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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2일
말씀: 요한1서 2:17
제목: 이웃 섬김의 원리
우리가 교회 회복을 위해 20주 넘어 설교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여러분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드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회 회복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며 오늘날 하나님의 계획이며 현제 실행해야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일전에 전염병이 지나가면 가뭄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것은 제가 하나님말씀을 받아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었고 구약에서 일종의 심판의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4:12‘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눅21:10-11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전염병과 기근과 칼’은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하실 때 전염병과 가뭄과 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근거입니다. 지금 전 세계 팬데믹현상으로 인해 3년이나 고통을 당했고 지금도 완전히 팬데믹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유럽에서 원숭이두창이 사람들의 마음을 염려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기근입니다. 이것은 식량난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물 부족으로 허덕인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물 부족국가입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전 세계적으로 가뭄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곡물부족현상이 나타나 물가가 상승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고 또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북한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전쟁의 화약고가 도사리고 있는 물리적 전쟁의 위험지역이 많은 상황입니다. 왜 성경은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또한 오늘날도 교회가 예배를 통해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겁을 주기위해서, 공포분위를 조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일이 일어났고 일어날 수 있는 징조를 통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교회가 이 말씀을 붙들고 감동에 따라 교회회복을 부르짖고 있고 교회회복이야말로 가정의 회복이요, 이 땅의 회복임을 직시하고 이 말씀을 우리가 심각하게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지금 교회회복을 중심으로 이제 예배의 회복, 기도의 회복, 전도의 회복 교제의 회복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교제의 회복에서 섬김과 봉사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교제에 있어서 섬김과 봉사는 일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일에 대한 소명의식은 사랑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번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부르심으로 인한 섬김과 봉사는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서 출발하느냐하는 부분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다시 확인한다면 이웃을 섬기는 출발은 ‘나’로부터 입니다. 교회에서 연단과 훈련을 받아 이웃으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섬김과 봉사는 ‘나’ ‘교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 흘러가야하는데 왜냐하면 ‘나’가 모인 교회에서 삶으로 출발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 섬김의 현장이 바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이 필요 없지만, 그러나 우리 이웃은 선한 일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를 섬기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합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데 어디에 숨어계시느냐 하면, 첫째, 내 마음에 숨어계십니다. 우리가 섬김으로 인해 ‘나’를 섬기는 것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합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섬기는 것이 상대방을 섬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결국 나를 섬기는 것이 된다는 한 몸의 원리입니다. 마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나 자신 같이’입니다. 이웃이 ‘나’라는 말씀을 저번 주에 드렸는데, 이 원리를 알고 이웃을 섬기야 진정으로 섬김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셔야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이웃에 숨어 계십니다. 우리의 이웃을 섬김으로 인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웃에 하나님이 숨어계시니까 그 이웃을 섬기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쪽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그리고 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그러시면서 반대의 말씀을 하시고 또 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행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구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이웃가운데 숨어계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섬기고 이웃을 섬김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웃을 섬기게 하는 동기는 우리 이웃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만날 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웃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지요,
우리의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할 가치를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감정과 생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하고 상대방에게 사랑할 수 없는 조건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또한 내 이웃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는 농부는 하나님이 그 농부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농사지을 수 있도록 공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대접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지요. 아이들 식사준비도 그리스도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 식사 준비도 그리스도께 하는 것입니다. 한 몸의 원리가 바로 그리스도께 하는 관점에서 하나 됨을 유지해야합니다. 모든 대상을 우리는 그리스도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이게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현상적으로 형태적으로 하는 행동이나 삶을 보면 섬길 마음이 없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중요하고 그 안에 그리스도를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이웃을 섬김으로 인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웃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웃의 범위를 잘 아시지요. 그 이웃은 동심원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입니다. 즉 이웃은 나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왜 이런 상식적인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일반적으로 자녀들은 부모가 이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녀들은 항상 부모로부터 섬김을 받는 대상으로만 여기지 섬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은 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요구만 하지 어떻게 섬길까를 자녀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마는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자녀들은 부모를 섬겨야하는 이웃임을 잘 아셔야합니다.
저번 주에 서정승 선교사와 강미현선교사가 다녀갔습니다.
저번 주에 광고를 하면서 주일새벽에 이런 감동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교회 우크라이나의 마음을 품고 힘든 사역을 하시다가 오신 선교사님을 나그네대접 하듯이 하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새벽3시에 잠이 깨어서 잠이 안 오기에 ‘왜 하나님이 나그네 대접하듯이 하라’고 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교회에서 초청강사의 설교가 끝나면 사무실에서 대접을 합니다. 저희교회는 어느 강사가 와도 간식의 내용이나 양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선교사님이 이렇게 대접하는 교회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흘러 들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이 그래서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하셨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뱁티스트 이사 모임이 있어서 집사람과 경기도 양평으로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그네대접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에, 여러분들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새벽에 집에서 공항으로 나갈 때 선교사님이 ‘나는 나그네요, 선교사의 삶이 나그네 삶이라’는 말씀을 했던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폴란드에서 한국에 올 때에도 나그네라는 말씀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게 우연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말씀을 따라 나그네를 최선을 다해 섬겼고 또 그로 인해 선교사님은 카톡을 통해 ‘은혜의 선물을 한아름 받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교회로 인해 또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이렇게 보내왔습니다. 영명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더욱더 크게 사용할 수 있도록 복을 내려주실 줄 확신합니다.
나그네라는 뜻은 ‘자기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묵으면서 꽤 먼 길을 가거나 이곳 저 곳을 방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전의 용어가 있습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 사람들’이란 8-12절에 언급된 인물들 즉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 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보고’는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가 됩니다. 즉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는 창23:4절에서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한 말 즉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라는 말과 또한 야곱이 바로에게 한 말 즉, 창47:9절에서‘내 나그네 길...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을 인용한 것입니다.
옛 신앙의 위인들의 그러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그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삶았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한 것은 자신들이 살았던 이 땅이 본향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본향’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트리다’는 ‘선조의 땅’, ‘고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목적지가 하늘나라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우리가 나그네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척박한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의 삶을 삽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환영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잠시 머무시고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 나그네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생스러워도 견디고 정당한 대우를 못 받아도 원망하지 말고 불편하고 힘들어도 참아야하는 이유가 우리는 이 땅이 나그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그네의 삶으로 인해 외롭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언젠가는 하나님의 집에 돌아가 온전한 쉼과 환희를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이 땅에서 섬김과 봉사의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1:17‘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로 있을 때'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이전에 잠시 거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할 것처럼 안일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는 악에서 떠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하며,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시고 교회로 부르신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삶을 살아갈 것을 암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요한1서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세상의 세속들은 다 사라지고 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원히 남는 것, 영원한 상급으로 받을 것, 그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땅에서 나그네삶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내가 나그네삶이기에 나그네 된 자들을 섬기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알아, 심김과 봉사의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심령들이 되셔야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섬김은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하는 것임을 아셔야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교제가운데 섬기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역을 감당할 있도록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마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48절, 이 부분이 섭리요, 일반 은총이요, 공급하심입니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바로 사랑이지요.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이 땅을 통치하시고 유지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통치하시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세워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교회는 부르심의 소망을 가진 자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십니다.
섬김에 있어서도 특별한 은사를 통해 사역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들이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은사는 기능면에서도 운명적으로 주신 사명입니다. 물론 운명적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섭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능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은사를 적제 적소에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주신 것은 사명이 나의 힘과 능력으로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며,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힘에 의존하여 사역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기능, 직책을 다 주셨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내가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이런 부분이 은사의 영역에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은사를 받아서 주의 일을 감당하면 힘들거나 어렵거나 지칠 수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어서 이런 모든 것을 해쳐나갈 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주의 영광된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세우는 일을 귀하게 감당하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이 땅에서 삶며 섬김과 봉사로 이웃을 사랑하며 교회와 선교사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으로 천국을 소유하는 귀한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