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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객 형가 ■
연나라는 현재의 북경을 중심하는 지방에 근거를 둔 전국칠웅 중의 한 나라이다. 현재도 북경을 연경(燕京)이라고 부른다. 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나라는 조(趙)와 제(齊) 두 나라였다. 연나라가 압박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나라의 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연나라로서는 조나라나 제나라와 연합해서 직접적인 압력이 없는 진나라에 대항하려고 하는 직접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조와 제 두 나라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진나라와 동맹을 맺어야할 이유는 분명하다. 조나라는 동쪽의 연나라를 치려고 할 때, 서쪽에 있는 진나라의 움직임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연나라가 손을 잡을 상대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진나라다. 강대해지기 전의 진나라도 동쪽에 있는 삼진(三晋 : 한위조 세 나라를 말함.)으로부터의 압력을 줄이기 위해 그 배후에 있는 연나라와 손을 잡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연횡론과 합종론은 그 이론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효과적이기는 했지만 현실이란 이론대로 진행되지 않는 법이다.
연나라와 진나라의 관계가 우호적이었다고는 하나, 전국시대 말기에 진나라가 삼진을 병합할 무렵이 되자, 그것이 계속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완충지대가 없어졌으므로 차차 연나라도 진나라의 힘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 전야에 있어서의 가장 극적인 사건을 말한다면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단연 연나라의 태자 단이 형가라는 자객을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암살이란 행동은 비상수단을 말한다. 달리 취할 수단이 없어 할 수 없이 실행한 것이다. 이제까지 우호적이었던 진과 연 두 나라는 순식간에 그 관계가 악화된 것이다. 압력을 받고 있는 연나라로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전혀 방법이 없었다. 암살이라는 매우 극단적인 방법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은 연나라의 당황함과 곤혹함을 여실히 말하는 것이다.
" 마침 연나라의 태자 단이 진나라에 불모로 있다가 달아나서 연나라로 돌아갔다. 연나라의 태자 단은 한 때 조나라에 볼모로 있었다. 그런데 진시황은 조나라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단과 친하게 지냈다. 진시황이 진나라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태자 단은 진나라에 볼모로 와 있었다. 진시황이 태자 단을 잘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달아난 것이다. 그는 연나라에 돌아온 다음에 진왕을 암살할 수 있는 자객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응후(應侯) 범수(范雎)의 뒤를 이어 진나라의 재상이 된 사람은 연나라 출신의 채택(蔡澤)이었다. 당시 그는 이미 진나라의 재상을 그만 두었지만 강성군(剛成君)에 봉해져 진나라의 국정자문을 맡고 있었다
▶범수(范睢)/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55년에 죽었다. 전국 때 진나라의 대신을 지냈으나 원래는 위(魏)나라 출신이다. 이론과 변설에 능했다. 남의 모함을 받아 위나라의 재상 위제(魏齊)에게 잡혀 곤장을 맞은 치욕을 당하여 중상을 입었다가 일부러 주검을 가장하여 목숨을 구해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바꾸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나라의 소양왕에게 여러 번에 걸쳐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여 군주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당시의 실권자인 양후(穰侯) 위염(魏冉)의 전횡과 발호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양왕은 위염이 갖고 있던 승상의 직을 회수하여 범수에게 주고 지금의 하남성 보풍현(寶豊縣) 서남쪽의 응(應)을 식읍으로 내리고 응후에 봉했다. 그가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기간 중 진나라를 제외한 육국에 대한 외교를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에 입각하여 각개격파 전술을 사용했다. 진(秦)과 조(趙)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전국시대 때 제일 큰 싸움이었던 장평대전 후 명장 백기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를 대신하여 친구 정안평(鄭安平)을 천거하여 싸움에 임하게 했으나 출전할 때 마다 싸움에서 패했다. 이를 두려워한 범수는 스스로 진나라의 재상 직에서 물러났다. 일설에 의하면 소양왕이 그의 죄를 추궁하여 사형에 처했다고도 한다. <사기열전 범수채택(范雎蔡澤) 열전> 참조
▶채택(蔡澤)/ 전국 때 범수에게 유세하여 그를 진나라의 재상의 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대신 그 뒤를 이었다. 연나라 출신이다. 일찍이 변설에 능하여 여러 군소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며 유세를 행했으나 아무도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후에 진나라 재상에 있던 범수가 자기의 친구인 정안평을 백기의 후임으로 천거하여 조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안평이 조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나라로 들어가 범수의 소개로 소양왕을 접견하고 객경(客卿)으로 임명되고 이어 얼마 후에 범수를 대신하여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재상이 된지 몇 달 후에 진나라 사람들이 모함하자 재상의 자리에 물러났다. 그러나 진소양왕은 채택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강성군(剛成君)에 봉했다. 진나라에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소양왕(昭襄王), 효문왕(孝文王), 장양왕(莊襄王) 등을 모시다가 진시황 때는 진나라를 위해 사신이 되어 연나라로 들어갔다.
그는 연나라 출신이었음으로 진나라의 사절로 연나라에 파견되어 양국간의 여러 현안 문제를 협의했다. 그때 두 나라 사이의 협정의 보증으로서 태자단이 인질로 진나라에 보내지게 되었다. 태자단과 진시황은 옛날 어렸을 때에 조나라에 다 같이 인질로 보내져 친구처럼 지낸 적이 있었다고 위에서 언급했다. 당시 진시황의 처지는 도망쳐버린 아버지 장양왕이 남겨 놓고 간 쓸모 없는 인질의 아들이었다. 진시황이 진나라에 송환된 해는 그의 나이 9살 때였다. 이에 태자단은 자기가 진나라에 들어가면 진시황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냉대를 받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태자단은 진나라에서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와 그 원한을 갚기 위해 자객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태자단의 사사로운 원한이 진시황을 암살하려 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태자단이 진나라를 탈주한 것도 양국간의 존재했던 외교적인 마찰도 한 가지 이유였다. 채택이 연나라에 사절로 가서 맺은 조약을 진나라가 위반한 것도 포함되었다. 태자단의 입장으로서는 진나라의 조약위반을 추궁하고 싶었지만 양국 간 국력의 차이가 너무 커 정상적인 방법 대신에 비상수단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즉 태자단은 자객을 이용하여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한 것이다.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자세히 적혀있는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소설적이어서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꾸며낸 이야기로 하는 학자도 많이 있다. 틀림없이 윤색한 부분도 있겠지만 자객 형가(荊軻)의 이야기는 중국에서 2천 년 이상이나 전해지고, 역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로 믿어왔다.
형가는 위(衛)나라 사람이지만 그 조상은 원래 제(齊)나라 사람이었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이미 나라가 비록 달라도 서로 섞여 살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연나라 출신의 채택이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연나라에 사자로 가서 진나라를 위해 외교적인 교섭을 한 것이나, 위(魏)나라 출신의 범수가 진나라를 위해 자기의 조국에 해당하는 위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전국 시대 말기에는 자기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 출신지에 구애받지 않고 각국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형가는 협객을 자처하고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형가는 그들과 비교해서 특이한 점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차(楡次)라는 곳에서 개섭(蓋聶)이라는 검객과 검술에 관해 논쟁을 하다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개섭이 노하여 눈을 부라리자, 형가는 더 이상 다투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유차(楡次)/ 지금의 산서성 유차시(楡次市)로 태원시(太原市) 동남 약 30키로에 있다.
옆에서 입회했던 사람이 형가를 다시 불러 논쟁을 계속 시키려고 했지만 형가는 짐을 챙겨 그 고을을 떠난 후였다. 형가의 행동은 협객 사이에 대장부다운 행동이 아니라고 비난 받았다. 그러나 뜻이 높은 형가는 검의 사용법 따위의 차원이 낮은 문제로 객기를 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나라의 서울 한단성(邯鄲城)으로 흘러 들어간 형가는 노구천(魯句踐)이라는 사람과 도박을 하다가 규칙문제로 다투게 되었다. 노구천이 험악한 말로 고함을 지르자 그때에도 형가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달아난 것이다. 형가에게는 검술과 마찬가지로 도박의 규칙는 다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형가가 다시 연나라에 들어와 개를 잡아 생계를 꾸려나가던 구도(狗屠)라는 사람과 축(筑)이라는 악기를 타던 고점리(高漸離) 라는 사람을 만나 서로 마음이 맞아 매일 같이 연나라 서울인 계성(薊城)의 시장 바닥에서 술을 마셨다. 구도란 사람은 사회적으로 천민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형가는 개의치 않고 친구로 사귄 것이다. 축(筑)은 거문고 비슷한 모양으로 큰 주걱으로 연주하던 현악기의 일종이었다. 축의 명인이었던 고점리가 연주를 하면 형가는 그 가락에 맞추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형가는 술만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독서를 즐기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연나라에 들어와 구도와 고점리 두 사람 이외에도 처사(處士)인 전광(田光)이라는 사람과도 사귀고 있었다.
마침내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진나라에 보낼 자객을 찾고 있던 태자단이 전광이라는 사람이 협객을 많이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났다. 태자단은 전광을 만나 나라의 중대사에 대해 상의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전광은 자기는 이제 너무 늙어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말하며 형가를 대신 추천했다. 태자단은 전광에게 자기가 한 말을 남에게 이야기하지 말고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광은 알았다고 대답을 한 다음, 형가에게 찾아가 그를 태자단에게 천거했다고 알려 주고, 태자가 그 일을 남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부탁한 것은 자기를 의심했기 때문이라 하면서 자기가 죽으면 비밀이 지켜질 것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다.
이윽고 형가가 태자단의 부름을 받고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진시황을 직접 접견하기 위해서는 뭔가 선물을 준비해야 했다. 만날 수 없으면 암살할 기회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만나줄 선물이 필요했다. 형가가 생각한 선물이란 연나라의 독항(督亢)이란 땅과 번오기(樊於期)의 목이었다. 독항이라는 땅을 바치는 의식을 행하기 위해 그는 지적도를 준비했다. 독항이란 지금의 북경시(北京市) 남쪽과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북쪽 일대의 땅으로 진시황이 옛날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번오기는 원래 진나라의 장군으로 진시황을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망명하여 연나라에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진시황은 진나라에 남아있던 번오기의 가족들을 멸족시키고 그의 목에는 1만 호의 식읍과 황금 천근의 현상금을 걸어놓고 있었다. 형가로부터 두 가지 건을 요구 받은 태자단은 독항의 땅은 내 줄 수 있지만 번오기의 목은 줄 수 없다고 했다. 자기를 믿고 망명해 온 인물을 자기 나라의 사정 때문에 죽인다는 것은 의리상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태자가 허락을 하지 않자 형가는 직접 번오기를 만났다. 번오기는 자기의 부모를 비롯하여 일족을 모조리 살해한 진시황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형가는 번오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원컨대, 장군의 목을 얻어 진왕에게 바치면 진왕은 틀림없이 나의 접견을 허락할 것이오. 그때 내 왼손으로 그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찔러 장군의 원수를 대신 갚아 주리라!"
형가의 말은 들은 번오기는 스스로 자기의 목을 쳐서 죽었다. 그는 자신의 목으로 진시황을 죽일 수 있다는 말에 기꺼이 죽음을 택한 것이다.
한편 태자단은 100금의 황금을 주고 서부인(徐夫人)이라는 칼날이 예리한 보검을 사서 그 날에 독약을 발랐다. 상대방에게 실날 같은 상처를 입히기만 해도 목숨을 잃게 되는 맹독을 바른 것이다. 그 외에 태자는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용사를 채용해서 부사(副使)로 삼아 형가를 돕게 했다. 그러나 형가는 모든 준비가 되었음에도 좀처럼 길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부사로 데려갈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정처 없이 세상을 방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자는 형가에게 빨리 길을 출발하라고 재촉했다. 재촉을 받은 형가는 더 이상 출발을 미룰 수 없었다. 형가 일행이 진나라로 길을 떠날 때 태자와 그 빈객들이 상복을 입고 역수(易水) 강안까지 나와 전송했다. 일의 성사 여부를 떠나 그 두 사람은 살아 돌아 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상복을 입은 것이다. 역수의 강안에서 주연을 마련하자 형가는 친구인 고점리가 켜는 축의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風蕭蕭兮易水寒(풍소소혜역수한)
바람은 소슬하고 역수(易水)는 차가운데
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일거혜불부환)
장사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探虎穴兮入蛟宮(탐호혈혜입교궁)
호랑이 굴을 찾음이여 이무기 궁으로 들어가네
仰天噓氣成白虹(앙천허기성백홍)
하늘을 우러러 외치니 흰 무지개가 서도다!
형가는 보검인 서부인을 독항의 지도 속에 감추었다. 이윽고 형가가 진나라의 서울인 함양성에 당도하여 진시황을 알현하게 되었다. 형가는 번오기의 목을 담은 함을 들고 계단을 오르자, 부사인 진무양은 지도를 받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진시황이 앉아 있던 옥좌를 향해 계단을 오르던 진무양은 진나라 호위병들의 위용에 압도되어 얼굴이 새파래지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연나라에서 용사로 소문난 진무양은 진짜 용사가 아니고 담력이 없었다. 태자단은 사람을 잘 못 고른 것이다. 형가는 마음속으로 혀를 차면서, 진무양을 향해 뒤 돌아보았다가 다시 계단을 올라 진시황을 향해 말했다.
" 북방의 촌놈이 이제까지 천자를 배알한 적이 없어 저처럼 떨고 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장면을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진무양은 진왕 근처의 호위병을 보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위에 대열하고 있던 신하들이 이를 보고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자, 형가는 혀를 차고는 진왕에게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 "북쪽 오랑캐 땅에 살던 촌부가 대왕을 배알하게 되어 황송하고 두려워 벌벌 떨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대왕께서는 저 사람의 무례를 용서하시어 어전에서 저희 사명을 완수 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진왕이 형가에게 "무양이 든 지도를 가져오라"라고 하지 형가는 뒤에 서 있던 진무양에게 지도를 받아들고 진왕의 앞에 나아가 지도를 바쳤다. 진왕이 두루마리를 펼치자, 끝자락에 말려 있던 서부인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재빨리 형가가 왼손으로 진왕의 옷소매를 붙잡고는 오른손으로 서부인을 잡아 앞으로 내찔렀다. 그러나 깜짝 놀란 진왕이 손을 뿌리치며 뒤로 물러서자 그만 소매가 찢어지며 형가는 진왕을 놓치고 말았다. 진왕은 재빨리 허리 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맞서려 하였지만, 그 검은 예식용이었던 탓에 다른 검보다 조금 길었고, 빨리 검을 뽑을 수 없었던 진왕은 계속해서 형가가 휘두르는 서부인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진나라의 법에는 그 어떤 사람도 어전에서는 단 한 치의 쇠붙이라도 지닐 수 없었고, 무기를 든 시종 무관들은 모두 어전 아래쪽에 도열하고 있었으나 어명이 없이는 감히 위로 올라와서는 안되었다. 때문에 신하들이 이에 대응치 못하고 당황하고 있기만 하였으니 형가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 진왕이 재빨리 몸을 피해 기둥 둘레를 돌며 형가의 검을 피하고 있자, 시의 하무저夏無且가 재빨리 휴대하고 있던 약봉지를 형가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이에 형가가 잠시 멈칫하자, 신하들이 일제히 "전하! 검을 등에 지소서!" 하고 외쳤고 진왕은 한 손으로 재빨리 검집을 등에 지고 아래로 잡아당겨 칼을 뽑을 수 있었다.
검을 뽑아든 진왕은 형가를 덮쳐 왼쪽 허벅지를 베었다. 근육이 끊겨 쓰러져 일어날 수 없게 된 형가는 재빨리 서부인을 진왕을 겨냥해 던졌으나 맞지 않았다. 진왕이 계속해서 8번 검을 내리쳐 형가에게 중상을 입었다. 일이 실패했음을 깨닫게 된 형가는 간신히 몸을 추스려 한 다리를 괴고 편히 앉아 피거품을 물고 미소를 머금으며 진왕을 향해 말했다.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은 천운이다. 허나 그대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하게 된 것이 한이로구나"
진왕이 이와 마주하고 있을 때, 좌우의 신하들이 달려들어 형가를 죽였다.
한편 형가의 친구 고점리는 형가가 진왕을 암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 그의 지인들에 대한 수배가 내려질 것을 예감하여 이름을 감추고 어느 지방으로 내려가 한 부호의 하인이 되어 일하며 몸을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의 집에서 큰 잔치가 벌어졌는데, 시중을 들던 고점리가 나지막히 잔치 중 축을 뜯는 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저열한 연주라 평하였는데, 이를 같은 하인이 귀담아 듣고는 주인에게 고했다.
주인이 고점리를 불러다가 골탕을 먹일 생각으로 그렇다면 네놈이 한번 연주해 보거라 하자, 고점리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축을 안고 연주를 시작하였다. 그가 한 곡을 끝내자 숨을 죽이고 고점리의 연주를 듣던 이들은 모두 환호하며 그를 추대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점차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연주를 펼치는 축의 달인 고점리의 소문이 이리저리 퍼져나가, 마침내 진왕의 귀에도 고점리의 이름이 들어왔다.
진왕이 그를 불러 연주를 들어보자, 매우 흡족하여 그를 궁중 악사로 채용하려 하였는데, 그때 신하 중 한 명이 고점리가 바로 그 형가의 친구였다 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솜씨가 무척 마음에 든 진왕은 차마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다만 두 눈을 멀게 한 뒤에 궁중 악사로 채용하였다.
진왕은 그의 연주를 매우 좋아했다. 때문에 그에게 독주를 명할 때가 꽤 있었고, 그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고점리의 마음 속에서는, 자신의 벗 형가를 죽인 진왕에 대한 맹렬한 복수심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몰래, 축의 안에 납을 채워 넣고는 진왕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진왕이 주위를 물리곤 혼자 술 상을 차려놓고 고점리에게 연주를 명하곤 앉아 눈을 감고는 손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며 감상했다. 비록 눈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왕의 박자가 점차 느려지는 것을 느낀 고점리는 진왕의 의식이 점차 흐려지고 있음을 눈치 채고는, 진왕에게 다가가 납을 채운 축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일격은 빗나가고, 깜짝 놀란 진왕은 바닥에 흩어진 축의 파편과 납들을 보고는 크게 노하여 고점리를 붙잡아 거열형에 처해 죽였다. 진왕은 이 일 이후 자신이 멸한 나라의 사람과는 결코 면담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진왕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해는 진시황 20년 기원전 227년이다. 조나라는 그 전해에 이미 멸망했다. 다음해인 기원전 226년에 진시황은 대군을 연나라에 보내 그 도성인 계(薊)를 공격했다. 연왕과 태자단은 진나라의 공격을 피해 요동으로 달아났지만 진나라 군사들은 끝까지 그들의 뒤를 추격했다. 연왕은 태자단의 목을 베어 진시황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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