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년간 온게임넷의 운영을 지켜봐 왔습니다. 오늘 24강 스타리그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래선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 몇자 씁니다. 노파심에 못박아두겠습니다. 양대 게임방송사 중 특정 방송사를 비판하려는 목적은 아닙니다. 온게임넷이 게임리그계에서 그만큼 위상이 크기 때문에 비난도, 비판도 더 집중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판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거대정당에 대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양비론과 양시론, 두루뭉술한 비판은 냉소과 무기력만 낳을 뿐이지요. 아무튼 최근 온게임넷의 운영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세 가지 사건만 예로 듭시다.
첫째, 16강에서 24강으로의 스타리그 방식 변경 둘째, 결승전 맵 순서의 공지없는 변경 셋째, 골든마우스 논란
1.
첫번째의 스타리그 방식의 전격변경은 지금 가장 첨예한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리그에서 탈락한 임요환을 위한 '음모'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정에 근거한 '썰'이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문제삼는 건, 과연 이것이 마케팅을 위한 기업의 결정권 차원에서 용인해줄 문제인가, 아닌가 입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기업의 결정권 차원을 넘어선 문제라고 판단합니다. 분명 스포츠마케팅과 상품마케팅은 이윤추구라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이윤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다시말해 '배를 째고 말한다면' 휴대폰을 올해 몇대 생산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과 스타리그에 몇 명을 뽑아올릴건지 결정하는 건 같은 사안이지요. 기업의 고유권한이란 겁니다.
분명 온게임넷 내부에서는 현재의 돌아가는 '판'을 낙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좀 오버하자면, 위기를 감지하고 있는 걸로 추측됩니다. 기업으로서 당연히 최근 1년간 관중수, 광고수익 등의 추이를 면밀히 분석해보았을테지요.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새로운 사업자의 리그 참여설이 있고, 올해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입니다.(아아, '우승자' 변길섭 선수를 생각하니 안구에 쓰나미가..ㅜ.ㅜ)
객관적인 조건들을 보면, 올해의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고 판단됩니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고, 스타판이 곧 망할거라곤 더더욱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어떤 스포츠 리그든지 다소간의 부침이 있게 마련이지요. 테니스, 골프, 축구 등 소위 메이저 스포츠도 마찬가집니다.
스포츠마케팅은 단순하게 말해 스타마케팅이고, 어떤 스타를 발굴하고 띄우는냐에 따라 판돈의 단위가 달라지는 분야입니다. 마이클 조던 은퇴 이후 NBA의 순이익이 큰 낙차를 그린 것, 샘프라스-애거시의 부진 이후 세계남자테니스계의 작은 침체, 타이거 우즈의 메이저 대회 우승 이후 골프투어의 수익 상승 등.. 스포츠 마케팅=스타마케팅이라는 실례는 많습니다. 다시말해 스타마케팅은 대전제라는 겁니다. 스타 없는 스포츠는 망한다는 것.
재미있는 건, 10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진 스포츠 분야에서 리그나 투어 운영방식의 혁신적 변화는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윔블던의 그 뿌리깊은 보수주의(여자선수의 복장까지 간섭했지요)는 워낙 유명하지만, 다른 스포츠 분야에서도 그리 급격한 운영방식의 변화를 시도한 예는 많지 않습니다. 스타가 없으면 없는대로 리그는 죽 이어졌습니다. 스타를 갈망했지만, 스타를 구걸하지는 않았지요. 다시말해 그들은 이익만을 쫒는 기업이라면 절대로 해선 안될 일을 태연히 해왔던 겁니다. 왜?
바로 그것이 '판'을 키우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급하다고 해서 경솔하게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바꾸다보면 토대는 그만큼 약해진다는 사실, 그걸 오랜 역사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그렇게 탄생합니다. 졸부 하나가 나타나서 돈을 때려부어 만든 대회가 생겨도, 그 대회에 '권위'는 없습니다. 스포츠는 대중들의 '판타지'에 부응하는 비즈니스이며, 당연하게도 판타지는 반드시 자본의 논리로 작동하지는 않지요. 사실 그래서 스포츠마케팅이 재미난 분야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온게임넷은 리그운영방식이라는 '토대'를 스스로 흔들고 말았습니다. 물론 불합리한 제도는 바꾸어야 합니다. 바꾸지 않으면 그건 보수주의일 뿐입니다. 하지만, 16강 방식의 불합리한 점에 대해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시각까지의 상황만 놓고보면, 혁신은 혁신이되, 원칙이 없는 혁신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원칙없는 혁신은 언제나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2.
두번째의 경우를 보죠. 이 경우는 온게임넷측에 의해 그저 '의사소통과정에서의 실수'라고 해명되고 넘어갔습니다. 사실 대회를 치르다보면 이런일도 저런일도 생기고, 정말 어처구니없는 해프닝도 일어나게 마련이죠. 그 실수를 가지고 온게임넷 운영에 문제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 겁니다.
문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개인의 실수인지, 아니면 제도적으로 허술한 부분이 있어서 개인의 실수를 크로스체크하지 못하는 것인지 이참에 명확히 밝히고 넘어가야 했습니다. 온게임넷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단순한 실수'라도 두번 반복되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실패입니다. 다시한번 명확한 사과와 맵추첨과정의 투명성 확보, 그리고 상호간 크로스체킹 제도의 신설이 필요한 듯 합니다.
'프로'라는 바닥은 그렇게 살벌합니다. 선수들에게는 이미 충분히 살벌한데, 리그운영사는 상대적으로 좀 덜한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의 선수들에게 '적자생존'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강조하면서도 정작 기성세대가 '물렁'한 것 같아 '기성세대'의 일원으로 낯이 뜨겁군요.
3.
스타리그 3회 우승자에게 혜택을 주는 골든마우스 제도의 신설은 선수들에 동기부여를 해준다는 측면에서 마련된 걸로 보입니다. 물론 2회 우승자 중 하나인 임요환 선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지요(그렇죠?^^). 가장 전통이 있는 리그운영사로서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사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잘못된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속이 들여다보이긴 하지만, 선발주자인 온게임넷의 애교(?)로 봐줄 수 있다고 봅니다. 팬 입장에서도 골든마우스가 생겨서 얘깃거리가 하나 늘어난 것도 사실이구요. 흥미로운 발상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골든마우스 그 자체가 아니라, 온게임넷의 지나친 '향수' 마케팅입니다. 과거에 연연한다는 겁니다. 최근 방영되는 황제백서라는 프로그램도 그렇고, 지나치게 '임요환'에 집착하는 듯 보입니다. '임요환' 이름 석자로 장사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임 선수에게는 죄송하지만, 기업으로서는 임요환이라는 이름의 골수까지 쪽쪽 빨아마시고 싶을 겁니다. 그게 마케팅이고, 자본주의라는 거지요.
포스트 임요환은 언젠가 등장할 수 있고 이미 있을 수도 있지만, 임요환 선수와 같은 드라마틱한 카리스마를 지닌 선수는 현재 시스템에서 다시 나오기 어렵습니다. 임요환 선수의 실력, 스타일리쉬한 컨트롤을 능가하는 선수는 나올 수 있지만, e-sports 태동기의 가슴 떨리던 시대적 상황, 테란의 암흑기, 마이크로 컨트롤이 지배하던 맵 등등, 우리가 지금에 와서 다시 시대(era) 그자체를 창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달을 보라는데 왜 자꾸 손가락을 보느냐는 유명한 선문답이 있습니다. 임요환은 손가락이고 달은 스타리그라는 전체 구도일 겁니다. 임요환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제2, 제 3의 임요환을 찾아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다보면, 제1의 최연성, 제1의 이윤열, 제1의 차재욱, 제1의 염보성은 영원히 온게임넷에서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습니다.
4.
온게임넷은 척박한 황무지에서 e-sports를 일구어낸 주역입니다. 황형준 국장과 온게임넷 스태프들의 열정과 감수성에 진심으로 경탄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1999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누구도 그들처럼 잘해내진 못하리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특히 때때로 시도된 온게임넷의 혁신적 변화들은 언제나 충격이었고, 파격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열정이 단지 이윤을 향한 욕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팬들의 목소리를 조용히 경청했고, 유연했고,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온게임넷에서 위기의 징후를 봅니다. 팬들과의 피드백이 예전같지 않다는 걸 느낍니다. 다시한번, 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팬들과의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은 그 자체로 혁신이고, 동시에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구구절절 와닿는군요............... 제 2의 임요환이 나오지 않는다............................... 제 1의 최연성 제 1의 이윤열 제 1의 차재욱 제 1의 염보성 모두가.. 제 2의 임요환이진 않을까요.....................
첫댓글 구구절절 와닿는군요............... 제 2의 임요환이 나오지 않는다............................... 제 1의 최연성 제 1의 이윤열 제 1의 차재욱 제 1의 염보성 모두가.. 제 2의 임요환이진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