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89
4월8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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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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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9ZV3S6huP8 (하정호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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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들의 배은망덕 앞에서도 진노하시거나 징벌을 내리지 않으시는 하느님!>
유다 문화 안에서 돌을 든다는 것은 장난삼아 하는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 죽을죄를 지은 사람을 향해 명백한 살의(殺意)를 지니고 행하는 살상 행위였습니다.
공생활 기간에 예수님께서는 몇 번이나 살기등등한 적대자들의 위협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밀어붙인 예수님의 죄명은 신성모독죄였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을 자처하고 있소.”(요한복음 10장 33절)
끝끝내 예수님 당신의 신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거부하고 무시하는 동족 유다인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는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깃든 신성은 보지 못하고 인성만 바라보았습니다.
유다인들은 눈에 보이는 본성만 알아보았지, 눈에 보이지 않은 본성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본성을 파악했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신성 모독죄는 예수님이 아니라 유다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깃든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완전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참 하느님이요 참사람이신 예수님의 신비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입니다. 수백 번 수천 번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사건입니다. 너무나도 감지덕지한 황송스런 사랑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하는 짓을 보십시오.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손에 손에 하나씩 돌을 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돌을 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도적이며 적극적인 ‘살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이기로 마음먹고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족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배신감, 비애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진노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징벌을 내리지도 않으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에 또다시 설득하십니다. 끝까지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으십니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그게 아니란다.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것이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하고 마음 바꿔먹어라. 내게로 돌아오라.”며 신신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배은망덕함, 돌까지 드는 노골적인 적대감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는 예수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항상 우리들의 영혼, 우리들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순절의 막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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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표징보다 강한 말씀의 힘>
미국 뉴욕에 사는 ‘리리안 요맨’이라는 유명한 여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병원 일에 지쳐 아편을 조금씩 복용하다가 아편중독이 되어버렸던 여인입니다.
아편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포자기 상태에 있을 때 하느님을 받아들였고 말씀을 묵상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고 아편을 끊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아편 중독, 알코올 중독,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는 요양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요양소에서는 약이나 수술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의 힘으로만 치료를 한다고 합니다. 그녀가 쓴 책에 이런 경험담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앰뷸런스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면서 그의 요양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들것에 실려 온 사람은 폐병 3기가 지나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여자 환자였습니다. 그녀는 뼈가 앙상하고 숨이 턱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리리안 요맨 박사는 환자를 곧 이층 입원실에 옮긴 다음 성경 말씀 구절을 크게 쓴 종이를 환자에게 주고 요양원에 있는 한 그 말씀으로 살아야만 한다고 권했습니다. 그 말씀은 이 구절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 3,13)
그 환자에게 이 성경말씀을 하루 종일 주의를 기울여 읽고 무슨 말씀인지 뜻을 생각해보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튿날 환자에게 찾아간 요맨 박사는 그 구절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물어보았지만, 환자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라고 해 놓고는 병실을 나왔습니다. 6일 째 되는 날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이층에서부터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요맨 박사는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문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활짝 웃는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뛰어내려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요맨 박사를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사님, 이젠 제가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을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박사님께서 적어준 성경 말씀을 주위를 집중해서 읽고 묵상했는데, 방금 전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께서 받으신 저주 안에는 저의 폐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산하신 짐을 내가 왜 지고 살아야 합니까? 이 기쁜 소식을 박사님께 알려드리려고 뛰어 내려왔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건강을 회복하고 요양소를 떠났습니다. [참조: 인터넷 블로그, 터나누기, 나의 참 모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않고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에 가서 머무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믿는 이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사실 믿지 않는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표징’, 즉 기적이나 이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없는 이의 눈을 만들어 주어도, 다 죽어서 썩는 냄새가 나는 라자로를 살려 내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이들은 표징을 하나도 보여주지 않은 요한이 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깨닫고 믿었다고 합니다.
즉 표징보다 말씀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더 큰 힘이 있는 말씀을 바로 옆에다 두고도 그 말씀을 통해 믿음을 찾지 않으면서 기적들만 찾아 헤매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말씀의 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기적은 감각적인 것에 영향을 주고 표징은 이성에 영향을 주지만 말씀은 영에 영향을 주어 가장 깊숙이 찌르는 쌍날칼과 같은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해서 그리스도께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구약의 예언들이 당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오랜 시간 설명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 때서야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소공동체에서 하는 성경말씀 묵상이 바로 이렇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단시간 묵상하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말씀으로 일주일은 살아내야 그 말씀 안에 머물게 되고 그 말씀이 내 심장 깊숙이 스며들어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렇게 묵상하고 체험한 것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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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32절)고 하신다. 유대인들은 돌을 던지려고 한 이유가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33절)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성, 즉 하느님이심은 알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에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하느님이 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고, 나중에 인간이 되셨다. 그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같이 되고,아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35-36절) 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께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면,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말씀’께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이 신들이 된다면 그들이 참여하는 그분이 하느님이 아닐 수 있겠는가? 우리는 빛에 다가가 빛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빛에서 물러나면 어둠속에 있는 자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신들이 되게 한다면‘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37-38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아드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당신이 ‘말씀이신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셨다.
이 ‘말씀이신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단지 모습이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의 육체를 지니셨다.인간 육체 안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일들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요 말씀이시라는 것이 그분의 일들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분이 아버지의 일들을 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다. 당신의 육체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불리기에 합당치 않다고 보인다면 그 일들만이라도 믿으라고 하신다. 여기서 아들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들어야 한다.
유다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들의 손을 벗어나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40절)고 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다른 민족들의 교회로 가시는지를 보여준다. 이 교회에는 세례의 샘이 있고, 많은 사람이 요르단 강을 건너 그분을 찾아온다.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 건너편에 머무르셨다는 말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서 다른 민족들로 건너가셨고,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그리스도에 관하여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41-42절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 가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께 몰려와서,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41절)고 하며 예수님을 믿었다고 한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던 요한을 믿었다. 그렇다면 표징을 일으킨 예수님은 더더욱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 때문에 요한의 신뢰성이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우리 자신의 참된 변화와 더불어 살아있는 표징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음을 기억하며 그러한 새로운 삶을 주님께 바치며 살아가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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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요한 10,31-33)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8),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씀들을 신성모독 발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좋은 일’은 ‘하느님의 일’을 뜻하고, 예수님의 일과 말씀과 삶을 모두 가리킵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라는 말씀은, “나의 일과 말과 삶은 모두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라는 유대인들의 말은, “당신의 일을 ‘하느님의 일’로 인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사람의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칭 메시아’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뿐이고, 당신 스스로 하느님으로 자처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 부활 후에 토마스 사도가 처음입니다.(요한 20,28)>
<신앙은, 상식이나 과학이나 논리가 아니라, 선택과 결단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이 세상이 ‘저절로,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문제로 서로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각자 자기가 믿는 대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을 살고, 무신론자들은 목적지 없는 유랑 같은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구절은 시편 82편에서 온 것입니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 여기서 ‘신’은 법관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법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재판한다는 점에서 구약시대 사람들은 법관들을 ‘신들,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인간 구원’이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또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신 일들은 모두 ‘아버지의 일’입니다. 앞의 9장을 보면,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뜬 사람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3) 예수님께서는 그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똑같이 보아도,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안 믿습니다. 왜 그렇게 갈라질까? 하느님(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믿는(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42)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5,38) 안 믿는 사람들은 그들 마음속에 사랑이 없어서, 예수님의 일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니까 믿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에는 관심도 없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주셨다면, 사람들은 열광하면서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빵의 기적’ 후에 일어난 일이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기적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그 빵만 보고서 열광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한 6,15)>
예수님 말씀에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 거짓 예언자와 가짜 메시아를 믿으면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라는 말씀은, “나에 대해서 모르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된다면, 나를 믿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다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요한 10,30) 깨닫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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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문학으로 성경 읽기’를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도미니코 페티의 ‘걸작과 습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도미니코 페티는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하나는 거의 습작의 수준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성을 기울인 걸작이었습니다. 걸작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에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습니다. 도미니코 페티의 걸작은 그곳에서는 그리 높게 평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걸작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작으로 그렸던 작품은 독일의 뒤셀도르프 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걸작에 있지 않았습니다. 습작처럼 그렸던 그림을 통해서 사람들을 변화시켰다고 합니다. 그림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것을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Ego pro te haec passus sum. Tu vero quid fecisti pro me.)”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은 이 그림 앞에서 깊이 묵상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영국의 해버걸이라는 여성은 이 그림 앞에서 깊이 묵상하였고 영혼을 울리는 성가를 작사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똑똑하고 잘났던 바리사이의 기도보다는 겸손했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넉넉한 가운데서 헌금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헌금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하느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방인이었던 시렙다 과부의 집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나아만을 치유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굳이 방문하지 않고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했던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학력, 능력, 업적, 재물, 명예, 권력, 신분’과 같은 것들에는 큰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습작’이라고 생각하는 ‘겸손, 희생, 나눔, 인내, 기도, 봉사, 절제’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하셨던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갔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키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베로니카였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성소국장으로 지냈습니다. 교구장이신 추기경님, 주교님들, 국장신부님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교황님의 한국방문을 준비하는 모임에도 함께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제 사제생활의 ‘걸작’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5년도 감사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주교님, 다른 국장신부님들이 많아서 저는 그리 드러날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경기도의 작은 성당에서 3년 동안 지낸 적이 있습니다. 신자수도 적고, 헌금도 적고, 할 일이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제 사제생활의 ‘습작’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습작’과 같았던 그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사제생활 중에 다시 돌아가고픈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들 속에 감사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빌라도가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 예수님의 모습에서 결코 ‘걸작’의 품위를 찾기 어렵습니다. 가시관을 쓰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습작’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걸작과 같은 빌라도의 권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걸작과 같은 헤로데의 신분에 있지 않았습니다. 걸작과 같은 대사제 가야파와 안나스의 율법에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한 없이 초라해 보이는 ‘이 사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려고 하는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요?
사순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편견과 오만 그리고 교만과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 이기심, 자존심, 명예 그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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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주간이 어느덧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서 안의 유다인들의 행동도 극에 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 자처했다고 해서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 합니다. 그들 안에 신앙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파괴적인 행동에서 율법주의에 빠진 종교적 근본주의를 볼 수 있습니다.
종교는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 종교가 그릇된 신념이나 편견과 고집으로 꽉 차 버린다면 그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전쟁과 폭력과 살상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신념과 종교를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커다란 재앙이 됩니다.
신앙은 우리 곁에서 존재하시는 분을 알아보는 것, 우리와 함께 걸으시고, 우리를 당신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진정한 형상이십니다.
신앙은 이념이나 특출한 행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날 때,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처럼 어려움 중에도 마음의 평화를 깨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건지신 주님께 찬양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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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용진 요셉 신부님]
어릴 적, 첫영성체 교리를 받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는 동안 문득 ‘예수님은 나의 큰 형님, 나는 예수님의 막내 동생’이라는 사실에 행복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의 착각이 숨어있는데 아시겠습니까?
뭐가 그리 대단한 발견이라고 그 당시엔 싱글벙글거리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나는 하느님의 자녀이니까, 그럼 예수님은 나의 큰 형님이 되시겠네~’라고 떠들어댔고,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다른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좋아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만 특별히, 예수님과 형님 동생하는 그런 가까운 관계도 아닌데, 우리 모두 예수님과 그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철없음에 그저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예, 그렇습니다. 제 착각은 바로 ‘예수님과 나는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그러니까 예수님과 내가 아주 가깝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이 착각이야말로 다른 그 어떤 믿음보다도 크게 제 삶을 이끌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나는 가까운 사이니까 친해져야 하고, 예수님과 나는 가까운 사이니깐 큰 형님께서 하신 일을 나도 해야지하는 생각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제 서품을 준비하면서도 서품 성구를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들려왔던 마태오 복음 3장 17절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으로 정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예수님과 나는 가까운 사이’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세례를 받으셨고 이때 이 말씀을 들으신 것처럼 사제생활을 시작하는 나에게 이 말씀이 큰 위안과 힘이 되리라는 확신에서 이 성구를 선택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힘이 되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예수님과 나는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착각보다는 ‘나는 정말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고 있구나’하는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시는 특히, 뭔가가 먹고 싶을 때는 어김없이 먹게 해 주시고, 이때까지 제가 주도하는 행사에서는 한번도 비가 온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 새벽까지 비가 와도 아침에는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맑은 날씨를 선물로 주시기까지 하시니 어떻게 이런 착각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ㅎㅎㅎㅎ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밝히시며 ‘그 아버지의 그 아들’답게 사셨던 예수님.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본받아 열심히 살아야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도 제가 하고 있는 이런 착각, 필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막내 동생이자 하느님 아버지의 귀여운 아들, 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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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손에 돌을 집어들고 예수를 치려고 했던 유다인들이 또 다시 돌을 집어들었다. 요한복음을 통틀어 유다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한 것은 모두 두 번이었다.(8,59; 10,31) 물론 같은 자리에서 집어든 돌을 놓았다가 다시 집어든 것은 아니다. 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 사이에는 요한복음의 여섯 번째 표징사화에 해당하는 '태생 소경의 치유'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생트집 사건'(9,1-41), 그리고 이 사건과 직접 연결된 '목자와 양의 비유'(10,21) 가르침이 자리하고 있다.
유다인들이 돌로 예수를 치려했던 첫 번째 이유는 초막절 축제 마감에 즈음하여 성전에서 행한 가르침과 논쟁 때문이었다.(8장)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을 밝히신 이유 때문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자신을 유다인들이 믿고 있던 하느님께서 파견한 메시아인 동시에 아들로 선포하신 것, 아버지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것, 그리고 유다인들이 조상들 중에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던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있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오늘 복음의 바로 전 구절로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한 가르침에 잇따른 논쟁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10,3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돌로 쳐죽이려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는 둘 다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탈출 20,7)는 십계명의 제2계명에 근거한다. '주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온 공동체가 그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이방인이든 본토인이든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4,16)는 시행세칙에 저촉되는 것이다.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선동하는 자들 또한 "돌로 쳐죽여라. 그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건져내 주신 너희 하느님 야훼와 버성기게(벌어져 틈이 생기게 만드는) 하려고 꾀는 자이니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신명 13,11)는 세칙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세칙들이 예수님께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스스로 당신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죄가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스스로가 자신에 대하여 지나칠 만큼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31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와 같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신다. 오히려 죽을 뻔한 빌미를 제공하면서까지 당신의 신적(神的) 본성을 계시해 주신다.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라는 생각을 굳혔고, 그래서 손에 돌을 집어든 것이다.
이렇게 오늘은 유다인들이 손에 돌을 집어든 채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을 만나게 된다. 유다인들이 예수께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 하고 있소?"(33절) 하고 대들자, 예수께서는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34절)는 율법서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여기서 율법서는 모세오경과 예언서만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한다.
이 말씀은 정확히 시편 82장 6절을 가리킨다. 그러나 문맥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삽의 노래에 해당하는 시편 82장 전부를 봐야 한다: "하느님께서 신(神)들을 모으시고 그 가운데 서시어 재판하신다. 언제까지 너희는 불공평한 재판을 하려는가? 언제까지 악인에게 편들려는가? 약한 자와 고아를 보살펴 주고, 없는 이와 구차한 이들에게 권리 찾아주며,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풀어주어라.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그들은 분별력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여 어둠 속을 헤매고만 있으니 세상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나의 선고를 들어라. 너희가 비록 신(神)들이요, 모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들이나 그러나 너희는 보통 인간처럼 죽겠고 여느 군주처럼 넘어지리라. 하느님이여, 일어나시어 온 세상을 재판하소서. 만백성이 당신의 것이옵니다."(시편82장)
위의 시편 내용에서 시편저자가 하느님의 재판에 부친 신(神)들이 누구인가? 여기서 신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지도자(재판관, 관리)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하느님의 능력, 즉 정의를 실현하는 기능을 대리하기 때문이다. 시편 저자는 백성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자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살펴야 할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불의를 정당화하고 권리를 남용함으로써 대리적 기능을 저버렸음을 지적하고, 이로써 그들이 신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했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적어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사람은 누구나 신이라 불리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신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헤아리지도 행하지도 못함으로써 '신(神)이 됨'과 '아들들이 됨'의 자격을 박탈당한 유다인들은 손에 돌을 거머쥐고 예수를 해치려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벗어나 요한이 한 때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서 머무르셨다고 한다. 요르단 강 건너편이라면 거기가 어디인가? 바로 예수님 스스로가 세례를 받으시고, 성삼 하느님의 현현(epiphany)과 더불어 아들로서의 계시를 받은 곳이며, 공생활의 준비를 위한 대피정(40일간)을 하셨던 곳이다. (마태 3,13-4,2; 마르 1,9-13; 루카 3,21-22; 4,1-2 참조)
예수께서 이곳에서 자신의 세례를 상기하시고 하늘에서 들려왔던 아버지의 음성을 되새겼을 것이다. 사순절은 이렇게 우리가 이미 받은 세례성사를 기억하는 시기이며,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는 시기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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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 봉헌축일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시오.”(요한 10,24)라는 질문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이들 안에서 말씀이 되는 일, 곧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를 흔히 ‘신화’(θεοσισ)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폐기 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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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한다.”(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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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찬양과 모독>
요한 10,31-42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찬양과 모독>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기에
나 있음으로써
하느님께서 세상에 계시게 함이
하느님께 찬양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음에도
나 있음으로써
하느님께서 세상에 계시지 못하게 함이
하느님께 모독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기에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일하시게 함이
하느님께 찬양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음에도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일하시지 못하게 함이
하느님께 모독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기에
세상에서
내가 하느님처럼 됨이
하느님께 찬양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음에도
세상에서
내가 하느님처럼 되지 않음이
하느님께 모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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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방식이 꼭 최고는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 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 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게는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 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시선도 그러해야 합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을 보지 않고 그저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내 방식으로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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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순 제5주간에 읽게 되는 복음은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긴장 관계가 점차 고조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집어 던지려고까지 합니다. 이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다음의 긴 담화를 하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까? 요한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은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이면서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는 신성 모독이라는 논리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기적’이라는 낱말 대신, ‘표징’이라는 낱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다른 공관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기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면, 요한 복음서는 기적이 ‘표징’으로서 담고 있는 의미에 더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그분께서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심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일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일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합니다. 그 작은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찾으려 끊임없이 애를 씁니다. 우리 각자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오늘 하루의 일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그 의미를 곰곰이, 차분하게 성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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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요한10,39)
<예언자의 길!>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이들을 옳은 길로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잘 따르다가도 이내 벗어나 또 다른 예언자들이 파견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파견된 예언자가 바로 하느님과 같으신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처럼, 그리고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은 참으로 '무거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며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예언자는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달콤한 소리를 원했지만,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소리인 쓴소리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쓴소리를 거부했습니다. 더러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도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하느님의 소리인 쓴소리를 하는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언자들이 성직자와 수도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예언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유다인들처럼 배척하고 있지는 않은지?
제10처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묵상합시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십자가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가 내 삶의 아름다운 일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벌 받은 사람처럼 불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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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의대 교수는 의대생들이 시험에서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지에 적어낼 때 감점을 아주 크게 한다고 합니다. 보통 답을 몰라도 자기 나름의 답을 적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의대 교수는 의사가 생명과 연관된 직업이기에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하긴 진찰하고서 잘 모르겠다며 아무 약이나 처방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분명합니다.
추측의 위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추측을 삶의 전반에서 취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추측, ‘아니면 말고’ 식의 말들, 한 가지 모습만을 보고서 ‘그 사람은 ~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 짓는 모습 등등….
이 추측은 과거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똑같이 범했던 죄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합니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라는 예수님 말씀이 신성모독이기에 돌로 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성모독의 경우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때에만 해당했습니다. 율법해석가인 랍비 압바우(300년)은 “어떤 사람이 나는 하느님이요 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나는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굳이 따진다면 ‘거짓말’을 했다는 죄에만 해당하지, 신성모독 죄는 아닙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로마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기에, 사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입니다. 좋은 일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믿고 따른다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라도 하느님을 믿으라는 호소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일들이 계속됩니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어떻게든 믿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이 그 사랑의 손길을 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이제 더는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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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누구인가?>
- “한결같이 늘봄”을 사셨던 분 -
어제 강론시 제가 예수님께 지어드린 “늘봄”이란 호가 참 마음에 듭니다. 마침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가 “감사합니다. 작년 여름 ‘늘봄 마을’로 이사왔는데 바로 예수님 마을이네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강론 댓글을 보니 참 잘 정했다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주의 요셉 수도원을 ‘배꽃 마을’이라 부르는데 ‘늘봄 마을’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아마 1주일 정도 지나면 배꽃 만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요즘 봄꽃들 만발한 파스카의 계절입니다. 아마 일년중 가장 꽃들 많이 피어나는 시기일 것입니다. 인고의 겨울을 지내고 부활의 봄에 피어난 꽃들이라 한결같이 청초淸楚합니다. 올들어 세 번째 인용하는 제 좋아하는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생명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들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생명이다”-1999.3
요즘 개나리꽃들의 샛노란 청초함이 단연 눈길을 끕니다. 우리나라 산하의 대표적 봄꽃은 아마 개나리와 진달래일 것입니다. 역시 오래전 써놨던 “개나리”란 시도 나눕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봄날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 초롱들
가득 켜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다”-2001.4.11.
파스카의 계절 “늘봄”같은 예수님입니다. “늘봄”에 하나 더하여 “한결같이”란 호를 예수님께 붙여드리고 싶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한결같이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본기도시 ‘한결같이’가 들어간 두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주님, 저희가 한결같이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며”
“한결같이 거룩하게 살아 영원한 상속을 받게 하소서”
그러고 보니 한결같이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여기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진짜 늘봄 마을이자 예수님 마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 서울교대부국을 방문했을 때 동산에 세워진, 이미 고인인 된 서울교대부국 교장으로 재직중 병사한 '박대한' 제 친구의 “한결같이”란 글이 새겨진 기념비도 감동이었습니다. 아마 제 친구의 좌우명이었던 듯 합니다. 교직원들은 물론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았던 분이었습니다.
세상을 들여다보면 한결같이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변절자들과 배신자들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제 주변을 보면 우리 수도형제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처럼 언제나 한결같이 늘봄을 살아가는 분들을 자주 발견하곤 합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평범하나 확실한 성인들입니다. 오늘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가 두 권의 새 책이 반가웠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일독一讀 하려 합니다.
“꽃동네 40년사”(1976-2016)
“꽃동네 오웅진 신부가 전하는 삶의 깨달음”
꽃동네의 창설자 오웅진 신부 없는 꽃동네를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말들도 많지만 제가 볼 때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닌 오웅진 신부 역시 예수님을 닮아 한결같이 늘봄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를 보면 예수님과 예레미야 역시 한결같이 늘봄을 살았던 분임을 알아채게 됩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의 삶입니다. 사실 주님과 일치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제1독서의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친구들까지 등을 돌린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주님께 바치는 다섯 번째 고백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한 번 들어 보십시오.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고발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마고로 미싸빕은 “사방에서 공포가!”를 뜻하는 말마디로 예레미야가 처한 사면초가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와중에서 터져 나오는 예레미야의 하느님 찬양과 구원의 고백입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랑하는 주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는지는 오늘 독서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 말씀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들어도 감동스럽게 마음에 와 닿는 고백입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20,9)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예표처럼 생각됩니다. 끊임없이, 참 집요하고 끈질기게 따라 붙어 예수님을 괴롭히고 공격하는 유다인들입니다. 제자들은 어디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 혼자서 계속 겪는 고난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분의 신원이 잘 드러납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늘봄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음은 아버지와의 상호내주相互內住의 깊은 내적 일치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그리하여 눈밝은 많은 이들은 이런 예수님이 일으킨 무수한 표징을 알아보고 피신중인 예수님을 찾아와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백하며 예수님을 믿습니다.
참으로 예나 이제나 우리와 함께 한결같이 늘봄의 삶을 사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중에 우리 또한 한결같이 늘봄의 정주생활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 해 주십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18,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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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3n4l0_AB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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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요한 10, 32)
이미 지나왔던
많은 길이
좋은 일들로
넘쳐난다.
보여주신
좋은 일로
좋으신
하느님께로
돌아선다.
좋은
모든 일은
하느님의
생명이다.
생명의 봄이
힘차게
생명의 길에서
피어나고 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실천하시는 좋은
행위(行爲)이시다.
원래부터
있었던
좋은 사랑을
행위로
드러내신다.
아름답게
가꾸시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신다.
하느님과
하나되는
좋은 일이다.
원래부터
하느님과
우리는 좋은
하나였다.
하느님의
좋은 자녀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들의
좋은 관계이다.
본래의
우리로
돌아가는
십자가의
사순이다.
끝내 하느님께서
하시는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은
좋으신 사랑이다.
가장
좋으신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좋은 일은
좋은 행위로
드러난다.
봄꽃이
더욱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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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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