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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1장 1절 -13절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많은 사람들이 신앙, 믿음과 신념을 구별하지 못하고 신념을 신앙, 믿음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은 신앙이 있어서 출세한 것이 아니라 저들은 신념이 있어서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하여 투쟁함으로 인하여 지도자가 되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잘 살아보세” 라는 신념으로, 새마을 운동과 경제 부흥 운동을 하여 나라를 잘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신앙이 있는 장로이지만 신념이 없는 사람이라서 결국 나라를 IMF로 끌고 간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신앙보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 출세를 합니다.
이것을 간혹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신앙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디슨은 전기를 발견하고 오늘날과 같이 밝은 세상, 편리한 세상을 만들 때까지 많은 실패를 하였지만, 신념을 버리지 않고 결국 성공하여 오늘날의 밝은 세상을 만든 것과 같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신념이 강하게 있어야 성공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신념은 다른 것입니다.
신념을 갖고서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신앙으로는 신념이 강한 자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지는 못하나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날 교회 중에서 신앙보다는 신념을 강조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복음 성가도 “할 수 있다” 라는 노래를 무수히 부르면서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노력합니다.
물론 신념을 강조하는 교회는 부흥도 합니다. 빨리 성장하고 성공합니다. 사람의 건강도 역시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잠언 18장 14절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나는 건강하다. 장수한다 하고 힘있게 운동하며 활동하는 사람은 병이 있어도 병을 이기면서 건강하게 살게 되지만, 나는 몸이 약하다. 나는 틀렸다 하는 사람은 건강이 곧 무너져 버립니다.
이러한 신념이 약한 사람은 건강도, 인격도, 학력도 무너집니다. 사람은 신념에 따라서 삶의 강약이 좌우가 됩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 사람이 무슨 환갑 잔치 인가하면서 나는 늙지 않았다 하면서 젊은 사람과 함께 활동하는 사람과 나는 늙은이다 하면서 항상 노인들과 어울리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할 때에 Robert라는 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기고 성품도 좋은 백인인데 Filling Room에서 일을 하는데, 그만 인화 물질을 갖고서 기계를 닦다가 발각이 되어 해고를 당했습니다.
해고를 당한 후에 나는 사회의 폐인이다. 나는 이제 돈도 못 벌고 돈이 없는 사람이다. 하고 자기의 삶의 신념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다음날 67가 Camelback에 있는 은행에 권총을 들고 들어가 은행 강도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청년은 영원한 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념이 무너진 사람은 어떠한 처방의 약도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주님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 9:23)” 하신 것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일을 할 때에야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성공자는 신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암 환자가 독자를 두고 돌아보는데 암이 걸려서 곧 죽는 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독자가 대학을 졸업하는 날까지 나는 죽을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암으로 인한 심한 고통이 와도 계속 일을 하면서 참으면서 아들이 대학 졸업 할 때까지 나는 죽지 않는다 하며 12년 동안을 살아가다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한 다음 날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신념이 있는 자의 성공 확률은 심히 많습니다. 그러나 신념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신념은 천국으로 자기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요사이 많은 사람이 신념을 갖고 나는 천국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천국에 못 가도 나만큼은 갈 수 있다는 신념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과 신념을 혼동한 사람들의 하는 말입니다.
ETC 교인들도 나는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에만 교회에 나오면서도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도 역시 신념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신념으로는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념도 갖고, 신앙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잘되고, 영혼도 잘 되어지는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신앙을 갖고 있으면 내가 오늘 죄를 지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을 갖고 내가 오늘 의롭게 살았어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신앙이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신앙에 따른 결과인 믿음의 역사, WORK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행함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행함이 있기 때문에 죄를 고의적으로는 지을 수가 없고, 실수로는 짓게 되지만 이내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기본은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이 사실이 정말 믿어지면 감격하여 감사가 나오게 되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면서 그분이 하신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느 사람이 자기 대신 감옥에 죄를 뒤집어쓰고 갔습니다.
감옥에 안간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감옥에 대신 간 사람의 가족들을 돌아보아 주고 뒷바라지를 정성껏 합니다.
깡패들의 세계에도 그런 아름다움이 있거든 하물며 대신 죽어 준 분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헌신함이 없다면, 이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 대신 죽어 주신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동차 주인이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습니다. 옆에 탔던 운전사가 경찰에 자기가 운전을 잘못하여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대신 감옥에 갔습니다. 자동차 주인이 운전사 가족을 성의껏 돌아보아 주고 감옥에서 나오도록 변호사를 사고하면서 운전사에게 모든 편의를 돌아보아 줍니다. 운전사가 대신 감옥에 간 것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픕니다.
이와 같이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이 대신 내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셨는데 어찌 내 마음에 감사와 헌신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함이 없을 때에 운전사가 실상은 내가 죽인게 아니고, 차주가 운전 면허 없이 운전을 하다가 죽였다고 말을 하면, 더 큰 죄를 받고 감옥에 가는 것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순종함이 없다면 천국에서 내가 네 죄를 대신하여 죽지 않았다 할 때에 그 사람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징집 영장이 나오면 사람을 사서 대신 군대를 보낸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군대에 가면 빳다를 매일 맞고 난 후에야 잠을 편히 자는 정도를 심한 구타가 있었고, 목지 못하고 고생을 많이 합니다. 대신 군대를 보낸 집안에서는 상대방의 일을 적극 도와주고, 돈도 후히 주면서, 제대하는 날까지 군대를 대신 간 사람이 원하는 것을 다 하여 줍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신 일을 알은 사람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내가 정성껏 힘껏 다 감사함으로 실천합니다.
만일 내 대신 일한 사람이 내가 약속을 안 지킬 때에는 얼마든지 취소할 권한이 있습니다.
제대하는 날까지 내가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듯,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날까지 주님의 요구에 순종하면서 약속을 이행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를 건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얻었지만 가나안 땅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가지 최종적으로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고 나머지는 20세 이하의 사람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서 믿음 변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광야 40년 동안에 실패를 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도 구원받은 믿음이 변하여 구원을 받지 못할 믿음이 되기도 합니다.
고린도 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 사람,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과거에 좋은 신앙을 가졌었다 하여도 버림이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사도 바울 같은 분도 역시 매일 자기 믿음을 점검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갖도록 항상 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에스겔서 33장 13절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어제까지 잘 못이 있어도 오늘 고치고 잘 믿으면 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어제까지 잘 믿었어도 오늘 내가 잘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나의 믿음은 항상 변할 수 있음을 알고 매일 내 믿음을 돋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과 신념은 다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임을 알고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 주신 사실을 믿고, 그 분께 감사를 드리면서 그분이 요구하는 말씀에 항상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믿음으로 인한 구원에 참례하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소망은 우리가 흔히 희망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소망은 희망과는 다릅니다. 희망은 내 자신의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요, 소망은 이미 되어진 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희망 때문에 살아갑니다. 희망이 있으면 고통을 참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가난하고 어렵게 살면서 허리띠를 졸라매지만 내 자식들은 공부를 잘하여서 잘 살 것이고, 내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잘 살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참게 됩니다.
자식에게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생선을 이고 골목마다 생선을 사라는 소리를 지르면서 허리가 부러지게 고생을 하면서도 힘들어하지 않는 것은 생선 팔아 번 돈으로 자식을 대학에 공부시키는 보람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고통을 이겨 나가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을 현실을 이겨내는 인내가 있고, 희망이 없는 사람은 현실을 이겨내는 인내가 없는 것입니다.
소망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희망이 소망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진 사람은 이미 믿음을 가진 자이고,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릴 사람이므로 소망으로 그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희망은 세상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람이요 소망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람입니다.
소망은 희망보다 더욱 고상한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사람은 생명을 버리고서라도 소망을 이루려고 순교의 반열에도 기쁨으로 뛰어 들게 됩니다.
그러나 희망은 자기의 호흡이 끝나는 동시에 모든 희망은 사라지지만, 소망은 자기의 호흡이 끊어짐과 동시에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희망과 소망을 모두 가지고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성공적인 사람이 되고, 내세에서도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희망과 소망이 있는 사람은 모두 참는 인내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 때에는 반드시 현실에서 당하는 고통이 있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일종의 고통임이 틀림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 나누어주면서 사는 것은 나 자신으로는 손해를 당하는 고통임이 틀림없지만 이것을 참고이기고 나가는 것은 좋은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장차의 즐거움을 위하여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고통을 참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는 안보이고 손에는 지금 안 잡히고 귀에는 들려지지 않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랑은 네 가지로 헬라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에로스 사랑 -
제일 세상 사람들이 소설의 주제나 영화의 주제로 삼고 있는 남녀간의 이성의 사랑으로 에로스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참으로 빠졌을 때에는 좋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 관계의 사랑으로 변하여 버립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변함으로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사랑입니다.
필레아 사랑 -
친구간의 우정의 사랑입니다. 친구간의 사랑도 참으로 좋은 사랑임이 틀림없지만 이 사랑도 역시 가정을 이루고 세월이 지나고 환경에 따라서 변하여 지는 사랑입니다.
스돌케 사랑 -
가족간의 사랑, 혈연의 사랑입니다. 가장 인간 관계에서 변하기 어려운 사랑이지만 위에서 내려가는 사랑은 진하지만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사랑은 변화가 많은 것입니다. 고려장이란 말이 있듯이 부모가 나이가 들어 노망하면 내다 버리는 사랑이 이 스돌케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 -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무조건 적이고 변하지 않는 사랑이 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도 이 아가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다 변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같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소망이 있고, 소망이 있으면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 가지를 항상 같이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한가지가 없으면 균형을 잃은 자가 됩니다. 삼각 발은 항상 안전 한 것으로 아폴로 우주선의 달착륙선의 다리도 세 개로 되었습니다.
성삼위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계시듯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함께 하나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라 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수고를 수고로 생각지 않는 희생적인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사랑하심으로 그 사랑의 수고로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이 되는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수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 이 세 가지를 나도 항상 나타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정리: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일입니다. 믿음 없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헛수고를 한 것입니다.
다음에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고 나도
조건 없이 사랑을 나누어주는 수고를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는 신념도 있어야 성공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느 영국의 구두 회사에서 두 사람의 판매원을 아프리카에 보내어 구두를 팔게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두 장의 편지가 본사로 왔습니다.
한 사람은 여기에 있는 토인들은 구두를 안 신고 맨발로 살고 있으니 여기서는 구두를 팔 생각도 하지 말고 돌아가야 한다, 철수를 하여야 한다고 보고하는 서신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구두를 한번도 안 신어 보아서 신을 신으면 얼마나 편하고 발이 보호되고 좋은지를 알게 되어 많이 팔리게 된다 하면서 구두를 많이 보내 달라고 하는 편지입니다.
우리는 독 같은 환경, 독 같은 사물을 볼 때에 없다고 보지 말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컵에 물이 절반이 담겨 있으면 물이 절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물이 절반이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몸이 아파도 나는 나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아프리카에 구두를 팔 수 있다고 하는 신념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신념은 세상에서 좋은 성공을 가져다가 주지만 내세에서는 신념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내세는 신앙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말을 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야 갈 수 있고, 믿음을 가진 사람은 소망이 있고, 소망이 있는 증거로는 참는 인내가 나타나고, 참는 인내는 사랑의 수고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4장 10절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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