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사람들은 끝간데 없이 권력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서는 상식이고 법률이고 헌법이고 간에
수 틀리면 모조리 쓸어버리는 - 권력에 환장한 인간들
한국가스공사의 임직원들(靑`壯`南`女 모두)과 가끔은
마음을 열고 숨김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대화를 하다보면
아! 이네들 他地人들은 대구`경북에,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구나
ㅡ 하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곤 한다
이러면 小弟는 다음과 같이 조근조근 설명을 해준다
~ ~ ~ 조선조 3`4백년동안 영남인들은 남인으로서
당상관以上 벼슬을 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 대신 학문에 정진하여 조선의 유학학풍을 만방에 떨쳤고
헌종`철종代의 세도가인 안동김씨도 貫鄕만 안동이지
안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서울의 장동김씨이다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대규모의 의병을 일으켜
막부군에 타격을 준 곳이 영남지방이고
일제 침략시기에는 국체보상운동으로 求國운동을 했어며
4`19 의거와 6`3 운동(韓日수교 반대)의 주동자들이
거의 대부분 대구`경북 출신들이라고 ~ ~ ~
가장 결정적으로는 2`28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펌하여
임직원들에게 앞앞이 E-mail 로 보냈다
* * * * * * *
대구 이야기 ㅡ 2·28 대구 학생 민주화 의거
대구·경북은
예로부터 선비의고장, 충절의 고장임에
올곧은 선비들이 지역정신을 굳건히 가꾸었고
충신열사들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고장이요
나라를 구하기 위한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 을 때
한 여성단체가
“노예 상태를 벗어나 자유인이 되어 세계 上等국가 되기”를
간절하게 외친 그 정신들이 대구·경북의 피에 흐르고 있다
2·28 대구 학생 의거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3월15일의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 를 앞두고
자유당은 권력독점과 정권연장에 혈안이 된 나머지
부정선거운동이 극치에 달하였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들은 반항의 말 한마디
행동 한번 표출하지 못했는데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자유당의 부정 부패에 철퇴를 가하고
유린 당한 백성들의 인권과 자유등을 되찾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목숨을 걸고 분연히 일어켰던
숭고한 정신이 전국으로 번져
마산의 3·15부정선거 항의시위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한민국 헌정상의 민주화운동의 효시가 된 것이
‘2·28 대구 학생 민주화운동’ 이다
발단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이자
일요일인 이날 ㅡ 2월28일
당국이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못나가도록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발단이 되었다.
의거 개요
경북고는 일요일인 이날 등교지시를 내린다.
사유는 3월에 있을 중간고사를 앞당겨 친다는 사유였다.
대구시내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일요등교를 지시 한다
사유는 토끼사냥, 영화관람과 같은 황당한 이유도 있었다.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의 이대우 경북고등학교 학생부위원장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부속고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ㅡ 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결의문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
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1960년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 등이 조회단에 올라 격앙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자
흥분이 고조된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반독재의 횃불은 이처럼 대구에서 처음 불타올랐다.
2월 28일 오후 1시 경북고 학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 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경북고등학교 800여명이 맨 처음 선두에 나섰고
이어서 경대사대부고,대구고,대구상고,대구농고,
대구공고,경북여고, 대구여고의 400여명 등
대구는 곧 1천200여 명 학생들의
‘민주화 함성’ 도가니로 변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커졌고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땐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 전부 공산당"이라고 한 반면,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박수를 쳤고,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이 대부분이었다.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 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게 된다.
의거 주체
2.28 의거는 고교생들이 주체이고,
계획적 조직시위의 민족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운동이었다.
우리 역사상 6.10 만세 사건, 광주 학생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한일 수교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이때는
발췌 개헌(1952년), 사사오입 개헌(1954년),
진보당수 처형(1958년) 등 자유당 정권 실정에 분노하고,
대통령 선거(3월 15일)가 다가온 시기였다.
기념사업
• 1961년 4월 10일 매일신문이 주관하여 대구시민 성금으로
명덕로터리에 2.28대구학생기념탑을 세웠다.
• 1990년 2월 28일 2.28기념탑을 명덕로터리에서
두류공원으로 이전하였다.
• 1999년 2월 28일 대구시는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에 위치한 대구중앙초등학교 부지를
2.28민주의거기념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선포하였다.
2·28이 걸어온 길
** 대한민국 헌정상의 민주화운동의 효시가
2·28 대구학생민주화운동
** 2010년 민주화 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 개정 법률 공포
법률 10007호에 의해
'2·28 학생의거'- 첫번째 민주화운동으로 확정
2·28민주운동은 군사정부의 온갖 탄압과
정치적·사회적 제약의 긴 암흑의 턴널속에서
방향감각을 잃기까지 하였고
역사의 나락으로 떨어져 제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도 하면서
2012년에 쉰 두살의 장년이 되었음
이와 같은 세파에도 쓰러지지 않고 인동초처럼
2·28민주운동정신은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았지만
민주화정신이 조그마한 물줄기가 되어
이 강산에 흘러왔음
1991년 (사) 2`28 민주운동 기념사업회 설립
1995년 제35주년 기념 심포지엄 개최
1997년 제37주년 기념 문집 발행
1999년 2·28 민주운동 제39주년 기념식에
김대중 대통령 축하 메세지
2000년 ‘2·28 민주운동사’ 3권 출간
국제학술대회개최
2000년 제40주년 기념식에
김대중 대통령 내외분 참석
2001년 2·28 민주포럼 창립
2·28 회보지 ‘횃불’창간
2009년 민주화 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 법률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2010년 민주화 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 개정 법률 공포
법률10007호에 의해
2·28학생의거가 첫번째 민주화운동으로 확정
2010년 ‘2·28 민주운동 교육용’ 교재 발행
2·28 기념관 건립 추진
*****本人, 김종갑 은
'2`28 대구 학생 민주화 의거' 에 있어서
당시에 경북고등학교의 재학생으로서
이 의거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 첫걸음을 내디뎠음
첫댓글 탄아형! 2.28민주화의거 잘 정리하셨습니다.큰 일하셨습니다.내년 2.28일경에는 2.28의거에대한 회고를 주요일간신문에 기고하셔서 잊혀져가는 2.28운동을 상기시켜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28민주화의거를 널리알리자면 가까운 사람부터 기념사업에 가입시키고
꾸준한 홍보를 펴나가야 할것 같습니다.
서론부터 결론까지 구구절절 울림이 큽니다~~~. 이 요약본을 출력하여 주위에도 돌려볼 생각입니다~~~!!!
이 글은ㅡ2`28 에대해서 기념사업회에서 이미 발표한 것을 ㅡ小弟가 펌해서 올린 것입니다 ㅡㅡㅡㅡㅡ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ㅡ2`28에 대해서 물어보면 ㅡ100명중 100명이 머리를 갸웃둥합니다 ㅡㅡ심지어, 대구`경북출신으로 수도권에 거주하는 청장년들에게 물어봐도ㅡ 십중팔구는 고개를 흔듭니다ㅡㅡㅡ그동안, 특히, 우리 42회-43회 부터가 무엇을 해왔는지를 되돌아 보게합니다
장하고 감격스러운 우리의 운동이 잊혀져 가는가운데 명쾌히 정리 하여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 우리의 또다른 사명이다. 2.28민주화 사업이 기념관 준공이 곧있으니 우리모두 참여하여 그날의 함성을 되새겨 후손에게 그정신을 승계해 이나라 민주화의 추석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해 봅니다. 파이팅~~ 탄아형 고맙소 . 그날의 함성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경북고학생 만 매일신문사,도청,지사관사 등 거리에서 투쟁하였고 나머지고는 학내에서 투쟁 교문에서 저지 당함.
古軒兄 ㅡ한국가스공사는 유력한 공기업으로(장래에는 가장 큰 공기업이 될 것임) 전국에서 인재들이 모인 곳입니다 ㅡ대구 경북 출신들도 있습니다마는 ㅡ호남출신이 제일 많습니다 ㅡ이 분들은 호남의 각 고을에서 내로라하는 opnion leader들 입니다 ㅡ이 분들에게 만이라도 TK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거두게 한다면 ㅡ아마 이 분들이 주저없이 대구로 率家할 것입니다 ㅡㅡ나아가서는 이 분들의 호남에 거주하고 있는 부모형제에게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