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연중 제17주일, 조부모와 노인의 날) 끝까지 주기 예수님은 산에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당신을 따라온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셨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셨는지는 묵상 거리가 아니다. 자기가 가진 걸 모두 봉헌한 그 아이에게 감동받아서 사람들이 가진 걸 모두 내놓아서 그렇게 됐는지, 예수님이 빵과 물고기를 만들어내셨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풍랑을 잠재우고 죽은 이도 되살려내시는 분이 어떤 일이든 못하셨겠나. 집중해야 할 건 많아진 빵이 아니라 빵이 많아지게 한 예수님 마음이다.
거기까지 당신을 따라온 그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고(마르 6,34), 예수님은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다. 그곳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든, 수천만 원어치(이백 데나리온) 빵이 필요하든 예수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자들이 반대하고 불평을 해도 예수님은 그들을 보는 순간부터 그들을 먹일 마음이었다. 필리보에게 물어보신 건 그들을 교육하시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어렵다고, 안 된다고, 하기 싫다고 불평하지 말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겠다는 마음으로 고쳐먹으라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사랑이고, 사랑은 주는 거다. 완전한 참사랑은 끝까지 그리고 다 주는 거다. 형장에서 순순히 목을 내놓는 순교자들을 망나니들이 두려워했던 거처럼, 다 주려고 하는 사람을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 있는 건 딱 하나, 불신뿐이다. 믿지 않고, 또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전능하신 하느님도, 외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하느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다. 젊었을 때는 삶을 몰라서 그랬다고 치고, 나이가 들었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사람처럼 미성숙하고 불쌍한 사람은 없을 거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사람은 줄 때 기쁘고 사람다움을 느낀다. 하루 종일 폐지를 주우면 4, 5천 원을 버는데, 그런 수고는 나중에 손주 용돈 주는 기쁨으로 보상받는다고 한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서 주어야 사람답고 온전하다.
2021년 프란치스코 교종은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하였다. 그것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신앙의 전수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며 노인들의 소명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늙는 게 아니라 영글어 가고 완성되어 가는 거니까 서글퍼하지 않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 후보자와 TV 토론에서 참패한 후에 그다음 유세에서 다른 때보다 더 목청을 높여 연설하는 모습이 부자연스럽고 안타깝다 못해 애처로워 보였다. 그는 올해 82살이다. 아직 그 나이가 안 돼서 잘 모르겠지만, 그때면 적당한 단어가 잘 안 떠오르고, 자꾸 떨어뜨리고 넘어질 거다. 마음은 늙지 않았지만, 뇌와 몸은 아니다. 방송매체에서 연예인들이 나이 든 걸 부끄러워하고 어려 보인다는 걸 칭찬처럼 여기는 풍조가 개선되기를 바란다. 몸은 도움을 더 많이 받겠지만 마음은 더 많이 줄 거다. 최근 조카가 아이들 첫영성체 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참 기쁘고, 참 많이 칭찬했다. 부모로서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삶으로 전해준 것과 선생이나 친구가 전해주는 것은 비교가 될 수 없다. 선생이 전해준 건 머리에 남고 부모가 전해준 건 마음에 남고 온몸에 새겨진다. 모든 걸 다 내어주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늙어감이 서글픈 게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거라서 더 평화롭게 한다, 시편은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으며 수액이 많고 싱싱하다고(시편 92,15)” 하고,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잠언 22,6).”라고 가르친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인생은 소유가 아니라 내어줌이라고 외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마음을 아드님의 마음속으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