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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소설 『사랑이 한 일』(문학동네)은 창세기의 5가지 ‘문제적’ 사건을 살핀다. 작가는 이 작품을 불친절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적 패러프레이즈” 또는 “소설적 가필”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다섯 편의 단편 중에서 나의 주된 관심은 이삭의 문제를 다룬 「허기와 탐식」에 있다. 그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면 그 앞의 두 단편 「하갈의 노래」와 「사랑이 한 일」까지 살펴봐야 한다. 먼저 「하갈의 노래」를 살펴보자.
하갈의 노래
하갈은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달라는 여주인 사라의 요청에 따라 아브라함의 침실로 들어간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거라는” 신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신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이 늙은 아내의 태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저 남편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라는 여주인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이스마엘이 태어난다.
하갈은 아이를 배자 여주인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발견한다. 하갈은 여종 주제에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여주인을 멸시하는, 분수도 모르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여주인의 분노는 학대로 이어진다.
분노의 불똥이 자신에게로 튀자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하갈을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다. 소설 속 하갈은 여주인의 학대를 방조하는 아브라함의 말을 전해 듣고 절망하여 탈출을 감행한다. 혼란의 도가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재판장으로 등장하여 잘잘못을 가리지도, 폭주하는 사라의 의지를 꺾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뜻밖의 지점에서 개입하신다. 광야로 달아난 하갈을 찾아가 그녀를 학대하는 여주인에게 돌아가라고 하신다. 『사랑이 한 일』이 다루는 문제적 사건들 곳곳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기대할 만한 순간에는 나타나지 않으시고, 전혀 뜻밖의 순간에 나타나신다. 곳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시고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주시고),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지 않으신다.
광야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하갈에게 약속을 주신다. 태어난 아들로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첩이 되고 이스마엘을 임신하게 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의 ‘부산물’이지만,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관심을 가지시고 그 인생에도 찾아가신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하갈이 사라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아브라함은 또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모른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하갈이 집으로 돌아왔고, 그렇게 해서 아이가 안전하게 태어났고 10년 넘게 잘 자랐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라가 보니
세월이 지나고 드디어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십 대가 된 이스마엘이 젖 뗄 무렵의 이삭을 희롱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삭의 안위와 장래에 위협감을 느낀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게 되었다. 이때까지 나는 이스마엘의 이삭 희롱이 명확한 ‘사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소설 내용을 염두에 두고 살펴본 성경 본문에는 “사라가 보니”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었다. 성경이 이 상황의 관찰자로 사라를 제시한 것이다. 이건 ‘사라의 눈에는 상황이 그렇게 보였다’라고 읽으라는 초대장 같다.
그동안 갈등의 한복판에서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아예 노골적으로 사라 편을 드시는 것처럼 보인다. 전에 하갈에게 찾아가 주인에게 돌아가서 주인을 섬기라고 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와서는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아이와 함께 쫓아내라고 하신다.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다. 하갈은 아이를 데리고 광야로 쫓겨나면서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당신이 섬기는 신이 당신에게 내가 겪은 것과 같은 일을 겪게 해달라고 빌겠다”고.
광야는 가혹하고 메마른 곳, 뜨겁고 위험한 곳이다. 광야에서 먹을 것과 물이 없어 기진하여 누운 이스마엘을 멀찍이 두고 하갈이 운다. 서럽고 원통하고 억울하고 막막하여 운다. 그때 찾아오셨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 있는가. 여기서 작가는 하갈이 “문득 어디선가 가느다랗고 뿌연 연기 같은 것이 여러 갈래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곳이 아들이 누워 있는 곳 같아서” 눈을 뜨는 장면을 삽입한다. “제물을 태우기 전에 불길이 피어오르는 제단에서 본 것과 같”은 광경에 하갈은 주인 아브라함이 제물을 바치던 장면, 그때 피어오르던 불길과 연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악에 받쳐 하나님께 소리 지른다. “정녕 당신이 내 아들을 원하십니까?”
기력을 잃고 의식이 가물가물한 하갈에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하늘과 땅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들려온다. 그녀는 귀를 막았지만 그 소리는 더 확실하게 크게 들렸다. 그 순간 “몹시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부른다. “그녀보다 더 놀란 것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이 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네 아이는 죽지 않을 것이다. 어서 일어나서 물을 마시게 해라”는 재촉을 받으며 하갈은 그 목소리가 전에 들었던 바로 그 음성임을 깨닫는다. 하갈은 눈이 열려 우물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은 이후에도 이스마엘을 보살피셨다. 하나님의 보살핌은 어떻게 펼쳐졌을까? 아브라함을 활용하셨을까? 이스마엘에게 비범한 사냥 실력을 주시고 쉴 새 없이 사냥감을 불러주시는 방식이었을까? 둘 다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도 없겠다. 둘 뿐이었을 거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사랑이 한 일』표지, ⓒ문학동네
사랑이 한 일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사흘 길을 가서 산에 오르기 전,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말한다. “내가 아이와 함께 산에 가서 예배드리고 돌아오겠다.” 아브라함은 혼자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식이 될지는 그도 몰랐다. 하지만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삭을 어떻게든 같이 돌아오게 하실 거라고 생각했다(히브리서는 이것을 부활 신앙과 연결해서 설명한다).
하나님이 이삭 대신 예비하신 양을 제물로 바치고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른 다음에 산에서 내려오는 대목에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소년들에게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아브라함이 돌아왔을 때 이삭이 그와 함께 있었을까? 이때까지 나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삭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으니 있는 쪽으로든 없는 쪽으로든 단정할 수가 없었다. 여백이 있었고, 상상력이 작동할 여지가 있었다.
작가는 이 여백에 주목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다. 이삭이 그날 아버지와 함께 내려오지 않았을 거라고, 그다음 날에도 곧장 집으로 출발하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한다. 이런 상상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이삭이 ‘끝이 좋으면 다 좋아’라고 툴툴 털며 흔쾌히 따라간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것 같다. 이삭으로서는 “내게는 이 상황을 처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소설에 나온 대로 그날 산에 홀로 남았다면, 이삭은 그 이유를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알겠고, 아버지가 나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버지에게 그런 시험을 주셨다는 것도 알겠고, 하나님이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에 벌인 시험이라는 것도 알겠어요. 그 시험을 아버지가 통과하자마자 하나님의 천사가 아버지 이름을 두 번이나 다급하게 불러서 아버지를 제지하여 나를 살렸다는 것도 알겠어요.
이제는 하나님이 미리 양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도 알아요. 처음부터 나를 죽게 하실 마음이 없으셨다는 거지요. 그것도 알겠어요. 제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하나님이 준비하실 거라고 하셨지요. 아버지가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하신 그 대답은 진실을 포착한 것이었어요.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을 명하시고, 명하시는 것을 주시는 분이시군요. 만약 제물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도 이 모든 일이 신기하고 놀랍게 느껴지고, 역시 하나님이라고 감탄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제가 사건의 당사자잖아요. 제게는 혼자 있을 시간이,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대로는 같이 못 가겠습니다.
이승우는 산에 혼자 남은 이삭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많은 말씀을 하셨을 거라고 추측한다. 이삭은 그 말씀을 대부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충분히 말씀하셨을 거라고 말이다.
허기와 탐식
하나님이 이삭에게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삭은 모든 상처와 충격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날의 일을 툴툴 털고 갈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라는 게 작가 이승우의 생각이다. 그 이야기가 그다음 단편 「허기와 탐식」의 내용이다. 나한테는 이 소설을 구성하는 다섯 단편 중에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작품이었다.
내가 이삭을 통해 묻게 되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뭔가 엄청난 것을 요구하실 때, 그와 긴밀히 이어져 있는 가족이나 자식 같은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은 엄청난 대의를 위한 주인공의 커다란 희생과 헌신에 따라오는 ‘부수적 피해’를 당할 존재들일 뿐인가. 이런 즉각적 반감은 내가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주의자라서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에 들어 하든 아니든, 인간의 연대성은 너무도 엄연한 현실이다. 연대하는 존재이니 영광과 기쁨을 함께하듯 슬픔과 고난도 함께 한다. 부모와 자식의 운명, 또는 한 집단과 그 집단을 대표하는 이의 연결성을 무시하는 것은 정직한 반응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대답에 온전히 만족하지는 못하겠다. 하나님은 인간을 한 사람 한 사람 귀하게 보신다는 믿음도 가볍게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집단적으로도 대하시지만, 개별적으로도 다가가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들 각각의 인생에도 다가가시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내게 「허기와 탐식」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읽힌다. 작가 이승우는 성경의 뜻밖의 대목에서 이 문제를 풀 열쇠를 발견한다.
이삭은 에서를 편애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 왜 그랬을까? 리브가가 야곱을 사랑하는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두 아들 중 한 아들만 사랑한 이유는 당연히 물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반면,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이유는 나와 있다. 에서가 잡아 온 고기를 사랑했기 때문이란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사랑하게 되었다고 옮기고 있다(창 25:28). 과연 그런 이유로 아버지가 한 아들을 편애한다는 게 말이 될까.
직관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탓에 내가 심상하게 넘어갔던 이 질문을 「허기와 탐식」은 깊이 파고든다. 이 소설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 때문에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것이 이삭의 감정에 대한 정확한 진단임을 설득한다. 작가는 운명의 그날, 목숨을 건 시험이 있었던 그날, 천사가 다급히 개입하여 간발의 차이로 이삭이 목숨을 건진 그날을 주목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소설가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그는 산에 혼자 남았던 이삭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이삭은 그로 인해 중요한 교훈과 깨달음을 얻었을 거라는 상상에서 더 나아가 이삭이 다음 날 누군가를 찾아갔을 거라고 과감하게 추측한다.
소설가적 가필
소설 속에서 이삭은 들에 사는 사냥꾼이자 배다른 형인 이스마엘을 찾아간다. 그리고 형이 차려준 음식을 얻어먹는다. 자기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자기처럼 버림받고 죽도록 내버려진 것 같은 상황을 겪었던 (살리심과 보살핌을 받았다는 면에서도 동일한) 형과 마음을 나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같은 아버지 밑에서 비슷한 일을 당하고 살아온 형을,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사건의 생생한 기억을 안고 이삭이 찾아간 것이다. 그날 자기 심정을 알아줄 단 한 사람, 형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삭은 채울 수 없는 허기를 느꼈다. 그날, 그는 고기를 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이삭이 어느 날 맏아들 에서가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보았을 테고, 또 어느 날에는 에서가 요리해 주는 고기를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요리를 먹을 때마다 옛날 형이 차려준 음식을 떠올렸을 것이다. 상속자로 선택받은 자신과 달리 아버지의 손에 집에서 쫓겨났던 형이 떠올랐을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선택받지 못한 맏아들 에서의 처지가 생각났을 것이다. 선택받은 자기가 철저히 버림받는 것 같았던 그날도 선명한 기억으로 새삼 찾아왔을 것이다. 에서가 차려준 고기를 먹으며 이삭의 머릿속에서 이스마엘, 에서, 자신의 인생이 오버랩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스마엘을 닮은 에서를 보면서 선택과 사랑의 신비와 냉엄함, 가혹함에 몸을 떨었을 것이고, 에서에 대한 애잔함과 애틋함, 긍휼과 측은지심을 품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 때문에 에서를 사랑했다.
이것이 이삭이 에서가 잡아 온 고기를 먹고 그 고기에 맛을 들이게 된 사정에 대한 작가 이승우의 소설가적 가필이다. 그가 볼 때 이삭의 트라우마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찾아가셨다. 또한 이스마엘을 마련해 두셨다. 아브라함의 불순종이 빚은 결과물인 이스마엘이 극심한 충격 가운데 허덕이는 이삭을 위로하는 핵심 도구가 되는 아이러니에서 하나님의 신비, 지혜와 자비를 엿보는 것은 무리일까. 이삭은 자신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아픔을 겪었던 이스마엘을 통해 위로받고 형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에서를 향한 이삭의 편애가 이해가 된다. 그의 편애가 결정적으로 표현된 장면이 있다. 이삭이 자신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고 에서를 불러 마음껏 축복할 수 있게 야생 동물을 잡아 와 요리해 오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셨음을 분명히 하셨건만, 죽기 전에 에서를 축복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뒤집으려 시도하는 것 같은 대목이다. 그리고 이삭의 반항은 상상도 못 했던 결과를 낳는다. 아내 리브가와 결탁한 둘째 아들 야곱이 눈먼 자신을 상대로 벌인 사기극. 야곱을 에서로 알고 내린 이삭의 축복. 자기를 속인 동생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만 하면 죽이겠다고 벼르는 에서. 자기 의도와 관계없이 긴박하게 흘러가는 상황을 보며 이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대목에서 작가 이승우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이미 늙어 눈이 어두웠던 아버지,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던 아버지는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이십 년 이상을 더 살았다. 죽음을 예감하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음껏 축복하겠다던 이삭의 이 긴 생명 연장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아버지가 일찍 숨을 거두었다면 어쩌면 에서는 정말로 살인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아버지는 아주 오래 살았고, 그사이에 에서는 시간과 함께 원한으로부터 풀려났다. 그리고 어쩌면 이삭은 자기 의도대로 되지 않은 그 축복 사건을 통해 최선을 뛰어넘는 최선, 법과 도리를 넘어서는 신의 섭리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자기 생각을 앞세워 바꾸려고 해도 신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큰아이가 작은아이를 섬길 것이다.” 그는 신의 뜻을 헤아리려는 시도를 멈추고 아버지처럼 온전히 복종하는 사람이 되었다. 음식에 대한 허기와 탐식도 그와 함께 사라졌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삭이 죽을 때 두 아들이 그를 조상들 곁에 묻었다.
우리 안의 이삭에게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이 먼 훗날 친히 아들을 보내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먼 미래의 구원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중차대한 사건임을 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시험의 한복판에 있던 이삭도 그런 것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 ‘때문에’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절망과 공포를 겪어야 했던 이삭. 그런 상처와 아픔은 도대체 수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 이삭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온유한 사람으로 섰음을, 하나님이 친히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실 수 있는 그런 신앙의 선조가 되었음을 안다. 이 소설은 혹독하고 어두운 심연 가운데도 하나님이 이삭에게 다가가시고 그가 동생으로, 부모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자라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두 상태 사이의 공백을 메워준다. 사랑과 신뢰, 충격과 배신감, 이스마엘과 에서에 대한 공감과 그것에서 나온 편애와 반항을 거쳐 끝내 순복과 신뢰에 이르는 과정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시는 이야기였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왜 이삭의 심정과 상황에 마음이 쓰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삭에 대한 나의 의문은 남의 일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사정은 다 다르고 정도와 수준도 천차만별이겠지만, 신자는 다 어느 정도 아브라함이고 신자의 자녀는 어느 정도는 이삭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기쁨과 영광이 있지만, 그에 따른 아픔과 상처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설령 불가피하고 값진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상처가 없었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은혜가 주어진다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도 되기를 원하신다고 『사랑이 한 일』은 말한다. 우리 안의 작은 이삭에게 이 메시지가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홍종락 작가, 번역가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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