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깐 철불이
1150년 세월을 지나 옵니다.
후덕한 얼굴과 달리 두 손은 작고 예쁘장해 아기손 같습니다.
높이가 2.73m나 되고
통일신라 말기 858년에 만들었다는 제작 연대가
명확하게 기록돼 있는 철불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지요.
국보 117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입니다.
거무튀튀한 철불과 화려하기 그지없는 원색 닫집이
부조화의 조화를 이룹니다.
절 마당 곳곳에 여름 배롱나무꽃이 피었습니다.
나무껍질 없이 뼈를 드러낸 줄기가
불가에선 무욕의 상징이지요.
여지없이 쏟아지는 한낮 햇살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부처의 공덕인 양 진분홍빛을 발합니다.
8월 14일 해남 민박집을 떠나 강진 거쳐 올라온 장흥 보림사,
두 번째 포스트는 전란의 화마 속에서 살아남아 전해오는
두 국보 이야기입니다.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보림사로 224
061-864-2055
http://www.borimsa.org/
일주문과 천왕문을 들어서면 시야가 툭 트이면서
널따란 절마당이 펼쳐집니다.
김제 금산사 못지않게 시원스럽습니다.
평창 월정사도 옛날엔 이랬는데 콘트리트 전각을 마구 짓는 바람에 망가졌지요.
사진엔 잘렸지만 왼쪽 느티나무 거목 아래 큰 평상을 놓아 쉬어가게 했습니다.
절 마당에 평상 보기도 처음인데
보림사 스님들 따스한 마음 씀이 느껴졌습니다.^^
절 문 들어선 일직선, 사진 왼쪽에 대적광전이 있고
대적광전과 직각을 이뤄 오른쪽에 대웅전이 있는 가람 구조도 특이하고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대웅전과 범종각이 또 다시 직각을 이루고 서 있습니다.
절터가 매우 큰데도 전각이 많지 않은 것은
6.25 때 스무 채 넘던 전각들이 모두 타버린 뒤 폐사지처럼 버려져 있다가
1968년 대적광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조금씩 복구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통과하면 정면에 보이는 대적광전으로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향합니다.
보림사의 주불전은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거든요.
그 앞에 선 석탑 둘과 석등이
보림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자 또 하나 국보입니다.
셋을 함께 묶어 국보 44호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입니다.
왼쪽을 남탑, 오른쪽을 북탑이라고 부르는데
보림사는 비스듬한 동남향을 하고 있어서
엄밀히 말하면 남서탑과 북동탑이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얼핏 쌍둥이 탑처럼 보이지만
북탑 키가 5.9m로 남탑 5.4m보다 조금 큽니다.
1932년 도굴꾼이 석탑 안 사리함을 훔치려다 탑이 넘어졌는데
이듬해 복원할 때 일층 탑신 사리 구멍에서 사리와 함께
탑의 내력이 쓰인 탑지(塔誌)가 나와 870년 신라 경문왕 때 세운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통일신라 석탑과 석등 가운데
이렇게 상륜부를 비롯한 부재를 거의 다 갖추고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매우 드물뿐더러
제작 연도까지 확실해서
다른 석탑-석등의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고
당시 석탑-석등을 연구하는 게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왼쪽 남탑과 오른쪽 북탑은 높이만 다를뿐 구조는 똑같습니다.
장대석 여럿으로 짠 지대석 위에 상하 두 단의 기단을 놓아
그 위에 3층 몸돌을 세웠고
상륜부에 노반 복발 양화 보륜 보개를 다 갖췄습니다.
위 남탑은 보륜이 셋인데
오른쪽 북탑은 키가 큰만큼 보륜이 다섯개입니다.
두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위 기단은 크고 아래 기단은 좁은 데다
각층 몸돌 폭에 비해 우주 폭이 가늘며
지붕돌은 얇은데 모서리는 많이 들려 있어 섬약해 보인다는 평을 받습니다.
높이 3.12m 석등은 지대석을 제외한 기단 몸돌 지붕이 모두 팔각이고
각 부분 비례가 잘 맞아 조화로울 뿐 아니라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 형태이고
손상된 곳 없이 가장 잘 보존돼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석탑과 같은 시기 만들어 함께 세운 것으로 짐작합니다.
대적광전 앞에 서서 천왕문 쪽을 바라본
석탑-석등의 뒷모습입니다.
대적광전은 화엄경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입니다.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와 우주 본체를 상징하는 법신불입니다.
기독교의 신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쉽지요.^^
'비로자나'라는 범어가 광명, 빛이라는 뜻을 품고 있고
비로자나불이 광명으로 온 세상을 밝힌다고 해서
모신 전각을 대광명전이라고도 하지요.
가장 중요한 주불전인데 편액 글씨는 평범해서 별로 감흥이 없네요.
서예가 아니라 글자를 비석이나 나무에 글자를 새겨넣는 서각(書刻)을 하신 분이어서 그런 듯합니다.
노인회 전남연합회장을 지낸 고당 조성호라는 분이신데
6.25 후 폐허가 된 보림사의 관리 책임자가 돼 복원 사업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보림사로서는 매우 고마운 분이겠지만
절 안 편액 대부분이 이 분 글씨인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서예가들의 편액을 걸어두는 것도 절로서는 작지 않은 문화 자산이고
방문객에겐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감상하는 재미가 짭짤하기 때문이지요.^^;;
대적광전 안은 다른 불구와 장식 없이
비로자나 철불만 모시고 있습니다.
쇠가 금동에 비해 불에도 잘 녹지 않고 단단해
6.25의 화마에서 살아남았지만
광배와 좌대는 사라지고 불신(佛身)만 남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철불을 만든 시기가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인데
통일신라 말기 왕권과 중앙 집권 세력이 약해지고 지방 호족 세력이 커지면서
호족들이 세를 과시하고 복을 빌기 위해 저마다 비용이 적게 드는 쇠로 불상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철불은 강도와 내구성이 좋지만
주물하기가 어렵고 세부 조각이 금동불보다 섬세하지 못합니다.
철이 금동보다 싸고
금동불은 비싼 밀랍으로 틀을 만들지만
철불은 진흙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지어붓기 때문에
제작 비용과 시간이 절약돼 호족들이 쉽고 크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때문에 불상 묘사가 사실적이지 못하고 생동감이 떨어졌지만
친근하고 인간미 넘치는 토속적 불상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근엄하게 정형화된 부처 얼굴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고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나는 이웃의 얼굴로 바뀐 것이지요.
시커먼 무쇠 빛과 거친 장엄미가 철불의 매력지이만
이 철불도 2007년까지는 갈색 덧칠을 해 그 매력을 가렸다가 벗겨내
비로소 진면목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이보다 조금 늦은 865년 만든 국보 63호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도
금박을 입혔다가 같은 해 벗겨내 본래 모습을 찾았다고 합니다.
비로자나불은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서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오른손 엄지와 왼손 집게를 서로 대는 손갖춤, 지권인(智拳印)을 합니다.
부처와 중생, 미혹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왼 팔꿈치 위쪽 뒷면에 여덟 줄 60자 넘는 명문이 새겨 있어
858년 헌안황 때 만든 것이라고 알립니다.
보조선사 체징이 보림사를 선종 본산으로 다시 개창한 시기부터
보림사와 함께해온 것이지요.
부처의 머리 윗부분이 솟아오른 것을 상투 계 자를 써서 육계(肉髻)라고 하는데
부처의 지혜를 상징한답니다.
육계가 큰 편이고
소라처럼 말린 나선형 머리카락 나발(螺髮)은 흙으로 빚어 붙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생동감과 사실성이 떨어지고 균형도 잘 안 맞지만
얼굴과 몸에서 건장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소탈하고 거친 철불과 대조되게
불상 위 집 모양을 한 보궁형 닫집이 매우 화려합니다.
닫집 위로 극락조 한 쌍이 날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극락조는 소리가 곱다고 하지요.
봉황의 일종이라고 보기도 하고요.
용머리가 넷 내밀었습니다.
보궁형 닫집은 세 겹 지붕의 서까래와 다포식 공포를 치밀하게 짜고
구름 속 용머리와 비천상을 곁들여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용, 극락조, 연꽃, 비천 같은 길상들이 극락의 분위기를 돋웁니다.
닫집은 신성하고 숭고한 천상 세계, 불국정토를
상상 속이 아닌 실제 모양으로 구현해 보임으로써
불자들의 의구심과 미혹을 씻으려는 뜻이라고 해석하더군요.
마당 반대편에서 직각을 이뤄 대적광전을 바라보는 대웅전은
화엄사 각황전, 부여 무량사 극락전처럼 내부는 트인 이층 전각입니다.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은 여느 절에선 주불전이지만
보림사 주불전은 대적광전이고
대웅전은 절이 커지면서 추가로 지은 것으로 짐작합니다.
조선 초기에 지어 6.25 때 불타기 전까지 국보 204호로 지정돼 있었을만큼 당당한 전각입니다.
옛 주춧돌 위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 팔작지붕집을 복원했습니다.
대웅전 앞에 괘불대 한 쌍이 서 있습니다.
절 마당에서 법회나 행사를 할 때 대형 불화 괘불을 거는 지지석입니다.
당간을 거는 당간지주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당간지주가 절 입구에 있는 반면, 괘불대는 이렇게 불전 앞에 자리하지요.
마당 한쪽 울퉁불퉁한 자연석 위는 사람들이 쌓은 돌탑 차지입니다.
대웅전과 직각을 이루고 선 범종각 역시 새로 지었습니다.
아래로 사람이 지나다니도록 통로를 냈지만
절 마당 들어서는 동선과는 상관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범종각 편액 글씨는
서울사대 교수와 동우대 학장을 지내신 한학자이자 원로 서예가인
우봉 한상갑님(1914~)의 작품입니다.
불교 사물이 걸린 종루에 생뚱맞게 시계가 걸려 있는데
그나마 엉뚱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네요.^^;;
대웅전과 범종각 사이 마당 복판에 반쯤 땅에 묻힌 듯한 작은 전각이 있습니다.
약수터에 세워 비바람을 가리는 수각(水閣)입니다.
한국의 명 약수로 꼽힌 보림 약수로군요.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고 미네랄 풍부하다고 합니다.
보림사 뒷산에 유명한 차밭이 있듯, 차 달이기에 제일 알맞은 약수라고 합니다.
뒤편 울창한 비자나무와 대나무숲, 차밭의 영향인지 뒷맛이 쌉싸름하다네요.
한때 광주와 목포에서까지 사람들이 약수를 길으러 오는 바람에
북새통을 이뤘다고 하는데 한산합니다.
관리 상태가 안 좋은 듯 이끼가 끼여 있어 저는 안 마셨는데
남편이 먹어 보더니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보림사의 나머지 보물과 문화재들은 다음 포스트에서 구경합니다.
[출처] 장흥 보림사가 품은 국보,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삼층석탑-석등|작성자 비니버미
첫댓글 합장 올립니다...
성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