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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장 선배, 이제는 계란 장사 못하게 생겼어요.
닭들이 이번 더위에 다 죽어 버렸어요.”
“어쩌냐........”
“한편으로는 후련해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거냐.”
“잠시 놀면서 생각해야죠. 죽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아이들 다 클려면 멀었잖어.”
“뭐, 어떻게든 되겠지요.”
축산과 후배인 그녀가 찾아왔다. 금진온천에 계란을 넣기 위해 왔다가 횟집으로 잠시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올 여름 유난히 덥더니 힘들게 사는 그녀를 마지막 궁지로 몰아넣고 만 것이다.
날씨가 힘들게 사는 사람를 더욱 힘들어지게 마련인가보다.
축산학과를 나와 죽도록 매달린 일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축산과를 나와 자살한 사람이 두 명이고, 망해서 소식이 없는 사람도 꽤 여럿이었다. 정부의 축산 정책만으로는 도저히 값싼 수입 축산물을 따라 잡을 수도 없었고, 게다가 대형 마트들의 횡포는 축산업자들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축산이란 존재는 이제는 농업이라고도 부를 수도 없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제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량으로 고기와 계란을 생산하기 위해 동물이 생명체라는 인식은 간 곳이 없었다.
실제로 나는 후배의 양계장에서 1년 6개월 동안 키우다가 사료 대비 효율이 나지 않는 도태되는 닭들을 얻어다가 횟집 음식물 쓰레기로 키운 적이 있었다.
처음 올 때는 털이 빠지고 볼 상 사납던 닭들이 한 달도 되지 않아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이틀 걸러 알을 낳아 주었다.
자칫했으면, 햄 공장에 마리당 5백 원에 팔려갈 단백질 덩어리가 나에게로 와서 비로소 생명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대형 마트에게 너무나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 금진온천을 소개시켜 준 것이다. 금진온천에서는 온천수로 삶은 계란을 손님들에게 서비스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꽤 많은 양의 계란을 사용했다.
나는, 그녀가 축산과 후배라서 단순히 도와주었다기보다, 그녀에게 저지른 철없었던 나의 젊은 시절의 객기 탓이 더 클 것이다.
몇 년 전 토요일, 춘천에서 내 모교 강원대학교 축산학과 5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그 날 공로상을 받은 축산인 夫婦가 있었는데, 부인은 3 년 후배 82학번, 남편은 1년 후배 80학번, 둘 다 너무나 잘 아는 후배들이었다.
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부인이 얘기 했었다.
별로 중요한 상도 아니었고, 간단한 인사말 정도로 끝낼 일이였는데, 그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끝내는 말을 맺지 못했었다.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난 그 눈물의 의미를 짐작하기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눈물에 대한 죄책감에 난 연단에서 내려오는 그 후배에게 여는 사람들처럼 박수도 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부부의 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내 자신이 바로 그들이 부부로 맺어지도록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1984년, 난 그 때 軍에서 제대하여 복학을 한 상태였다.
군에서 어찌 어찌하다가 1년을 늦게 복학하는 바람에 과에서 최고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축산과는 강원대에서 체육과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전부 남자들이었고, 체육 특기자가 많아서 선후배간의 군기가 철두철미했다. 더구나 1년을 늦게 복학을 했는데 과에서 날 잘 따르는 강릉 후배가 있었다. 그는, 사실 후배라기보다, 대학교 학번은 1 년 후배였으나,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였다.
어느 날 춘천 명동에서 후배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는데, 전부 취해서 횡설수설 할 때쯤, 바로 그 후배가 울면서 나에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 놓기 시작했다.
우리 과에 여학생이 딱 한명 있었는데 그 여학생을 사랑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했다.
그녀는 우리 과의 마스코트였다.
도저히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여자라도 그를 좋아 할리가 없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자기는 그 여학생과 결혼하여 아버지가 하시는 돼지 농장을 물려받아 평생 축산인 부부로서 살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의 구구절절한 얘기가 거의 울부짖음으로 바뀌어 갈 때쯤 난 그만 해서는 안 될 결심을 하고 말았다.
‘두 사람을 그날 밤 기필코 맺어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무엇이든 겁날 것 없는 시절이었다. 축산과의 거친 분위기가 나로 하여금 객기를 부리게 했을 것일까.
하여간, 나의 미치도록 가벼운 결정이 두 사람의 인생을 바뀌어 놓을 줄 알았더라면, 내가 좀 더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그 후배 여학생을 살필 줄 아는 나이었더라면,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당시 나의 머릿속에는 그런 것까지 남을 배려할 정도의 원숙함보다는 그 나이에 어울리게 경박함만이 가득 들어 있었다.
후배들을 시켜서 술에 만취한 그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한다는 그 여자 후배 집에 전화를 해서 집 앞에 나와 있으라고 했다.
결정과 동시에 일을 진행 시킨 것은 순식간이었다. 두 사람을 후배의 자취방에 밀어 놓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후배들을 데리고 다시 술 한 잔 하러 시내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에 학교에 갈 때 까지도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일본에 갔다가 6년 만에 돌아오자, 둘이 결혼을 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돼지 농장으로 찾아 갔다.
그와 악수를 하고, 잠시 후 부인과 악수하기 위해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이 여자의 손이 아님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짐승의 손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대학 동문회에서 가끔 그들 부부를 보더라도 애써 외면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후 들리는 소문은 아이를 낳다가 사산을 했다는 얘기, 강원도 축산인 부부로 뽑혀 유럽여행을 했다는 얘기, 남편이 뇌종양 수술을 두 번 받고 살이 돼지처럼 쪄서 농장 일은 전혀 못한다는 얘기, 그래서 그녀는 혼자서 노예처럼 일만 한다는 얘기.......
아무리 듣고 싶지 않은 얘기라도, 내 귀에는 누구보다도 빨리 소식이 전해져 왔다. 마치 내가 들으라는 얘기처럼.
그리고는 그날 두 부부가 강원대 축산학과 50주년에서 공로상을 받은 것이었다. 누구나가 축하 해줘야 할 일이지만, 나는 축하보다도 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얘기하는 그 여자 후배 발밑에서 잘못했다고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그 눈물의 의미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꽃다발과 상패를 들고 내 앞을 지나가면서 다시 한 번 눈물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고 그 후배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념식이 끝나고 위도에서 체육대회가 있었다. 나는 학생들이 만든 소시지와 고기로 소주를 마시며 잔디밭에 혼자 앉아 있었다.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녀였다.
"아....xx이구나...그 동안 잘 있었어?"
나는 축하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소주나 한잔 받아라"
소주를 나눠 마시며 한참을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소주의 따뜻함이 장을 통과해 눈가에 취기가 돌 때쯤, 나는 한마디를 했다.
"살기가 어떠냐?"
“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밖에 물을 수 없었고, 그녀 또한 그렇게 밖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그녀는 나를 향해 방긋이 웃었다.
강릉으로 돌아오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그녀는 나에게 다가 와, 자기 부부를 집에 초대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아마 이 겨울이 다 가기 전 난 그 부부를 우리 집에 꼭 초대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야기
몇 달 후, 나는 후배의 죽음으로 아산강릉병원에 문상을 갔다 왔었고, 화장을 하고 사천 납골당에 다녀왔다. 바로 죽은 친구가 그녀의 남편이었다.
상가에서 고인에게 절을 올리고 부인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2 년 전 보다 더 말라 있었다. 얼굴은 더욱 까맣게 타 있었고, 중년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몸집은 왜소했다. 검은 상복의 그녀는 너무나 초라했다. 아니, 슬펐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녀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망의 눈길인지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마지막 미사를 올리기 위해 임당동 천주교회에 갔을 때, 십자가 위 가을하늘에는 참새들이 날고 있었다.
마리아 조각상 옆으로는 키 작은 국화들이 왜소하게 나를 맞았다. 성당 안에는 조용한 미사의 노래가 들렸고, 그러나 나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성당 안 어딘가에 그녀의 왜소한 몸뚱이를 발견할까봐 겁이 났었을까? 하여간 나는 밖에서 십자가 위 가을하늘을 나는 참새들과 마리아 조각상 옆에 심어져 있는 국화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터에서 후배의 시신이 불구덩이로 들어갈 때, 그녀는 오열했었고 나는 참을 수 없는 격렬함이 가슴에서 타고 올라와 도저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화장터 뒤에서 마음껏 울었고, 퉁퉁 부은 얼굴로 그녀를 보기가 창피하여 버스 안에서 그녀에게로 얼굴을 향할 수 없었다.
납골당에서 그녀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왔다. 후배들이 그녀를 부축했었고, 모든 축산과 동문들이 그녀를 위로했지만, 나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먼 발치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멍하니 있기만 했다. 아마 잠시 그녀도 나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을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의 파편들이 나의 얼굴을 향해 쏟아졌고, 나의 시린 눈에는 눈물이 고였었다.
비가 올 것인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로의 말로는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슬프다는 표현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다만 이 가을이 가고 겨울을 기다리면 되는가?
세 번째 이야기
위 글을 쓰고, 다시 2 년 만에, 축산과 모임에 갔다. 내가 쓴 소설책을 한 권씩 나누어 주고 있을 때, 총무 후배가 전화를 받더니 말했다.
“xx 누나가 온데요.”
“xx이 요즘 뭐 하냐?”
“양계장 해요.”
“양계장?”
“xx형, 양돈장 날아갔잖아요.”
“..........”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후배가 죽고, 그녀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았다.
“선배님, 오랜만이예요.”
“그래, 오랜만이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에게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양계장은 어떠냐?”
“부도 난 양계장 10 년 장기 임대 내서 하고 있어요.”
“계란은 잘 팔리냐?”
“택지 양돈 마트와 성덕 마트에 들어가고 있어요.”
“송정 마트는?”
“거긴 못들어가요.”
“그래? 내가 알아봐 줄까?
“그래 주실래요? 그럼 고맙죠.”
그나마 다행이었다. 양돈 하나로마트 상무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어, 그녀를 도울 길이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양계장을 찾아갔다.
“여기......xx씨 여자 분 하는 양계장 맞죠?”
“그런 사람 여기 없는데요?”
이상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틀림없이 거기였다.
몇 번을 임곡 동네 도로를 오르락 내리락 거리다가,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처음 찾아간 곳이 역시 그녀의 양계장이었다.
“빚쟁이들 때문에, 여기 사람들에게 나를 찾으면 모른다 하라고 시켰어요.”
그녀는 계면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 죽고 법률 공부 많이 했어요.”
“그래......다들 그러고 살어......”
나는 그렇게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가 보는 양계장이었다. 지독한 계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양계장 안은 갑자기 닥친 추위로 썰렁했다. 난로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주인 부도 나고, 빈 껍데기에 시설 전부 새로 했어요.”
“돈도 많이 들었겠다.”
“그렇죠.....뭐.....”
“xx이가 양돈 농협 이사였잖아. 그런데 왜 계란이 못 들어가?”
후배는 아버지 양돈장을 물려받아, 대학을 졸업하고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축산업에 뛰어 들었다.
축산과를 졸업하고 한 번도 축산업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는 열심이었다.
그런데, 그는 빚만 남기고 죽어버렸다. 그녀도 역시 축산과를 나와서 남편과 함께 축산에 몸을 바쳤으나, 남편 죽고 나서 남편의 빚을 떠안고, 이제는 남의 양계장을 임대 받아 겨우 살고 있었다. 그녀 또한 할 줄 아는 것은 축산 밖에 없었을 테니까.
“택지 하나로 마트 물건 들어갔는데, 올 여름에는 손해만 봤어요.
앞에 청솔 마트와 경쟁을 하느라, 우리 계란 세일 한다고.....자기네들은 마진 다 챙기면서.......세일 끝나면 송정 마트에 물건 들어가게 해 준다고 해놓고 약속도 지키지 않아요.”
“농협이 어디 농협이냐? 농민들 위해 만들어 놓고도 장사 할 생각만 하니, 게다가 직원들이야 지들 봉급만 성과급으로 챙기면 그만이니.......”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지금 그녀에게 농협의 부당함을 말해 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행히 중국 농산물과 FTA 농산물 중, 수입을 할 수 없는 계란을 그녀는 택했겠지만, 그 또한 그녀에게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사명감이 없는 농협과 경쟁을 하는 대형 마트와 싼 것을 좋아하는 소비자에게, 그녀는 어쩌면 지금까지처럼 또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양란과 특수란을 만들어, 내년에는 서울 양재 하나로 마트로 진출 해보자.”
“가능 할까요?”
“부딪혀 봐야지......그냥 있을 수 있냐.”
양재의 농협유통과도 거래가 있어, 그녀를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현재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었다.
“내일, 상무와 점심 약속 했으니, 만나고 전화하마.....”
“그래요, 고마워요. 선배님......”
"그리고, 이거 가지고 가세요.“
그녀는 방금 낳은 계란 두 판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것을 받을 수 없었다.
“난 못 받는다. 고생해서 만들은 거.....안됀다......”
“괜찮아요. 가져 가세요.”
그녀는 기어코 내 차 뒷 자리에 계란 두 판을 밀어 넣었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서둘러 그녀의 양계장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나서 3 년 만에 다시 이곳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한 대형 마트와의 거래 약속은 전부 불발이 되고 말았고, 나는 미안하여 당분간 그녀를 찾지 못한 것이다.
올 여름이 지나면 그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이야 그 지겨운 일에서 벗어났다는 후련함에 실감을 못하겠지만, 찬바람 불어오면 살아간다는 것에 주저앉을 것이 뻔했다. 세상은 없는 사람만 죽어라하고 사지로 내몰고 있다.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
“없어요. 막막하지만 살아야지 별 수 있나요. 지금까지 살아왔는데요.”
“그래.......그렇지.”
그녀에게 해 줄 것도 없었고, 해 줄 말도 없었다.
그저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뭐가 문제가 될 것인가. 사는 게 별거던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을.
그것이 지독히 힘든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인 것을.
몇 년후, 지나가는 소문으로 그녀가 원주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 결혼 마저 잘못되어 홀로 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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