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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람의 깊이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시적 상상력과 80년 광주 오월의 의미
“원탁시” 회원 시 해설
<시인, 문학평론가> 박철영
1.
80년 광주의 5월만큼은 시대가 바뀌었는데 변한 것이 없다. 먼 과거의 일 같지만, 묻어버릴 수 없는 상처가 너무 커 심리적 상처에 대한 회복도 쉽지 않다. 어김없이 1980년 5월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물지 못한 상처를 반복해 말해야 하고 그래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때마다 아픈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사람들은 괴롭다. 그래도 말을 해야 한다. 세상이 변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고행을 묵묵히 수행하는 시지프스처럼 시인들은 시로써 말해야 한다. 40년을 말해왔는데 못다 한 말이 아직도 많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시인들은 광주의 진실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음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문학은 진실을 향해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과 변화를 촉구하며 시대정신의 기저를 서사로 해서 이뤄진다. 응당 시인들이 역사에 가담하는 것은 매우 진실한 행동이고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고 살려는 양심을 실천하는 숭고한 행위이다. 시가 있어야 할 자리가 그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원탁시” 회원들은 시를 통해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의 의미를 진실에 대한 회복을 위한 계기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문학적 담론보다 역사적 담론에 대한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취지가 분명하다. 광주의 진정한 진실을 국가가 주체가 되어 낱낱이 밝혀줄 때까지란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러한 발언은 이미 임동확 시인의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의 평에서도 필자가 밝혔듯이 “극히 사적(private)인 언표로 발화된 시가 공적(public) 의미로 전환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개별적 의미로는 소수라는 범주에서도 아예 제외된다. 그런 언어는 무관심과 왜곡된 ‘우리’라는 사회에서 당연히 불편하고 배타적인 언어로 치부하려 한다. 설령 긴 사유의 시간을 거쳐 시적 의미를 담아낸다 해도 관심에서 이내 사라진다. 그러나 80년대라는 고통의 속살이 표피로 밀려 나와 나뭇등걸의 흉터로 인지된다면, 만지고 싶은 충동은 강해진다. 약한 자에게 고통으로 남은 1980년대의 상처는 국가 권력이 저지른 전횡의 결과다. 그 영향은 198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소멸되지 않았고, 격절되지 않은 시간은 작금에 이르러 독특한 시 공간에서 구별하어 거듭 호명되어야 한다. 그 시간을 “어제이자, 오늘이며, 내일”이라고 말한 마샬 버만(marshall berman)의 모더니티(modernity)를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따라서 ‘1980년’이라는 지시어는 특정한 시대만을 개념 하는 것이 아닌 도래하는 미래의 시간까지를 함의한다. 출발은 과거였지만, 현재도 진정되지 않았고 진폭은 강한 추동력을 충동하고 있다.“ 고 필자는 말한 적이 있다. ‘80년 광주 5월’이 40여 년이나 흘렀지만, 바로잡히지 않는 역사의 진실을 많은 사람들은 우려한다.
2.
“원탁시” 회원들의 시적 동기는 변함없는 광주의 진실을 바로 세우겠다는 사명이고 의지일 것이다. 열일곱 분의 시들을 통해 역사의 진실과 문학의 길항 관계에서 오는 소명까지를 담론 형식으로 접근해보려고 했다. 그 바탕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보편적 윤리의식에서 지지되고 공감할 수 있는 실존과 존엄을 민주 시민에 대한 인권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아침 점호가 끝난 후
밥을 얻어먹기 위해 편지를 썼다
“지금 광주 일원에게 자행되고 있는 폭동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들의 책동이오니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열심하기 바랍니다”
시민들이 계엄군과 맞서 싸울 때
불러주는 대로
군복 소매를 떨면서 편지를 썼다
겨우 두 살짜리 조카가 시민군이 지나갈 때면
주먹밥 나르던 누님의 품에 안겨 손을 흔들었다지만
나는 한 끼 밥을 얻어먹기 위해
날마다 광주를 향해, 허튼소리를 해댔다
참으로 치사한 밥,
그 밥에 침을 뱉으면서도
살기 위해 목구멍에 밥을 밀어 넣었다.
-강경호, <치사한 식사> 전문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양심은 무엇인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마음으로 평형을 유지해주는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도덕에 앞서는 양심이라는 균형추가 작동된다는 것이다. 강경호 시인은 양심 속에 간직하고 있던 과거의 특정한 사건을 어렵게 끄집어냈다. 늦었지만, 치욕적일 수 있는 사례 노출을 통해 왜곡된 80년 광주의 5월이 얼마나 잘못 인식되고 있었던가를 증언하는 양심선언이라고 봐야 한다. 시인은 그 당시 군에 입대하여 복무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강경호 시인의 산문 일부를 참조하고자 한다. 어느 날 전라도 병사라는 이유만으로 최전방에서 강경호 시인은 느닷없이 호출당한다. “5월 18일, 갑자기 전라도 새끼들 점호장으로 집합!’ 살벌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때 나는 입대한 지 15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어 휴가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전라도 새끼들은 영문도 모르고 점호장에 집합했다. 간부 하나가 “전라도 새끼들은 빨갱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정신교육이라는 것을 했다. 말이 정신교육이지 전라도를 성토하는 자리였다. “김대중이 빨갱이 새끼!””라고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매도당하며 불온한 행위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증언이다. 광주 민주화 항쟁 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많은 군인들이 행한 광주 시민에 대한 신체 훼손 및 가혹 행위에 대한 참회와 증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는 대비되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요즘도 잊을 만하면 튀어나와 선동하는 그 무리들이 사주한 강압에 못 이겨 “시민들이 계엄군과 맞서 싸울 때/ 불러주는 대로/ 군복 소매를 떨면서 편지를 썼다”며 80년 광주 민주화 항쟁을 왜곡 전파했던 시인은 늦었지만, 잘못한 행동을 통렬하게 참회하고 있다. “겨우 두 살짜리 조카가 시민군이 지나갈 때면/ 주먹밥 나르던 누님의 품에 안겨 손을 흔들었다지만/ 나는 한 끼 밥을 얻어먹기 위해” 두 살짜리 조카아이만도 못한 부끄러운 과거를 살아온 양심에 반한 행위를 자성하고 있다. 시인에게 면죄부에 따른 더 큰 사명이 기다리고 있다. 정의를 위한 헌신뿐만이 아니라 문학을 통한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부담도 시인의 몫으로 감당해야 한다. 시는 자아의 진전과 내면의 성찰을 통해 시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는 문학적 언표 행위이다. <치사한 식사>는 그런 면에서 시적 의미의 반전을 통해 사회 윤리의식의 엄결성을 제기하며 시인의 문학적 신념에 의해 표출되었다. 당시의 사실을 기록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또 다른 신념을 가진 시인도 있다.
나는 껌팔이 소년
원장님을 따라 소년 재활원에 들어간 나는
구두닦이를 하며
용돈을 벌었죠
최루탄이 터지자
모두들 혼비백산 도망갔어요
구두통을 목에 걸고
오늘 번 일당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달렸지요
고아로 태어나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본 적 없지만
왜 김대중을 석방해야 하는지 전두환이 물러가야 하는지
잘 모르지만
형과 누이들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충장로, 금남로, 지하도가 공포로 가득 찬 것을 보면서
세상이 한참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어요
떠날 수는 없었지요
금남로는 나의 집
목이 관통당한 내 몸은
찔리고
트럭에 태워져서
망월동에 버려졌어요
-강대선, <혼불 5_김재형 님> 전문
빙의된 망자의 전언을 받아 적은 시들 중 한 편이다. <혼불> 연작시는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을 위한 진혼시다. 한을 품고 죽음에 이른 영혼을 대신하여 비통해하는 대속자의 자세로 쓴 시임을 알 수 있다. 강대선 시인은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죽어간 영령들과 접신한 후 죽은 자의 입을 빌어 들은 사연을 기록하고 있다. 흔히 광주의 당시 상황을 불순한 집단이 벌인 폭동쯤으로 폄훼하거나 왜곡하기를 권력자들은 밥 먹듯이 정당화 해왔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강대선 시인은 5월 영령들의 죽음 이전의 행적을 더듬어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자 한다. ‘김재형’님의 경우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분명한 것은 정치나 국가 통치 체제에 관심도 없었던 그야말로 하루 세끼 행복을 위해 열심히 구두만 닦아온 평범한 소년이었다는 증언이 애처롭다. 죽음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형과 누이들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충장로, 금남로, 지하도가 공포로 가득 찬 것을 보면서/ 세상이 한참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어요”라는 가장 인간적인 항변이다. 순수했던 소년의 가슴에는 좌익 사상이나 정치적 의식은 티끌만큼도 없었다는 것이다. 소년의 눈에는 삼천리강산이 아름다운 것처럼 양심에 충실한 자아로 옳고 그름만을 생각하며 행동했을 뿐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김재형 님은 우리가 아무리 불러도 이 세상에서 다시 뵐 수 없는 소중한 영혼이 되었다.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는 별들이 무수히 많다. 홀로 반짝이다 사라지는 밤하늘의 별들처럼 광주의 80년 그날 우리의 이웃들이 죽음을 맞아 곁을 떠나갔다.
세찬 폭풍우가 몰아쳤다
도저히 별이 뜰 것 같지 않던 그날
짙은 어둠마저
설 곳 없는 개펄로
스멀스멀 내리던 그날
나무들도 세차게 몸을 떤다
개구리들마저 속울음 울던 그날
하늘은 어두웠다
길마저 몸을 숨겨버린 하늘
새벽에 가닿기 전
우리는 별처럼 반짝일 수 있을까
아직 폭풍우는 그치지 않았는데
가시 돋은 바람은 언덕 하나 넘었을까
길이 어디냐 물어도 대답없는 어둠 뿐
밤하늘 살갗 뚫고
불그스레한 낯빛 하나가 막 지고 있다
망월, 그 언덕에 그림자로 선다
-고선주, <망월(望月)> 전문
누구나 한두 번쯤 고단한 생을 살며 넘어야 할 고개가 있다. 인생 고개라고 말하는 그곳이 민중의 정서에 녹아있는 아리랑 고개다. 아리랑 고개는 야트막한 언덕에도 있고, 험난한 산길에도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고개를 넘으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감내하는 것은 언제나 힘없고 지친 민중의 어깨를 교교히 비춰주는 달빛이 있어서다. 시인은 80년 광주라는 험난한 아리랑 고개를 기억한다. 그 고갯길은 멀고 고통스럽다. 고갯길을 넘을 때마다 고요도 숨죽이고 어둠의 사위를 밝히다 지쳐가는 망월은 달빛을 풀어놓곤 했다. 망월은 만월인 보름달을 가리키고, 보름달은 원형으로 꽉 찬 달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서정의 한 장면 속에 있어야 할 망월(望月)은 광주에서만큼은 그렇질 못했다. 그날따라 폭풍우가 몰아쳐 별도 뜨지 않았다는 “나무들도 세차게 몸을 떤다/ 개구리들마저 속울음 울던 그날/ 하늘은 어두웠다”는 밤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80년 광주 오월’은 애먼 민중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울분에 찬 가슴뿐인 생목숨에 가차 없이 총검을 휘둘러대는 군인(공수부대원)들에 이유도 없이 죽임 당한 영령들이 있다. 지금도 그날의 뜨거운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해 귀를 열고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 광주의 망월동 묘역이다. 시인은 막막한 시대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답답할 때마다 망월동 묘역을 찾았을 것이다. 망월동에 묻힌 영령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시인뿐만이 아니라 민족의 나아가야 할 길을 수없이 되물었을 것이다. 고대하던 대답 대신 “밤하늘 살갗 뚫고/ 불그스레한 낯빛 하나가 막 지고 있다// 망월, 그 언덕에 그림자로 선다”는 데 그 빛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영령들의 영혼임을 알아야 한다. 죽음 직전의 생을 위로하듯 제사의식에서는 생전의 밥상을 차려 제의를 치른다. 그분들의 목에 아직도 삼키지 못한 밥 알갱이가 맺혀 있을 것 같은 가슴 아픈 추억으로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 당시의 주먹밥을 잊을 리가 없다.
광주의 엄마들은 침묵으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거리 곳곳에 솥을 걸고
흰 쌀밥 고슬고슬하게 지어
둥글게 빚은 주먹밥
무명의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던
아낌없이 온정을 베푼
그 주먹밥 한 덩이가 40년 전
오늘 이렇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광주의 엄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함께 했다는 것에
그 정신에 감동의 물결 몰아친다.
고립된 광주에서 우리는 폭도가 아니었기에
신군부의 진압에 맞서
광주의 힘으로 5.18 민중항쟁을 이끌었다
민주화 운동 기간 동안 자율적으로 참여하여
질서를 지키며 단 1건의 범죄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광주의 정신을
이 주먹밥으로 증명하련다.
-김은아, <주먹밥> 전문
80년 광주의 오월은 소수의 불순한 사람들이 사주해서 촉발된 폭동이 아님을 방증하는 사례 시다. 금번 “원탁시” 회원들의 시 대부분은 개별적으로 인지한 당시의 진실에 근거한 서사성을 견인해준다. 그 당시를 가장 생생하게 인지할 수 있는 대다수 광주 시민들의 참여로 드러난 민중 의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군부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폭동 진압이라는 작전에 용기 있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거리 곳곳에 솥을 걸고/ 흰 쌀밥 고슬고슬하게 지어/ 둥글게 빚은 주먹밥/ 무명의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던/ 아낌없이 온정을 베”풀어준“광주의 엄마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헌신적인 참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것은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이 참여한 민중 항거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군부가 진압 명분으로 내세운 불순한 명분이 허구라는 것은 광주 시민들의 질서 있는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 “민주화 운동 기간 동안 자율적으로 참여하여/ 질서를 지키며 단 1건의 범죄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광주의 정신”이 확실한 증거다. 되레 계엄군에 의해 자행된 살육과 같은 참극은 도덕성을 상실한 신군부 세력에게 부메랑처럼 고스란히 돌려져 버렸다. 그들의 행위를 광주 시민들뿐만이 아니라 광주의 신산인 무등산은 다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식은 자의 가슴에 불을 넣는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불을 넣는다
귀먹고 눈 먼 자에게도 불을 넣는다
아아 무등산 고여도 넘치지 않는 바다
아아 무등산 죽음의 허리에서 눈뜨는 불씨
아아 무등산 끝끝내 끝까지 가득하던 山
강추위와 찔찔거리는 눈물과 째째한 목숨과
닫힌 방과 얼어붙은 감탄사와 쓸갯물까지
새벽에서 밤중까지 흘러내리지 않게 쓸어안고
흙 아닌 자 흙으로
인간 아닌 자 인간으로
모두모두 앉은뱅이에서 일으켜 세우며
크고 무서운 하늘의 말씀으로 굽어보고 있나니.
-김종, <無等山> 전문
우리 민중의 정서에는 산이 항상 존재한다. 집터를 잡아도 동네 뒷산을 울타리 삼아 살았고 죽어 묻혀 산으로 돌아갔다. 그렇기에 우리 민족을 살궈낸 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아침 눈 뜨면 바라보는 산을 통해 하루를 시작했듯 “식은 자의 가슴에 불을 넣는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불을 넣는다/ 귀먹고 눈 먼 자에게도 불을 넣는다”며 새로운 마음으로 각성하게 된다. 그 산에서 사람이 태어났고 죽어서는 무등산의 하늘 아래 새인봉의 소나무가 되거나 서석대의 입석이 되어 산다. 어차피 산에 들어가도 산사람이듯 산에 나와서도 무등을 닮은 산 사람이었으니 무등산을 품은 광주에는 좌익도 우익도 없었다. 무등산은 잘난 놈과 못난 놈으로 편도 가르지 않았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도 어머니의 마음으로 품어 줄 뿐이다. 모두 다 무등산에서 나온 한 족속이었으니 내칠 수가 없는 것이다. 김종 시인의 시를 읽다 범대순 시인의 <백년전쟁>의 시가 떠올랐다. “백년전쟁은/ 남의 현장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간이 불나고/ 허파에 흙이 묻었다// 3·1이든 8·15든 6·25든/ 4·19, 5·16이든 5·18이든/ 뜨겁게 있었지만 그러나/ 늘 나는 지는 쪽에 있었다// 마음속 푸른빛은/ 급하게 구름으로 바뀌었다/ 눈치 보며 뒷걸음치는/ 늘 꾸부정한 신장이었다// 봄날 무등산 무돌길/ 쑥국새 울고 진달래꽃 피어도/ 너무 먼 나팔 소리 만세 소리/ 백 년은 그렇게 늘 지는 역사”였다지만 그렇지 않았음을 본다. 범대순 시인의 “늘 나는 지는 쪽에 있었다”는 말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김종 시인의 <無等山>은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침묵하고 인내하는 무등산의 의지에서 세상과 당당히 맞서겠다는 행위를 견인하고 변화를 추동하기 때문이다. 단군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서 신시를 열었듯이 무등산에서 새롭게 생동하는 기운은 지금껏 답습해온 인내를 넘어 “흙 아닌 자 흙으로/ 인간 아닌 자 인간으로”라며 자연 질서와 닮은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자는 궐기이다. 인간의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꽃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꽃 중 가장 아름다운 색깔로 피는 꽃
사람이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팔십 년 오월 금남로에서 보았다
꽃 덩굴은 골목에서 줄기차게 뻗어 길고 두터웠다
첫 잎에서 재가 될 때까지 하늘로 솟는 불꽃
꽃은 져 어둠에 묻혀도
잿 속에 숨어 있다가 개화 때가 되면
활화산처럼 부활하여 어둠을 벼리는 칼이 된다
군홧발에 짓밟혀도 꽃잎은
색깔 하나 변치 않고 땅 속에 붉게 몸을 묻는다
꽃이 민주의 불꽃이었던 5월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꽃잎을 폈으며
그리고 무엇을 불빛에 살라버렸던가?
어둠이 깊어지면 새벽으로
꽃은 모여 화염이 된다는 것을
임 보낸 금남로에서
짝 잃고 버려진 신발에서도
오월은
무더기로 꽃을 피웠지
뒤돌아보면 안개 속
싸움이 사라진 뒤에도
꺼지지 않도록 다독여 불씨를 부는 일은
우리들의 일
꽃은 토네이도 속에서도 부활한다
-박판석, <광주, 불의 꽃> 전문
그 꽃은 아무 때나 피고 지는 꽃이 아니다. 분명한 계절에 대한 감각을 씨앗부터 품어온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의지대로 개화의 시기가 조작되어 피는 꽃은 진정한 꽃이 아니다. 그 꽃은 본래의 색깔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꽃은 사계절을 분별하지만, 사람은 때와 장소를 분별하지 않는다. 꽃은 계절 변화에 따라 색깔을 드러내며 피고 지지만 사람은 가슴이 뜨거워지면 얼굴색이 변한다. 세상이 정의롭지 않았을 때 분노에 찬 화색은 절망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뜨거운 가슴으로부터 영혼을 자극받아 발산하기 때문 꽃보다 더 강렬한 자의식으로 표출된다. 우리는 죽음을 불사한 그런 사람들을 열사라고 하며 정의의 화신이거나 광주 항쟁의 꽃이라고 말한다. 들에 핀 꽃들도 무명초에서 피어나듯 죽어서 또는 살아서 꽃이 된 사람들도 그저 들꽃처럼 순수했던 우리의 이웃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박판석 시인은 금남로에서 계엄군에 의해 “군홧발에 짓밟혀도 꽃잎은/ 색깔 하나 변치 않고 땅 속에 붉게 몸을 묻”었던 80년 광주 항쟁 때 죽어간 영령의 모습으로 환기하고 있다. 그 꽃은 계엄군에게 쫓기며 미처 챙기지 못한 주인 잃은 “짝 잃고 버려진 신발”짝에서 핀 꽃이다. 토끼몰이하듯 했던 신군부가 내려 보낸 공수부대원들의 악랄한 패악을 추궁하고 있다. 패악의 죄는 물어도 끝이 없다. 추궁할 죄의 목록에 전시戰時도 아닌데 상상할 수 없는 광주의 하늘에 헬리콥터가 날아들었다.
어릴 적
온 하늘을 덮은 시커먼 까마귀 떼를 보았다
불안과 저주의 기운 땅 위에 뿌리며
순식간에 새싹 돋아나는 보리밭에 내려앉아
일제히 쪼아대고 일제히 이륙하는
무서운 까마귀 떼
80년 5월 27일 신새벽
지산동 옥탑방에 살던 나는
두두두두두두 소리에 잠을 깨어 밖으로 나가 보았다
무등산에서 금남로까지 하늘에 시커먼 까마귀 떼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야! 죽을라고 환장했냐 빨리 들어가!”
총소리처럼 울리는 그 소리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창틈으로
그 까마귀 떼 도청 상공을 빙빙 도는 것이 보였다
폭포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금남로가 우두두둑 꺼지고
광주천 흐르던 물줄기가 땅속으로 잠겼다
그날 신새벽
집집마다 억장 무너지는 소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무등산이 말없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수인, <헬리콥터> 전문
소름 돋는 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다. 시인에게 까마귀 떼는 어린 마음속에 불편한 존재로 각인되어있다. 당시의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청보리 새싹 때부터 잘 관리가 되어야 할 보리밭에 까마귀 떼가 순식간에 여린 싹을 망쳐버린 탓이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학습된 나쁜 것에 대한 기준이 되었다. 그런 시인에게 까마귀 떼처럼 검은 빛깔로 날아오는 헬리콥터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광주에서 목격하게 된다. 나쁜 것은 어둠처럼 검은 색깔을 띠고 있다. 신군부 세력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흑심黑心도 그와 다르지 않다. 계엄을 선포하고 치안 유지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투입한 것도 이해 불가다. 그것도 모자라 도청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하고 하늘에 헬리콥터를 띄워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는 대한민국 국군사에 씻지 못할 치욕적인 일이 벌어졌다. 지금도 살아있는 신군부의 무리들은 아니라고 변명하지만, 하늘에 뜬 헬리콥터에서 쏘아대는 총격을 구분 못할 우매한 광주 시민은 아니다. “80년 5월 27일 신새벽/ 지산동 옥탑방에 살던 나는/ 두두두두두두 소리에 잠을 깨어 밖으로 나가 보았다”는 백수인 시인은 그 광경을 몸소 목격한 산 증인이다. 그 사실적 정황은 ““야! 죽을라고 환장했냐 빨리 들어가!”/ 총소리처럼 울리는 그 소리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창틈으로”라며 체험하지 않으면 재현할 수 없는 광경을 생생하게 진술하고 있다. 진실은 구전처럼 끝없이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컴퓨터 앞에 편안히 앉아
이것저것 인터넷 서핑에
각국의 사정도 살펴보고
양동 시장에서
찬거리 장 봐서 밥 해 먹고
기독교 병원에서 건강검진도 하고
한동안 집안청소에
내일 수업할 강의 준비하다가
무등산 골짜기
맑은 물 흘러가는 소리 듣고 싶어
산책길 나선다
배고픈 다리 근처 숙실 마을 가는 길섶
마삭꽃 향기 환한 숲 그늘 서성일 때
깃대봉에서 총알처럼 날아오는
검은 새 한 마리
과녁이라도 발견한 듯 귓전을 스친다
그 순간 5.18민주항쟁 사적 13호 표지석이
우뚝 내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오늘 일상의 자유와 평화가
표지석 횃불 따라 일렁거린다
1995년 광주로 이사 온 봄
망월동 묘지에 늘어 선 검은 만장의 행렬 앞에
분노와 슬픔과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가슴이 꽉 막힌 듯 어질거렸다
강원도에서, 경상도에서 어렴풋이 들은 5.18민주화운동은
혼돈과 왜곡 속에 묻혀 버린 진실이었다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에게
사용한 51만발의 실탄과 무기는
군인들에게 지급된 80만발의 부분이었다는 수치는
광주시민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는 추측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어디에 묻혀 있는지
어느 보일러실에서 불태워졌는지
그들의 죽음과 저항 위에
오늘의 일상은 안위되고 있다.
-서승현, <홍림교에서> 전문
서승현 시인은 80년 광주의 오월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이후 광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시인은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일 뿐이지만, 광주라는 지역이 안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은 광주에 살아서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의무이자 권리이다. 1연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2연에서 “깃대봉에서 총알처럼 날아오는/ 검은 새 한 마리/ 과녁이라도 발견한 듯” 시인의 이성을 충격하는 순간 익히 들었던 광주 5월의 총격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은 데자뷔처럼 다가오는 무의식에 감전된 의식에서 때로는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시인이 서 있는 바로 앞에 “5.18 민주항쟁 사적 13호 표지석”이 있었던 것이다. 강원도나 경상도에 살면서 잘못 알고 있었던 광주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쯤에서 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시는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시인은 80년 광주의 진실을 표지석을 통해 사실성을 확인해준다. 권력에 의해 조장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모순된 사회를 정상 궤도로 복귀하게 하는 동력이고 그것이 올바른 시인 의식이다. 당시 광주에서 계엄군이 사용했다는 51만 발의 실탄에 의해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어디에 묻혀 있는지/ 어느 보일러실에서 불태워졌는지/ 그들의 죽음과 저항 위에/ 오늘의 일상은 안위되고 있다.” 는 시인은 만약을 우려했는지 모른다. 그들 중에 문병란 시인이 전하는 <구두닦이 철이> 가 있을 수 있다. “철이는 구두닦는 청년이다,/ 무등고아원 출신 철이는/ 스스로 거리의 예술가라 뽐낸다/ 아세아다방 앉아 자기 터라고/ 넌지시 내게 단골 노릇을 꼬시던 철이,/ 그는 친구보다 구두통을 더 믿는다.// 저금통장도 없고 부동산도 없지만/ 구두통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하루 라면 세 개만 있으면 산다고/ 저금통 대신/ 알뜰히 구두통을 사랑했던 철이,/ 그가 요즈음 광주 거리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람이 그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밝혀내지 못한 억울한 죽음도 많지만, 그 당시 참혹함은 사인으로 적힌 분류에서도 증명이 된다.
강대일복부총상 고영자복부총상 고규석흉부총상 강정배총상 강성원두개골골절후유증 강복원총상 강동일불명 기남용흉부자상 기종도위궤양 김금단구타후유증 김귀환총상 김광호정신이상 김경희불명 김경철후두부타박상 김갑진고문후유증 김남석총상 김동수총상 김복만총상 김병연총상 김명숙총상 김만두목총상 김동혁고문후유증 김동진차량사 김부열두부총상 김승후흉부총상 김영선흉부총상 김영묵후유증 김영두차량사 김영님부상후유증 김연호정신질환자살 김안부타박상 김영철흉부총상 김재평총상 김인태두개골골절 김윤수총상 김용표목총상 김완봉목총상 김오순차량사 김재형총상 김재홍다리총상 김종철총상 김종렬목관통상 김종연총상 김정선타박상 김정곤고문후유증 김재화흉부관통상 김중식허리관통상 김천례불명 김흥기두개골함몰 김형진합병증 김형영의문사 김형관두부총상 김평용총상 김춘화교통사 김춘례총상 나홍수흉부총상 민병대목총상 문재학복부총상 남춘만정신질환 모기훈정신착란 명재용전신타박상 노재인불명 노경운좌하박부관통상 문용동흉부총상 박병현두정부맹관파편창 박병규흉부총상 민병렬후두골절 박금희복부관통상 박귀주교통사고 박관현급성폐부증 박갑수대퇴부골절욕창 민청진두부납탄파편 박기현구타 박재구후유증 박인천대퇴부총상 박인배목관통상 박용준얼굴관통상 박순철고문후유증 박성용흉부총상 박재영얼굴총상 박정욱지병 박현숙총상 박태조출혈 박창권전갑골총상 박찬재고문후유증 박주삼총상후유증 박종화전신타박상 박종길자상 서호빈복부총상 서종덕가슴총상 백상운교통사고 백대환두부총상 방광범총상 서민오흉부관통상 안종필흉부총상 안병태머리총살 안병복두부손상 선종철아래턱총상 심동선두부총상 신명호뇌사 송진광익사 성시균교통사고 이영생고혈압 이애신정신질환 이성자흉부총상 이성귀두개골관통상 이병휴변사체 이매실두부총상 이경호불명 이옥단두부총상 이인성교통사고 임수천타박사 임균수두부총상 이홍선총상후유증 이종연두골함몰 이정호부상후유증 이재술총상 임정식흉부총상 전종식정신질환 임태남의문사 전재수총상 장하일복부총상 장철석정신질환후교통사고 장재철배요부총상 장영섭총상후유증 장방환타박사 전정호가슴총상 정기봉전기고문 정상덕부상후유증 정방남전신구타후유증 정민구총상 정남철전신타박상 정기봉부상후유증 정종월고문후유증 정찬용흉부관통상 조일기구타사 조사천흉부맹관상 조대훈얼굴관통총상 조남신이골관통사 조규영옆구리총상 조강일전기고문 조행권총상 최승희흉부총상 최승석추락사 최미애두부관통상 최강식골수암, 채이병복부총상, 한상일정신질환후자살, 한영길두개골총상, 허봉두개골파열 허남주구타후유증 함광수두부총상 한용덕불명 현병화간질증세후유증 홍성규두부타박상 황성술질식사 홍태환타박사 홍순권총상 황호걸복부총상 윤성호두부총상 김상태총상……
*
빨강 파랑 노랑 하양 명주 천 한 폭에 한 사람씩 죽은 자들의 초상을 그려 나간다.
어떤 이는 각목 들고, 어떤 이는 깨진 보도블럭 들고……. 그것조차 없는 이는 맨주먹에 머리띠 동여매고 총칼 맞아 낭자하게 피 흘리며 쓰려져가는 자를 그리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급히 헌혈하고 나오다 총 맞아 죽은 젊은 여자도 그리고, 쇠몽둥이 뜸질에 붉은 피 질질 흘리며 끌려가는 어느 신혼부부 한 쌍 그리고, 굴비 두름처럼 줄줄이 묶여 어디론가 끌려간 다음 물고문 전기고문 끝에 비명횡사한 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어느덧 오월이다. 필수가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빌고 빌면서 날을 받는다. 공수부대의 첫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도청 앞 그 자리, 오월의 꽃잎들 처연히 졌던 바로 그 자리.
-서춘기, <트라우마, 그 꽃> 부분
산문성이 강한 서춘기 시인의 장시는 시가 갖는 언어의 함축성에 기인한 절제와 정제성보다 우위를 통해 절절한 한의 정서를 잘 묘사하고 있다. 더불어 ‘80년 광주 오월’뿐만이 아니라 이후의 장대한 서사까지 함의 전달해준다. 죽은 사람들의 사인을 보면 전쟁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총상이나 골절과 타박에 의한 신체 손상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신체에 가해진 충격으로 죽음에 이른 것이고 과학적 근거로 뒷받침해준다. 그 원인과 결과는 광주라는 지역의 내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죽은 사람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5·18 때 진압군에게 강간 당한 학보사 여기자”와 그로 인해 태어난 ‘봉선’ 그리고 여기자를 강간했던 사내의 아들 ‘달수’가 죄 없는 영혼으로 이생에서 호명되어 만나게 된다는 운명은 비운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선’이나 ‘달수’와는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저지른 악행의 후유증은 다음 세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들은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음을 제기한다. 피폐해진 영혼의 위로를 위한 씻김의 한풀이 굿판도 알고 보면 가해자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속죄의식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다. 되레 위로받아야 할 피해자가 베푸는 선행인 것이다. 이 시는 5·18 때 자행된 폭력성이 세대를 이어 우리의 인간성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들어가는 가를 생생하게 증언해준다. 시가 갖는 문학의 영역과 시의 상상력이 허방처럼 현실과 유리되면 안 된다는 인식을 잘 보여주는 시다. 불행한 역사를 전언하는 시인의 역할은 신의 영역까지이다.
1.
강신降神의 새벽녘
한 여자의 들판이 일어서고 있다
떠난 이들 생각에
가위눌린 꿈조차
시린 강물에 시달려
귀 아픈 숨소리만 자욱하더니,
신열神熱의 들판
한 여자가 소리치며
익명의 어둠을 불러내고 있다
얼마나 깊은 혼절 속에
누워 있었더냐,
천 년 풀무질로 일구어낸 조선 삽날
이제 너희 가장 내밀한 상처까지
더듬으리니……
가슴을 풀어 헤치는 허공 속으로
새 떼들 흩어지고
사람들 숨 죽여
흐르다 바라보다
말없이 돌아서던 극락강
비로소 예리하게 단절된
한 시대와 만난다.
2.
여명 속
무섭게 발기하는 한 그루 수목
접신의 여자가
그 비수 같은 하현의 눈썹
꿈틀거릴 때
새파란 핏줄기로 솟구치는 지맥
조선 삽날에 걸려 일어서는
튼튼한 이름의 뼈마디들
하늘은 낮게 내려와
차디찬 조선의 이마를 덮어
더운 피를 돌게 하고
제단 위에
눈발로 퍼붓는 순교의 말씀들……,
암장된 시신들이
극락강변을 걸어나오고 있다.
-염창권, <부활1_새벽 들판> 전문
강은 죽은 자와 산자를 가르는 신의 영역이다. 종교적으로도 요단강이나 삼도천처럼 사후 세계에 존재한다는 강으로 생사의 경계를 구분한다. 그 강은 신이 주관하는 강으로 가장 엄중한 절차인 생전 선악한 행위로 판단한다. 시인은 광주에 실재한 극락강가를 꿈속에서 걸었을 것이다. 시인이 걸었던 시간은 여명이 밝기 전이고 신의 주관한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겹친다. 신 새벽 강가에서 사후에도 죽음에 들지 못한 한 여자를 만난다는 것도 인간계를 맴돌고 있음을 내포한다. 영혼으로 떠도는 여자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80년 광주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임을 알게 된다. 그 징표는 다름 아닌 “조선 삽날”로 확인된다. 가장 민중적인 징표인 “천 년 풀무질로 일구어낸 조선 삽날”은 쉽게 만들어진 삽날이 아니다. 민중의 한을 풀무질로 달구고 식히기를 수십 번 반복하여야 만들 수 있는 혼이 깃든 삽날이다. ‘조선 삽날’은 눈이 없어 아무것도 분별하지 못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 여자의 들판이 일어서고 있다/ 떠난 이들 생각에/ 가위눌린 꿈조차/ 시린 강물에 시달려/ 귀 아픈 숨소리만 자욱하더니,/ 신열神熱의 들판/ 한 여자가 소리치며/ 익명의 어둠을 불러내고 있다/ 얼마나 깊은 혼절 속에/ 누워 있었더냐,/ 천 년 풀무질로 일구어낸 조선 삽날/ 이제 너희 가장 내밀한 상처”를 어루만지며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묻힌 ‘들판’을 찾아간다. 자신을 가로막는 대상은 죄다 푹푹 질러 베어버리거나 그것도 역성에 차지 않으면 기어이 세상 바깥으로 파내 던져 버리지만, 아픈 영혼의 가슴은 뜨겁게 어루만져주는 조선 삽날이다. 억울하게 죽어 중음계를 떠도는 “암장된 시신들이/ 극락강변을 걸어나오”는 환영은 천황대를 타고 내린 강신降神의 기운처럼 ‘조선 삽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어, 꼭 꿈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비밀리에 매장된 시신들이 현재까지 발굴되지 않았다는 정황을 살펴보면 사실이기 때문이다. 죽어간 그분들의 가슴은 죽어서도 조선 삽날을 달군 잉걸불처럼 벌겋게 달아 있을 것이다.
이것 좀 봐
아직도 덜 탔나 봐
흰머리를 날리며 벌겋게 달아오른 게
꼭 네 아비 같구나
장작불을 얼굴에 담고
오일팔 날 도청으로 가던 네 아비 같구나
새가 날아와 노래할 때에도
열매가 열릴 때에도
뿌리 깊은 나무로 살겠다면서도
활활 타는 꿈을 꾸고 있었던가 봐
아무렴
때가 되면 타야지
투덕투덕 타다닥 탁탁 솟구쳐야지
세상을 삼킬 듯 이글거려야지
훌치더라도
가무러지더라도
벌불이 되어서라도 다시 피어나야지
불거금을 가져오너라
조심조심 집어라
방안에 들이자
꽃굴불로 살려 놓자.
*잉걸불: 덜 탄 장작불. 불이 붙은 숯덩이.
*훌치다: 불꽃이 바람에 쏠리다.
*가무러지다: 불이 약해져서 꺼질 듯하다.
*벌불: 심지 옆으로 뻗치어 번지는 불.
*불거금: 부집게.
*꽃굴불: 고콜에 켜는 관솔불.
-오대교, <잉걸불> 전문
타도 타도 끝없이 이글거리는 잉걸불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요즘 세대는 아니다. 쇠죽 솥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불을 피워내는 사람 가슴까지 뜨겁게 타들어가는 것이다. 80년 광주의 5월 “흰머리를 날리며 벌겋게 달아오른 게/ 꼭 네 아비 같구나/ 장작불을 얼굴에 담고/ 오일팔 날 도청으로 가던 네 아비 같구나”라며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 아버지도 광주 금남로의 거리를 메운 군중의 한 사람이 되어 훌치듯(불꽃에 바람이 쏠리듯) 달려갔을 것이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에 의해 고립된 시민들의 항쟁 의지가 가무러지듯(불이 약해져 꺼질 듯하다)할 때는 벌불(심지 옆으로 뻗치어 번지는 불)이 되어주었고, 잉걸불의 불심을 더 강하게 살워내는 불거금(부집게)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특정한 한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광주의 금남로를 메운, 도청에 갇힌, 광주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다. 시민 대다수가 참여한 광주 항쟁 정신은 가슴에 새기고 대대손손 전해져야 할 소중한 정신으로 “방안에 들이자/ 꽃굴불로 살려 놓자.”라며 시인은 당부한다. 꽃굴불(관솔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 민중의 눈을 밝힌 햇불이었다. 나무에 밴 송진이 타들어가면서 은근한 불꽃으로 사위를 밝히듯 뜨거운 광주 항쟁 의지는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관솔불처럼 타오르 길 바라는 염원일 것이다. 여기에서 ‘80년 광주 5월 민주화 항쟁’이 어떻게 촉발되었는지를 백수인 시인의 산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광주 시민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내놓자 이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유신독재로부터 벗어난 민주사회를 기대하고 있던 터에 신군부가 행한 이 조치는 헌정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기대했던 민주화에 정반대 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무차별적 폭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을 살육했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무장하기 시작했고, 이후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지속적인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결국 21일 저녁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광주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망을 차단하고 모든 통신을 끊었다. 광주는 군인들에게 완전 포위 봉쇄됐고 철저하게 고립됐다.”는 기록은 여러 사료에서도 밝혀진 사실이다. 그런 과정에서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주도된 살육과도 같은 만행은 어떠한 변명에도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어느덧 광주 민주화 항쟁 40주년이 화살처럼 흘러갔다. 그런데도 세상이 확 바뀌어야 하는데 변하지 않고 있다. 더 늦기 전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한양을 향해 들불처럼 일어나 장성 갈재를 넘던 동학군이 그랬던 것처럼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다.
주먹밥은 멀리 떠나는 자식들이 배곯지 않게
어머니들의 정화수가 뭉친 것이다
기약 없는 용기로 뭉친 것들은 염려가 접착제가 되었다
아침에 핀 꽃이 한낮에 떨어지고
금방 스친 옷깃이 5미터 앞에서 고꾸라졌다
죽은 친구의 등허리를 껴안고 우정을 포개고 죽은 소년
억울한 주검을 나르던 열여섯에게 민주란 무엇이었을까
어젯밤 나누어 삼킨 주먹밥 한 덩어리
마지막 눈물처럼 가슴에 퍼부었겠지
같은 심박동끼리 뭉친 주먹밥은 끈기가 달랐다
치댈수록 밀도가 올라갔다
의리의 마찰로 뜨거워진 우정은 차마 바스러질 수가 없었다
주먹밥처럼 꼭 끌어안고
죽음도 떼어놓지 못한 밀도로
어린 친구들은 하늘에서도 주먹밥이 되었을까
오월의 하늘을 쳐다보면
주먹밥 같은 뭉게구름이 뭉클뭉클
어깨를 겯고 날아오른다
중3의 심장에서 꿈틀대던 의분의 밀도는
억만 년을 버틴 서석대처럼
광주를 버티는 주먹밥인양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다.
-전숙, <꽃과 꽃 사이의 오월 1_주먹밥의 밀도> 전문
한 중학생의 죽음이 개인적이지 않다면 슬픔을 넘어 사회적 공분이 되어야 한다. 열여섯 살 중학생의 죽음을 가슴으로 추도하며 쓴 전숙 시인의 ‘꽃’의 의미는 그 소년을 상징한 것임은 분명하다. 꽃이 너무 여려 꽃으로 불리기도 애린 봄날의 연두 빛처럼 가냘픈 새싹 같은 꽃이어서 슬픔은 더 크다. 꽃과 오월의 상관성은 억울하여 끝없이 분노해야 하는 광주에서 민주 항쟁의 상징성이 되어버렸다. “금방 스친 옷깃이 5미터 앞에서 고꾸라졌다/ 죽은 친구의 등허리를 껴안고 우정을 포개고 죽은 소년/ 억울한 주검을 나르던 열여섯에게 민주란 무엇이었을까”라며 광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이후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묻고 있다. 중 3학년 친구의 등허리를 껴안고 죽어간 아이들에게 세상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응답을 해줄 수가 없다. 그 외침은 시인뿐만이 아니라 목이 터지도록 대한민국의 거리에서 반복되고 있지만, 공허한 물음은 광주의 소수에게는 절박함만으로 끝나곤 했다. 강박처럼 내장된 80년 광주라는 과거의 외상적(traumtic) 후유증은 생각보다 깊어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부러진 생각을 밟고 계절이 지나간다
모란이 몸을 푸는 오월이면
우리는 다시 환상통(幻想痛)을 앓는다
내 안에 그대들을 둔 지가 벌써 수십 년
아픔은 기억으로 남고 슬픔은 한으로 가라앉아
아직도 마음을 긋고 가는 사람아 사람아
오뉴월 뻐꾹새 소리는
무슨 사연을 저리도 풀어내는가
우리 살아있다는 것이 죄가 된다면
그리움은 가실 줄 몰라
아직도 형벌이 되는구나
이름은 지워지지 않은 채
오월이 가고 유월이 간다
때 되면 꽃들은 또 무엇하려 피는지
그 많은 발자국 소리들은
왜 그리 가슴만 밟고 가는지
가는 이는 강물이 되어 떠났지만
그대 손은 돌아와 지금도
갈대꽃으로 피어 나를 흔든다
또 다시 더워오는 자리
아직도 잠들지 못한 별들이여
등 하나 켜놓고 나 소리쳐 부른다
사람아 사람아 잊을 수 없는 사람아
-전원범, <다시 망월동에서> 전문
버젓이 가해자(당시 신군부 세력에 의해 광주에 투입되어 만행을 저지른 공수부대원들)인 그들은 반성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마음조차 없다. 외려 가해자들보다 광주의 참상을 목격했거나 함께 했던 사람들 스스로가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살아있음을 속죄하고 있다. 전원범 시인은 망월동을 찾아 “부러진 생각을 밟고 계절이 지나간다”며 광주에서 있었던 그날의 참혹함을 “부러진 생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부러진다는 의미는 물리적인 위력으로 강제당해 꺾여서 둘로 겹쳐지거나 잘라져 동강이 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때 망월동에 묻힌 영령들 대부분의 그 당시 모습이 그러했을 것이다. 전원범 시인은 오월만 되면 그분들의 가슴 아픈 죽음만큼 이상으로 환상통을 앓아야 한다. 의례적인 가슴앓이는 “내 안에 그대들을 둔 지가 벌써 수십 년/ 아픔은 기억으로 남고 슬픔은 한으로 가라앉아/ 아직도 마음을 긋고 가는 사람아 사람아”처럼 의로운 연대의식에서 애틋한 그리움으로 발화되고 있다. 예기치 못한 불행한 역사에 대한 참회를 국가를 대신해 “형벌”을 앓으며 속죄하고 있다. 광주라는 지역적인 연고로 묶인 끈끈한 연대는 “가는 이는 강물이 되어 떠났지만/ 그대 손은 돌아와 지금도/ 갈대꽃으로 피어 나를 흔든다/ 또 다시 더워오는 자리/ 아직도 잠들지 못한 별들이여”라며 가슴으로 포옹하며 불온한 과거를 “등 하나 켜놓고 나 소리쳐 부른다/ 사람아 사람아 잊을 수 없는 사람아”를 초혼하며 심정적 제의祭儀를 통해 치유해 간다. 잠들지 못한 영령들이 있는 자리에서 도진 통증을 시인의 가슴으로 벼려낸 시다. 인간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역사의 부당함을 환기하는 자리에 응당 있어야 할 시인의 가슴은 진정한 것이고 진실을 향한 양심의 제기임을 알아야 한다. 상실 이후 상심이 아무리 크다해도, 어머니의 마음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회화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어서 어서 돌아오세요
계절 바뀌어 봄, 봄꽃들 얼굴 내밀고
겨울 이기고 용기 냈는데
당신은 아직 소식이 없네요
회화나무 아래서 인내를 배웠어요
불의를 보면 그대로 있을 수 없었겠지요
혼자서 배부르게 살지 말라고
다같이 다같이 둥글게 살아야 새 세상은
찾아온다고, 통일도 되고, 평화가
넘실 거린다고, 아직 할 일이 남아있는가요
회화나무 아래서 희망 붙들고 있어요
그대여 어서 어서 돌아오세요
도청에서,
상무관에서,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산골짜기 어디에서도
당신 숨소리 못 찾은 채
마지막 인사도 못 나누고
아스라이 어머니의 노래 들리나요
사십년 피눈물 통곡소리 들리나요
어머니의 노래 들린다면 회화나무 아래로 오세요
봄 노래가 상큼상큼 걸어오는데
소식 없는 그대여 어서 어서 돌아와줘요
봄빛이, 봄꽃이, 봄사람들 곁으로
-함진원, <어머니의 노래> 전문
시가 갖는 특수한 언어의 형태는 상상력에서 가정되어 함축적으로 표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볼 때 과연 ‘80년 광주의 오월’을 문학적으로 정의해볼 때 시적 상상력은 응당한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80년 광주라는 도시가 상징하는 아픈 역사는 진실이기에 시적 은유나 환유의 극치보다는 가감 없는 시적 진술 형식이 되레 합당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형식이야 어떠하든 문병란 시인이 추구한 “시와 행동의 일치‘에서처럼 문학적 신념으로 본다면 동일한 위의威儀를 갖는다. 함진원 시인의 <어머니의 노래>는 그런 의미에서 사실적 진술에 가깝다. 전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시의 형식을 빌려 가족사의 아픈 서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당시 희생된 아들을 잊지 못해 회화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몸도 마음도 온전치 못한 어머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손을 놓고 떠나며 “혼자서 배부르게 살지 말라고/ 다같이 다같이 둥글게 살아야 새 세상은/ 찾아온다고, 통일도 되고, 평화가/ 넘실 거린다고,” 주고받은 말이 가슴에 못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꽃피는 좋은 봄이 와도 한번 떠나간 ‘당신’은 가족의 품 안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사의 비극적인 이산은 단 한 사람만의 아픔이 아니다. “도청에서,/ 상무관에서,/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산골짜기 어디에서도/ 당신 숨소리 못 찾은 채/ 마지막 인사도 못 나누고” 헤어진 수많은 아들과 딸들은 우리의 이웃인 것이다. 어머니의 노래는 망자가 된 피붙이의 귀환을 염원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봄빛처럼 봄꽃처럼 모든 사람이 염원하는 살기 좋은 세상이 오길 기다리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집 앞 회화나무에서 노란 꽃이 피었다 질 때 즈음이면 어머니의 노랫소리는 더 애절해진다. 광주의 봄은 화사하게 핀 꽃들마저 80년의 오월 앞에서는 숙연해진다.
몽글몽글 뭉쳐
두 손에 쥐어주던
이팝나무, 하얀 꽃송이
소금물 적신 눈물 한 모금
하얀 꽃뭉치 한 입
서울의 봄과
광주의 봄이 다르지 않듯
계절이 가고 옴은 같으며
꽃이 피고 짐도 같다
거북이처럼 가는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멈춰 있는 듯
지나가는 시간 속
일상은 천천히 다시 반복된다
여전히 두근거리는
오백 열 여덟 개의 심장
두 손에 꼭 쥐어진
또 다른 두 손
이팝꽃은 피고 또 진다
이 속절없는 계절에
-백애송, <주먹밥> 전문
시적 대상을 통해 시인은 내재된 세계를 사유로 발현한다. 사유는 상상과 연계되어 우리라는 자아 공동체를 만들고 타자는 엄밀하게 또 다른 대상으로 분리된다. 두 주체도 결국은 존재한다는 의미로 볼 때 현실에서 동일한 장소에 공존한다. 시인의 사유 속 이팝나무 꽃은 주먹밥으로 변주된다. 그 주먹밥은 광주의 어머니들이 가마솥을 거리에 걸어 밥을 짓고 헌신적으로 함께 행동한 정의로운 사실에 기인한다. 주먹밥은 피 끓는 80년 광주 민주 항쟁의 정당성과 순수성을 담보해주는 에너지 보급소였다. 한 개의 주먹밥 속에는 수많은 밥 알갱이가 뭉쳐져 있다. 그런 응집성은 민중을 결집시키는 힘인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광주 시민들은 주먹밥을 받아먹은 순간부터 우리라는 자아 공동체로 결집하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항쟁 의지는 더 강하게 승화되었을 것이다. 격화된 감정과 분리된 타자는 냉철한 광주의 이성이다.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추구한 욕망은 사사로운 욕망이 아닌 대의(민주화된 국가 체제 실현)에 대한 변화 욕구였다. 백애송 시인은 1980년 유신체제의 붕괴 이후 불어 닥친 민주화의 염원에서 찾아온 “서울의 봄과/ 광주의 봄이 다르지 않듯” ‘80년 광주의 오월’ 이후 시간의 반복에도 “여전히 두근거리는/ 오백 열 여덟 개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듣고 있다. 시인은 죽은 영령들과 정신적인 영역에서 끊임없이 교감하고 있다. 꽃이 핀 계절이 와도 그렇고 꽃길을 걸어도 편치 않은 요즘이 시인의 마음이다.
5월이에요
5.18 광주민주화의 길이 눈을 떴어요
아버지 이 길을 따라 건너오시길
종종걸음 어머니도 따라 오시길
저 죽음과 같은 겨울은 지금도
근접 수행을
5월이라구요
5.18 민주항쟁이 길을 열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아직도 길을 더듬거리셔요
겨울이 먼저 알고 피해가도 겨울을 따라 다니셔요
마음을 절뚝거리며 따라나선 겨울 말고는
당신들을 부릴 데가 없으시나요
5월이다니까요
5.18 광주항쟁이 저기서 손을 흔들어요
아버지 어머니 구부러진 길 말고는 도통 아는 길이 없으시다니
아버지 어머니의 믿음은 광주전남 뿐이었잖아요
겨울이 한창일 때 붉디붉은 동백꽃이 무더기무더기
피었었잖아요
5월이 여기 버티고 있어요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다시 피어나고 있어요
우리가 한참이나 겨울을 더듬거리고 있을 때
청홍매화 복수초 산수유가 길을 만들었잖아요
흐드러진 꽃망울 속에 두려움에 떠는 우릴
꼭꼭 숨겨주었잖아요
5월이 왔어요
5.18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우뚝 섰어요
아버지 어머니의 믿음은 겨울 말고 봄이였었어요
바닥에 낮게 깔린 민들레가 거기 있었다잖아요
흐드러진 개나리꽃 노오랗게 매달린 꿈들이
옴팡지게 벚꽃송이들을 들어올려요
5월은 5월이 아니에요
5월은 장미꽃을 가슴에 단 5.18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꽃처럼 이렇게 건너오셔요
이미 꽃이 된 아줌마 아저씨들을 따라가셔요
봄이 된 아들 딸들을 꽃처럼 이렇게 건너오셔요
금남로 도청 앞 상무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허갑순, <꽃처럼 이렇게 건너오셔요.> 전문
시인은 시를 통해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간다. 그 길은 “5.18 광주민주화의 길”이라 명명하고 있다. 그 길은 죽은 자와 산자가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소로 암흑천지 같았던 80년 광주의 그곳을 현상하고 인화하여 드러내 보인다. 그 길을 통해 세상에 부재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러내고 있다. 길 가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보며 지난 시절의 혹독한 기억을 잊으시라고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다. 행여 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 모를 그분들을 위해 그 당시에도 피었을 “겨울이 한창일 때 붉디붉은 동백꽃이 무더기무더기/ 피었었잖아요”라며 꽃에 대한 강박증을 해소하도록 어르며 완화하고 있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진 슬픔이나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히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시인은 시인만의 생각과 사유 그리고 감상적 심상에서도 광주의 5월 속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트라우마에 갇힌 긴 세월에서 벗어나길 소망하는 시인의 심상이 투영된 “5월은 5월이 아니에요/ 5월은 장미꽃을 가슴에 단 5.18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꽃처럼 이렇게 건너오셔요/ 이미 꽃이 된 아줌마 아저씨들을 따라가셔요/ 봄이 된 아들 딸들을 꽃처럼 이렇게 건너오셔요/ 금남로 도청 앞 상무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라는 시대와 세대를 건너온 광주 민주화 항쟁 정신의 면면 성을 보여주는 시임을 알 수 있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사람과 사람에게 불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오월이 오면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진동할 것이다.
빛바랜 주소록에 너는 없지만
먼 곳에서 잘 지내는지
오월의 들불과 찬란한 슬픔사이
‘우리들의 한 소절 노래되어
너는 오래오래 있었구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햇빛 비치는 길을 물어
너의 둥근 얼굴과 단발머리와
장동의 학교, 문리대의 등나무와
사범대 도서관 앞 잔디밭…
너의 웃음이 가득 번지던
오이향의 그곳을 찾아가본다
너의 작은 방에 스몄을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했던 날들
위태로운 몹쓸 운명이 거기 있었지만
견딜 수 없는 곳에 너는 있었겠지만
때를 기다리며 서성이면서
날이 무뎌진 추억에도
우리들의 살 오른 오월이
얼마나 깊이 베일 수 있으며
수평의 시간에 밀리기도 하는가를
친구야,
너는 지금 이곳에 없고 그곳에 있다
우리 만날 먼 훗날은 가까이 오고 있다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임을 위한 행진곡’ 중에서
-김정희, <먼 훗날에의 다짐 _친구 기순에게>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사랑보다 더 뜨거웠던 사람들의 가슴속 피는 아직도 식지 않았다. 김정희 시인은 그 긴 상처의 통증을 고스란히 홀로 아파하며 살아왔다. 불온한 세상을 만나 억울하게 빼앗겨버린 “너”로 상징되는 친구 기순은 ‘80년 광주 오월’ 속 암전 된 풍경 안에 갇혀버렸다. 김기순은 ‘들불야학’을 열어 낮에는 노동자로 밤에는 야학교사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살다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런 시인의 친구 기순과 1980년 5.18 민주항쟁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이었던 윤상원(계엄군의 의해 사살됨)은 깨어있는 청년들의 표상이 되었다. 그들이 생전에 연인 사이였던 것을 안타까워한 소설가 황석영 등의 뜻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아름다운 영혼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그때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토록 가슴 아프면서 아름다운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김정희 시인은 친구 기순이 생각날 때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을 것이다. 그러면서 학창 시절의 “햇빛 비치는 길을 물어/ 너의 둥근 얼굴과 단발머리와/ 장동의 학교, 문리대의 등나무와/ 사범대 도서관 앞 잔디밭…/ 너의 웃음이 가득 번지던/ 오이향의 그곳을 찾아가본다”며 과거 속 아련한 회상에 잠기곤 했을 것이다. 여리기만 했던 오이향 풋내 나는 시절 “너의 작은 방”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간 친구는 끝내 세상 사람들이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염원했지만, 그런 평등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수평의 시간에 밀”려 죽어서야 민중의 삶의 수평을 가늠하는 평형자가 되었다. 친구 기순이 생각했던 “수평의 시간”은 차별받지 않는 민중적 삶을 상징 할 것이고 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의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인은 말해준다.
3.
“원탁시” 회원들의 숨가뿐 시들을 일별 하며 깊은 사유의 천작을 통해 길어내지 못한 시의詩意에 대하여 나의 한계를 확인하였기에 염려도 깊어졌다. 그런 것 마저 변명하게 하는, 보편적인 시대 인식에서 정상적인 이성이 존재하지 못한 시대 속에 80년 광주가 있었다. 불편한 과거가 오랫동안 청산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암울한 그림자가 우리 사회에 엄존하고 있다. 그동안 몇 번의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새로운 국가 주체가 바뀌었는데도 지난 역사를 모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과거로 정의롭게 청산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80년 광주 5월이라는 시대와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은 상당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간극과 괴리는 크게 변화된 것이 없다. 굳이 변한 것이 있다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광주 항쟁으로 당당하게 호명되었고, 망월동 묘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 있게 된 정도를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마저도 오랜 긍정과 부정으로 국가라는 체제 속에서 표류를 거듭하다 얻은 수확이라면 광주에서 무고하게 흘린 피의 대가라고 말하기에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흔히들 당시 광주 5월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불순한 사태라고 했고, 이어 광주 항쟁으로 불리다 최근 들어 광주민주항쟁으로 명명되었다. 80년대라는 역사적 시대 공간에서 직, 간접으로 몸으로 부딪치며 항거했던 사람들과 그 소용돌이를 피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의 역할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80년 5월을 외면하였기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80년 5월 당시 광주, 전남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치욕적 삶을 살아왔고 그 사례는 자료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런 왜곡된 시대를 바로잡기 위해 문학적인 접근으로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 힘써온 사람들도 그중 한 부류다. 지금껏 문학을 통해 진실을 외쳐온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원탁시 회원들의 올곧은 시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크나큰 기여임을 알게 되었다. 서정이 있는 삶의 복판으로 언젠가는 도래할 광주의 5월을 문병란 시인의 <街路樹가로수>로 상상하려 한다. “향수는 끝나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오후의 강변에서/ 돌아와 섰다.// 생활의 폐허에 부대끼던 겨울을 벗으면/ 빙점에 서서 기다리는 우리들의 삼월---/ 凍傷동상의 가지마다/ 부풀은 지열에 창문이 열린다.// 허기진 발자욱들이 돌아오는 오후의 입구/ 아무데서나 너의 인사는 반갑고/ 너와 같이 걷는 이 길은/ 시진한 고독을 나누며 가는 계절의 좁은 길// 빈 손 마주 모으고 돌아오는 밤이면/ 가난을 열지어 흐르는 어둠 속/ 서러운 까닭은/ 우리 모두 사랑을 따로이 간직한 때문이다.// 어둠을 호흡하는 고요론 자리/ 누리지는 별빛을 머금어/ 다가오는 3월 같은 머언 얼굴들이/ 쏟고간 눈물.// 너는 보내야 했듯이 또 맞아야 하기에/ 철 따라/ 새 옷으로 갈아 입는 미쁘운 여인.// 여기는 계절이 맨 발로 걸어왔다/ 맨 발로 돌아가는 길목.// 가자,/ 우리 소망이 머언 산정에 보이면/ 목이 메이는 오후.// 가로에 나서면/ 너와 같이 거닐고 자운/ 너는 오월의 휘앙세, 기대어 서면 너도/ 나와 같이 고향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