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의 구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 13:11)
성경을 보면 구원의 조건이나 형태가 시대와 대상에 따라 다르게 변천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담과 하와의 구원은「생명나무 열매」였는가 하면
가인과 아벨의 구원은 「더 나은 제사」(히 11:4)였고 홍수 심판 때는「방주」였으며
아브라함 가족에게는「언약」이었는가 하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율법과 제사」였었다.
주님 승천 후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이었으며 이천년 복음시대는「십자가 구원」이었다.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서두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고 있다"라면서「이 시기의 우리의 구원」을 생각게
할 뿐 아니라 "처음 믿을 때와는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다"라는 어휘를 사용함으로 우리를 긴장케 하고 있다.
"이 시기를「말세」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의 현상을 보면 말세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희박해져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책자나 강연이나 부흥회를 통해 대단한 열풍이 일었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조용해졌는데도 조용해진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현상을 태풍에 한번 비유해 보기로 하자.
태풍이 남지나해에서 발생하여 북상할 때는 온통 야단법석이다.
기상대는 말할 것도 없고 재해 대책본부에서 대통령이 직접상황보고를 받는가하면
전 공무원에게 갑호비상(甲號非常)이 걸린다. 바람 태풍이 오기 전에 반드시 민심태풍이 먼저 설친다.
그러나 태풍이 상륙하여 한반도가 태풍의 눈이라는「중심권」에 들어가게 되면
삽시간에 그렇게 조용해질 수가 없다.
그래서「태풍전야」란 말까지 생긴 것이다. 일단 태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는 피해상황이 보고되기 시작한다.
태풍의 결과만 남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말세에 대해 그처럼 요란했단 것은「태풍발생과 북상 중」임을 알리는 예보가 아니었을까?
오늘날 이처럼 괴괴한 것은 태풍중심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조금 있으면 피해상황이 알려지기 시작할 것이다.
성경은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라"(마 24:8)했으며 또한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기근」
과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인가?
구약 아모스 선지는 아모스 8:11에서 분명히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 라고 하셨다.
「지진」
과연 리히터 지진계가 감지하는 그런 지진일까?
그런 지진은 지각운동이 심했던 옛날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었다는 것은 웬만한 지리학자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12: 26절에서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을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면서 계속되는 말씀......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진동치 못할 나라」라는 대목이다.
Διο βασιλειαν ασαλευτον παραλαμβνοντες(디오 바실레이안 아살류톤 파라람바논테스)
「우리」라는 사람들은「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는데 어떤 존재는「진동할 것들」이라는 말씀이다.
(이 부분은 해석상 전문적 연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피하기로 한다)
그러면서 28절 후반부의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찌니....."에서
「이로 말미암아」가 앞에 나오는「진동치 못할 나라」임을 가리키고 있다.(스테판 원어성경참조)
이상의 말씀들을 볼 때「기근」이나「지진」이 배고픈 기근이나 지각변동의 지진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처음 구원’과 ‘이 시기의 구원’?
같은가? 다른가?
같다면 무엇이 같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 를 살펴보자.
요 1:17절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에서 율법과 은혜와 진리는 말하고 있다. 율법시대는 지나갔다. 그동안을 이구동성으로 「은혜시대」라 했다.
십자가 구원은 분명 은혜이다.
시기적으로 분명히 율법시대가 있었고 은혜시대가 있었는데 왜 진리시대는 없는가?
진리가 무엇인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 ....진리요"(요14: 6)이시다.
거기「나」는 누구인가? 요한복음 14장의 주제는「진리의 성령」이시다.(요 14:17)
그는 누구인가? 다른 보혜사이시다.
왜 다른 보혜사라 하셨는가? 같은 존재의 다른 형태이시기 때문이다.
같은 형태라니.....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이다.
그 말은 또 무슨 뜻인가?
예수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만민의 유월절 양으로 단번제사의 희생 제물이시다.(히 9:12-15)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른 보혜사 진리의 성령으로 우리 속에 거하시는 (요14:17)분으로
아버지께로 가게 하는「길」이시요.(요 14:6) 우리를 자유케 하는「진리」시요(요 8:32)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는「생명의 성령」이시다. (롬 8:2)
이런 관점에서 다시 요 1:17을 요약하면 율법=모세, 은혜=예수, 진리=그리스도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 사실은 신약성경 자체가 증거한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상은 역사서로 봄)에서는 주로「예수」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흔치 않은 반면에
로마서 이후는 주로「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의 호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승천전의 예수와 승천후의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다른 보혜사」되심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그런데「이 시기」에 있어서 오늘날의 구원조건이나 형태는 어떠한가?
십자가 복음 아니면 은사성령을 강조하고 있고 그것이 전부인양 외치고 있는데....
십자가 복음은 로마서 6장 전반부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그 목적이 무엇인가?
특히 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되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계속해서 10절은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라 하시며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기"라고 ........
그러므로 한 마디로 십자가 구원은 즉각적이면서 단 한 번이면 족하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구원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은사성령’ 역시 그렇다.
표적은 어디까지나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성령의 나타나심」이다.(히 2:4, 고전 14:22,고전 1:4)
또한 표적은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게 하기 위한「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막 16:20)
주님은 요 4:48절에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고 탄식하실 뿐 아니라
마 16:4에서는「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질책하시며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잘라 말씀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요 6장은 오병이어로 배부른 무리들은 예수님을 무엇 삼으려 했으며(15절)
"내가 생명의 떡"이라 하시자 나중에는 다들 어떻게 행동했나(요 6:66)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바다 건너편에서 무리를 다시 만난 주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한 단계 발전해서)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라고 하시며
썩을 양식(원문; απολλμι, 멸망시키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원문; 거하는)양식을 위하여 하라"
는 말씀으로 그들의 요구를 일축시키고 계심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결코「표적무리」들을 환영하시거나 좋아하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은 자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왜? 저들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아시기 때문이라고 요 2:23이하는 노골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시기의 구원 !
이 시기를「말세」, 또는「추수 때」라 한다.
농부가 농사가 잘 됐다, 못됐다 하는 기준은 그 시기에 따라서 달라진다.
못 자리판 속의 모도 잘잘못의 기준이 있으며 모를 낸 후에나 가지치기는 할 때와 이삭이 팰 때 등등
적기에 제 구실을 제대로 해야 잘됐다 할 수 있다.
다른 논은 가지 뻗기를 하고 있을 때 못자리의 모가 아무리 충실하다 해도
그것을 보고 잘됐다 할 농부는 아무도 없다.
지금은 추수기다.
알곡이냐 쭉정이냐를 가를 때가 추수 때인 것이다.
그런 지금, 이제 패기 시작한다든지 여물이 들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잘 자랐다해도 그것은 시기적으로 이미 가능성이 없어져 버린 벼인 것이다.
알곡과 쭉정이 !
차이점이 무엇인가?
알곡은「생명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내년 봄 다시 심으면 싹이 트는「씨나락」알곡이다.
쭉정이는 아무리 외양은 알곡의 형태와 조건을 갖췄다 해도 씨눈에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씨눈에 생명이 언제 들어가느냐?
추수하기 직전에 들어간다.
그 증거로 대개 추수기 직전에 태풍이 많은데 아무리 잘 성장한 벼라도 그때 태풍에 쓰러져 버리면 이제까지의
농부의 수고가 헛수고가 되는 것은 씨눈에 생명이 없는 쭉정이, 곧 싸라기가 되어 버리기 되기 때문이다.
또한 추수적기를 놓치면 이삭에 붙어 있는 나락 낟알이 떨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농부는 추수 적기를 알아서 제때에 추수를 해야 쭉정이 추수와 낙곡 추수를 방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구원 ! ?
곧 추수기의 구원은「생명」이다.
아무리 은혜시대인 여름내 성장이 좋았다해도 추수 직전에 생명이 들어가지 않으면 쭉정이요 낙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의 곡간에 들일 가치가 없어(마 3:12)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본문에서 결론을 얻어보자.
'빛의 갑옷을 입자!" 무슨 말씀인가?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는 권면이시다. 사도 바울은 고후 5:1절 이하에서
"만일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짓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그러시면서 4절에서는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족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에서「죽을 것」=내가, 「생명」=그리스도에게, 「삼킨바」=덧입고자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곧「알곡」이 되는 순간을 잘 보여준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알곡과 열매의 구성요소와 형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코자 한다.
과일은 과표(果表)와 과육(果肉)과 씨,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껍질은 과육, 즉 살을 보호하고 있는 형태이며 역시 과육도 씨를 보호하고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또한 과육은 씨가 싹으로 자라는데 영양분 역할을 하고는 없어진다.
여기서 그것을 지으신 조물주의 뜻과 그것을 음식물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과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살, 즉 과육을 목적하지만 조물주는 씨를 목적으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창 1:20절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나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한 마디로 "너희 식물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맺는 나무이다" 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누차 "열매로 나무를 알라"(마 7:20)하시므로 성경이 말하는 열매가 식물(植物)이 아니라 동물,
즉 사람임을 명확히 해 주셨으며 마 12:33이하에서는 그 열매가「말」이라는 것까지 밝히시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시면서
36절에서는 결정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고 예고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뿐이랴 ! 마15장은 더 노골적으로 11절에서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며 13절에서는 "...심은 것마다 네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하시므로
바리새인들은 천부께서 심은 것이 아닌 "그 원수가 와서 곡식(알곡)가운데 덧뿌리고 간 가라지(마 13:25) 임을
암시하시며 드디어 요 8:44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하시며 47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하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모두 들추어내어 버리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 하시며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
하시며 요 9:40절에서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묻는 바리새인에게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져 있느니라"라는 말씀으로 그 더러운 입을 막고 계심을 기록하고 있다.(롬 3:19)
"어두움의 일을 벗어야"합니다. 그리고서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할 때입니다.
육신의 일만을 도모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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