬리의 이 완전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완전의 문제는 학문적 문제이기에 앞서 신앙의 문제인데 오늘의 우리에게는 기독교인의 완전을 이루고자 하는 웨슬리의 신앙적 열정과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신앙적 고민이 없는 한 웨슬리의 신앙체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웨슬리의 회심을 말할 때 올더스게잇의 경험만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웨슬리의 4대 회심을 알지 못하고서는 웨슬리의 그 집요하고도 집중적인 전도활동을, 또한 그 외의 폭넓은 활동 영역을 신학적으로 논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활천 2004년 8월호)
-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을 따르는 감리교는 성서, 이성, 체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회적 성결과 성화운동을 일으키며, 자유주의적인 신학이 아니라 진보적 신학을 추구한다.
(참고 ; 19세기에 발생한 자유주의신학(liberalism)이란 인간의 원죄와 타락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과신하며, 지상의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던 신학운동이었는데, 1차와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그러한 자유주의신학의 유토피아가 산산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런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을 그대로 믿고 강의하는 감신대 교수들은 없다. 다만 감신에서는 진보적(liberal) 요소는 있다.
이성에 의한 성서비평학적 연구를 통하여 성서 저자들의 삶의 자리를 바르게 이해함으로 성서의 본래적 의미를 추구하려 하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종교간의 대화를 통하여 오늘날의 종교간의 갈등에 의한 테러도, 전쟁도 없는 인류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진보적 요소는 지극히 웨슬리적이다. 웨슬리가 루터나 칼빈과 다르게 신앙의 정확성과 신빙성을 위해, 그리고 신앙의 성숙을 위해, 이성을 신학의 방법론으로(성서, 전통, 체험과 함께)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는 사회적 성결(social holiness)을 이루는 다양한 사회적 성화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또한 웨슬리는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에 근거하여 타종교인들에게도 일반계시적 선재적 은총이 임한다(그러나 그들에게도 자동적으로 구원이 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믿어야만 구원받는 것이다)는 면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여는 개방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감신대 신학에는 복음적(evangelical) 요소도 아주 중요하게 강조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의롭다하심을 얻고 거듭나는 웨슬리신학을 그대로 믿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화를 또한 믿고 가르치고 있는 점에서 감신대 신학은 웨슬리적 복음주의(Wesleyan evangelicalism)를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
→ 웨슬리의 삶과 회심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의 귀한 삶과 회심을 따라 믿음으로 사명 감당하며 귀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