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825. 묵상글 ( 연중 21주간 목요일. - 풍요로워진 우리는. 등 )
----------------------------------------------------
220825. 연중 2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풍요로워진 우리는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이 여러모로 풍요로워졌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과 그렇지 않은 종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연결하여 이런 성찰을 해봤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저도 주님 안에서 여러모로 풍요로워졌는데
이렇게 풍요로워진 제가 슬기롭고 충실한 종인가?
그런데 오눌 복음을 보면 주인에게 충실한 슬기로운 종은
주인에게 충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식솔에게도 잘해야 합니다.
곧 주인에게만 딸랑딸랑 알랑방귀 뀌고 그 식솔들에게는 잘못하면 안 되고
주인이 올 때 깨어 기다리다가 맞이할 뿐 아니라
주인이 없는 동안 그 식솔까지 잘 돌보는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라면
주님에게서는 사랑을 받고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고,
주님 안에서 풍요로워지고 이웃에게 그것을 나누고,
주님 말씀을 듣고 이웃에게 그 영적 양식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220825. 연중 2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깨어 있어라
깨어 있는 삶이란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서로의 관계 안에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늘 준비하고 삽니다. 사실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리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은 못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실행하고 나서는 ‘미리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강의를 부탁받을 때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날짜가 임박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리고는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오면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또 후회합니다. 이러한 것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깨어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시합이 이루어지는 날은 희망의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노력한 모든 것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땀이 함께 했으면 등수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실패를 하더라도 그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요, 최선을 다한 것이 보상입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속임수로 준비했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패배는 패배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을 향한 인생여정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 준비하고 있으면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드시 올 그날을 지금 준비하면 그날이 언제 오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여정의 모두가 구원의 날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심판자로 오신다 해도 깨어 준비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광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됩니다. 인생의 연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에 옳고 바른 것을,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으십시오”(마태24,42). 예수님께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24,46). 하셨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참 구원의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잠든 사람이 있고, 깨어나는 사람이 있으며, 깨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깨어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20825. 연중 2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마태 14,45)
예수님께서는 앞의 23장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해 불행선언을 하신 다음,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고 올리브 산으로 가시고, 가장 큰 재난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해 말씀하시고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한 “도적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곧 “깨어있으면서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3-44)고 하십니다. 재림의 때가 예측 불허할 뿐만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올 것이니, 아무런 준비 없이 있다가 그 때를 돌발적으로 맞이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깨어있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유 속의 “종”은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곧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주인이 자기 종에게 자기 집안의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마태 14,45)
‘충실함’이란, 자신에게 맡겨진 ‘주인 집안 식솔들’(마태 24,45)과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어주는 일’(마태 24,45)에 대한 충실함으로 묘사됩니다. 곧 ‘맡겨진 사람’과 ‘맡겨진 일’에 충실함이 주인에 대한 충실함이 됩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주님 집안의 식솔들, 곧 양들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 곧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님께 대한 충실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슬기로움’이란, 먼저 ‘주인의 뜻을 아는 것’이요, 그리고 그 뜻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무 양식이나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양식’을 내어주는 일, 곧 당신의 말씀인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일 자체도 그분이 맡기신 일이요, 그분의 일입니다.
이처럼, “깨어있음”은 의식의 각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실행을 말합니다. 곧 “깨어있다”는 것은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일을 맡기신 ‘주인의 신뢰에 대한 깨달음’과 “깨어있음”에서 오는 종의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받은 ‘종들’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신뢰하시는 주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구체적인 행동으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께서 관계 맺어준 형제들에게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형제들을 존중해야 할 일이요, 결코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께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마태 24,45)
주님!
당신께 속해 있는 종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에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형제들에게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시고
그것이 당신께 대한 저의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20825. 연중 2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불교에서는 ‘죽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비의 뜻은 대나무로 만든 길쭉한 매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사용하는 이유는 작은 충격에도 큰 소리가 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스님들이 참선할 때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피곤해서 졸음이 올 때 죽비를 치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잡념과 졸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죽비로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참선하는 스님의 몸을 죽비로 치기도 합니다. 죽비를 맞거나, 죽비 소리를 들으면 참선하는 스님들은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참선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죽비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입니다. 며칠 전에 수녀님으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아들에게 어머니가 축하인사를 하면서 뺨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다고 합니다. 놀란 아들이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늘 이렇게 깨어서 지내도록 하세요.” 아들은 그 의미를 알고 어머니께 그렇게 살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시간에는 3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집니다. 마치 햇살이 온 땅을 골고루 비추듯이 하루 24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부자라고 해서 시간을 더 많이 얻을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루 24시간은 주어집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8월 23일은 제게는 의미 있는 날입니다. 서품기념일이기 때문입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축일, 기일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날에 사람들은 선물을 주기도 하고, 피정을 가기도 하고,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리적인 시간, 의미의 시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님들이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듯이, 가치의 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가치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가치의 시간은 무엇일까요? 예전에 교리문답은 가치의 시간을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원리와 기초에서 보다 상세하게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보다 병약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이 바로 가치의 시간입니다. 진복팔단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가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던 이방인 여인, 백인대장, 하혈하는 여인은 가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는 가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가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마치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당신이 앗아가면 그들은 한바탕 꿈/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사람을 진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며 인간의 종락들아 먼지로 돌아가라./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에 의미라는 디딤돌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에 가치라는 계단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미라는 디딤돌을 건너 천국의 계단으로 올라 갈 수 있습니다.
----------------------------------------------------
220825. 연중 21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계적인 명지휘자 토스카니니(1869∼1957)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아주 심한 근시여서 잘 보지 못했다고 하지요. 관현악단의 일원을 연주해야 하는데, 눈앞에 있는 악보도 보이지 않았으니 어떻게 연주할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악보를 완전히 외워서 연주회에 가야만 했습니다. 이 상황이 즐거웠을까요? 자기의 엄청난 근시에 대해 답답해하고 어느 정도의 불평불만도 간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연주회 바로 직전에 지휘자가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한 것입니다. 지휘자가 없으니 연주회 자체가 무산될 위기였지요. 그런데 그 많은 오케스트라의 단원 중에 곡을 전부 암기하여 외우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토스카니니였습니다. 바로 임시 지휘자로 발탁되어 지휘대 위에 서게 되었고,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불평불만의 일들은 늘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일만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렵고 힘들다면서 자기 신세 한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또 자기가 가져야 할 것만을 떠올리며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한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인이 부재중일 때, 그 집의 하인들이 늘 깨어 있으면서 주인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하나의 내용과 주인이 돌아왔을 때, 떠날 때 맡긴 직무에 대하여 충실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일 처리를 했느냐에 대한 점검이 있을 것이라는 또 다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가 종말론적 비유를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과 연결되기에 종말의 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늦어지는구나.’라는 잘못된 판단에서 불충실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는 생각은 자기 판단일 뿐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각만을 내세우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불충실한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충실한 종이 과연 종말의 순간을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이 원하는 모습을 지금 당장 실천하면서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과연 충실한 종일까요? 불충실한 종일까요? 종말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는 충실하고 성실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
사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된 순간에야 비로소 나는 다시 살기 시작하는구나(알베르 카뮈).
------------------------
----------------------------------------------------
220825. 연중 21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영혼의 식솔을 충실히 돌보는 삶 ♣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
오늘 복음은 나태와 내분, 불신과 냉담한 생활 등 마태오 공동체가 겪고 있던 어려움과 상황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나오는 도둑의 비유는 “주인이 어느 날에 오실지 모르고”(24,42),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에”(24,44) 깨어 주님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당부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느님 앞의 나의 소명은 무엇인지를 ‘지금 여기서’ 명확히 의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과 관념, 정서적인 역동과 감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과의 관계를 잊지 않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실제로 걷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향한 전인격적 집중을 의미합니다.
주님 앞에 깨어 해야 하는 것은 준비입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기다림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준비는 나 자신이 주님께서 머무실 합당한 거처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을 비우고 낮춰야만 하겠지요. 그렇게 되려면 끊임없는 기도 안에서 주님을 내 영혼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또한 매순간 주님을 선택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좋은 말과 생각과 행동이 합당한 준비입니다. 이런 준비는 내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를 허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사로잡아 변화시켜주시도록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란 순응과 변화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종의 비유는 교회 지도자들이 충실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24,45-51). 주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입니다.”(24,50) 종에게 집안 식솔들을 맡기고 떠났던 주인이 돌아왔을 때 불충실하고 포악한 종은 처단 받아 위선자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입니다(24,49).
종의 비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입니다. 마태오는 주님과 공동체와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주인은 종들의 행동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를 충실하고 슬기롭게 하느님께 인도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 공동체의 책임자들은 불충실과 무분별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신앙공동체의 책임자들은 맡겨진 양떼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그들을 위한 사랑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내적 평화나 개인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맡겨진 양떼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공동선을 추구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지요.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다음 세 가지를 명심했으면 합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나를 당신 도구로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 교회 구성원, 사회 구성원 모두가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영혼의 식솔들’임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소한 일,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자신을 기꺼이 내주며 언제든 충실히 사랑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흩어진 관심사를 주님께로 모으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며 깨어 있도록 힘쓰고, 나에게 맡겨진 ‘영혼의 식솔’들을 사랑으로 충실히 돌보는데 온 마음과 넋을 다하는 영적 몰입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