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하워드 페인의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 ]
미국의 애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곡 보다 미국인들이 더 좋아하고 자주 부르는 노래가 아마 존 하워드 패인(John Howard Payne)의 '홈 스위트 홈'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남북전쟁 당시 남군과 북군이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전투를 하고 있을 때 이 노래와 관련됐던 사연이 지금 까지 내려 오기 때문이다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 즐거운 나의 집)’이 남북 양측 군대에 의해 함께 울려 퍼진 사건은 미국 남북전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감동적 일화 중 하나이다.
1862년 12월 30일 밤, 미국 테네시주 머프리즈버러(Murfreesboro)의 스톤스 리버 전투(Battle of Stones River) 현장에서 있었던 실화로 남북 양 진영은 다음날의 대규모 격전을 앞두고 북군과 남군 약 8만여 명이 스톤스 강을 사이에 두고 불과 수백 미터 거리 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밤, 양측 군악대는 사기를 높이고 기선 제압 을 위해 군가를 연주하기 시작 했는데 북군 군악대가 'Yankee Doodle' 등을 연주하면, 남군 군악대는 'Dixie' 등으로 맞받아 치며 경쟁적으로 연주를 하다가 한 군악대가 존 하워드 페인 작사의 'Home, Sweet Home'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상대편 군악대도 합주를 시작했고, 강 양쪽에 대치해 있던 수만 명의 병사들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 하며 눈물을 흘리며 모두 다 함께 합창을 불렀다고 한다.
그 순간 만큼은 노래 한곡 때문에 전쟁은 사라지고 오직 조국과 동포애만 남았던 것이다. 이렇게 <즐거운 나의 집>의 멜로디는 전쟁 중에도 서로의 적대감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변화시켰던 놀라운 힘을 발휘 했던 것이다.
이 일화를 증언하고 기록으로 남긴 인물은 남군(남합중국군) 소속의 참전 군인이었던 프랭크 M. 믹슨(Frank M. Mixson, 1846–1932) 이었는데 사우스 캐롤라이나 제1자원보병연대 소속으로 참전 했다.
전쟁 후 1910년에 자신의 참전 경험을 담은 회고록에 사병의 시각으로 본 남북전쟁의 참상과 병사들의 인간적인 순간들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이 홈 스위트 홈 사건에 대해서도 기록해 놓아서 당시 전투 전야에 군악대의 대결과 감동적인 일화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Home, Sweet Home’은 전쟁 당시 북군뿐만 아니라 남군 지휘부 에서도 실제로 연주 및 가창 금지령을 내렸던 대표적인 곡이었다고 한다.
금지곡이 된 구체적인 이유와 배경은 멜로디 와 가사가 너무 애절 하여 장병들의 극심한 향수병 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 전투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병사들이 이 노래를 들으면 전의를 상실하고 눈물을 흘리며 탈영을 시도하는 일이 급증했기 때문 이었다.
당시 남북 양측에서는 ‘Home, Sweet Home’ 외에도 고향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Lorena’ Auld Lang Syne같은 감성적인 발라드 곡들이 비슷한 이유로 군영 내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고 한다.
이곡의 작사자인 존 하워드 페인은 1791.6.9.~1852.4.10.)은 미국의 극작가 이자 배우였는데 그는 열세살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마저 세상을 뜨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이산 가족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며 평생 집이 없이 결혼도 안하고 산 사람이었다.
웅변선생이었던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배우가 된 그는 미국인 으로서는처음으로 영국 무대에 진출한 연예인 이었는데 당시 이 노래는 헨리 비숍이 곡을 붙인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Clari, The Maid of Milan)에서 불려지며 유명해 지자 그가 이 노래에 가사를 붙여 발표를 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래의 반열에 올랐다.
"아무리 초라해도 내 집만한 곳은 없다"라고 한 이 노래는 그가 어머니와 아버지 와 같이 살던 그 집 외에는 자기 집이라고는 평생 가진 적이 떠돌며 살아온 그의 인생이다 보니 더 고향집이 그립고 간절해져서, 이 노랫말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842년 튀니스 주재 미국영사관에서 10년간 지내다가 거기서 숨을 거두었는데 죽기 한 해 전에 친구에게, “나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하도룩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해주었지만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은 없었고, 그 맛을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맛을 보지 못하고 살 것 같다” 라고 편지를 써서 친구에게 하소연 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후 31년이 지나서야 미국 정부가 알게 되었고 미국 정부는 즉각 그의 유해를 그의 출생지인 뉴욕주 뉴욕시(New York City) 로 운구해 왔는데 여기에는 워싱톤 모누멘트 제작시에도 자금 지원을 하고 미술관등을 지어 사회 공헌을 했던 자선사업가 윌리엄 윌슨 코코런(W. W. Corcoran)의 후원으로 프랑스 증기선(부르군디아 호)을 통해 뉴욕항에 도착한 것이다.
유해가 도착하던 날 뉴욕항은 많은 저명인사와 수많은 시민들과 그리고 65명으로 구성된 밴드가 '홈스위트 홈'을 연주하면서 죽어서야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와 같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맞았다.
그를 열광하며 환호하던 시민들은 그의 유해가 내려오자 모두 눈시울을 붉히며 그의 죽음과 귀향을 기렸는데 유해는 뉴욕 시 당국과 군 의장대의 영접을 받아 뉴욕 시청(City Hall)으로 운구되었으며, 시청에 안치되어 수많은 시민들의 조문을 받았다.
그의 유해가 미국으로 귀환했을 당시(1883년 3월) 미국의 대통령은 제21대 대통령 체스터 A. 아서(Chester A. Arthur)였는데 아서 대통령은 당시 뉴욕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가지는 않았지만 뉴욕항 대신 1883년 6월 9일 페인의 탄생일 에 맞춰 수도 워싱턴 D.C.의 오크힐 묘지(Oak Hill Cemetery)에서 거행된 공식 안장식 및 국가적 추모 행사에 직접 참석했다.
이 추모식에는 아서 대통령을 비롯해 행정부 각료, 연방 대법관, 군 주요 장성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존 필립 수자가 이끄는 해병대 군악대가 ‘즐거운 나의 집’을 연주했다. 이 묘지 역시 코크란의 배려로 그의 안식처가 될 수 있었다.
필자도 2026년 5월 워싱톤 방문시 그의 묘를 찾아 참배를 했는데 죽어서야 집을 구한 그의 묘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로 미국을 건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신 하워드 패인을 평안히 잠들게하소서'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았고 죽어서는 아이러칼 하게도 평생 자신의 집을 갖지 못하고 타지를 떠도는 보헤미안 같은 삶을 살다가 최고의 집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많은 시간을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East Hampton) 에 있는 조부모님 댁에서 보냈다. 이 집은 현재 '홈 스위트 홈 박물관(Home Sweet Home Museum)' 으로 보존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이곳을 그의 정서적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펌>
첫댓글 나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하도룩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해주었지만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은 없었고, 그 맛을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맛을 보지 못하고 살 것 같다” 좋은글 감동깊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