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의 순교신앙
일사각오의 순교신앙으로 구주를 앙망하고,
조국 잃은 민족의 아픔을 기도로 승화시켜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본보기로 남아지다
굿뉴스울산 취재 차량에 올라타고 창원으로 향하는 길, 바야흐로 샛노란 개나리가 쓰윽 고개를 내밀었고, 천지간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절정을 알리는 벚꽃길이 내내 펼쳐졌다. 이리도 봄꽃의 향연이 가득한데 봄꽃보다 더 진했던 인생의 절정의 순간순간을 천상의 절대자를 향해 순교의 피로 드린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생각하니 애잔한 마음에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드디어 창원 진해구의 옛 웅창교회의 터전 위에 다다르자 주기철 목사 순교기념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흘린 선혈처럼 주황색의 아담한 순교기념관은 방문객의 발걸음을 포근하게 받아주었다. 1층 입구의 안내데스크에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 경건한 터전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때마침 방문객이 거의 없는 시간이라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기념관의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곳의 시간은 한민족의 역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일제 강점기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땅은 우리 땅이었지만 자유와 주권을 빼앗긴 채 무기력한 삶을 연명해가는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야수보다 악랄한 일제가 마수(魔手)를 뻗어 남의 나라 땅을 빼앗을 때 그 총칼은 무자비했고, 피흘림은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소양(蘇羊) 주기철(朱基徹, 1897년 11월 25일~1944년 4월 21일) 목사는 일제 강점기 경남 창원시 진해구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였다. 고신대학교를 태동하게 한 한상동 목사와 더불어 신사참배를 공개 거부한 대표적인 인물이며 독립운동가였다. 아울러 손양원 목사와 더불어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손꼽힌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순교했다.
어릴 때 주기철 목사는 소설가 춘원 이광수의 학생 모집을 권유하는 순회 연설을 듣고 마음이 감동돼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당 조만식을 비롯한 유영모, 이승훈 등 민족 지도자들에게 교육받아 민족혼을 발견하게 되었고, 연세대 전신인 조선예수교대학 상과에 진학해 장차 큰 사업가가 돼서 민족을 돕고 싶은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20세의 나이에 일찍 안갑수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낳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는데 첫 부인은 갑작스런 병으로 일찍 생을 마감했다. 그는 마산 문창교회와 고향 웅천읍교회 사경회에서 부흥사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거듭나 신앙에 새롭게 눈뜨게 되었고,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1925년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를 담임하면서 교회에 큰 부흥을 가져왔는데 무엇보다 두 번째 부인 오정모 집사와 결혼하였고, 이후 그의 인생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차츰 순교자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같은 교회의 처녀 집사와 자녀가 많은 그가 결혼하자 수군거리는 소리가 많았고, 부인의 마음에 상처가 났다. 이에 그가 수학할 때 스승이었던 조만식 장로가 찾아와 사정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를 가 그곳에서 산정현교회를 담임하게 된다.
그의 교회에 걸출한 민족지도자들이 많았고, 억압받는 민족을 위해 교회의 사회참여를 원하는 분위기도 강했지만 주기철 목사는 애오라지 ‘하늘의 길은 무엇보다 영적이어야 된다’는 신념이 강했다. 어찌 보면 그의 신앙이 오롯이 하늘의 순수한 신앙을 견지했기에 나라 전체가 일본 천황을 살아 있는 신이라 고백하는 신사참배를 할 때 그는 순교신앙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일본은 신사참배를 통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입하려 했다. 그래서 신사참배는 국가의례(國家儀禮)일 뿐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며 회유했고, 천주교·천도교·불교·기독교 등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단체가 무릎을 꿇었다.
조선의 거의 모든 교회가 신사참배는 종교예식이 아니라 국가의례일 뿐이라며 신사에 절을 했지만 주기철 목사는 끝까지 꼿꼿한 신앙의 절개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담임하는 산정현교회 성도들도 일본 순사들에게 매질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우렁찬 찬송을 부르며 어려운 시간을 견뎌내었다. 서너 차례 주 목사가 검속(檢束)당할 때마다 성도들도 담임목사와 한 마음 한뜻이 되었지만 잔악한 일제는 교회를 아예 폐쇄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감옥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할 때 그의 절규는 하늘에 사무쳤다. 단번에 짧은 시간에 불에 지지거나 몽둥이질을 당하거나 물 고문을 당한다면 참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수년 동안 계속 이어진다면 그 고통은 사람으로서 감내하기 정말 힘든 것이다. 그가 얼마나 고문을 견디기 힘들었으면 검속에서 집으로 돌아와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순사들이 체포하러 왔는데 “나는 도저히 다시 감옥에 갈 수 없소. 부인 나는 어찌하면 좋소.”하면서 아내에게 하소연했다. “목사님, 어찌 이러십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피한다면 어찌 주의 종이라 할 수 있겠어요. 성도들이 목사님을 보고 있습니다. 목사님 다시 힘을 내셔야 합니다.”라며 부인이 냉정하면서도 단호하게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자 주 목사는 허공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내 마음을 다잡고 옷깃을 다시 여미며 의연한 모습으로 순사들에게 연행돼 갔다.
결국 주기철 목사는 1944년 4월 21일 평양교도소 병감에서 순교의 제물로 바쳐졌다. 초췌하고 병든 그의 육신이 죽어서야 비로소 일제의 손아귀에서 놓여나게 된 것이다. 해방 후 교회는 신사 참배했던 교회와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교회 간 극한 갈등으로 분열을 거듭했다.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한 결과 몇 년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조국의 산하를 피로 물들였다.
1963년 우리 정부는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에 주기철 목사를 추서(追敍)했고, 2006년 4월 17일 예장통합 평양노회는 67년 만에 그의 목사직을 복권했다. 2015년 3월 24일 그의 고향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세워져 일사각오의 순교신앙의 발자취를 남기고 떠난 그의 신앙과 애국심을 기리고 있다.
이금희 발행인, 박정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