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는 거지도 웃는다
1.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느 부자 외국인이 필리핀의 시골로 여행을 갔다. 부자는 시골에서 며칠 머물며 농부들의 생활을 눈여겨보았다. 농부는 오전에 한 시간 일하고는 밭 옆 해먹에 누웠다. 이웃사람과 잡담을 하거나 낮잠을 자며 빈둥거리며 반나절을 보냈다. 점심을 먹고 나서야 밭에 들어가 두 시간 가까이 일했다.
그리고는 밭에서 나와 망고나무 아래에 모이더니 해가 질 때까지 잡담하며 하루를 보냈다.
딱히 여긴 부자가 농부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여보시오, 이 아까운 시간을 왜 놀리며 빈둥대고 있습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면 좋을 텐데요.”
“오늘 일할 몫은 다 하고 쉬는 거랍니다.”
“시간 있을 때 더 열심히 일하면 되잖아요.”
그러자 농부가 부자를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되묻는다.
“더 일해서 뭘 하게요?”
“돈을 벌어 넓은 땅을 사고, 더 많은 농사를 지으면 수확도 많아져서, 언젠가는 나처럼 부자가 되지 않겠소?”
부자의 설명에도 농부는 여전히 의아하다는 눈빛이다.
“부자가 되어서는 뭘 하게요?”
“아, 그렇게 되면 생활이 윤택해지잖아요.”
“생활이 윤택하다는 것은 뭘 말하는 건데요?”
“여유 있는 삶을 살면서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부자의 말을 듣던 농부가 도리어 딱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잖소?"
이 일화는 지금의 삶만도 행복하다는 농부의 고백을 담고 있다. 더 행복해진다는 명분을 위해 왜 현재의 여유를 잃어야 하는가에 대해 반문을 하는 셈이다.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재산보다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것은 잘 모른다. 재산과 행복이 비례할 것이라고 믿는 착각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벌어도 행복할 수가 없다.
경제 선진국이 아닌 행복 선진국에서는 국민소득(GNP)보다 국민행복지수(GNH: Gross National Happiness)를 더 중요하게 판단한다. 국민의 평등한 행복권 추구를 국가의 경제발전보다 더 중시하고 있다. 거지 적선하듯 하는 복지정책이 아니라 국가의 시책으로 정해진 나라들이 많다.
경제성장과 행복성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부탄이라는 나라를 꼽을 수 있다. 부탄은 히말라야 산맥 동쪽 끝에 있는 나라로 인구 70만 명의 아주 작은 나라이다. 부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400달러(150만 원)로 세계 150개 조사 대상국 중 124번째로 가난한 나라로 나타났다. 1999년에 TV가, 2000년에 인터넷이 들어올 만큼 문명 속도도 느리다.
한국의 땅덩이가 작고, 국력도 약하다고 하지만 부탄에 비하면 대국이다. 남한만의 땅덩이만 놓고 봐도 부탄의 두 배가 넘고, 인구는 600백 배가 넘는다.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이 부탄의 10배를 넘어서고, 텔레비전과 인터넷 문명은 세계 중에서도 첨단에 속하지 않는가.
그런데 지난 2006년 영국 레스터대학 에이드리언 화이트 교수가 조사한 ‘세계 행복지도’에서 부탄은 세계에서 행복한 나라 8위로 꼽혔다. 이에 비해 경제 선진국이라 부리는 한국은 102위에 불과했다. ‘소득과 행복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탄의 사례에서 충분히 입증되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 부자 나라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의외의 현상을 두고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이라고 부른다. 리처드 이스털린 교수는 1974년에 이러한 현상을 논문을 통해 밝혔던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이들은 덴마크 사람이었으며, 스위스, 오스트리아, 아이슬란드, 바하마 등이 뒤를 이었다.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인 미국은 23위, 영국은 41위, 독일은 35위, 프랑스는 62위에 머물렀다. 여기서도 한국은 102위에 머물렀다. 아시아권은 중국 82위, 일본 90위, 인도 125위로 행복도가 하위에 머물렀다.
낮은 소득을 지닌 부탄 사람들에게 행복 수준이 높게 나타난 것은 GNH(국민 총행복 )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서민 대다수를 희생하여 기업의 경제발전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발전을 중시하는 것이다. 삶의 자연환경을 보호하고 전 국민과 공평하게 부를 분배하는 정책이 국민의 행복수준을 높인 것이다. 이는 결국 돈이라는 경제 수준보다 사람이 느끼는 삶의 만족감을 얼마나 충족시키는가에 있는 것이다.
영국에 본부를 둔 신경제기금(NEF)에서 2007년 밝힌 행복지수 역시 결과는 비슷했다. 행복지수는 삶의 만족도와 평균 수명, 생존에 필요한 면적과 에너지 소비량 등의 환경적인 여건 등을 종합해서 세계 178개국의 순위를 발표한다. 가장 행복한 국가 1위는 태평양 남서부의 8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인구 25만 명의 가난한 섬나라 바누아투가 차지했다. 미국은 150위, 영국은 108위 일본은 95위, 중국은 31위, 홍콩 88위 등으로 나타났다.
아시아 24개 지역 중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곳은 전 세계 12위의 베트남이며, 그다음으로는 부탄, 스리랑카,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의 순이었다. 아시아에서 경제 대국으로 손꼽는 일본, 한국, 싱가포르는 홍콩의 뒤를 이어 아시아 3대 행복지수 하위권 국가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또 다른 조사 기관에서의 결과 역시 한국은 하위권으로 나타났다. 미국 미시간대 사회연구소가 1981년부터 발표하는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에서는 1999~2001년 조사에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국민의 행복지수가 세계 1위로 나왔었다. 지난 2005년의 자료에서는 1위 푸에르토리코, 2위 멕시코, 3위 덴마크 순이었으며, 한국은 49위를 차지했다.
아일랜드(4위) 스위스(6위) 오스트리아(11위) 미국(15위) 스웨덴(18위) 같은 선진국은 그렇다 쳐도 한국은 엘살바도르(12위) 나이지리아(19위) 베트남(29위) 필리핀(31위) 등 후진국들보다 낮았다. 아시아의 싱가포르(24위) 대만(32위) 일본(42위) 중국(48위)보다도 밀려 있다.
행복지수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스스로 측정하는 지수를 말한다. 행복지수란 편의상 번역이고 원래 명칭은 ‘주관적 웰빙 순위(Subjective Well-being Rankings)’라고 한다. 이 조사가 빈부의 순서가 아니라 ‘마음이 행복한 국민' 또는 ‘마음이 불행한 국민'의 순위를 매겨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며 산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경제가 행복을 이끌어가지 못한다는 연구조사까지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2천 달러를 넘어서면 만족의 수준은 줄어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또 미국의 한 조사에 의하면 50년 전 사람들의 생활필수품은 72가지였는데 이 중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18가지였다.
그런데 현재의 생필품은 496가지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28가지로 느는 데 불과하다고 한다. 문명 발전으로 누리는 생활의 윤택과 실생활의 만족도는 별개라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이다. 결국 행복이란 문명발전, 경제 발전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스스로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 재산의 축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의 작가 앤서니 라빈스는 “어둠을 밝히는 데는 그리 많은 빛이 필요하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그 경구는 ‘행복을 만드는 데는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고쳐 써도 되지 않을까?
앤서니 라빈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우리의 행복이 좌우된다면, 괴로움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불가능한 재물을 모으기 위해 욕심을 내다보면 현재의 순간도 잃고, 삶이 추구하는 행복도 잃기 마련이다. 주어진 오늘의 삶을 분수껏 살면서 주어진 행복을 잃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국 앞의 일화에서 언급한 오늘 누리는 삶의 여유가 우리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바쁜 현대인, 특히 학생 때부터도 지나치게 바쁘게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시간의 여유를, 마음의 여유를, 돈벌이의 여유를 지니기 위해 쉬어갈 필요가 있다.
어차피 인생이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제 우리도 좀 더 행복을 만드는 연습을 하자.
정연수 논설위원(시인,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