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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소송인단, 민본과의 소중한 인연]
2013년 6월 18일.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김수복 선생님이셨다. “김후용 목사님과 한영수 대표님께서 내일 광주지방검찰청에 제18대 대통령 부정선거와 관련해서 고발을 하신다고, 광주에 오신다는데, 자네도 고발인 명단에 올리고 함께 만나세.” 두 분이 누구인지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평소 존경했던 김수복 선생님을 믿고 동의했다.
2013년 6월 19일.
광주지방검찰청에 김후용 목사님과 한영수 대표님께서 오셨다. 두 분과 처음 만남이었다. 오전에 고발장을 제출했는데, 오후에 참고인 조사를 받는다고 하셨다. 두 분께서 멀리에서 오셨는데, 어떻게 위로를 해드릴까 궁리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였다. 당시 만남을 글로 남겼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과 동학의 역사적 조우, http://cafe.daum.net/electioncase/EzjK/5059”라는 제목의 글이다. 시간 있으신 분들께 탐독을 권유드린다.
2013년 6월 22일.
아침 일찍 서둘러 광주에서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소재해 있는 사단법인 사랑의 빛으로 향했다. 개소식 사회와 취재 때문이었다. 사랑의 빛은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세계 오지의 인류 19억 명에게 태양관랜턴기부사업을 하는 자선단체다. 이사장은 참여정부 청와대 초대인사수석 정찬용 수석이다. 정찬용 수석께서 2010년 국민참여당 광주시장 후보로 출마하셨을 때 나는 유세단장직을 수행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사랑의 빛 취재가 끝나고 대한문으로 향했다. 선거소송인단 집회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 18대 대선 총체적 부정선거 규탄 집회 취재기, http://cafe.daum.net/electioncase/G9Gu/192”라는 제목으로 글을 게시했다. 참고 바란다. 이 날이 한영수 대표님과 두 번째 만남이었고, 김필원 대표님은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2013년 7월의 어느 날.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 국민의 명령 문성근 대표가 광주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아름이 님은 광주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저희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문재인 후보 지원유세를 합시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연락이 없었다. 그러던 중 문재인 후보가 열세라고 판단했는지, 광주시민사회에서 시민유세단을 만들어서 문재인 후보를 지원했다. 그 과정에 1980년 5월 당시 연일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금남로 분수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행사에서 사회를 보았던 뮤지컬 화려한 휴가 김태종 감독께서 나에게 유세팀장을 맡아서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미력한 힘이나마 흔쾌히 동의하고 광주지역을 순회하면서 지원유세를 했다.
안타깝게도 문재인 후보가 낙선했다. 당시 나는 조성구 회장과 경제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시는 분께 취업을 부탁드렸다. 그 결과 어느 음식점에서 주차노동을 할 수 있었다. 근무시간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이기 때문에 다른 일은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했다. 6월 19일과 22일은 사장님의 배려로 광주지검과 서울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런데 6월말에 퇴직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선거소송인단의 활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차에 상경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세 분의 권유가 있었다. 김수복 선생님께서는 “대선 부정선거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자네가 선거소송인단을 지원해주면 좋겠네.”라고 말씀하셨고, 신상철 대표는 “아름아, 네가 지금 광주에 있을 상황이 아니다. 빨리 서울에 올라가서 내 대신 선거소송인단을 지원해라.”고 하셨으며, 조성구 회장께서는 “제가 봐도 부정선거가 확실합니다. 그러니 서울에 가서 선거소송인단을 지원하십시오.”라고 하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신상철 대표는 당시 대장암 3기 투병 중이었다. 그날이 2013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노동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잠깐 서울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3년 만에 광주에 내려갔던 경험이 있었기에 나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판단과 행동이었다. 한영수 대표님은 서울에 기거할 곳이 없으면 함께 방배동에서 지내자고 하셨다. 흔쾌히 동의하고 방배동 생활을 시작했다. 한영수 대표님께 개표부정에 대한 강의를 들었고, 그 강의 내용을 정리해서 주로 페이스북과 다음아고라를 통해 SNS에 유포했다.
그런데 제18대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자행된 총체적부정선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일 수도 있는 개표조작이 부각되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그래서 지인들께 자문을 구했다. 그분들이 언론혁명당 관계자들이다. 언론혁명당과 인연을 지은 것은 채헌정 선배를 통해서였다. 채헌정 선배는 조성구 회장께서 소개를 해주셨다. 2013년 1월 1일부터 주차노동을 하면서 조성구 회장과 소원했다. 근무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서울에 계시는 채헌정 선배가 직접 광주까지 내려와서 조성구 회장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모습을 보고 참 좋은 분이다라는 첫인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당시 박영식 선배를 비롯한 언론혁명당 동지들을 자주 방배동 선거소송인단 사무실로 초대해서 한영수 대표와 직접 소통을 시켜주었다. 그 이유는 한영수 대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7월의 어느 날이었을까? 잠깐 광주에 일이 있어 내려왔는데, 서울에서 지인 한 분이 내려오셨다. 그분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용산참살, 서울시 무상급식 사안과 관련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분이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연 씨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오해는 하지 마세요. 한영수 대표를 믿지 마세요. 그리고 한영수 대표와 함께 활동하지 마세요. 한영수 대표는 이상한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난감했다. 내가 직접 겪어본 한영수 대표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나에게 충고를 해준 분도 대단한 활동가였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에게 충고를 해주신 그분의 한영수 대표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한영수 대표와 함께 만나서 대화를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그분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그분도 한영수 대표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씻을 수 있었다.
그 이후 그분은 나에게 한영수 대표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갖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주 내용은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종로구 홍보부장으로 지원유세를 했다는 경력을 오픈해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 선택은 주효했다.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싸울아비(김창건) 님도 나의 경력을 알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게 되었으며, 광우병 촛불을 주도했던 분들과도 인연을 짓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8년 8월의 어느 날.
국정원 시국회의가 주도했던 서울시청광장에서는 국가기관 대선개입을 맹렬히 규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표조작은 벽안시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외연을 확대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언론혁명당 동지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 개표조작의 진실을 알리고, 동의하는 단체와 연대를 통해 개표조작을 표면화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과정에 예비역 대위 민경석 선배께 선거소송인단 산하에 시민수사단을 만들겠으니 단장직을 맡아주시고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을 했다. 민 단장께서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래서 시민수사단이 포착한 광범위한 개표조작 자료가 선거소송인단이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시민수사단은 상당한 자금을 소요하고 있었다. 전국의 자료들을 취합해서 분석하는 일이었기에 당연히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안타깝게도 당시 선거소송인단은 재정이 취약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지인들께 자금지원을 요청하고, 모금한 돈을 시민수사단에 지원했다. 지금 생각해도 시민수사단에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재정적 여유만 있었다면 훨씬 더 광범위하고, 자세한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으리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늦게나마 시민수사단원들께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언론혁명당을 중심으로 조직을 신설했다. 그 결과 시민주권연대가 태동되었다. 그리고 시민주권연대 중심의 전국순회를 계획했다. 서울은 국정원 시국회의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지역의 역량을 극대화시켜서 서울로 진군하자는 계획이었다. 첫 방문지는 부산이었다. 부산지역의 활동가들께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당시 부산지역 활동가들과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연대를 하기로 잠정합의했다. 그러나 그 이상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그래서 재정적 여유가 확보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SNS를 통해 외연을 확대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국정원 시국회의에 자유발언 신청을 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다음주에는 꼭 해드리겠습니다.”였다. 말 그대로 다음 주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광주에 내려갔다. 그리고 아는 분께 부탁을 드려서 120인치 풀영상이 탑재된 1톤 유세차를 확보해서 서울로 갔다. 그 사장님은 우리 공동체를 위하고, 정의로운 일이라면 한 번쯤은 자신도 도움을 주고 싶다라는 말씀을 몇 번 나에게 전한 적이 있었던 분이었다. 그 유세차의 하루 임대료는 최하 30만 원 이상이었다. 그리고 100여일 정도 그 유세차를 이용해서 국정원 시국회의가 진행하는 범국민대회 행사 전과 후에 시민들께 개표조작을 설명드렸다. 뿐더러 부산, 대전, 군산, 광주, 대구 등을 순회하며 개표조작을 설명하고, 동영상을 방영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2013년 11월의 어느 날.
한영수 대표께서 익산에 계시는 박창신 신부님께서 “익산에서 만나자,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면 좋겠다.”는 연락을 주셨다며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한영수 대표님께서 익산으로 데리고 갈 사람이 무척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혁명당에 요청하고, 개인적으로 지인들께 연락해서 약 30여 명 가까이 익산으로 함께 갈 수 있었다. 당시 매우 특별한 분이 동행을 했다. 윤두병 선배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백기완 선생,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투옥되었고, 1987년 노태우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구로구청항쟁을 주도했던 분이다.
박창신 신부님의 제안은 간단명료했다. “개표조작을 알리고 국민적 합의를 통해 정권을 퇴진시킨 후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면 전국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이 민본 출범의 시초였다. 그래서 8월에 결성했던 시민주권연대를 근간으로 민본을 구성하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리고 과정에 유만영 씨가 윤두병 선배를 보더니 “익히 존함은 많이 들었는데, 존경하는 분을 여기에서 만나니 영광스럽습니다.”라고 했다. 두 분께서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윤두병 선배가 대표를 맡고, 유만영 씨가 사무총장을 맡아서 조직을 이끌어 가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런데 임원 선출 과정에 개인적 바램대로 윤두병 선배가 운영위원장에 유만영 씨가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전남 보성 제암산으로 워크샵을 떠났다. 당시에도 서울, 부산, 대구, 부여, 대전, 경기, 전북, 광주, 전남 등 전국에서 30여 명이 모였다. 그리고 근본취지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기본조직의 골격을 구성했다. 그런데 논의과정에서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표적인 사안이 선거소송인단을 민본에 복속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윤두병 운영위원장과 한영수 대표를 모시고 산책을 하면서 선거소송인단을 민본에 복속시키면 안 되는 당위성을 설파했다.
“선거소송인단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했다는 것이 주요내용인데, 한영수 대표님 말씀에 의하면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전자개표기 사용 자체가 위법이다.’라는 것만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진보단체 일부에서 견강부회한 측면이 있습니다. 민본이 출범하면서 행정상 편의를 위해 선거소송인단의 법인 인가를 민본에 넘겨야 한다거나 선거소송인단을 아예 민본에 복속시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거소송인단을 대변하는 단체의 필요성에 공감해서 민본을 만드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민본을 선거소송인단과 동일체로 여길 수 있도록 만들어 버리면, 민본을 또 다른 선거소송인단의 성격으로 이해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선거소송인단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를 불식시킬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민본이 선거소송인단과 관계있다는 것을 당분간 최대한 숨겨야 합니다. 민본을 창립하여 잘 운영되면 연대단체 성격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선거소송인단도 n분의 1로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상황이 되더라도 예를 들어 100개 단체가 민본에 가입한다면 최소한 선거소송인단은 90번 째 정도에 가입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민본은 선거소송인단과 가급적 거리를 두고 민본 자체적으로 운영하면서 선거소송인단이 주창하는 개표조작 사안을 모든 연대단체에 전파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선거소송인단은 완전한 독립단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18대 대통령선거무효소송을 제기한 유일한 단체이며, 원고이기 때문입니다. 연대는 할 수 있겠지만, 어느 단체와도 병합되거나 복속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선거소송인단을 민본에 복속시키면 시작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명확하게 정리하고 가야 합니다.”
나의 주장에 윤두병 위원장과 한영수 대표는 동의했다. 그리고 그 이후 2014년 3월 1일 민본을 창립시킨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지속적인 창립논의를 이어갔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창립논의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간헐적으로만 참여했다.
2014년 2월 27일.
광주에 내려갔다. 당시 광주광역시 장휘국 교육감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는데, 1부 사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행사에 재능기부를 했기 때문에 수입이 없었지만, 출판기념회 사회를 보면 수입이 적잖았다. 이런 식으로 개그맨 노정렬 씨와 함께 출판기념회 사회를 보면서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다.
1부 사회를 보고 행사장을 나섰는데, 전북 정읍에 계신 김효소 님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전화를 드렸더니 “윤두병 위원장을 사퇴시키세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김효소 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싶어서 서울에 계신 분들께 연락을 드렸더니 의견이 나뉘었다. 민본 창립논의 과정을 한 발 떨어져서 지켜만 보고 있었기에 상황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창립식을 불과 이틀 앞두고 들었던 김효소 님의 제안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에 윤두병 위원장께 전화를 드렸다.
“위원장님, 내일 마지막 운영위원회를 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회의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조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윤두병 위원장님을 사퇴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사전 포석의 차원에서 정중하게 말씀을 드린 것이었다.
방배동에 새벽 2시쯤 도착했는데, 한영수 대표님께서 민본을 창립하면 안 되고, 취소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유를 여쭤보았지만,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안의 말씀은 드렸다.
“대표님, 지금까지 민본 창립논의를 나름의 절차에 의해서 진행해 왔으니, 창립취소 또한 나름의 절차에 의해서 결정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전국에 계시는 분들께 초대장까지 발부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작정 창립을 취소한다고 하면 어느 누가 이해를 하겠습니까? 뿐더러 제3자가 보면 ”저 사람들이 저런 식이니 일이 잘되지 않는 것이다.”라는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창립취소 과정을 절차에 의해서 진행하십시오.”
2013년 2월 28일.
아침에 일어나서 유만영 사무총장과 통화를 했다. “민본 창립에 사무총장께서 반대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윤두병 위원장님을 사퇴시키면 창립식 진행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고 여쭈었는데, 대답이 없었다. 통화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윤두병 위원장을 직접 만났다. 그리고 김효소 님과 유만영 사무총장 등과 관련한 일체의 말은 하지 않고 사퇴를 권유했다.
“윤 선배님, 미안합니다. 운영위원장직을 사퇴해주십시오. 지금은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 선배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민족문화 복원과 남북통일을 위해서 역할을 해야 할 시기가 올 것입니다.”
윤두병 위원장께서는 “자네가 어제 전화할 때 눈치를 챘네. 그렇게 함세”라며 사퇴권고를 두 말 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셨다. 큰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윤두병 위원장께서는 너무 오랫동안 감옥에 가지 않았다며,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고 민본창립과정에 참여하신 분이었다. 그런 분에게 사퇴권고를 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러나 창립식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윤두병 위원장께서만 사퇴하시면 무리없이 창립식이 진행될 것이라 판단하고 의기양양하게 운영위원회 회의장이 있는 종로 건너편의 YMCA로 향했다. 그리고 유만영 사무총장께 전화로 메시지를 드렸다. 왜냐하면 유만영 사무총장께서 “대변인은 운영위원이 아니니 운영위원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하셨기 때문이다. 메시지로 운영위원회 참여가 가능하냐는 의사를 타전 중에 다른 운영위원들이 밖에 있지 말고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그래서 운영위원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당시 정옥경 사무국장은 회의에 불참 중이었다. 그런데 정옥경 사무국장께서 전화를 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유만영 사무총장께 말씀드려서 페이스북 민본그룹 관리자를 복원시켜달라고 전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페이스북 민본 그룹은 필자가 만들었다. 그런데 진행과정에 윤두병 위원장께서 독선이 지나치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민본그룹 관리자를 사무국으로 제한한다는 통보를 하고 필자와 윤두병 위원장을 비롯한 사무국의 유만영 사무총장, 정옥경 사무국장, 장혜원 님 등을 제외한 모든 분들의 관리자 자격을 박탈했던 상황이었다. 이것은 운영진들의 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었기에 유만영 사무총장께 “정옥경 사무국장의 관리자 자격을 복원시켜 주십시오.”라고 전했다. 그러나 유만영 사무총장은 아무런 이유도 말씀하지 않고, 무조건 복원시켜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던 중 나는 일순간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고성으로 “유만영 사무총장께서는 윤두병 위원장의 독선이 지나치다며 비판하시더니, 운영진의 합의에 의해 결정한 민본그룹 관리자 자격을 임의로 박탈하는 독선을 자행하십니까.”라고 항의했다. 그 말을 듣고 유만영 사무총장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옥경 사무국장만 관리자 자격을 박탈시킨 것이 아니고, 장혜원 님도 관리자 자격을 박탈당했었다. 당시 민본그룹은 관리자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글을 게시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어찌 되었든 창립식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창립식을 진행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유만영 사무총장께 문자메시지를 전했다. “고성을 지른 것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창립식 진행여부를 결정해야 하니 회의에 참석해서 논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자리를 박차고 나간 유만영 사무총장은 그 이후로 일체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운영위원들끼리 결정을 해야 했다. 한영수 대표께서도 새벽에 말씀하신 것과 달리 “민본 창립식 진행에 동의한다.”고 하셨다.
윤두병 위원장께서 운영위원회에 참석하신 이후 정체되어 있던 창립식 진행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그리고 창립식을 진행하자고 의결했다.
2014년 3월 1일.
운영위원들은 잠실에 있는 정옥경 사무국장 사무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창립식과 관련한 준비물을 새벽 2시까지 모두 마련했다.
민본 창립식장 경향신문 별관으로 이동하던 중 신상철 대표께서 연락을 주셨다. “아름아, 네 힘으로 민본 창립식을 연기할 수 있으면 연기해라.” 당혹스러워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페이스북 민본그룹에 유만영 사무총장이 박창신 신부님과 한영수 대표께서 이 시간 이후로 민본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게시했는데, 박창신 신부님과 한영수 대표님이 없는 민본이 무슨 의미가 있니? KTX를 타고 서울로 가고 있는데, 대전에서 내려서 다시 창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라는 말씀을 주셨다. 개인적인 의견은 개진하지 않았다. 다만 “형, 전국에서 창립식에 참여한다고 오시고 계시는데, 내가 어떤 명분으로 창립식을 연기할 수 있겠습니까? 형이 내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한영수 대표님과 송태경 박사님께 전화를 하셔서 두 분 말씀을 듣고 판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민본 창립식 사회를 보기 위해 시나리오를 점검하고 있는데, 신상철 대표가 도착했다. 좌중이 술렁거렸다. 예기치 않은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 왔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운영위원들이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복도로 나오기를 청했다. “어제 대표직은 공석으로 놓고, 박영식 님을 임시운영위원장으로 내정했는데, 이왕이면 신상철 대표가 초대 대표를 맡아주시면 탄력이 붙을 것 같으니 대변인께서 신상철 대표께 요청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나는 단호하게 답변을 했다. “예전에 한영수 대표께서 신상철 대표에게 민본 대표직을 권유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주셔서 신상철 대표께 권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 대표께서 답변하시기를 ‘아름아, 나를 대표직에 추대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나에게 민본 대표직을 수행하라는 것은 나에게 빨리 죽어라는 것이나 같다.’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신상철 대표가 대장암 투병 중이고, 무엇보다 민본 대표직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는 사안을 다시 권유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못합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사회석으로 이동을 했다. 그런데 행사진행 과정에 쪽지가 전달되었다. “신상철 대표직 수락”. 미심쩍어서 신상철 대표께 확인을 했더니 수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에 맞춰서 행사를 진행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분들이 어떻게 신상철 대표를 설득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신상철 대표의 취임사와 그 이후에 신상철 대표께 들었던 내용으로 신 대표가 수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 있다.
“아름이 네가 제시했던 의견대로 한영수 대표님과 송태경 박사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송태경 박사님은 완고하게 창립식을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시더라. 그리고 한영수 대표님께서도 창립식은 진행해야 한다고 하셨고, 유만영 사무총장이 페이스북 민본그룹에 글을 게시했던 내용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해서 창립식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뭔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만 임시로 대표직을 수락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취임사에서도 밝혔듯이 박창신 신부님과 유만영 사무총장을 만나서 해결하려고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었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까운 상황이었어.”
신상철 대표는 그후 지속적으로 유만영 사무총장과 연락을 시도하고 원만한 관계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사무총장직을 공석으로 두었다. 그 이유는 오해가 불식되고, 언제든지 유만영 사무총장이 복귀하겠다면, 그 의사를 우선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배려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민본 공동대표직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신상철 대표께서 유만영 사무총장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와 최선을 다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 이후는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것과 같이 민본이 운영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민본이 잘 운영되기를 바란다. 전국의 수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속에서 민본이 출발을 했고, 재외동포들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뿐더러 신상철 대표께서는 천안함의 진실과 제18대 대통령 총체적부정선거 특히 개표조작을 연동해서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신상철 대표의 전국순회 강연은 선거소송인단이 원했던 민본의 바람직한 운영이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민본이 출범된 후 나는 손아래 처남의 갑작스러운 비명횡사에 따른 정신적 충격과 애들 엄마의 이혼경고를 외면하지 못하고 다시 광주에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나에 대한 근거없는 “민주당에서 자금을 받아서 활동했다, 국정원 프락치다.”라는 등의 원색적 비난에 대해 듣기는 했으나, 공개적인 비난이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몇몇이 모인 자리에서 특정인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것까지 대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옛 말에 “나랏님이 없으면, 나랏님 욕도 한다.”는데, 하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개적인 장소가 아니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다만 공개적인 페이스북 또는 SNS에서 근거없는 원색적 비난 또는 음해는 삼가야 할 것이다. 뿐더러 공개적인 장소에서 근거없는 인격모독성의 글은 어떤 형태로든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건강하고 건전한 토론과 비판문화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아름이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그리고 매우 고마운 생각을 하였습니다. 민본 창립식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을 추진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법원에서는 18대 대선무효소송을 질질 끌고만 있을 뿐 재판 속개의 기미가 전혀 안 보입니다. 법치의 최후 보루라고 하는 대법원이 실정법을 위반하고 있어도 국회의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인지? 대법관들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제기하는 야당의원이 한사람도 없는것 같습니다. 임기만 채우기를 기다리는것 같습니다. 어쩌다 이지경이!
몇몇 사람들이 계속 소송인단을 진흙탕 싸움으로 이끌고 있네요. 참, 안타깝습니다.목적이 너무 드러나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그러나, 저들의 행동과 말은 무시하고 나아가야 겠죠. 적어도, 우리는 더 큰 목표만을 보고 가기 때문이지요.
아름이님~~^^
힘 내시구요~
그리고, 소송인단 여러분의 현명한 대처에 감사 드립니다.^*
글 쓰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틀리지 않게 글을 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라라는 말씀입니다.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지난 1년여 수고를 천지신명님(저는 하느님을 천지신명님이라고 부른답니다.)께서 눈여겨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저와 맺은 인연도 일부 그 수고를 강요한 것이었기에 미안한 마음 그지 없습니다. 주연님 부인과 자녀 분들께는 더더욱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 모든 수고가 함께사는 나라와 세상(하느님 나라, 부처님 나라)를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억울한 삼사를 달랠 수 있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