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읽기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외 2편)
고두현
늘 뒤따라오던 길이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
지나온 길은 직선 아니면 곡선
주저앉아 목 놓고 눈 감아도
이 길 아니면 저 길, 그랬던 길이
어느 날부터 여러 갈래 여러 각도로
내 앞을 질러간다.
아침엔 꿈틀대는 리본처럼 푸르게
저녁엔 칭칭대는 붕대처럼 하얗게
들판 지나 사막 지나 두 팔 벌리고
골짜기와 암벽 지나 성긴 돌 틈까지
물가에 비친 나뭇가지 따라 흔들리다가
바다 바깥 먼 항로를 마구 내달리다가
어느 날 낯빛을 바꾸면서 이 길이 맞느냐고
남 얘기하듯, 천연덕스레 내 얼굴을 바라보며
갈래갈래 절레절레
오래된 습관처럼 뒤따라오던 길이 갑자기
앞질러 가기 시작하다 잊은 듯
돌아서서 나에게 길을 묻는 낯선 풍경.
튤립 뿌리에선 종소리가 난다
겨울이 지난 뒤에야 알았네.
전쟁의 신 마르스도 정원지기였다는 걸.
누군가는 지하 무덤에 들고
누군가는 지상 봉분에 눕지.
꽃의 알뿌리는 봉분을 닮았네.
혹한에 몸 눕히고 뿌리로 남아
대지에 입을 물리는 어머니 젖무덤 같은 것.
지난겨울은 혹독했지. 발밑으로
흙덩이를 뭉치며 나는 땅속 깊이 집을 지었네.
그래서 내 몸에선 둥근 소리가 나지.
눈과 코, 심장을 도는 물관들이
내 뿌리를 둥글게 감싸듯 내 입도 둥글다네.
그곳에서 벌레들만 아는 비밀을 공유하며
천둥과 태풍, 눈보라 닮은 씨눈을 준비했지.
알뿌리의 운명은 때로 가혹하면서도 따뜻해
봄 정원에 앉으면 꽃에서 구근 냄새가 난다네.
튤립 뿌리들이 땅 밑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우주 저편에서 숨죽이던 별,
하늘정원의 별똥만한 구근으로 빛나고
내 몸에서는 종일 둥근 소리가 난다네.
누군가의 봉분 같고 누군가의 젖가슴 같은
깊고 낮은 종소리.
노숙인과 천사
―서울역, 2021년 1월 18일 오전 10시 30분
갑자기 눈이 쏟아졌다.
낡은 수면 바지, 얼룩진 군복 상의
해진 운동화 차림의 노숙인이 구부정히 서 있다.
모두들 종종걸음
한 남자가 멈춰 섰다.
잠시 후 외투를 벗어 입혀 줬다.
주머니를 뒤져 장갑을 꺼내 줬다.
또 무언가를 건넸다.
오만 원짜리였다.
소낙눈 피해 서울역 지붕 밑에 섰던
사진기자가 그 모습 발견하고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34초간 27장, 날리는 눈송이 때문에
핀이 맞은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았다.
그사이에 사람들은 중계하듯 말했다.
잠바를 벗어 주네, 장갑도 줬어, 이야 돈까지……
사진이 제대로 찍혔는지 살펴본 기자가
황급히 쫓아갔지만 남자는 총총히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 자리를 눈발이 하루 종일
솜이불처럼 덮었다.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2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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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 1963년 경남 남해 출생.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시선집 『남해, 바다를 걷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